[설악산] 금강산 화암사(禾巖寺)
설악산의 최강 코스 공룡능선 2박 3일
2023-08-21~22~23 셋째 월요일 / 비 / 습하고 무더움 ( 24º~ 28º)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남한에서 3번째로 높은 설악산
첫째날 코스 : 용대리 백담주차장 - 백담사 - 영시암 - 만경대 - 오세암(1박)
둘째날 코스 : 오세암 - 마등령삼거리 - 나한봉 - 큰새봉 - 킹콩바위 - 1275봉 -
촛대봉 - 신선봉 - 무너미 - 소공원.
셋째날 코스 : 화암사2주차장→ 수바위→ 시루떡바위 →신선대(낙타바위) →
숲길정상삼거리→ 화암사2주차장(원점회귀).
함께한 분들
달친 / 별친 / 민대감 / 피오나 / 이프로 / 깃비 / 청마(靑馬).
차량지원(운전) : 달친 / 이프로
사진 촬영 청마(靑馬)
화암사( 禾巖寺)
강원도 고산군 토성면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진표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 진표(眞表)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 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春潭)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 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 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因法堂), 금강루(金剛樓), 일주문, 미타암(彌陀庵),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강원도 고성은 북한과 경계에 있는곳으로 설악산 끝자락이자 북설악으로 분류되는 금강산 일만이천봉 제 1봉 신성봉
(1,212m) 이 있고 그 기슭기에 금강산 화암사 가 자리잡고있다. 화암사 일주문 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수바위
시루떡 바위 성인대 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설악산 울산바위 동해바다 뷰 북쪽은 신선봉이 보이고
남한쪽으로 벋어내린 금강산 의 풍광을 볼수있다.
미시령( 彌矢嶺)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사이에 있는 고개.
미시령(826m)은 한계령과 함께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고개이며, 예로부터 진부령·대간령·대관령 등과 함께 태백산맥을 넘는 주요 교통로였다. 미시령은 조선시대에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불렸다.
해발 826m 미시령돌탑
북쪽에는 신선봉(神仙峰, 1,204m), 남쪽에는 황철봉(黃鐵峰, 1,381m)이 있는데, 미시령은 이들 봉우리 사이의 안부(鞍部)에 해당한다. 내설악의 산록에는 북한강 지류인 북천(北川)이 흐르고, 이 하천의 연안에는 인제에서 고성에 이르는 46번 국도가 지난다. 미시령 일대는 설악산국립공원의 북부로 계곡과 산세가 수려하여 백담계곡·십이선녀탕계곡과 더불어 내설악의 핵심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미시령을 넘어가면 나타나는 외설악에는 울산바위로 오르는 길이 있고, 이곳에 계조암(繼祖庵)·내원암(內院庵)·신흥사(神興寺) 등이 있다. 미시령은 한계령이 금강산의 비로봉 고개에 비유되는 것과 같이 금강산의 만물상 고개에 비유된다.
고려 때는 길이 있었으나 너무 험준하여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다가, 1493년(성종 24) 다시 도로를 개척하고 길을 열었다. 그 뒤 조선 말기에 다시 도로가 폐쇄되었다가 1960년경에 개통되었다. 그러나 워낙 지형이 험하고 교통이 불편하여,1971년 한계령을 넘는 도로가 개통되면서 진부령·미시령을 넘던 차들은 대부분 한계령을 이용하게 되었다. 2007년 5월에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과 속초시 노학동을 연결하는 미시령터널(3.69㎞)이 개통되어 거리는 기존 22.7㎞에서 7.0㎞로 줄어들었고, 통행시간은 20여분이 단축되었다. 미시령터널의 개통은 과거 미시령도로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대형 사고의 빈번한 발생, 휴가철의 상습 지정체, 강설시 교통두절 등의 문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또한 수도권과 영동지방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미시령을 지나는 관광객이 크게 감소하였고, 관광경기도 침체되었다.
서울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홍천을 지나 미시령 방면 46번 국도를 거쳐 한계삼거리를 지나 용대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미시령이 나온다. 미시령터널은 미시령 고갯마루를 통과하는 옛길의 300m 아래 땅 속을 지나며, 진출입 도로를 합친 전체 구간은 약 15.7㎞이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