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중리 무봉산(舞鳳山)에 있는 창건 연대는 미상, 통일신라 시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측.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원래는 만의사(萬義寺)라고 하였다. 1284년(충렬왕 10)을 전후하여 주지 정길(貞吉)과 현묵(玄默) 등이 중창하였다. 산의 모양이 봉황이 춤을 추는듯 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기록에 의하면 일명 만의산(萬義山)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1831년(순조31)에 발간된 「화성지」 에서도 동북면에 있으며 일명 만의산이라는 기록이 있다.
만의사는 원래 화성시 동탄면 신리에 있던 신라시대 이래의 고찰이었으나, 1669년(현종 10)에 그 곳이 우암 송시열선생의 묘자리가 되면서 절을 중리의 현 위치로 옮겨가게 되었다 한다.『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암이 한때 만의사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으니 가문에 큰 화를 입힌 셈이 되었다. 때문에 말년에 머문 만의사와 무봉산 자락이 인연으로 그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된 듯 싶다.
“수원의 동쪽 수십 리 거리에 절이 있으니 만의사(萬義寺)라고 한다. 나라의 복리(福利)와 비보(裨補)를 기구(祈求)하던 옛 절이다. 파괴되고 폐지된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초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더니, 황경(皇慶) 연간 천태종의 진구사(珍丘寺) 주지인 혼기(混其) 대선사가 옛 터를 와서 보고 새로 절을 중건하였으며, 삼장법사 의선공(義璇公)이 뒤를 이어 절을 주간하였다.” 1392년 2월, 21일 동안이나 계속된 대법회 때 권근(權近)이 쓴 ‘수원만의사축상화엄법화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會衆目記)’의 내용 일부인데 만의사의 내력과 비보사찰로서의 옛 모습이 흥미를 끈다.
이 절이 천태종(天台宗) 사찰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천태종 진구사(珍丘寺)의 주지였던 혼기(混其)가 1313년(충선왕 5)에 이 절로 옮겨와서 크게 중창하고 법화도량(法華道場)을 연 뒤부터이다. 혼기의 뒤를 이어 의선(義璇)이 이곳의 주지를 잇게 됨에 따라 천태종의 중심사찰로서 기반을 굳혔으며, 충혜왕 무렵에는 묘혜(妙慧)가 주지로 있으면서 요원(了圓)의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간행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의 우왕 때에는 이 절의 주지를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교대로 맡게 되었다. 충선왕 이래로 축적되어온 사전(寺田)과 사사노비(寺社奴婢)를 둘러싸고 현실적인 경제적 이익을 차지하려는 쟁탈이 노골화되었고, 조계종에서 이를 차지하자 천태종에서는 법에 호소하게 되고.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자 절의 노비 약간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부(水原府)에 귀속시켰으며, 소유권은 다시 천태종측에 돌아오게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위화도 회군에 공이 컸던 신조(神照)가 이 절의 주지가 됨에 따라 나라에서 사전 70결(結)을 급여하였고, 노비도 대대로 주지가 소유하게 공인함으로써 다시 한 번 사회적 보장과 경제적 기반을 굳힐 수 있었다. 이에 신조는 1391년 정월에 7일 동안 소재도량(消災道場: 재앙을 물리치는 법회)을 개설하였고, 1392년 2월 천태종의 덕 높은 승려 330인을 초청하여 21일 동안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열어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을 기원하였다.
조선시대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사명당 유정(惟政)의 제자 선화(禪華)가 오랫동안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69년(현종 10) 절터가 송시열(宋時烈)의 장지로 선택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이름을 만의사(萬儀寺)로 바꾸었다.
1796년(정조 20) 수원성곽이 중수되자 팔달문에 만의사의 종을 옮겨 달았다. 이 종은 1080년(문종 34)에 주조된 뒤 1687년(숙종 13)에 만의사 주지 성운이 무게 700근으로 개주(改鑄)한 것이다.
현재 정면 3칸의 대웅전과 산신각·천불전,보현전,지장전,요사채 등이 남아 있다. 유물은 1791년(정조 15년) 제작된 지장보살 탱화가 유명하다
천왕문 출구부분에는 천년된 벽조목(벼락맞은 대추나무)으로 조각된 제석천왕을 모셧고 보현전에는 의상대사의 법성도가 있고 지장전에는 만의사에 주석하셨던 정락스님 목각상을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