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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소통
김정탁(성균관대 교수)
修己治人 강령에 충실했던 다산
소통은 인격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대표적인 修己之學이다.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인격이 전제되지 않으면 상대방과 쉽게 소통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소통이란 한자를 파자하면 더욱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소통은 ‘트일’ 疏와 ‘통할’ 通 두 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통하려면 먼저 트여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트임(疏)’이 ‘통함(通)’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그런데 상대방과 마주할 때 자신의 마음이 트이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때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트인 마음을 지니기 위해선 스스로의 자세를 낮추거나, 또는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 같은 일정 정도 수준의 인격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또 소통은 이론과 실제가 분리될 수 없는 대표적인 實踐之學이다.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만 꿰차거나 또는 그 이론을 잘 학습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소통이론을 잘 이해하거나 학습하는 작업이 누군가와 소통을 원활히 이루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소통이론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해서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면 그 이론이 추구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 이 점이 다른 治人之學, 예를 들어 정치학, 행정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등과 다른 점이다. 이런 治人之學 분야에서는 이론과 실제가 어긋나더라도, 즉 주장과 실천이 따로 놀더라도 그다지 문제되지 않지만 소통학에선 이론과 실제가 분리될 수 없다. 만약 이론과 실천이 따로 노는 경우 당사자들의 인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소통학의 이런 특징은 ‘다산과 소통’이라는 본 논문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매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다산은 필자와 동시대 인물이 아니기에 다산이 언급한 소통관 내지 소통이론을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구현했는지, 또 상대방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소통했는지를 필자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修己之學과 實踐之學의 성격을 지닌 소통학으로서 다산의 소통행위를 분석하려면 필자가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본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간접적인 방법으로밖에 추론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다행히 다산은 많은 문헌을 남겼기에 이런 문헌의 분석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직접적인 관찰법 못지않게 다산의 소통행위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또한 다산이 道學과 科學(器學)을 통합해서 인간과 사회를 조명했다는 사실도 간접적인 방법의 객관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산은 心性論 같은 도학에 입각해서 經世論 같은 과학을 펼쳐 나갔는데 周易心箋으로 대표되는 경전 연구가 심성론 연구에 해당하며,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 등으로 대표되는 경세택민에 관한 저술이 경세론 연구에 해당한다. 바로 이 점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실학의 완성자’라고 칭송받는 중요한 이유다. 만약 다산이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도학(심성론) 연구를 도외시한 채 과학(경세론) 연구에만 집착했더라면 다산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통관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다산은 전체적으로 修己治人의 대강령에 충실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사상을 연구하다 보면 일부는 修己에 주력하다가 상대적으로 經世(治人) 측면을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經世(治人) 측면에만 주력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修己에 소홀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산은 수기치인의 대강령을 仁 사상에 관통시켜 修己 측면에선 仁을 탐구하여 이를 개인적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治人 측면에선 仁 사상을 사회적으로 전개, 확충시키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조선의 학풍에 있어 다산처럼 修己와 治人의 양면성을 彬彬하게 갖춘 학자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다산의 이런 학문관은 17세기 이래 당색 간 파쟁과 결부되어 관념화, 공론화로 치닫던 주자학 일변도의 학풍에 대한 반성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궁극적으로 유학의 본령, 즉 堯, 舜, 周公, 孔子의 修己治人의 道로 돌아가 그 가르침을 직접 이어받음으로써 그에 대한 실효를 거두고자 시도했다. 이로 인해 그의 학문체계는 원시유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지표 아래 수립, 전개되고 있다. 다산이 仁의 구현을 특별히 강조했던 것도 원시유학 정신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일념 때문이다. 그런데 仁의 구현이 다산의 소통관 및 그의 소통행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소통의 관점에서 다산을 연구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 소통 연구를 통해 다산의 실학정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行事:修己治人 실천의 방법
仁ㆍ義ㆍ禮ㆍ智의 四德은 우주의 생성원리인 태극의 속성, 즉 元亨利貞이 개별 존재자의 性에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仁ㆍ義ㆍ禮ㆍ智는 선험적 理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ㆍ의ㆍ예ㆍ지 四德의 본성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惻隱之心(측은지심: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羞惡之心 (수오지심:
부끄러워하는 마음), 辭讓之心(사양지심:사양하는
마음), 是非之心(시비지심: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의 四端이다. 그렇다면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는 情에 해당하고, 인ㆍ의ㆍ예ㆍ지는 性에 해당한다. 우리는 情의 발함을 통해 性의 본연을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端은 실마리인 셈이다. 그래서 朱子는 인ㆍ의ㆍ예ㆍ지 四德이 밖으로 드러난 단서를 四端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다산은 이런 주자의 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측은ㆍ수오ㆍ사양ㆍ시비의 사단은 인간이 본래 具有하고 있는 마음인데 이를 단초로 삼아 ‘확충’함으로써만 仁ㆍ義ㆍ禮ㆍ智의 四德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四心을 단초로 삼아 확충해 나가는 행동이 ‘行事’다. 행사란 곧 실천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 四心을 실천한 후에야 인ㆍ의ㆍ예ㆍ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실천하기 전에는 아예 인ㆍ의ㆍ예ㆍ지라는 명칭조차 운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실천하기 전에도 사덕이 선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朱子의 설을 뒤집은 것이다. 주자는 仁ㆍ義ㆍ禮ㆍ智가 원래부터 인간의 내면에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다산은 仁ㆍ義ㆍ禮ㆍ智는 도덕적 실천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다산은 父子ㆍ君臣ㆍ夫婦ㆍ長幼ㆍ朋友의 인간관계에서 최고의 덕목에 해당하는 親ㆍ義ㆍ別ㆍ序ㆍ信도 실생활에서 이를 실천할 때 비로소 仁이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실천적 맥락에서 다산은 맹자의 四端도 ‘端緖’가 아니라 ‘端始’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사단의 ‘端’은 내면의 사덕이 밖으로 드러난 실마리가 아니라 거꾸로 사덕을 이루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단시설(端始說)이다. 주자가 말하는 단서가 이미 본성 속에 내재하는 인ㆍ의ㆍ예ㆍ지를 실마리를 풀어 가듯이 밝혀내는 것이라면 단시는 시작으로 삼아????? 인ㆍ의ㆍ예ㆍ지를 실천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시를 통해서만 인ㆍ의ㆍ예ㆍ지를 구현해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즉 사단의 실마리를 시작으로 해서 이를 실천함으로써 인ㆍ의ㆍ예ㆍ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다산의 견해다
따라서 인ㆍ의ㆍ예ㆍ지란 일을 행한(行事)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사람을 사랑한 후에 이를 仁이라 하는 것이지,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仁이라는 명칭이 성립되지 않는다. 손님과 주인이 절하고 揖한 후에 禮라는 명칭이 성립되고, 사물을 명료하게 분별한 후에 智라는 명칭이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나를 선하게 하기 전에는 義가 성립될 수 없고, 반드시 선한 후에야 義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어찌 인ㆍ의ㆍ예ㆍ지의 네 알맹이가 복숭아와 살구의 씨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덩어리로 잠재해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렇게 보면 인ㆍ의ㆍ예ㆍ지는 결국 선천적이고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고 실천적, 경험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이런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산의 이런 주장은 개인의 수양에만 치중하는 성리학자들의 靜的 자세를 비판한 것이고, 나아가 다산의 실학정신과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학문은 行事에 힘쓰면서 행사를 통해 治心했는데 오늘날의 학문은 養心에 힘쓰면서 양심을 핑계로 모든 일을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는 것은 오늘날의 학문도 잘하지만 천하를 함께 구제하려면 옛날의 학문이라야 가능하다.”(김형효, 2002:539) 일찍이 윤휴도 인간의 본성에 仁ㆍ義ㆍ禮ㆍ智가 선천적으로 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다산은 이런 윤휴의 입장과 함께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성리학적 수양론에 대한 다산의 비판이다. 근본적으로 인ㆍ의ㆍ예ㆍ지를 선천적으로 주어진 性 또는 理로 본다면 인간은 그것을 잘 지키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다산은 向壁觀心(벽을 향해 마음을 관조하는 것), 回光反照(빛을 안으로 돌려 마음의 본체를 밝히려는 것)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수양론에서는 사회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실천이 거세된다. 따라서 참된 선비가 지향해야 할 경세적 행사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왜냐하면 성리학적 수양론에 따른다면 治國安民이라는 사회적 실천보다 개인의 내면적 수양이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다산은 어디까지나 行事, 즉 실천을 통해서만 仁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
소통의 목적으로서 仁
유가에서 仁은 가장 핵심적 개념이다. 특히 공자는 仁을 강조했다. 논어에서 仁은 모두 109차례나 등장한다. 이는 仁이 공자의 핵심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仁의 개념을 통해 유가의 소통관을 파악할 수는 없을까? 다행히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단호히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근거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가에 따르면 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데 하나는 ‘서로 함께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함께함, 즉 관계의 친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硏經室集에 따르면 “仁은 두 사람이 짝함으로써 서로 함께함이다(相人偶者 謂人之偶之也)”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임금과 신하, 목민관과 백성 등이 모두 짝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의 짝함은 仁으로써 구현 가능한 것이다. 또 說文解字에서는 “仁은 친한 것이다. 사람 인(人)과 둘 이(二)를 따른 것이다(親也, 人二)”로 정의되고 있다. 이처럼 仁이란 글자는 人과 人이 중첩된 문자다. 무릇 두 사람 사이에서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을 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유교권에서는 예로부터 사람을 ‘人’이라 하지 않고 ‘人間’이라고 지칭해 왔다. 이는 인간을 일종의 관계 매듭으로 파악한 결과다. 이는 유교권의 전통적인 인간관, 즉 사람(삶)을 ‘人(being)’으로 보지 않고, 세상 속(間)의 인간인 ‘人間世(being-in-the-world)’로 보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존재론적 관계에 근거하는 인간관에 대한 언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仁도 人(人間)과 관계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의사소통을 통한 친화의 결과로 그 의미가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유가적 인간존재론을 표상하는 이념적 언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가에서 말하는 仁의 개념은 사람(人)들이 다양한 대상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방식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다산도 仁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仁을 파자하여 ‘人’과 ‘二’의 합성어로 파악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옛 전서에 仁이란 글자는 人과 人이 중첩된 문자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사람이고 형과 아우는 두 사람이며, 임금과 신하는 두 사람이고, 목민관과 백성은 두 사람이다.” 이런 인식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의미다. 사람이 둘이라는 것은 仁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는 개념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仁은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인간관계를 그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仁의 두 번째 성격인 관계의 친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해 왔다. 먼저 원시유가에서 인은 인간 상호간의 친화적 의미, 또는 친화하는 방법론적 의미였다. 공자도 仁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親和하고, 궁극적으로 親一하는 것으로 仁을 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에게 있어 仁이란 사랑(愛)을 통한 인간 상호간의 존재방식인 셈이다. 즉 仁은 我(人)와 他(人)의 존재방식(共生)으로서 의사소통의 방법이자 목적에 해당되는데 이는 사랑을 통해 수행된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간관계를 위해 仁의 필요성을 요청했다.
그런데 宋代에 와서 仁의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 그 당시는 仁을 存(仁猶存也)이라고 정의했는데(淸ㆍ阮元校刻, 1991:1613) 存이란 ‘恤問(휼문)’으로서 신께 禮를 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宋代에선 仁의 인식론적 범주가 신과 인간의 관계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럼으로써 仁은 사람과 사람 간의 존재방식일 뿐 아니라 인간과 신의 존재방식(우준호, 2000)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그 결과 仁을 통한 관계의 구현은 어떤 형식을 더욱 요구하게 되었다. 그 후 유가에서 仁은 禮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되었는데 이런 변화가 仁의 대상이 확대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다산은 禮라는 仁의 형식보다는 愛라는 仁의 내용에 대해 보다 침잠한다. 이는 근대유학보다는 원시유가의 정신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다산은 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仁이란 남을 향한 사랑이다. 자식은 아비에게 향하고, 아우는 형에게 향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향하고, 목민관은 백성에게 향하여, 무릇 사람과 사람이 서로 향해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인이라 이른다.” 이처럼 다산은 仁을 한마디로 ‘嚮人之愛’라고 규정하고, “아들은 어버이를 향하여, 아우는 형을 향하여, 신하는 인금을 향하여, 목민관은 백성을 향하여 애연(藹然)히 하여 그를 사랑하다면 이것이 仁이다”라고 정의했다. 구체적으로 아버지를 孝로써 섬기면, 임금을 忠으로써 섬기면, 백성을 자애로써 다스리면 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이 각기 본분을 다하면 곧 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산은 이런 인간관계를 다섯 가지로 범주화한 것을 오륜(五倫)으로 파악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父子), 임금과 신하(君臣), 남편과 아내(夫婦), 어른과 아이(長幼), 친구와 친구(朋友)의 다섯 가지를 가능한 인간관계의 대표적 유형으로 설정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맺는 관계 중에서는 親이 으뜸이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는 義가 으뜸이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는 別이 으뜸이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는 序가 으뜸이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는 信이 으뜸이라고 여겼다. 즉 親ㆍ義ㆍ別ㆍ序ㆍ信이 인간관계의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다산은 이 다섯 가지 덕목을 仁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다산은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잘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이를 유학의 기본원리로 받아들였다. 이 ‘만남’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서(恕)이며, 仁이요, 德이며, 人道이고, 人倫임을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란 바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인간존재의 근원을 하늘로 인식하면서도 인간관계의 사회적 규범인 인륜이 바로 天命임을 확인하고 인간존재의 실현이 바로 인간관계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어질 仁자는 두 사람을 뜻한다. 孝로 아버지를 섬기면 仁이다. 형을 공손하게 섬기면 仁이다. 忠으로 임금을 섬기면 仁이다. 벗과 믿음으로 사귀면 仁이다. 자애롭게 백성을 다스리면 仁이다. 인을 가지고 동방의 物을 낳는 이치(理)니 천지의 至公한 마음이니 해서는 仁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다산은 仁자는 人과 人을 중첩시킨 글자라며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 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仁을 가지고 동방의 物을 낳는 이치니, 천지의 지공한 마음이니’라고 보던 성리학의 해석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실천규범으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다산에게 있어 仁은 사변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행위였고,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恕(어짊ㆍ용서)였다. 그래서 다산은 공자가 말한 仁은 주자의 해석처럼 만물의 근원인 理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실천이며 그 실천방법은 공자가 論語 「里仁」 편에서 증자에게 말한 “나의 도를 꿰뚫는 것은 恕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산이 사변적인 중세 주자학의 틀을 넘어 실천적인 고대 유학의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다산은 “仁은 사랑의 이치요, 마음의 덕이다(仁者, 愛之理, 心之德也)”라고 한 주자의 형이상학적 해석에 반대하고, “仁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仁與人盡其分, 斯之謂仁)”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大學의 기본강령인 ‘明德’조차 추상적 개념이 아닌 ‘孝ㆍ悌ㆍ慈’로 구체화하면서 효ㆍ제ㆍ자는 부모와 자식과 형제 사이에 적용되는 인륜의 조목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그의 心性論은 인륜을 선의 기준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의 經世論도 인륜을 사회적으로 실현해야 할 질서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나아가 다산은 인간관계의 사회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본덕목으로 仁을 주목하면서 仁을 인간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산은 사회공동체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도 ‘남을 향한 사랑’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이 사회를 운영하는 통치원리를 근원적으로 사랑(仁)에 의한 어진 정치(仁政)로 파악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만남의 방법인 ‘人道’를 바로 인간관계의 규범인 ‘人倫’으로 확인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를 사랑으로 결합시키는 근본원리를 ‘仁’으로 밝혔다. 그리고 이 仁을 실천하는 기본방법이 바로 자기 마음을 남의 마음과 일치시켜 가는 ‘恕(헤아려 동정하다, 용서하다)’로 제시하고 있다. (금장태, 343~344) 다산이 정부와 백성과의 관계도 일종의 유기적 일체를 이룬 하나의 생명체로 규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조정은 백성의 심장이요, 백성은 조정의 四肢이니 힘줄과 경략의 연결과 혈액의 유통은 순간의 막힘이나 끊김도 있어서는 안 된다.” (與金公厚(履載))
이는 심장이 건강해야 사지가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요, 사지가 건강해야 심장도 튼튼할 수 있는 상생관계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표현은 심장이 사지를 해치고 사지가 심장에 거역하는 상극작용을 하는 다산이 살았던 당시 조선사회 현실의 근본적 모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다산은 자신이 지방관에 나갔을 때나 유배지에서 백성의 참혹한 생활상과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면서 백성에 대한 국가와 관료의 책임을 통감했으며, 이런 현실인식의 바탕 위에서 사회개혁 사상이 싹텄던 것이 사실이다.
다산의 이런 사회개혁 사상은 무엇보다 民本的 爲民사상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는 原牧 머리말에서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생존하는가(牧爲民有乎, 民爲牧生乎)”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선 이어 통치자의 발생과정을 역사적 논거 위에서 설명한 뒤 ‘통치자는 백성의 필요에 의해 있게 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계약설과 같은 것으로 종래의 전제주의에 반대했던 일부 先儒들의 이론을 한층 발전시킨 선진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다산의 정치사상은 유교의 민본적 위민사상에서 한 단계 나아가 서구의 민주주의로 접근하려는 시도의 흔적조차 보인다
따라서 다산은 그의 湯論에서 천자란 군중의 추대를 받아 그 자리에 오른 존재라고 전제한 뒤 군중이 천자를 찬동하지 않을 때 천자를 개선하는 것은 마치 가무단에서 지휘자를 교체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통치자의 위치는 민의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므로 통치자는 이 유동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민의의 소재를 파악해야 하며, 스스로 덕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심을 잃은 위정자를 민의에 따라 과감히 교체할 수 있다는 논리는 근대 민주주의 사상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이는 당시로선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이다.
이처럼 다산은 제왕의 권력은 천명을 통해 받은 것이라고 하여 제왕권을 신성화하던 봉건적 전통에 대해 혁명적인 변혁의 이상을 제시했다. 그만큼 백성을 지도자 선출권을 가진 정치주체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는 미래에 실현될 이상으로서 백성의 선거권을 고대의 법도에 투영하여 제시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백성을 제왕 선출권을 가진 정치의 주체로 파악함으로써 백성을 정치의 객체로 규정하여 보호와 사랑의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입장에서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다. 또 다산은 백성이 임금까지도 뽑아 올린다는 선출권 내지 추대권만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 백성에 의한 임금의 축출권마저 뚜렷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왕권에 저항하는 혁명권을 정당화하고, 탕 임금이 걸 임금을 축출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금장태, 353).
이런 다산의 경세론 핵심은 목민심서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경세론은 백성의 삶을 끌어올려 모든 인간이 균평한 조건에서 사회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해 목민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선 목민관으로서의 정신자세, 곧 心法을 갖추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것은 다스리는 자가 언제나 자신의 인격적 수양(修己)에 바탕해서 백성을 다스려야(治人) 한다는 유교적 통치원리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다산은 다스리는 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에 주목하여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절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라고 지적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의 일에 수신이라는 인격적 기반을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목민관에게는 행정 실무에 앞서 정신자세를 올바르게 확립하도록 요구하는 이유다.
맺음말
일반적으로 소통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조직(organizational) 차원의 소통으로서 조직 내 구성원들의 소통양식이 이에 속한다. 여기서는 국가 및 사회 등에서 言路가 어떻게 보장되는지가 핵심 사항이다. 두 번째는 대인(interpersonal) 차원으로서 가족 및 친지를 비롯한 자신이 관계한 사람들과의 소통양식이 이에 속한다. 이들과 관계할 때 어떤 자세와 태도로 임했는지가 중점 논의사항이다. 다산은 이런 논의들에 대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仁으로써 대신했다.
그런데 필자가 다산의 소통과 관련해서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조직 및 대인 차원의 소통이 아니다. 자신과의 소통(intrapersonal), 즉 내면의 다산과의 소통 양식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다산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그는 조선후기 학술문화사를 찬란하게 빛낸 학자이기 이전에 너무나 비극적인 인물이지 않았던가. 정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곧이어 정치적으로 나락에 떨어진 다산, 척박한 유배지에서 18년을 고난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다산, 가난 속에서도 도덕성을 굳건히 지녔던 다산, 요절한 자녀 6명(4남 2녀)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다산, 유배 죄인으로 자식의 과것길을 막아버린 아버지로서의 다산,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며느리를 둔 시아버지로서의 다산, 자신의 학문을 계승ㆍ발전시킬 후계자로 여겼던 17세과 20세의 조카 2명을 허망하게 잃은 작은아버지로서의 다산, 마음으로 존경해온 형의 임종을 소식으로만 들어야 했던 동생으로서의 다산.
그렇지만 다산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도 고민만 하지 않고, 또 괴로워만 하지 않았다. 또 혈루만 뿌리지 않았고, 가슴만 치지 않았다. 궁핍한 유형지에서도 항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때로는 다정하게, 더러는 혹독하게 자식들을 가르쳐 내일을 도모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한 다산의 진정한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이런 인간적 승리를 위해 자신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눈물겹도록 나누어야만 했던가? 그 결과 자신과 화해함으로써, 아니 소통함으로써 그는 이런 값진 인생의 승리를 맛보았던 것이 아닐까? 이 점이 필자로 하여금 인트라 퍼스널한 차원에서 다산이 행했던 소통을 다시 연구하도록 재촉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