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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75
4월24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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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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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cbAOS4UH2Q&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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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빵 산’>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말씀은 얼마나 명쾌하고 또 감미롭던지 암울했던 백성들의 삶을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앓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으로부터 치유를 받으려고, 그분께 조언을 구하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갈릴래아 호숫가를 따라 걷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 뒤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군중들이 따라 걷습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좋은 적당한 장소에 도달하면 군중들을 편안하게 자리에 앉힙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잘 볼 수 있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서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살아있고 재미있던지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제자 필립보를 향해 조금은 생뚱맞은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저 사람들’이란, 열 명 스무 명, 백 명 이백 명이 아닙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많은 수의 군중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마 진담으로 그러는 것을 아니겠지, 생각했던 필립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강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이라고 했는데, 데나리온은 예수님 시대 당시 통용되던 은화였습니다. 이것을 당시 가치로 따지자면 로마제국 군대 군인들의 하루 복무비 정도, 아니면 팔레스타인 지역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5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200 데나리온 어치 빵은 천만 원 어치 빵인 것입니다.
옆에 있던 다른 제자 안드레아는 더욱 비관적인 어조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안에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듭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전개됩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의 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초로 엄청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기적을 통해 제자들이 얻게 된 빵의 양,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천만 원 어치 빵입니다.
트럭으로 몇 트럭이 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빵 산’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이 나서 나누어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깜짝 이벤트가 꾸며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굶주렸던 백성들은 원 없이 빵과 물고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그래서 제자들이 남은 조각들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열둘이란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지요. 그 완전함이 또 다른 완전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미지는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곳,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상처도 죄도 없는 곳, 그저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행복만으로 충만히 채워지는 곳...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곳,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배를 채우는 곳,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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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uN2sUnzDTo
<모든 기적은 “될까요?”로부터 시작된다>
두 팔 없이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이름은 ‘제시카 콕스’(Jessica Cox), 올해 나이 35세입니다. 그녀는 두 다리만으로 할 수 있는 가능한 것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팔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세수나 화장도 손수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두 발만으로 콘택트렌즈까지 착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자는 1분에 25단어 정도가 가능하며, 그 작은 핸드폰 자판으로도 문자 메시지를 큰 불편 없이 친구들과 주고받습니다. 14살에 태권도 공인 2단을 땄고 수영도 합니다. 바다에서 서핑도 하며 물론 운전도 합니다. 그녀는 장애인 면허가 아니라 일반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비행기 조종도 합니다. 그녀는 20대 중반에 이미 단독으로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조건 ‘한다’라고 말하곤 했죠!”
“무조건 한다.”라는 믿음은 사실 “할 수 있을까?”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다 보니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두 발로 두 손이 하는 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두 손이 있는 사람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면을 무시하면 결국엔 자신의 믿음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기적을 일으키실 작정을 하시고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는 말도 안 된다고 혀를 찹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다르게 안드레아가 대답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 다 믿음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둘의 자세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마치 마중물이 들어간 상태와 들어가지 않은 상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의문형으로 말합니다. 의문은 이미 가능성을 1%라도 전제하고 있으므로 나오는 말의 형태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봉사하라고 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요.”라고 잘라버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제가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기 싫다는 의미로 들리고 그래서 시켜도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을 시키면 무슨 일을 시켜도 잘합니다.
빵 다섯 개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5’는 다섯 개의 감각, 즉 ‘오감’(五感)을 나타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능력을 말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에서 숫자 ‘2’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진리입니다. 사람을 바꾸기 위해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성자와 성령께서 힘을 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부정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의문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이미 믿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미시간 그랜드 래피드 근처에 1904년도에 개발한 석고 광산이 있었습니다. 1943년까지만 해도 수백만 달러가 나가는 광산이었으나 결국 쓸모가 없어져 폐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이 폐광의 지하터널 온도가 연중 균일하게 10도 시 정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칠면조, 계란, 감자 등을 저장하는 창고로 변형시켜 큰돈을 벌었습니다. 모든 기적은 “혹시?”라는 작은 1%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한 걸음이 없으면 두 걸음도 없습니다.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전에게 유튜브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저는 시간도 없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난 못해!”라고 말하지 않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만 했습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해버리면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에 나를 가두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때문에 시간이 생겨서 유튜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에게 주님께서 양식을 주시는 재료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사제가 된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적어도 의문은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부정적 확정문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작은 의문이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뜻에 나의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통한 주님의 계획을 잘 모릅니다. 주님의 어떤 뜻이 들어온다면 부정적 정언으로 마침표를 찍으며 끊어버리지 말고 적어도 “될까요?”라는 의문으로라도 마음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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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15 :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가르침보다 기적에 더 마음이 끌렸다. 기적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신다. 산에 오르시는 것은 우리에게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가신 적이 많다.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하셨다. 하느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이는 모든 장애물에서 벗어나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지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고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고 말한다. 여기서 보리빵 다섯 개는 모세오경, 즉 율법 전체를 나타내고 물고기 두 마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쓴 신약성경을 나타낸다. 즉 사도들의 설교와 복음사가들의 선포가 그것이다. 그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음식이 되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고 하신다. 이때는 바로 파스카가 가까운 때임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자들에 이어 복음의 빵이 되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가 나누어진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 주시리라 기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라고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기도를 바쳐 백성을 먹였듯이 그분께서 광야에서 자신들을 먹여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모세의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나와 같은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고, 물 위를 걸을 예언자고(마태 14,25-31)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 가셨다. 예수님은 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는 그래서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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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최고 의회 의원들은 분노합니다. 첫 번째 심문에서 위협하는 정도로 그쳤던 의원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순교의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지혜로운 말로 광포한 의원들을 달래면서 사도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기원 전후 무렵 자유주의적인 견해와 관용적 태도로 유명하였던 율법 학자 힐렐의 손자로서,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가말리엘은(사도 22,3 참조),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을 내버려 두자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움직임이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겠지만,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다면 의회가 결코 없앨 수 없으며, 어쩌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께 맞서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고 의회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예루살렘의 첫 교회 공동체를 막았지만,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하였음이 틀림없으나, 더욱 분명한 힘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입니다.
복음 속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살펴봅니다. 물론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사도들의 남다른 활동도 기적의 재료와 도움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바치시며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자, 사도들은 스승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담대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더욱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을 막으려는 온갖 악에 맞설 수 있도록 담대함과 열정을 허락하시는 성령께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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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기적의 빵을 주신 일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것으로 기록했고,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시려고 기적을 일으키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기적 이야기이지만 세부 사항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5-6)
여기서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의 뜻은, “사람들을 먹일 빵을 어디에서(또는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느냐?”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를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려고 계획하고 계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만 질문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제자들 모두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시기 전에 먼저 빵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은, 당신의 계시를(가르침을) 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라는 말의 뜻은,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신 질문이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이 먼저 와서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했고(마태 14,15; 마르 6,35-36; 루카 9,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16; 마르 6,37; 루카 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교회의 역할, 또 공동체의 사랑 실천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영적 생명의 빵’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지만, 육적인 빵의 문제는 우리의 ‘나눔’과 사랑 실천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양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면 주님께 간청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하늘만 쳐다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다는 필립보 사도의 말과(요한 6,7)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안드레아 사도의 말은(요한 6,9),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은 분명히 하느님의 권능으로 일으키신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사도의 믿음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또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일에 대해서는, 그 일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기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여기서 ‘그 예언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가 예고한 예언자인데, 유대인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라는 사람들의 말은, “이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을 뿐이고,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면 예수님의 뜻에 따랐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기들의 뜻에 따르라고 요구했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다.” 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것은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다.” 라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자신의 온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믿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온 삶을 예수님께 맡겨 드립니다. 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예수님은 온 세상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게 됩니다.)
2)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구세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람들이 원한 것은 임금이 아니라, 임금이 줄 부귀영화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독립하는 것도 희망했을 것이고, 로마제국의 하수인이었던 기득권층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도 희망했을 것이고, 강대국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도 희망했을 텐데, 그런 희망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과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는 ‘생명의 빵’에 관한 긴 논쟁으로(요한 6,22-71) 이어지게 됩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를 읽고 나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과 사람들이 먹은 그 ‘빵’만 생각하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을 잊어버리면,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육신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또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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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할 때 얼마나 커다란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적당히 오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도록 온다는 것입니다.가진 게 적었지만 예수님이 함께하시니 적게 가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목표와 스스로 설정해 놓은 나 자신에 대한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을 이루기에 많이 부족하고 많이 모자랍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나의 삶 가운데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거둔 그런 풍성함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문제는 오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두렵고 어려움이 보이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고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내 삶의 한 사건이 되려면 지금 주어진 처지를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오천 명을 위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리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풍성한 결실을 맺는 신앙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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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서 큰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멀리 푸루른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풀이 무성한 산등성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구름처럼 밀려옵니다. 때는 뉘엿뉘엿 해가 지는 저녁이며 외딴곳이라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은 일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원한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하셨나 봅니다.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빵을 사다가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입니다. 더군다나 이 외딴곳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봐도 '불가능하다'고 밖에 나올 수 없는 대답을 이미 알고 계실 예수님께서 왜 물어보셨을까? 성경은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곧이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말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작정하시고 계셨던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며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예수님 손에서 축성된 빵과 물고기는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하찮게 여겨지던 아주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쳐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나의 하찮아 보이는 기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자그마한 희생과 봉사.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거치면서 나와 이웃에 대한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빵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예표(豫表)입니다. 주님께 할애하는 나의 기도 시간, 자그마한 희생ㆍ봉사는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듯, 이웃을 위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주님을 기억하면서 봉헌하는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와 순종은 그 어느 때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어 나와 이웃의 평화와 위로의 양식이 됩니다.
이 평화와 위로의 양식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원천이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될 작고 큰 봉헌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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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산술적인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실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런 기적 이야기라면 굳이 요한 복음이 이 사실을 장황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필립보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먹일 빵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예상대로 필립보는 세상의 셈법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안드레아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가져온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 저자의 의도는 다릅니다. 진정한 기적은 빵을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입니다. 빵은 한순간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지만,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먹을 빵만 챙기고 남에게 관심도 없던 이기적인 사람을 변화시키면, 그가 일생 동안 수많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은 유다의 지도층을 혼란스럽게 만든 제자들을 붙잡아 처벌하는 어리석음보다는, 하느님의 선택을 지켜보고 결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옳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한 사도들은, 이런 확신을 실천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시편 저자의 노래가 더 감미롭게 들리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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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는 분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미국 정부는 경기부양책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업에 무상 원조와 저금리의 융자를 해 준다고 합니다. 개인에게도 일정한 금액을 준다고 합니다.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어도 세금을 낸 사람에게는 준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크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은 직원을 해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개인은 소비활동을 해야 합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 정책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 단체와 중앙 정부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한다면 건너지 못할 강은 아닙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지막 남은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씨 과일은 땅에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나고 그렇게 나무는 숲이 되고, 숲에는 생명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무엇이 마지막 남은 과일일까요?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핀다는 희망입니다. 힘들과 어려운 상황 속으로 달려가는 의료진의 헌신입니다.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는 나눔입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일궈온 원동력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시련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석과불식을 보았습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인 논리로 접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먹게 하려면 특별한 경제부양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빵을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도 빵은 남았습니다. 재물을 마련해서 빵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표징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도록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자비와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큰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아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곳에 성당을 세우고, 철야기도를 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유하려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과 치유’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위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사람들의 희망과 빛이시오니 간절히 비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맞갖은 기도와 찬미의 제사로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 아드님의 십자가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주님 사랑으로 저희를 지켜 주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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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갈릴래아에서 해방의 축제를>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갈릴래아에서 해방의 축제를>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에 그분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나름의 신심과
돈푼깨나 있는 이들이
해방의 축제를 즐기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때에 그분께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가난한 무지렁이 이방인들이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척박한 땅으로 가셨다지
그때 그곳에
모두가 파스카를 즐기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있기에
아무도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께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분께서는 미어지는 마음으로 보셨다지
파스카 곧 해방의 축제가 올 때 마다
오히려 얽매인 신세를 한탄해야만 하는 사람들
내일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고
그저 오늘을 버텨내야만 하는 사람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할 겨를 없이
맨몸뚱이로 당신을 따라나선 사람들
그때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당신께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났다지
많은 군중에 놀라
어떻게 흩을까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그분께서 말씀하셨다지
먹을 것도 거의 없는 자리
기쁨도 희망도 찾기 힘든 자리
찌든 삶의 흔적만 나눌 수 있는 자리
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가
그분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고픈 자리이기 때문이라지
그때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온 몸과 마음 정성껏 모아
감격에 겨워 감사를 드리셨다지
당신께서 그 자리에 있음에
그리하여 당신을 내어줄 수 있음에
당신을 찾는 사람들이 있음에
그 가운데 당신을 닮은 사람들이 있음에
당신과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있음에
그리하여 당신께서 하시려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그때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모두가 아낌없이 나누는
모두가 넉넉히 배부른
모두가 갈림 없이 하나인
모두가 감사에 넘치는
참 해방의 축제를 여셨다지
어느 해 파스카가 가까운 때에
흥분과 설렘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수많은 유다인들의 발길을 거슬러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조차 없던
수많은 작은이들과 함께 하시고자
그분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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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저희는 미사를 드리지 못했던 긴 시간을 지내고 이렇게 어제부터 다시 모여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직 사회가 정상화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절차들도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렸다는 듯 미사에 참석하시는 신자분들의 표정에는 생기와 기쁨이 가득합니다.
올해 초,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이러한 현실이 다가오리라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약 두 달의 시간을 꼼짝없이 갇혀 지내게 되고 심지어 성당이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종의 새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미사에 참석하고 계신 많은 분들의 계획에도 차질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행과 같은 개인적인 일정들도 모두 취소되었을 것이고 시니어 아카데미와 동아리, 구역 반장 모임을 비롯한 본당의 각 단체의 활동들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의 계획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학시절부터 꿈꿔왔던 한국의 봄, 기다려왔던 주일학교 아이들의 교리 개학, 학생들을 위해서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다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러한 사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제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망했다” 였습니다.
신자 분들과 미사를 할 수 없고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볼 수도 없고 그 와중에 대학 강의를 온라인으로 해야 하니 할 일은 많고 누군가를 맘 편히 만날 수도 없고 이태리에 있는 많은 동료 사제들과 신자분들에 대한 걱정은 커지고 TV를 켜면 경제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뉴스만 나오니 마치 전부 다 망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이러한 저의 상황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처한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때로 많은 기적과 치유를 베푸시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분의 기적을 바라며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를 앞두고 있었으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상황. 그런데 이 순간 안타깝게도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오늘 복음과 병행구절인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셨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빵도 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구한 것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 하나 뿐 입니다. 오천 명이라는 인파에 비하면 그야말로 “망했다”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안드레아가 힘없이 대답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연민의 정이 있고, 이 순간이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혼자서 “망했다”라고 중얼거리던 지난날의 저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안드레아의 대답과도 같았던 저의 비관적인 태도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참으로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며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시는 분이신데, 그것에 의지할 생각 보다는 제 주관만을 앞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많이 갖게 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하느님 계획을 끌고 가려합니다. 또한 우리 마음대로 하느님 사랑에 한계를 설정하고 우리 능력에 비추어 하느님의 전능함에 제한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우리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곤경에 있을 때 더욱 좋은 결실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우리에게 시선을 주시며 매순간 연민의 정으로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의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그 동안 성체성사를 기다려온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손길을 통해 나누어지는 이 따스한 기적. 그 안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가득 담겨져 있음을 직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성체를 영하시며,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의심이 아닌 ‘작은 것으로도 큰 것을 이루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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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스펜서 실버라는 연구원이 강력 접착제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기존의 접착제에서 보이는 끈적거림을 없애줄 획기적인 강력 접착제를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끈적거림을 없애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계속된 실패로 점점 의욕이 잃어가고 있을 때, 드디어 끈적거림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 역시 실패였음을 발견합니다. 끈적임은 없었지만, 접착력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의 옆에서 함께 했던 동료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꽂아둔 책갈피가 자꾸 떨어져 불편했는데, 이 접착제로 책갈피를 만들면 어떨까?” 이 접착제로 만든 책갈피가 무엇일까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포스트잇’입니다. 실패가 오히려 성공을 가져온 경우입니다. 만약 스펜서 실버가 끈적이지 않고 동시에 접착력도 강한 접착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포스트잇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가 오히려 사람들의 사랑을 끌어내는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바라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실패가 아닌 성공을 목격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까요.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긴장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굳게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이들이 배불리 먹습니다. 이 기적에서 빵이 남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딱 필요한 만큼만 기적을 일으키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어른들도 이런 말 많이 하시지 않습니까? “음식 남기면 벌 받는다.”라고 말이지요.
주님께서 음식 남는 것을 당연히 하라고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기적은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입니다. 그저 주님만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주님과 함께해야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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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전염되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여파로 사회가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한 사람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따라서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 옆에서 기침해대면 긴장을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요. 혹시라도 전염될 가능성 때문입니다. 확진자의 동선에 있는 가게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역시 전염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전염되는 바이러스 균을 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의 불행도 전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행에 빠진 사람에 대해 안타까움은 가지고 있지만,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불행은 전염병이 아닙니다. 대화하거나 악수를 하고 또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옮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멀리하는 이유는 자신도 이 불행의 처지에 함께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행에 빠진 이들을 더 힘들게 하고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사실 아픔에 함께하면 힘들어하는 이에게 큰 위로가 되고, 보인 역시 성장하게 됩니다. 나약한 존재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함께함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스스로의 자존감이 성장합니다. 불행은 절대 전염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함께해서 불행을 줄이는 백신이 내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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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
-분별력의 지혜-
공동체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여 분별력의 덕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라 칭하기도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참 중요한 분별의 지혜입니다. 배움의 지식은 짧았어도 옛 어머니들의 분별의 지혜은 뛰어났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지만 두가지 사실은 지금도 생생히, 고맙게 기억하며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갈수록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제 어머니는 화를 내거나 매를 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겨울철 저는 연 만드는 것을 참 좋아해 겨울에 10회 정도는 연을 만들어 띄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몰래 마실 간 틈을 이용해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실 후 연만든 것을 알아 채신후, “너 또 연만들었구나!” 곱게 눈흘기길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기에 참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창 내적 갈등으로 장기간 결석했을 때도 “너 학교 안가니?” 한마디만 하실 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도 고맙게 기억합니다.
사막교부들은 물론 그 후예인 성베네딕도 역시 특히 강조한 것이 분별의 지혜였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의 고생이 많듯 장상이 분별력이 부족하면 공동체가 많은 혼란과 불편을 겪기 마련입니다.
-‘대 안토니오 압바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몸을 고행으로 혹사시킴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분별력이 부족하다 하여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은 분별력이 뛰어납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자 겸손이고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랑과 겸손, 지혜도 함께 하기에 좋은 분별력을 지니게 됩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아빠스의 자질로서 분별력의 덕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1500년전의 성 베네딕도는 이렇듯 지혜로웠고 뛰어난 분별력의 덕을 지닌 경이驚異로운 수도승이었습니다. 참으로 수도공동체는 물론이고 모든 공동체의 책임자가 지녀야할 필수적 덕목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다음 대목 역시 성인의 분별력의 지혜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성규 머리말 45-46)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존재가 군계일학(群鷄一鶴), 뛰어난 분별력의 덕을 지닌 이로 드러납니다. 그의 사도들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별력의 지혜가 최고의회의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주님께 맡기고, ‘건들이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이 분별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분별력의 대가(大家)임이 드러납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후의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을 먹이신후 군중들의 광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위태한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 군중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처신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표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분별력이 결핍된 무지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예수님은 집착없이 산으로 떠나, 영원한 안식처이자 피난처, 정주처가 되시는 ‘하느님 안 제자리’에 머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마디처럼 공을 이루면 거기에 머물지 않고 초개(草芥)같이 내버려 두고 떠나는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와 처신이 참 아름답습니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란 시 첫 연이 생각납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욕의 지혜입니다. 일체의 탐욕이나 야심이 없기에 이런 아름다운 떠남의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늘 하느님과 함께 했기에, 늘 하느님 안에 머물렀기에 이런 분별력의 지혜란 은총의 선물입니다. 때로 분별이 되지 않을 때는 잠시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제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중단됬던 미사가 두달만에 거행된 날로 많은 분들이 주님 성체를 모실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저 역시 어제 작심하고 많은 시간을 내어 참 많은 분들에게 수도원 하늘길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아름다운 배경의 예수님 부활상을 찍어 카톡으로 다음 축복의 기도와 사진을 전송하며 미친듯 사랑을 나누니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사랑하는 자매님도 익명의 성녀중 한분이지요. 수도원 예수님 위로와 치유,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가장 좋은 분별의 잣대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고 판단하셨겠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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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먹을 빵을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통해서 생명의 빵을 끊임없이 제공하시게 되리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 18,15).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으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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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파스카와 연결시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기적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빵의 양을 증가시켜 그곳에 있던 군중을 먹이신 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이 세상에 양식으로 내어주실 희생 제사로 승화되리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파악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라니 소량의 빵과 물고기로 군중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숫자와 데이터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문제는 이 현실적 데이터가 쉽사리 우리를 회의와 실망, 포기로 끌어가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숫자나 데이터에는 숨은 희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빛을 잃고 지치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초라함과 우리의 한계와 해결해야 할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지레 주저앉습니다. 필립보처럼, 안드레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11)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니다. 적은 양이지만 아버지 앞에 펼쳐놓을 양식이 있고, 또 그것을 내놓은 순박하고 용기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제자들과 군중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은 넘치고 또 넘칩니다.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
군중은 "원하는 대로"(요한 6,11) 양식을 받아서 배불리 먹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양이 남았다고 하네요. 사실 사람은 본성상 잉여분을 챙기고 싶어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기약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그렇지만, 부자들도 가진 것을 더 불리고 싶어하니까요.
"억지로라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요한 6,15)
그런데 군중은 빵을 더 챙기지 않는 대신 빵을 많게 할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을 소유하려 듭니다. 그분이 임금이 되시면 더 이상 양식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나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사도 5,41)
불신과 회의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을 수 있음을 영광으로 여기게 된 변화야말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소유에 실망하던 그들이 스스로 보잘것없이 작은 자가 되어 모욕 당하기를 기뻐하는 이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임금이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파스카의 밤을 통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화답송)
주님 때문에 겪는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들이는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 죽기를 영광으로 여기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요.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먹히기 위해" 세상에 자기를 내놓는 존재로 굳건히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매일 빵의 기적에 참여해 주님을 모시는 우리도 그 기적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나 부활하신 주님처럼, 부활의 증인이로 우뚝 선 사도들처럼 우리도 변화되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회의와 불안과 실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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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인내를 희망과 관련지었다.
(바오로 사도) -행복한 만남을 위한 인내-
바오로 사도는 인내를 희망과 관련지었습니다. 인내는 희망을 가져오고, 희망은 인내를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상대방에게 희망을 갖고 있기에, 그 희망을 상대방이 실현시킬 때까지 지금은 보이지 않더라도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4)
-「만남을 준비하세요」에서
♣여러분이 인내의 태도를 배움으로써 기다리는 방법 또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어려워하며, 즉각적인 해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의 태도를 익혀야 하며, 특히 상대방에 대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즉시 달라질 수 없으며, 상대방도 변화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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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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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른바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상향곡선을 그려오던 예수님의 인기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이후부터는 차차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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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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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골고루>
"원하는대로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차별없이 사랑을 주십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사랑을 주십니다.
주린배를 채워줄 때,
상대가 원하는만큼 주시고
버려지는 조각 하나 없이
모으시는 알뜰함도 지니셨죠.
쓸데 쓰고 아낄데 아끼는
사람은 멋이 있습니다.
음식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지듯,
사람도 차별없이 대하고 골고루 나눠주고
골고루 보살피는게 예수님 닮은 사람입니다.
"사랑도 편식보다 골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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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 13)
생명은 생명의
길을 걸어가며
모든 것을
생명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먹고 남긴
조각으로
잊고 살았던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흩어짐과
모아들임 사이에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갈
힘을 다시 주는
생명의
성체성사입니다.
작은 조각이
있기에 큰 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각까지도
주님의
은총이고 주님의
사랑입니다.
살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할
사랑과 감사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방식은
이와 같이
나누는 삶의
방식입니다.
나누는 삶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나누는 길만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차게 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나눔과 감사로
오시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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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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