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일 대림 제1주일>
구원과 로또
예전에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새해 선물로 ‘로또 복권’을 석 장씩 사준 적이 있다. 사줄 땐 별생각 없이 재미로 시작했는데 나눠주고 난 후 내 몫으로 남긴 석 장의 복권을 놓고 심각해졌다. ‘물론 당첨될 리야 없겠지만’ 하면서도 ‘만약에 당첨이라도 된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당첨되면 보통 50억 정도였는데, ‘나에게 50억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니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연히 50억을 여기저기 의미 있게 쓰고 계속 사제생활을 해야겠지?’ 하면서도, ‘하지만 50억이라는 거액이 내 수중에 들어오면 나는 지금의 사제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1년에 1억씩만 써도 50년을 먹고 놀며 살 수 있는 금액인데 과연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당첨되기 전이야 얼마든지 호기를 부릴 수 있겠지만 과연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지면서 눈앞의 복권 석 장이 갑자기 끔찍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어느 것에 몰입하게 되면 ‘현실성’을 잃는다더니, 복권 석 장을 놓고 생각에 빠진 나는 이미 1등에 당첨이라도 된 듯 심한 유혹에 시달리며 복권을 바라봤다. 끔찍했다. 돈의 위력을 느끼면서 새삼 ‘가난한 사람이 왜 행복한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지금 사제로서 살아가고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 절대적 빈곤도 아니고 부족함이 없는데, 아무리 50억이 있다 한들 이 삶을 떠나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더 행복할 자신도 없고, 50억이라는 돈을 뿌리칠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석 장의 복권을 찢어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는 자신을 보며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흔들리는 갈대 그 자체였다.
대림절이 시작된다. ‘대림(待臨)’은 ‘메시아-그리스도’의 강림(降臨)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메시아-그리스도’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대림절’은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구원자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우리에게 ‘구원’은 무엇을 말할까?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면, 그 ‘구원’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진정 ‘구원’을 바랄까? ‘구원’이 무엇인 줄 알고 바라는 걸까? 우리가 바라는 ‘구원’이 진짜 ‘구원’일까? 아니면 로또처럼 ‘재앙’일까?
사극을 보면 ‘서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는 ‘한’을 가슴에 품고 사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본다. 그들에게 ‘구원’은 뭘까? 옛날 계급사회에서 노예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신분에 매여 어쩌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운 사람에게 ‘구원’은 무엇일까? 그래서 ‘구원’은 억압받는 이에게는 ‘자유’가, 억울하게 핍박받는 이에게는 ‘정의’가, 불치병으로 평생을 시달린 이에게는 ‘치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처럼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 풍요로운 적이 있었던가? 그 옛날 제왕들도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문명을 누리지 못했으니, 오늘날 현대인은 구원된 사람들인가? 산업화와 기계 문명으로 옛사람에 비하면 말 그대로 ‘천국’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에도 현대인은 행복하다고 구원받았다고 느낄까?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과거 군사 독재 등 고통의 근현대사를 겪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룬 사회를 만들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정의’와 ‘자유’가 보장되고, 약자들을 위한 법의 공감대를 이루었다.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는 사회 권력과 자본주의적 ‘계급성’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과거와 비교해 ‘계급성’은 많이 타파되었다. 누구도 개인 간의 ‘계급성’을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지 못한다. ‘갑질’이라는 형태로 자행되는 야만적인 ‘계급성’의 모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상당한 공정과 공평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우고 만든 세상은 여전히 불안하고 거친 폭력과 야만이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적 민주화를 방해하는 새로운 신진 귀족으로 등장한다. 인류에게 새로운 계급이 탄생한다. 그 계급은 ‘돈-맘몬’이라는 ‘악의 세력’으로 민주 사회의 정치권력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새로운 계급이다. 이제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헌법 1조 1항은 퇴색되어 수정된다. ‘모든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라고. 새로운 제국주의가 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자본의 권력화는 다국적 기업에서 기업국가로 이행되는 단계에 이른 것일까? 자본의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어서고 있다. 더는 신성한 국가 권력이 아니다. 기업의 자본이 사람들의 희망을 이루어주는 새로운 ‘구원자’로 떠오른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들만의 제국을 만들고 있다. 정치인보다 재벌가의 영향력이 더 크다. 사회는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라고 외치며 젊은이들에게 헛된 소망을 일으킨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잡을까 말까 하는데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가 그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들에게 성경 말씀은 얼마나 영향력을 가질까? 이미 자본주의라는 마법에 걸려버린 사람들, 그래서 언젠가 자기들도 ‘성공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이들에게 ‘구원’은 뭘까? 시내 복권 판매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행일까 아쉬워해야 하는 걸까? 내가 사준 복권이 당첨된 사람은 없었다. 당첨되면 서로 나누자고 했건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떤 부부는 나누지 않으려고 이혼했다던데, 다행일까? 아무도 당첨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변함없이 지금도 우리의 생활을 계속하며 살고 있다. 다행이겠지? 그때 누구라도 당첨되었다면 큰일 날 뻔했지? 여전히 가난하지만, 괴물이 되지 않았지? 그 후로 다시는 복권을 사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다시금 “구세주 어서 오사!” 하며 노래 부른다. 구세주를 부르며 노래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자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