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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기다리고 찻는 것은 인간이기에 하는
자기 만족 이라지만 오고 가는 모든 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 인것을 아는 진도 접도 봄바다 봄꽃길을 찻아갔다.
어느 본론도 반론이 없어면 본론이 없다고 한다. 이는 한쪽으로 가는 것은 결국은 집착이 되는 것이라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불가에서나 철학적으로 하는 논리는 진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잘아는 유명한 법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말은 성철스님이 인용한 오래된 불경의 진리를 말한 것뿐이다. 진리란
석가모니 의 불교의 경전에서나 스토아학파의 철학적 진리는 누가 말한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하나의 진리일 뿐이지 누가 발견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진리는 태어나서 보고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진리 산과 물을 배우고 알지만 자라면서 학문이나 경험으로 산을 보고 물을 보고 느끼고 알아지니 자신의 경험과 논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산을 가보니 숲도 있고 바위도 있고,
산도 산따라 각기 다르고, 어느 산은 신성한
문수보살 같고 , 어느 산은 접근조차 못하게하는 거룩한 곳도 있고,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산맥도 있고, 산은 산이 아니고 각기 경험으로 느끼는 천국이니 도인들의 거처니 하는 것이다. 물도 숲속에 가니 천연의 약수도 있고, 시냇물은 마치 마음의 도량같고, 강에 가서 느끼는 정취는 한편의 싯기속에 은하수같고, 저 넓은 바다의 물은 푸르른 파도와 넘실되는 심오한 도인같고, 물도 강이고 바다라는 것이다.
각자가 주장하고 경험하는 반론에 반론만 난무하는 지식으로 나타내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나이가 들면 누구나 도인이 되고 철인이되는 것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간단한 본질을 보는 것이다. 제자들이고 논객들이 스승을 찻아와서 경험이나 논리를 나타내지만 그것은 본질은
하나 뿐이고 반론은 반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고 난리를 하여도 본질은 하나이고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진리를 바라보는 때가 언제나 오는 것이다. 남자를 배우자이니 아버지니 고관대작이니 스님이니
노인이니 하여도 남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와서 떠들고 난리를 쳐도 떠들지 말고 '차나 한잔 하시게 '하고 똑같은 진리이다.
철학적 심오한 진리는 끝없는 반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리란 마치 발가벗겨지는 여인의 모습을 각오하여야 한다. 이집트의 유명한 진리탑 압에서면 누구나 발가벗겨 져야한다는 것이다. 발가벗겨 진 것은 절대진리가 맞냐는 것은
종교적 동기에 의한 다분히 오염된 의도라는 것이다. 플라톤계열의 주류철학자들이 초기에 종교에 경쟁하고 반박하는 구도속에 학문을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반론은 자신과 경쟁되는 이론은 끊임없이 나타내는 것만이 자신의 철학이론을 나타낼수 있는 것이다. 자칭 상대주의라 하면 절대주의가 되어야하고 , 저들이 우연을 중시하면 불변을 중시하고, 저들이 감각을 중시하면 초월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변하는 진리는 다분히 종교적이고 다른 문화권에서는 생소한 언어일지 모른다. 진리는 동양권에서는 도 道로 통용되는 것이다. 도란 말을 하면 도가 아니다. 도를 아는 순간은 도가 아니다 는 노자의 말처럼
도를 이야기 하는 순간 도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토록 진리조차 반론이 없어면 진리가 될수 없는 것이다. 반론은 없어면 정론이 될수도 없다.
인생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은 성공으로 향하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을 향해 가야한다는 것이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루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가야한다는 것이다.
어릴때부터 부터 늘 듣는 부모님이나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이 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가면 성공한 것이다.
일류학교에 가면 연예도 하고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낼줄 알았지만 다시 사회에 나가는 준비를 하고 의사사 판사나 좋은직장은 가지면 성공했다고 하지만
또다른 직장에서 노력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어야하고 끝없는 성공으로
가는 길뿐이다. 산을 다니는 산꾼인 우리들이
바라는 성공은 단 하나 끝없는 좋은 산을 다니는 것이고 오늘의 산행길을 언전하게 다녀오는 것뿐인 끝없는 산길만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성공이나 목적을 이루었다 하는 것은 착각이고 또다른 길을 가야하는 조그만 휴식일 뿐이다. 여정에서는 계속가야 하는 나그네의 운명처럼 중단은 단하나 이고 성공은 단하나 뿐이라는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결론은 인생의 성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어느 정복자가 이루었다는 것은 본인의 생각이지 그것은 이루렬는 마음으로 중단된 허상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끝없는 정복을 하다 죽었을 뿐이고, 로마도 끝없는 정복하다 멸망했고, 징기스칸도 큰 대륙을 정복하다
소리없이 사라진 것 뿐이다. 모든 것은 無에서 유 有를 얻지만 유有는 무無로 다시 한원하는 끝없는 순환하는 것뿐이다. 지구도 300 억년 돌다가 태양이 소멸하면 사라진다고 한다. 지금 이순간이라는 것도
말하는 순간 벌써 과거가 되어있는 것이다.
힌 순간 순간이 그래서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남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순간 하는 것이나 만나는 인연들이 성공이고
행복이고 좋은 것이다. 없는 성공을 찻는 짓을
가르치지도 말고 한순간 순간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다.
요새는 삶의 수준이 경제가 좋아지고 생활이 윤택해지고 하니 건강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다. 각종 건강기능 식품이 무수히 많고 많아 자고 나면 마치 온 나라 사람들이 환자가 되는듯이 각종 미디어나 만나는 사람마다 좋다는 것들을 선전도구인양 지식을 나타낸다. 옛부터 보양식이나 약초를 다려서 먹고 어릴때 귀한 장손이라
흔히 개구리나 기타 협오식품같은 것들을
먹였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보면 아주 어릴때인가 보다. 요새는 이름도 생소한 것들이 워낙 많아지고 하여 비타민이나 보조식품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같다.
특히 외국에 까지 가서 사오는 고가의 것들도
대단한 수준이다.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가면
그 많은 환자들이 같은 의사에게 진료 받고 처방하는 약들은 그의 같은 것들이다. 당뇨라든지 고혈압이라든지 흔한 질병은 똑같은 약들이다. 술먹고 나면 먹는 약이나 진통제나 같은 약을 선전하는 것만 찻아 먹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가진 인체의 구조는 같아도 서로의 기능부분은 다 다르다. 뇌의 크기나 위치도 약간의 차이가 있고 얼굴이 다 다르듯이 얼굴의 크기나 형상의 차이는 미세하게 다 다르다. 팔의 크기나 손가락의 모양 피부의 종류도 각각은 다 다르다. 위의 크기나 장의 길이나 혈관의 길이나 형상도 다 다르다.
그런데, 어찌 같은 약이나 먹는 기능식품이 효력이 같을수 있는가? 흔히 먹는 인삼이나
보양식으로 먹는 약초도 어떤이에게는 극약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기본은 같다고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같을수 없다. 물론 물이나 식품이나 공기나 흡입해야 존재할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나에게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인지는 알아야한다. 독이 되는 것을 모르고 계속 먹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격은 오랜시간 쌓인 나만의 살아가는 방식이라 문제를 자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는다.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는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신경증을 앓고 있다." 고 한다. 비교와 경쟁이 일상인 사회에서 신겅증 없이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 일이다.
사람들이 어려움을 대응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세가지 신경증적 경향성을 나타낸다 고 한다.
첫째, 사람에게 다가가는 유형인데, 타인의 관심을 인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거절을 싫어하고 늘 착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갈등을 피하고 속상해도 괜찮은척 하는 분노를 억압하는 형이다. 둘째, 힘과 통제로서 경쟁을 이기고 우위에 놓여 마음을 협력이나 양보를 꺼리는 겉은 강하고 내먼의 불안을 억누르는 타입이다. 셋째, 겉으로는 차분하고 독립적인데 누구와 감정을 얽히는 것을 싫어하고, 강요나 간섭, 책임 같은것을 싫어하고 철저히 방어를 하는 타입이다.
모든 인간은 세가지 경향을 과하게 몰입하든지, 하나 둘의 성향을 섞어서 의존형은 화내는 것이 두려워 늘 착한 역활을 자처하고 감정을 삼키고, 지배형은 약하게 보일까 불안을 억지로 누르고, 회피헹은 아예 감정적으로 누군가와 가까워 지는 것을 차단 하고, 한방향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은 자신의 삶을 점점 딱딱하고 외로운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나면 변하지 않으면 삶이 어려워진다.
인간의 사는 모습을 니체는 "발로 추는 춤, 사상으로 추는 춤, 말로 추는 춤, 그리고 펜으로 추는 춤을 출수 있어야한다." 고했다.
지구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식물이 존재한다. 이들은 갑자기 지구라는 곳의 세계에 선택되지 않는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선택되지 않는 삶을 사는 동식물중
동물은 그저 하루를 위해 그날의 음식을 구하다 밤이 되면 자는 지루한 삶을 보내고,
식물은 그자리에서 광합성을 하면서 산소를 버리고 이산화탄소 를 흡입하다 소멸한다.
인간만이 그렇게 살지 않고 끝없이 취하고,
때로는 우울감에 빠지다 새로이 일어나서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로운 일을 찻아헤메이는 것이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때로는 뒤돌아가고 이를 실존적 존재론 이라한다.
괴테는 "인간은 존재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라고 한다. 인간은 각자의 방황의 색깔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런 끊임없는 질문은 삶을 진동시킨다고 한다. 이 진동은 우리를 이곳으로 흔들었다 다시 저곳으로 흔들지만, 흔들림 의 모습은 제각각 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무대위의 춤을 추는
모습 같지만 다 다르다는 것이다. 완성될때 까지 끊임없이 춘다는 것이다. 산을 다니는 우리 산꾼들 중에 똑같은 발걸음으로 산을 다니는 사람은 찻을수 없고 산을 넘어 가는 의미도 다 다르다는 것이다. 존재는 의미의 표현을 하는 춤꾼으로 살아간다. 오늘도 무슨 춤을 추고 있는가? 인간은 죽음, 전쟁, 질병같은 극한의 고통과 마주할때, 비로소 자기 실존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는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 한계사황' 을 새겨보아야 한다. 고통이라는 삶의 파도는 자신의 배를 건축한 자만이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나
모두가 교육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같은 사상인지 모른다. 현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은 부분적으로 선하고, 부분적으로 악하다'는 말을 했다. 완벽하게 긍정적인 것은 생활세계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은 없다. 서로가 느끼는 것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이면이 존재하는 이유는 세계의 본질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토피아 적인 이상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통치자들이 이용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이란 바로 지금 당신앞에 있는 것이다 . 현재만이 실제할 뿐이다. 바로 이순간 당신의 행동이 긍정을 만들면 긍정이고, 부정을 만들면 부정이 된다. 그 순간의 본질은 그렇게 결정 날 뿐이다. 그것이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변하는 것 뿐이다. ' 오늘을 붙잡아라. 미래는 최소한만 믿어라.' 그리스 철학자 호라티우스는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며 운명에만 의지하지 말것이며,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가꾸라는 실존의지를 촉구하는 '카르퍼 디엠' 은 지금을 소비하라는 뜻이다. 실상 반복되는 세게는 없다. 세계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날마다 새로울 뿐이다.
미국 경제학자 이스럴런의 역설은 , 소득이 증가해도 일정부분이 채워지면 소득이 계속 증가해도 더 이상 행복도는 증가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더 많은 것을 가진다 고 해서 행복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때문에 행복하지 않는것인가?
첫째, 사회적 안정감을 느껴야한다. 사회적 유대감 이 높아야 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한다. 둘째, 사회적 비교가 없이야 한다.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사람이 가장 비호감 이라듯이 자신의 불행은 비교하는 데서 나타낸다. 핀란드나 부탄 같은 나라가 미국이나 우리나라 같은 나라보다 행복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사회는 부를 기준으로 경제대국 이지만, 행복지수는 별로이다.
우리의 고질병은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한국 특유의 남과 비교하는 문화이다. 우리사회는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를 줄 세우는 나라이다. 하나의 행복에 줄서는 불쌍한 나라이다. '코끼리 사슬 증후군 ' 처럼 어릴때부터 사슬에 묶여 살아오니 커서도 사슬을 끊고 자유로워야 하는데 사슬에 묶여 노예로 사는 것이 행복한 줄 아는 것이다.
모두 한쪽으로 가는 교육의 말로이다. 의사나 판ㆍ검사나 대기업의 입사를 못하면 낙오자가 되어 삶을 잃고 집에서 은거하는 무서운 시대가 왔다. 청년 은거가 백만을 넘어서는 것은 모든 선진국의 병페이다. 어찌 다르게 태어났는데 도착하는 곳은 똑같이 하나뿐인
곳을 향하는 어리석은 기계적 삶을 강요하는 교육의 허점이다. 우리는 금덩어리를 모두가 원하니 금이 된다.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돌일 뿐이다. 권력이라는 것도 경쟁과 계급사회로 들어가야하는 구조이다. 자신의 삶을 알면 틀에 박힌 것이 필요없다. 한사람의 개성이 완전히 말살하는 사회구조는 가희 노예사회이다. 나체는' 자기 삶에서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라' 한다. 내가 잡혀사는 궤도를 가감히 이탈하여 내가 승인한 것만 이루는 자유가 있어야한다. 오늘도 어디에 줄을 서고 남을 비교하고 타인이 되는 꿈에 부풀어 사는 허수아비인지 모른다. "타인은 지옥이다." 샤르트르는 이렇게 자기의 실존과 자유를 부르짖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낸다.
참 어려운 일이다. 안다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지성의 근원인 소크라테스는 상대에게 말을 하도록 하여 자신이 모자란다는 것을 가르쳤어니 철학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열린사회 를 만들기 위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출발선이다. 우리는 추리게임 하듯이 타인과 의사소통 을 한다고 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이 공허한 맥락 안에서 매일 반복한다고 한다. 서로 각자가 동상이몽 을 하는 언어의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니 자유니 하는 단어의 게임이 각자가
느끼는 것은 같을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도
보편적 자유 즉, 모두가 다 자유로워야 한다고 느끼는 이가 있으면 어떤이는 개인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라고 하고, 어떤이는 기득권이 있는 각층의 서로 다른 차이 즉, 상류층은 상류층의 자유 하류층은 하류층의 자유 가 있어야하고, 진보성의 자유와 보수성의 자유는 서로 죽자 살자 싸우는 이유는 서로의 언어의 게임을 하는 것이다.
결국은 언어의 규칙은 같아야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이룬 문화란 모두 정신세계를 통한 '언어게임의 ' 결과이다. 언어는 적대적 게임이 아니라, 서로의 맥락을 이해하고 공통의 합의를 이루는 경기이다. 우리는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유심히 관찰하는 소통의 시작을 배워야한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수 있어? " 하는 식의 사고는 무지와 단절의 근원이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 이상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하여 타인의 경험을 비교 보정하는 동물에는 없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수성을 알아야한다. 우린 대화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고 가르치지 않고 이쪽 저쪽, 일번 이번, 동서남북 식의 편가르기만 하는 단순한 것에 길들여 지는 경험이 아닌
남 따라 다니는 눈치게임에 길들여 살아가고 있다. 남의 말을 잘듣는 것이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자신어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경험을 공부히지 않는 이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경험에 갇혀사는 지각에 닫혀 사는 것이다.
지식이란 간접경험 이다. 들어주는 것이야 말로 관계의 성공을 향한 지름길이다.
종교의 성직자들은 미개한 대중들을 길들이기 위해 종교를 야만적으로 세속화 한다. 자신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 권력을 창조사기 위해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정의와 진리의 이름으로, 심지어 신의 이름으로 자행한다. 신학자. 성직자, 전도사는 모두 자신의 권력을 위한 거짓말이고, 그들의 노예로 살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야말로 허위로 만든 괴물들이다. 죄, 회개, 용서, 비움, 따위의 관념은 사람들이 군말없이 복종 하도록 만든 기만적인 이데올로기 이다. 그로 인해 인간의 퇴행은 지금도 자행한다. "기억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는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ᆢᆢ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 (첫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 ) 가장 혐오 스러운 신체훼손 (거세 ),모든 종교의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의 형태,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 니체는 신은 죽었다 " 라는 글은 인간이 죽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종교란 진정한 신앙으로 자기 마음성찰의 도구이다.
삶이란 미지의 미래를 향해 현재를 결단하는 '순간' 의 연속이다. 삶은 불안과 방황이다. 이것은 실존의 자유이다. 불안은 안정적 도피가 아니다 자유의 결단으로 해소된다. 이것은 '불안과 자유의 역설' 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유와 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진정한 자기를 버리는 안정의 욕구야말로 작은 불안을 더 큰 불안과 교환하는 부조리라 한다.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된 운명적인 세상에는 실존적인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안도 절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진정한 자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정한 나가 누구인지 몰라서 절망하기도 하지만 알면서 절망하기도 한다. 운명앞에서 세상의 모든 고귀한 것을 계산없이 등질수 있는 자유의 용기를 가질수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한 '공포와 전율'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가장 중요한 '나' 를 버리고 살아간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환원하는 현대의 삶은 진정한 '나'에 대한 결단의 가능성을 절멸 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지를 미지로 남겨 두지 못하는 앎의 욕망이야 말로 진정한 불안과 절망의 근원이라 할수있다. 삶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신의 비밀이라 할수있다. 따라서 삶은 결단의 불안을 동반하는 모험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단의 용기야말로 불안을 이기는 역설적인 힘이다. 안정속에 진정한 불안이 있고, 불안 속에 도리어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사랑, 구체적인 자기중심의 에로스의 사랑과 대립하는 타자중심의 아가페의 사랑을 원한다. 타자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 조건없는 헌신이 필요하다.
지구에 살아가면서 지구에 사는 까닭에 문화나 문명에 붙어 사는 관게로 수시로
알게 모르게 교육 아닌 교육을 받는다.
이 교육에 어긋나면 이상한 사람이나 정신이상자나 심하면 범법지로 낙인 찍인다.
간접 교육이든지 직접 교육이든지 받아야한다. 매일타는 버스를 탈려고 하면 정류장으로 가야한다. 당연한 교육덕분이다.
버스 정류장에 가면 정류장 에 붙어 있는 광고나 버스 노선이나 안내문구나 지켜야할
것들이 수없이 붙어 있다. 어느 버스를 타야 갈곳을 가는지 교육덕분에 각인되어 있다.
낯설은 곳으로 가면 당장 지리나 교통관계의
문제를 알아야한다. 요새는 어느 길로 가야하는 네비의 지시를 받는다. 점점 기계의 교육으로 하지 않어면 힘들고 손해를 보는 것이자 한순간이라도 핸드폰이나 금액결제 수단이 없어면 움직일수도 없다. 점점 기계의 결제만을 원하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의식주는 모두 교윸으로 지배받는 것으로 받고 살고 있다. 자식이나 가족들도 기계나 사회서 시키는 것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따르지만 부모나 누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커갈수록 무시하는 것은 사회교육 덕분이다. 우리는 산을 다니는 산꾼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무어라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책임감을 기지게 한다. 사회에서 떨어지고 시간이 나면 자연으로 가는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것은 지킬줄 아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혼자 숲이나 강변의 잔디에 누워있는 이유는 존재의 이유를 아는 방법이다.
퇴페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필요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갈망하는 존재이다. 이미 가진 것은
한계효용의 법칙에 의거하여 시간이 갈수록 무가치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나가면서 항상 타인들이 자신의 배우자나 가정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본인의 못느낀다는 것이다. 결핍을 해결하려는 병약함이 필요하다 는 것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를 주는 전설이나 절벽에 피는 꽃한송이를 원하는 여인때문에 목숨을 걸고 하는 행동이나 모두는 결핍에서 오는 결과라는 것이다. 퇴페는 부루조아계급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인가? 하지만 상류층은 되기 위해 바보짓을 해서는 이룰수 없다는 것이다. 어찌 남보다 뛰어나지 못하는데 남보다 높은 위치에 살수 있는가? 남보다 높은 권력자나 지배층은 항상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늘 불안하고 온갖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저 높은 곳으로 가기위해 죽자살자 메달리는지 모른다. 삶은 본래 보수적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유지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새로움이란 항상 불안정한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끌림은 그다지 권장하지 않지만 인간은 항상 순간적으로 호기심이나 새로움에 끌리는 복잡한 면은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바라는지 모른다. 퇴페란 우리가 가끔 마시는 술이나 피로를 잊기위해 하는 목욕이나 휴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배충이나 예술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성적이 동반된 결과라는 것이다. 퇴폐는 생산과 거리가 있는 음주, 흡연, 도박, 마약등 기본적으로 생산과 담을 쌓는 지배층들의 일시적 일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층들은 사회의 모든 구조에 항상 앞서가야한다. 그러나, 지배층들은 항상 퇴페의 그늘에서 몰락한다는 것은 역사적 일이다. 권력자의 말로는 항상 정상적이 될수없고, 지배층들은 대부분 감옥이나 비참한 물갈이가 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정세에 맞추어 간다는 권력자가 있을수 없고 결국은 퇴페에 물들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삶이란 살기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한 곳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은 성공을 하는 것이 아나라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뿐이다. 퇴페도 지배층이 되면 다가오는 하나의 징검다리 인지 모른다. 인간은 항상 남이 하면 따라가는 바보들 뿐이다.
봄바다는 늘 저리 변화무상 하고 봄섬은 봄에 젖어 있는가?
작은 섬은 바다에서 저리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진리는 무엇인가?
봄오는 접도에서 봄되어 있는 빈 마음은 이리
처음 만나는 봄을 잊을수 있을까?
첫댓글 애럽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