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여리실견(如理實見)은
이치와 같이 실답게 본다는 뜻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형상만 보지말고 그 속에 숨은 뜻,
숨은 이치까지도 꿰뚫어 보는 것이 보살의 삶이고
불자의 삶이고 인생을 좀 더 의미있게 살려고 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가벼워서 어떤 말이 있다면
그 말의 사실여부를 확인도 안 해보고
일단 말꼬투리부터 잡고 그 말에 놀아납니다.
말에 있어서도 여리실견이 좋은 교훈입니다.
이치에 비추어서 확인해 보고, 그럴 만한 말인가를
숙고해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마음자세가 여리실견의 자세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何以故오 如來所說身相은 卽非身相이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도 이치에 따라 실답게 봐야겠지만
불자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부처님을 실답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믿고 따르는 부처님이란 어떤 존재인가,
부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실다운 이해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몸을 가지고 여래라 하는가?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身相으로 見如來不아
부처님이 그동안 공부가 상당히 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내 몸의 모습을 가지고서 여래라고 보는가?”
마치 오래 된 부부가 “당신 나 얼굴보고 결혼했어?”
혹은 “나 돈보고 결혼했어?”
하고 묻는 말과도 비슷하겠지요.
부처님께서 문득 수보리에게 “자네 나 얼굴모습 보고
부처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수보리가 펄쩍 뜁니다.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不可以身相으로 得見如來니
불교를 좀 어지간히 하고 법문을 어느 정도만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보리와 같이 답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됐든 누가 됐든 외형으로 나타난 형상은
이것과 저것이 연기적으로 어우러져서
지금 이렇게 있을 뿐이지 사실은 공한 것이며
허무한 것임을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몸의 모습을 가지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지요.
何以故오 如來所說身相은 卽非身相이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그 몸을 받아서
차츰차츰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이 모습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늙습니다.
결국 이 몸은 죽어서 한줌의 재,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통의 상식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그렇게 허망한 몸을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서운합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여래의 진정한 의미는 얼굴에 있지도 않고
몸에 있지도 않으며 당신의 경력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그 무엇이 여래입니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겠지요.
즉비의 철학
수보리가 여래의 신상은 곧 신상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즉비신상(卽非身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즉비라는 말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즉비라는 말은 금강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몸의 모습은 곧 몸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의 모습이라 불린다.’라는 논리가 즉비의 논리입니다.
처음의 몸의 모습과 결론에 나오는 몸의 모습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어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역시 즉비의 차원입니다.
첫 문장은 상식적인 차원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절대 부정의 차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절대긍정의 차원입니다.
첫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이 같다고 해서
그 뜻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차원이지요.
절대 부정을 거쳐서 절대 긍정의 차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서도
그러한 안목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佛告須菩提하사대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하면 卽見如來니라
금강경 제일사구게
경전의 중요한 뜻을 네 개의 구속에 함축한 말이 사구게입니다.
금강경의 첫 번째 사구게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여래를 어떻게 보는가”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수보리는 밖으로 나타난 몸의 모습으로는
여래라고 할 수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이 유명한 사구게가 나옵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부처님을 이해하는데 외모를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지요.
우리가 사람을 보는데도 그렇습니다.
외모를 보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거지요.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는데도
이러한 안목을 이용한다면 삶의 좋은 지혜가 될 것입니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80세를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형상은 허망하지요.
그렇지만 뭐라고 탁 꼬집을 수는 없어도
부처님의 크나큰 공덕과 가르침과 위세는 우리에게
대단히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바다와도 같고 하늘과도 같은 존재인 부처님의
넉넉한 지혜와 복덕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여래다’ 라고 구체적인 형상을 이야기 하기는
어렵습니다.
형상화 하자마자 여래의 모습이 국한되어 버립니다.
예전에 어떤 큰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은 불교는 물론이고 노자, 장자에 아주 해박하시고
강의도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차츰 그 스님이 ‘노장학에 밝은 분이다’라고
이야기 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
그 스님은 노장학만 아는 스님이다’ 라고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내가 불교하는 사람이지 노장학하는 사람이냐?”
하고 불만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사실에 눈이 어두워서 그것만을 가지고
‘그 사람이다’ 라고 판단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고
서로에게 손해가 많습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한 두 가지의 모습,
그 어떤 장기를 가지고서 그 사람의 모든 진실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조건과 형상을 배재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실, 그 사람의 실상이 내 눈에 다가옵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진정한 부처님을 우리가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진정한 부처님을 이해하려면 ‘이것도 아니다’ 또 ‘이것도 아니다’
‘그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한정해서
부처님을 이해해선 안된다’ 하는
부정하는 마음, 즉비(卽非) 곧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자세가
상당히 필요합니다.
뭐든지 주워담고 이것도 맞다 이것도 맞다 하는 것보다는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이 금강경의 입장에서
여래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제1사구게를 우리 일상에 이끌어서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모든 사람, 모든 현상을 일단 부정하고 봤을 때
그 대상의 실체는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