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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 믿음의 기도, 의인의 간구 (약5:13-20)
우리 몸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기관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심장일 겁니다. 물론 오장육부 모두가 쉼 없이 기능을 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각각이 한 템포씩 쉬어갈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는 부단히 일하지만, 음식물이 다 소화된 상태에서는 다소의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심장은 쉬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장이 쉰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심장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게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예배도 드릴 때가 있고 성경 읽기나 찬양도 쉬었다 할 수 있지만 기도만은 결코 쉬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일컬어 ‘영적 호흡’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은 무릇 성도라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야고보 사도는 고난 당하는 자가 있으면 기도하라 했으며 병든 자가 있으면 주의 종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기도를 한다거나 기도를 받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기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살아가는 중에 우리가 원하는 것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 하는 게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에서 중요한 건 응답받는 거 같은데, 그러나 우리 기도의 목적이 응답에만 있으면 실제로는 그런 기도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이 말인즉 기도에서는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뭘까요?
‘응답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응답 주신다는 믿음이 없이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야고보 사도가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했고 16절에서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할 때면 나의 기도가 ‘믿음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의인의 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니 믿음의 기도란 게 뭐고 의인의 간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믿음의 기도는 말 그대롭니다. 응답받기 위해 하는 기도라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는 중에 여러분도 기도 많이 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다 응답받으셨는지요?
개중에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 그 기도는 어찌 되었나요?
혹시라도 ‘기도했다. -응답 없다. -끝났다. -기도도 끝!’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게 끝나버리지는 않았는지요?
기도가 믿음의 기도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믿음의 기도를 하라고 한 것에 대한 답을 바울 사도에게서 찾아보자면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던 의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란 겁니다.
사실 기도하다 보면 기도해야 할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기도 제목도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은 만큼 바뀐 상황에서든 달라진 기도 제목일지라도 응답을 기다리며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누구든 이렇게만 기도하면 반드시 ‘주께서 일으키심’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도 한 분이 가게를 개업했다면 그때부터 기도 제목은 사업 성공일 거고 사업이 번창하는 응답을 받고자 기도할 겁니다. 그런데 사업이 실패해서 폐업하게 됐다면….
상황만 놓고 보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거지요. 그렇다면 그간 기도했던 사업 성공이라는 기도 제목은 어찌해야 할까요?
잘 새겨들으세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실패했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받는 것에서까지 실패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했다면 어떤 상황이고 형편에서든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믿음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공하기를 원해 기도했다면 실패했을 때도 우리의 기도는 계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함에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은 ‘의인의 간구’입니다. 과연 의인의 간구는 어떻게 하는 것이기에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한 걸까요?
사전에 보면 ‘간구’는 ‘간절히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간절한 바람에 큰 역사가 있으려면 우리가 의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도 의인이 될 수 있을까요?
통상 의인 그러면 정의롭거나 남을 위한 희생적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세상적인 개념이고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그렇게 해서는 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 6:9절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셨듯이 성경에서는 노아를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보니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이란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에 언제든,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는 게 있게 되면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매 순간과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무슨 거창한 걸 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는 마세요. 출퇴근길이나 등하굣길에는 물론이고 집에 있을 때나 집 밖 어디서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해 주시기를 요청만 하면 하나님과의 동행은 성립됩니다.
성도로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이 중요한 이유는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에게 어떤 고난이 있었든 하나님과 동행한 요셉을 하나님은 결국 예비하신 축복과 성공의 자리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이런 인도 하심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요청하는 인생은 찬송가 384장 1절의 가사처럼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로 인생에서 고난의 순간에 마주쳤을 때면 우린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고 우리에겐 의인의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고난이 환영할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고난의 순간이 오히려 하나님의 치유와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고난을 당했을 때 기도하는 것.’ 이게 신앙의 특권이자 우리가 행동해야 할 믿음입니다.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때에 기도합니다.
신앙 격언 중에 “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기 위해 손을 펴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내 인생의 문제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문을 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실 기회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도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나를 향해 역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분도 하나님이 나를 위한 응답의 손을 펴시도록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두 손을 꼭 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믿음의 기도가 무엇이며 왜 의인의 간구를 해야 하는지를 아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믿음의 기도와 의인의 간구는 같은 것인가 다른 건가 하는 문제입니다. 같은 말인데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려고 다른 표현을 쓴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도에게는 둘 다 있어야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15절과 16절을 비교해 보자면 15절에서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6절은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합니다.
같은 고난일지라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라면 ‘서로를 위해 기도를 받는 것’이 의인의 기도입니다. 따라서 둘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믿음의 기도는 ‘개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의인의 간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푸른 십자가선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재정 형편이 어려운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의료혜택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인데 그 단체의 신조가 ‘우리는 봉사! 하나님은 치료!’입니다.
선교회 분들이 의료 종사자들이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달란트로 봉사를 하는 것이고 그들의 믿음은 치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하는 봉사를 오늘 본문과 연결해 보면 그들은 ‘의인의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의인의 기도를 해야 할 우리의 믿음도 그들의 신조에서 빌려올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는 기도! 하나님은 응답!”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늘부터는 나와 이웃을 위해 이 신조를 붙잡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의인의 간구를 강조하면서 엘리야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의 예언, 엘리야의 고난, 엘리야의 기도 모두가 자신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의인의 노력이고 의인의 간구였기에 결국 그에게는 갈멜산 상에서 이방 선지자들을 응징하는 역사가 나타났고 가뭄을 해소하는 단비가 내리는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전에 어느 집사님 댁 심방을 했더니 자기는 기도 수첩에 기도 제목들을 적어 놓고 매일같이 기도한다고 말씀하시기에 한번 보자 하였더니 정말 기도 제목들이 쭉 나열되어 있더라고요. 게다가 응답 된 건 동그라미와 날짜 표시까지 구체적으로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수첩을 넘기다 보니 중보기도라는 페이지가 있길래 봤더니 자기 가족들 이름만 달랑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좀 했습니다.
‘친척분들은 다 예수 믿으시나요? 그분들은 다 평안하신가요? 교회 친구나 직장 동료는 있으신가요? 이웃에 친한 분은 있나요?’ 등등을 계속 묻자 이상했던지 왜 그러시는데요라고 하시기에 중보기도 칸에 가족 말고는 다른 분들의 이름이 하나도 없기에 여쭤봤다고 했더니 그제야 이해하시고는 이제부턴 중보기도 칸에도 빽빽하게 기도 제목을 채워 놓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여러분의 기도 중에는 의인의 간구 즉 남을 위한 기도 제목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습니까?
어느 나라인지는 잊었지만 어떤 분이 외국 근로자로 나가서 힘들게 돈을 벌어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생활 수준이 자기 나라에서는 준재벌급에 속할 정도였답니다.
그는 번 돈 대부분을 자기와 가족들을 위해 사용했는데 그중 하나로 전력 공급이 원활치 않던 처지라 태양열 발전설비를 설치해서 전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데 문제는 많은 전기를 축적해 놓고도 그걸 자기를 위해서만 쓰다 보니 어느 날 이를 시기하고 괘씸하게 여긴 사람들에 의해 집에 불이 나는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최근엔 ‘내돈내산’이란 신조어도 생겼다던데 그가 내 돈 들여서 내가 설치한 것이니 나를 위해서만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달랑 전기선 한 줄만 끌어다가 우리 집에만 불을 밝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시샘을 받은 거고 엉뚱한 화를 당한 겁니다.
세상에는 이런 속성도 있는지라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서의 기도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에 내 문제가 큰일이고 발등에 떨어진 불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이유는 나만 위함이 아니요 그렇게 체득한 기도 응답의 경험과 기도의 능력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항간에 ‘배달 사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배달해야 할 것을 가로챘거나 잘못 전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중보기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이 나를 통해 누군가에게 주시려는 응답을 내가 배달 사고를 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라고 내게 기도의 능력과 응답을 맛보게 하셨는데 배달 사고를 냈다면 과연 나의 기도 능력과 응답이 이후에도 계속되겠는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기도. 하나님은 응답’이 이제부터 우리 모두의 신앙의 신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속에는 나를 위한 믿음의 기도는 물론이고 이웃을 위한 그리고 서로를 위한 의인의 간구가 있어야만 합니다.
어느 선교사님에 의해 아프리카의 한 마을 전체가 하나님을 영접한 곳에서는 선교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개인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도 움막을 지어 놓고는 집에서 거기까지 가는 길을 ‘기도길’ 또는 ‘생명 길’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기도가 게을러지다 보면 기도처까지 가는 생명 길에 풀이 자라게 되는데 그쯤 되면 이웃이 찾아가 “당신의 생명 길에 풀이 많이 자랐어요.”라고 말해준답니다. 그런데도 생명 길이 여전히 풀이 자란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면 이웃들 몇 사람이 대신 그의 기도처를 찾아가서 기도해준 다음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생명 길을 닦아놓았어요. 주님이 거기서 당신을 기다리시는데 저희가 함께 가드리겠습니다.”라고.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우리 신앙의 신조가 ‘나는’ 기도, 하나님은 응답이 아니라 ‘우리는’ 기도, 하나님은 응답인지를?
기도는 ‘믿음의 열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는 고난 중일지라도 기도 열차를 타고 하나님께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힘들고 어려운 일, 잘 안 되는 일이 있거들랑 기도 열차를 타고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우린 기도 열차를 타고 어디든 누구에게든 갈 수 있습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매일 밤 10시에 기도할 테니 너도 그 시간을 지켜 우리 매일 기도 속에서 만나자꾸나.’라고.
이렇듯 우리가 기도의 열차를 타기만 하면 우린 멀리 떨어져 있는 이웃과 함께 할 수 있고 고난 중에 있는 이웃에게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출타 중일지라도 중보기도를 통해 동 시간에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너나없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기도의 열차를 타고 있기만 하면 종국엔 축복의 종착역에 도착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 믿음으로 기도의 열차를 타기만 하면 됩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탑승권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열차에 탑승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껏 기도해 오신 분들이든 아니면 이제까지 기도를 잘 못 하셨던 분들일지라도 오늘부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도 열차에 탑승하여 여러분 모두가 항상 믿음의 기도, 의인의 간구를 하심으로 결국엔 나와 너와 서로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는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