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The external results in the two cases may appear to be the same in certain areas. But the inner results are enormously different. The key is in the difference in motivation and spirit. And that is the difference, as regards the effect on the way one lives as a Christian, between being under law and being under God’s gracious kindness through Christ Jesus. 이 두가지 경우의 외형적인 결과는 어떤 면에서 동일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적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핵심은 동기와 영의 차이점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이 율법 아래 있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아래 있는 것 사이에서 나타나는 효과의 차이점이다. Surely God’s wisdom is manifest in this. Love and faith, the true “rules” of the Christian, can reach innermost thoughts and depths of the heart. They can touch and affect every facet of life in a way that law and rules can never accomplish. Because of not being under law, the Christian is put in the position of showing what he or she really is at heart. And that alone counts with God. 분명히 이점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원칙"인 사랑과 믿음이 생각과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들은 감명을 받고 삶의 모든 부면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율법과 원칙이 이룩할 수 없는 것들이다.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여줄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이것을 판단하실 것이다. The longer I was a member of the Governing Body of Jehovah’s Witnesses, the more this issue pressed on my mind. I found that an inordinate amount of the time spent in our Governing Body sessions was occupied with the making of decisions that involved the regulating of people’s personal lives. I saw that each ruling spawned questions that led to further rulings, by which the righteousness of others was judged. Only if they observed those rules were they to be viewed as having a right standing with God and Christ. Why should this be? Did we few men really have the authority from God to do this? Was it genuinely for the good of those we were supposed to be serving? 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서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쟁점들이 더욱 더 나를 압박하였다. 나는 우리의 통치체 회기에서 시간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소비하면서까지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한 규제들을 만드는데 몰두함을 깨달았다. 하나의 규정은 또 다른 의문을 낳고, 더 많은 규정들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 규정들에 의해 타인의 의로움을 판단하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원칙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합당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소수의 통치체 성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그렇게 하도록 권위를 부여 받았는가? 우리가 섬기도록 임명받을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 It was only when I came to the realization that the freedom the Scriptures taught was not simply freedom from Mosaic Law but freedom from the very concept of law-keeping—whatever the system of law involved—that I could see where the true problem lay. Instead of law-keeping, rule-keeping, as the means for attaining and maintaining righteousness within the Christian congregation, there was a superior way. It was this that made Christian freedom possible, workable and so genuinely desirable. 내가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은,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자유는 단순히 모세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법을 지켜야 한다는 바로 그 관념으로 부터의 자유였다. 어떤 형태의 율법적 요소가 관련되어 있던지 간에, 바로 그 관념이 진정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대신에, 더 우월한 방식이 있었다. 그리스도인 자유가 가능하고, 능률적이며 진정으로 바람직하게 한 것은 비로 이것이었다. It is not that law is bad (it is, after all, the only thing that keeps many people of this world in check).9 It is rather that love and faith are so superior, able to accomplish so much more than law, able to produce a righteous spirit that springs from the heart. For which person would we ourselves feel greater confidence, have greater respect and esteem: the person who says he refrains from a certain wrong act “because it is unlawful?” or the person who says he refrains “because it is unloving and shows a lack of faith in God?” The first expression reveals only the person’s attitude toward, or concern for, law, while the second gives us a view of the person’s heart and intimate feelings. 율법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디모데 전서 1:8-10] 그러나 사랑과 믿음이 더 우월한 이유는, 그것들이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온 의로운 영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더 크게 신뢰하게 되고, 더 큰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떤 나쁜 행동을 억제하는 이유가 "그것이 불법(율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나쁜 행동을 억제하는 이유를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행동이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첫번째 표현은 단순히 그 사람의 행동이 법에 대한 염려 때문임을 밝혀주지만, 반면 두번째는 우리에게 그 사람의 마음과 자발적인 감정을 볼 수 있게 해준다. When God chose the people of Israel as his covenant nation, he did not call them into that relationship individually as separate persons but took the whole mass, “lock, stock and barrel,” good, bad and indifferent. Their national level of spirituality was certainly not notable, then or later. The Law given to them fulfilled a necessary role. It served as a disciplinarian, leading them to the Messiah, just as ancient “pedagogues” led children to their teacher.10 It made obvious their sinfulness and their helplessness to free themselves from sin, their need of a redeemer.11 It provided a panorama of “shadows” symbolically outlining the realities to be fulfilled through the Messiah.12 Without it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at the close of some 1500 years of the nation’s existence there would have existed any semblance of the arrangements God instituted among them, arrangements which were to provide the background against which the Messiah could be positively identified. By contrast, Christians are called to relationship with God as his sons through Christ, not as a mass, but as individuals, not on the basis of fleshly descent, but on the basis of their heart and its motivation. Their teacher has come and they do not need a disciplinarian to lead them to him. They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the gracious kindness of God. They have given their hearts to him and his Spirit motivates them.13 That Spirit can do infinitely more to safeguard any of us from wrongdoing and move us to good deeds than any law code or set of rules ever could. To miss that is to miss the whole point of the good news. To fail to appreciate the grand freedom this brings is to show disdain for what Christ accomplished in making it possible for us to be “not under law but under undeserved kindness” of God.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과 계약한 나라로 선택하셨을 때는, 사람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기위해 개별적으로 초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이 선하든, 악하든 그리고 무관심하든 집단적으로, 즉" 무리, 덩어리 그리고 통으로" 택하셨다. 이스라엘 나라의 영적인 수준은 분명히 그때에나 후에나, 탁월한 것은 아니었다.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필요한 역할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마치 고대에 "몽학 선생"이 정식 교사에게 아이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메시야에게 이끄는 몽학 선생의 역활을 하였다. [갈라디아 3:23-26] 그것은 분명이 자신들이 죄가 많으며, 자신의 죄로 부터 자유롭게 할 힘이 없으며, 구속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였다. [갈라디아 3:19,21,22] 그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성취될 실체들의 윤곽을 상징적으로 전영하는 "그림자" 이다.[골로새 2:16,17] 율법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1500년에 걸친 역사를 종결할 무렵,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도입하신 보이는 증거물, 곧 메시아를 적극적으로 증명해주기 위한 배경이 되는 마련이 존재한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초대하신다. 자신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개인적 관계를 맺으신다. 육적인 강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동기에 근거해서 초대하신다. 정식 교사가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분께 인도할 몽학 선생이 필요치 않다. 그들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치고, 그분의 영이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 [로마서 6:14-19] 영은 어떤 형태의 율법과 원칙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힘을 가지고 우리를 범죄로 부터 보호하고 선행을 무한하게 하도록 감동시킨다. 이 점을 놓치는 것은 좋은 소식의 핵심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웅대한 자유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 아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을 경시하는 것이다. As in any other area of life, it is true in religious matters that “the price of freedom is eternal vigilance.” Christian freedom is lost not so much by violent conquest as by subtle erosion, so that little by little one relinquishes to others his God-given right to exercise his own conscience, to do his own thinking so as to arrive at conclusions and convictions that are truly his own, and so that his faith is the product of his own heart, based on a personal knowledge of God’s Word. Eventually he arrives at a secondhand faith based on the convictions and reasonings of others. To sacrifice those rights inherent to Christian freedom—to whatever degree and for whatever reason—is to limit and inhibit our expression of faith and love. For such expression of these qualities to be spontaneous, inwardly motivated, it must enjoy a climate of freedom. For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14. 삶의 다른 모든 부면,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 자유를 얻기 위해 치르는 비용은 계속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리스도인 자유는 갑작스런 침략에 의한 폭력적인 정복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양심에 대한 권리를 조금씩 차례로 포기함으로써 상실할 수 있다. 양심이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참이라고 여기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믿음은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것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 지식에 근거한 것이 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의 확신과 추리에 근거한 간접적인 믿음에 이르게 된다. 어느 정도든 어떤 이유에서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들을 자발적이고, 내적 동기로 인해 표현함으로써,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둘째 3:17] Does that climate of Christian freedom flourish within the organization of Jehovah’s Witnesses, fostering expressions of love and faith that freely result from inner motivation and not from external pressure? I believe the evidence shows that it does not. My years on the Governing Body of that organization convince me that it does not. Not that all individual Witnesses are affected to the same extent. Some are able to cope more effectively with the organizational pressure. They are able to resist encroachment on their individuality, striving to avoid the narrowness of viewpoint and lock-step mentality that come from channeled thinking. Such ones often manifest a spontaneity of motivation that is noteworthy. Yet, the evidence is that this is not a result of the organization, but something maintained in spite of the organization. Nor do I think the situation is unique among Jehovah’s Witnesses. But I believe they are all affected to some degree and that the effect is inevitably a hurtful one. The attitude inculcated is based, not on truth—the truth that makes one free—but on a distortion of truth. It distorts their understanding of what being a follower of God’s Son actually embraces. It hinders them in making the fullest expression of his qualities. It restricts them in doing many acts of love and faith which their hearts would indicate and obliges them to perform other acts for which they see no convincing Scriptural reason. In one way or another, in greater or lesser measure, freedom is sacrificed. Obscured or forgotten is the truth that, “when Christ freed us, he meant us to remain free.” 여호와의 증인 조직 안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충만한가? 외적 압력이 아니라 내적 동기의 결과로 자유롭게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도록 격려하는가? 나타난 증거들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내가 조직의 통치체 성원으로써 지내는 수년 동안 그렇지 않음을 확신하였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 개개인들이 똑같은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조직의 압력에 좀 더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개성이 침식당하는 것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편협한 견해와 일방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사상적 단절을 피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자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을 보여주며,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이것이 조직이 가르친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또한 나는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어느 정도는 모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이 영향은 필연적으로 해로운 것이다. 주입식 사고 방식은 자유케 하는 진리가 아니라 왜곡된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왜곡으로 인해 증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인 자유의 상실을]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증인들이 하나님의 특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사랑과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것을 제한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성경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들에 순종되도록 강요당한다.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으로, 크든 작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유가 희생되고 있다. 이러한 진리가 모호하게 되거나 망각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자유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The roots of the problem are not one, but several. However, I believe that what next follows points to a very fundamental cause. 문제의 뿌리는,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들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들을 지적해 주리라 믿는다. |
9 Compare 1 Timothy 1:8-10.
10 Galatians 3:23-26, NRSV
11 Galatians 3:19, 21, 22.
12 Colossians 2:16, 17.
13 Romans 6:14-19.
14 2 Cointhians 3:17, RSV
첫댓글 요점:레이가 통치체에 있으면서 실감한 것은 성원들이 성서에 의한 믿음을 요구하기 보다는 획일적인 해석과 세부적인 방침으로 율법화 시킨다는 점이다. 결국 지침이나 규정에 매여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유의 행사가 아니라 그 자유를 타인에게 넘겨주는 행위이다
모든 증인들이 동일한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모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이 영향은 필연적으로 해로운 것이다. 주입식 사고 방식은 자유케 하는 진리가 아니라 왜곡된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왜곡으로 인해 증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인 자유의 상실을]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의 확신과 추리에 근거한 간접적인 믿음에 이르게 된다. 어느 정도든 어떤 이유에서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이다.
양심이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참이라고 여기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믿음은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것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 지식에 근거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