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몸에서 일어나는 아픔을 일반적으로 통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야도께서는 괴로운 느낌이라는 뜻으로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라고 하거나 그냥 느낌이라는 뜻으로 웨다나(vedanā)라고도 합니다. 둑카(dukkha)는 괴로움이고 웨다나(vedanā)는 느낌입니다. 이때 느낌이라는 뜻의 웨다나(vedanā)는 느낌, 감각, 수(受), 감수 작용, 고통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보통 느낌을 말할 때는 크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로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할 때는 세 가지 느낌 중에서 항상 괴로운 느낌이 제일 강하므로 괴로운 느낌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은 느낌이라고 알기 어렵고, 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도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괴로운 느낌은 매우 강력하므로 그냥 느낌이라고 했을 때도 괴로운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느낌은 몸이라는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감수 작용인데 이 느낌의 특징은 매 순간 변화무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 자체가 무상해서 괴로움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느낌은 무상을 알기에 매우 적합한 대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 몸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런 느낌을 통증이라고 말하고 사야도께서는 그냥 느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몸에서 일어나는 아픔을 통증이라고 하면 아픔의 실재를 아는 것이 아니고 관념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의 아픔을 느낌이라고 했을 때는 몸에서 일어나는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통증이라고 관념으로 알 때는 즉각 통증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없애려고 저항합니다. 하지만 느낌이라고 알았을 때는 변화가 심해서 무상을 볼 수 있으므로 실재를 보는 것이라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의 아픔을 통증이라고 알면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느낌으로 알면 실재를 알게 되어 통증이라는 것이 찌르고, 당기고,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 다양한 것으로 바뀝니다. 통증은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알아차리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찌르고, 당기고, 화끈거리는 현상은 느낌이라서 알아차릴만한 대상입니다. 통증은 계속해서 아프지만, 이것을 느낌으로 보면 계속되기보다 간헐적으로 지속하는 것으로 보여 견딜만합니다.
이처럼 수행자의 질문에서 보면 아픔을 통증으로 보지 않고 느낌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에 느낌의 변화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통증을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느낌이 변화가 심해서 같은 느낌이 아니라고 알 때 비로소 무상의 지혜가 성숙하기 시작합니다. 무상은 변화를 말하며 한순간에도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경행을 할 때 발을 들 때는 가벼움이 있고 내려놓을 때는 무거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발을 들을 때도 무거움은 있고 내려놓을 때도 무거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들을 때는 내려놓을 때보다 무거움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에 들을 때의 가벼움이라고 합니다.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마음이 바닥으로 가면 차가움이 있지만, 마음을 발바닥에 두면 따뜻함이 있습니다. 사실 따뜻함이 있어서 차가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온도의 차이가 달라집니다.
경행을 할 때는 이렇게 발의 느낌을 알아차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발을 들으려는 의도와 내리려는 의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발의 움직임은 발이 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몸의 움직임에는 마음의 역할인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이때의 마음은 의도고 행위는 결과입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가 바로 업입니다. 누구나 업을 짓고 사는데 이것을 모를 때와 알 때의 차이가 큽니다. 왜냐하면, 업은 반드시 인과응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동이 업이라고 알아야 책임감을 느끼고 지혜가 날 수 있습니다.
첫댓글 통증은 관념이 아니구요.
단지 우리가 (육체적) 통증이라고 이름하는 거는 색온과 수온이 결합된 덩어리입니다.
소위 '통증'이라고 부르는 특정감각을 '통증'이라고 이름붙일 때,
일정 수준의 통증까지는
중생 : 너무 아프다(데굴데굴) / 고수: 단지 특정한 감지대상일 뿐이다. or 견딜만하다.
통증의 수위가 더 높아지면
중생 : 죽겠다~(표현한다) / 고수 : 나도 죽겠다~(표현하지는 않음)
극단적인 통증 앞아서는
중생 : 죽겠다~(표현한다) / 고수 : 나도 죽겠다~(표현한다.)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 여담
고통이 지나간 뒤 소감
중생 : 와 죽는줄 알았다. 개무섭 ㄷㄷ / 고수 : 무슨 일이 있었는가?
느낌 즉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그 자극이 사라지길 바라는 건 행온이고 '아프다.괴로운 느낌이다'라고 파악하는 건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결정하는 거니까 상온이 아닐까요?
상온으로 보니까 수온이 변하는 걸 사띠하기 어렵다는 거 같은데요..
['아프다.괴로운 느낌이다'라고 파악하는... ...]것과 같은 거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그 전기신호를 붙잡으면 됩니다.
잡생각 없이 일단 전기신호를 붙잡은 후, 그 전기신호를 자세히 들여다봐서 더 분별이 되면 분별하구요.
새들이 지저귀는 숲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영화 장면을 보면서 새소리와 대화소리를 구별하듯 말입니다.
굳이 이론 즉 이름을 붙이자면, 그 구별이 상온입니다. 그런식으로 도대체 상온이라는게 뭔지 하나 하나 알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립한 앎이 '이해'예요.
너무 그냥 개념만 가져다쓰시는데, 그래서는 정말 혼동만 발생합니다. 그럴려면 그냥 개념 안쓰는게 나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