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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좌작태(安坐作怠)
폭신하고 편안한 방석이 게으르게 만든다는 뜻으로, 사람이 편안함을 좇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는 말이다.
安 : 편안할 안(宀/3)
坐 : 자리 좌(土/4)
作 : 지을 작(亻/5)
怠 : 게으를 태(心/5)
출전 : 영조실록(英祖實錄)
조선 제21대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또 재위 52년 동안 스스로 절제와 검박한 생활에 힘썼으며,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는 등 치적이 높았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신하와 백성이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짐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자 한다.”
그래서 거처하는 대궐의 방문이 찢어지면 손수 종이로 발랐다. 용상은 비단 대신 무명천으로 만들게 했고, 버선도 신다가 헤지면 기워 신었다.
특히 영조의 방석은 검소의 상징으로 백여 년 동안이나 호조에 보존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일화가 재미있다.
호조판서는 왕이 방석도 깔지 않고 맨바닥에 앉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부인에게 방석을 만들게 하여 진상했다.
다른 왕 같으면 누에고치에서 뽑은 비단 솜을 겹겹으로 넣고, 색깔 고운 비단 천으로 만들었겠지만 검소한 영조는 그런 사치한 방석을 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무명천에 푸른 물을 들이고, 무명 솜을 넣어 만들었다.
그런데 영조는 그 방석을 며칠 동안 사용하더니 다시 호조판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방석에 앉으니 몸은 편했소. 몸이 편하니 자연 게으르게 되어(安坐作怠) 쓰지 않기로 했소.”
모든 신하들은 영조의 검소한 기풍을 따라 널리 실천했다. 영조는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고, 사회, 산업, 문화,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크게 부흥시켰다.
그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는 등 불행한 일도 저질렀지만 재위 52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기로과(耆老科)를 창설하여 60세 이상의 선비와 무인들이 시험을 보게 해 관리로 등용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고, 세제를 개편하는 등 제도 확립에도 힘썼다.
영조(英祖; 1694 ~ 1776)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간 왕위를 지켰던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그 자신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1. 개인적 콤플렉스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즉위하다
18세기 초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는 지난 세기 동안 누적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은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진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진검승부가 되었고 각 붕당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숙종년간 남인과 서인의 대결구도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한 이후, 서인 내부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들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숙종의 뒤를 이을 다음 왕과 관련하여 또다시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왕위마저도 쥐락펴락하고자 하는 신하들의 등쌀에 연잉군(훗날 영조)과 그의 배다른 형 왕세자(훗날 경종)는 서로 다른 당을 등에 업고 왕위를 둘러싼 경쟁을 하여야만 했다.
왕세자는 그의 어머니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 했던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연잉군은 남인에 대해 강경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론이 밀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지지하는 신하들의 당색에 의해 정치적 색깔을 정해야만 했던 숙종의 두 아들은 불행한 이복형제였다.
왕세자는 아버지 숙종의 변덕스런 사랑으로 궁녀에서 왕비로 다시 희빈으로, 끝내는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부담감이 있었고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왕세자의 어머니 장희빈을 제거한 노론은 보복이 두려워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왕세자가 14세 때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목도한 충격으로 심신이 허약해진 것을 노려 숙종으로부터 왕세자의 뒤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는 명을 이끌어냈다.
아무리 몸이 허약하다고 하나 아직 젊은 나이였던 경종에게 후사가 태어날 것을 바라지 않고 신하들이 선동하여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게 한 것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였고, 한편으론 목숨을 건 모험이기도 하였다.
왕세제(다음 왕 자리를 이을 왕의 동생) 자리를 확보해 준 노론과 한배를 탄 연잉군에게도 이것은 운명을 건 승부수였다. 이대로 허약한 경종이 요절하여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거나, 혹시라도 후사를 본 경종의 손에 역적으로 몰려 죽거나의 기로에 선 것이다.
비록 심신이 허약하고, 드센 노론 세력에 위축된 경종이었지만 그도 왕은 왕이었다. 경종은 왕좌에 있었던 4년 동안, 소론과 손을 잡고 왕권에 도전하는 노론과 왕세제를 견제하였다.
경종 1년, 몇 차례 잡음 끝에 마침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여 다음을 도모할 기회를 얻은 노론은 더 나아가 허약한 경종을 압박, 왕세제의 대리청정으로 정권획득에 쐐기를 박으려 하였다.
그러나 현왕을 무시하는 이러한 성급하고 무리한 시도는 결국 경종을 분노하게 하였고 경종과 소론의 반격으로 노론은 4 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이 유배를 가는 신축옥사(1721)를 겪는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는 소론 측의 공격으로 4대신과 60여 명의 노론이 처형을 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를 갔다.
이 임인옥사(1722)의 옥안에 왕세제 또한 경종시해 모의에 참가한 것으로 나와 그의 목숨도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왕세제는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세제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그의 이복 형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후사 없이 요절하고 만다. 경종의 죽음으로 오랜 세월 왕권을 향해 공을 들여온 왕세제는 마침내 1724년 조선의 2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이다.
2.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이인좌의 난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영조의 즉위로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소론 측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영조의 어머니가 엄격하게 제대로 뽑힌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 수 없는 천한 무수리 신분인데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이유익, 심유현, 박필현 등 일부 소론 세력과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이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규모가 삼남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살되었다.
이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다.
3. 탕탕평평의 탕평책을 펴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년간에 일어난 신축, 임인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 중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내몰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탕평론자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치우치거나 무리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편하다)이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자(완론자)들만 등용하였다.
관직도 노론과 소론을 섞어서 배치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무조건 소론 중에서 임명하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펴나갔다.
이는 이후 어느 정도 탕평책이 안정되자 점차로 당색을 초월해 재능이 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바뀌어 갔다.
또 영조는 일반 유생들의 당론에 대한 상소를 금지 시키고 붕당 갈등의 중심이 된이조전랑이 가진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인사권을 철폐 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노론의 치우친 영조의 절름발이 탕평책은 영조의 개인적 콤플렉스와 결합하여 결국 또 하나의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 그것이 바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사건이다.
4.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다
아무리 영조가 탕평책을 쓴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노론위주로 돌아가는 정치 상황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일부 소론 층의 불만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소론에게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은 언제나 은밀한 가십거리였고 또 이것은 언제든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었다.
영조가 즉위하고 20년도 더 지난 1755년 나라의 정치를 비난하는 글이 나주에 붙었다. 이것이 나주 벽서 사건이다.
벽서를 붙인 자는 영조 즉위 초기 소론을 축출할 때 나주로 유배 간 윤지라는 자였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왕세제 때의 일이 다시금 불거져 나왔다.
왕이 된 지 20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는 자신에 대한 괴소문에 가뜩이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는 격노했다. 그리고 영조의 이러한 격노를 이용해 노론은 눈엣가시같던 소론을 이 기회에 중앙정계에서 완전히 일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왕세자(사도세자)였다. 당시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고 있던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분노와 소론을 제거하고자 하는 노론의 의도에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세자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노론은 당황했다.
소론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적인 세자의 태도에 앞날이 불안해진 노론은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를 불이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태도 또한 문제가 있었다. 영조를 싸고도는 노론에 대항해 남인과 소론, 소북 등 중앙정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던 세력들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에게 줄을 섬으로써 아버지 영조와 아들 세자 간에는 묘한 정치적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세자의 상식을 벗어난 과격한 행동들이 노론에게 꼬투리를 제공하였다. 정성왕후가 죽은 뒤 60대의 영조가 노론 강경노선인 경주 김씨 가문에서 새로 맞아들인 왕비 정순왕후는 세자의 입지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는 세자의 실행을 영조에게 과대 포장하여 무고함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개인적 콤플렉스 탓인지 원래부터 편애가 심하였던 영조는 세자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고 세자 또한 궁내에서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미행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일들을 벌여 갈등의 골을 심화시켰다.
그 와중에 노론 측에서는 세자를 폐위하고자 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10조 목의 글을 영조에게 올렸다.
세자를 불러들인 영조는 분노 속에서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한여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붕당 간의 정쟁이 불러온 왕실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영조는 뒤늦게 이를 후회하고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노론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위를 사도세자의 장자 정조에게 물려줌으로써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상쇄시켰다.
사도세자는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헌세자로 추존되었고 1899년 (광무3)에는 장조로 추존되었다.
5. 18세기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임금
영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경연(임금이 신하들과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을 가장 부지런히 한 임금이다.
왕이 중심이 되는 탕탕평평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임금이 신하들보다 한 수 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공부와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사치를 경계하였고 민생을 위해 많은 개혁조치를 단행해 갔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에 대신해 바치던 납포의 양을 1필씩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켜주었으며, 잔인한 형벌제도를 고치고, 양반들이 사적으로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을 금하였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경국대전' 이후 변화한 세상에 발맞추어 가지 못하는 법률을 재정비 하였으며, 사치와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본정책을 펴 '농가집성' 등의 책을 널리 보급하는 등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또한 청계천 등에 준천 사업을 벌여 홍수 때 범람을 막아 주거환경을 개선했으며, 신문고를 달고 궁성 밖 출입을 통해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영조 본인이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학자들을 우대하고,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켜 이 시기 실학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학문 우대 정책에 힘입어 인쇄술이 개량되고 많은 책이 간행, 보급되어 학문과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영조는 개인사적으로는 콤플렉스와 지독한 불행에 시달린 인물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고통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현명하게 승화시켜 민생을 안정시킨 임금이었다.
영조 대에 마련된 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손자 정조는 더욱 큰 선정을 베풀 수 있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의 시대를 보통 조선후기 중흥기라고도 부른다.
▶️ 安(편안 안)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무릎꿇고 깍지끼어 신을 섬기는 모습의 女(여자)가 건물의 지붕, 신을 모시는 곳을 뜻하는 집(宀) 안에 있는 모양으로 편안함을 뜻한다. 安(안)은 사람이 사당에서 신을 섬기는 일, 나중에 女(녀)를 여자라 생각하여 安(안)은 집속에 여자가 고요히 앉아 있는 모양에서 평안함이라 설명하게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安자는 ‘편안하다’나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安자는 宀(집 면)자와 女(여자 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安자도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다. 安자는 여자가 집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편안하다’나 ‘안정적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安(안)은 성(姓)의 하나로 ①편안(便安) ②편안하다 ③편안(便安)하게 하다 ④안존(安存)하다(아무런 탈 없이 평안히 지내다) ⑤즐거움에 빠지다 ⑥즐기다, 좋아하다 ⑦어찌 ⑧이에(乃), 곧 ⑨어디에 ⑩안으로, 속으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편할 편(便), 편안할 녕(寧), 편안 강(康), 편안할 온(穩), 편안할 정(靖),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위태할 위(危)이다. 용례로는 편안히 보전함을 안보(安保), 편안하여 탈이나 위험성이 없음을 안전(安全), 일이나 마음이 평안하게 정하여 짐을 안정(安定), 근심이 없고 편안함을 안이(安易), 편안하고 한가함을 안일(安逸), 걱정이나 탈이 없음을 안녕(安寧), 걱정이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을 안심(安心), 평안함과 평안하지 아니함을 안부(安否), 정신이 편안하고 고요함을 안정(安靜),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몸이 괴롭거나 아프거나 힘들거나 하지 않고 편하여 좋음을 편안(便安),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림을 치안(治安),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함을 위안(慰安), 안전을 유지하는 일을 보안(保安), 오래도록 평안함을 구안(久安), 무사히 잘 있음을 평안(平安), 웃어른에게 안부를 여쭘을 문안(問安), 편안한 때일수록 위험이 닥칠 때를 생각하여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안거위사(安居危思),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을 일컫는 말을 안빈낙도(安貧樂道),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안분지족(安分知足), 평화롭고 한가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즐김을 일컫는 말을 안한자적(安閑自適), 편안한 가운데서도 늘 위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늘 스스로를 경계하여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처함을 이르는 말을 안불망위(安不忘危), 편안히 살면서 생업을 즐김을 일컫는 말을 안가낙업(安家樂業), 마음 놓고 있을 집과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길이라는 뜻으로 인의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안택정로(安宅正路), 어찌 그러치 않으랴 또는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란 뜻으로 하는 말을 안득불연(安得不然), 확실한 안심을 얻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안심결정(安心決定), 반석과 같이 든든하여 위태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안여태산(安如泰山), 조용하고 편안하게 아무 일 없이 지냄을 일컫는 말을 안온무사(安穩無事), 부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빈자를 구하여 물품을 베풀어 줌을 일컫는 말을 안부휼궁(安富恤窮) 등에 쓰인다.
▶️ 坐(앉을 좌)는 ❶회의문자로 머무는 곳을 뜻하는 土(토)와 마주앉은 사람을 나타내는 从(종; 두 사람)의 합자(合字)이다. 사람이 마주보고 멈춘다는 뜻이다. 전(轉)하여, 그냥 앉아 있다, 또 앉은 채로 있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坐자는 ‘앉다’나 ‘무릎을 꿇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坐자는 土(흙 토)자와 두 개의 人(사람 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소전에서는 土자를 사이에 두고 人자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도 우리와 같은 좌식(坐式)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坐자는 바닥에 앉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坐(좌)는 (1)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자리의 등진 방위(方位). 자방(子方)을 등진 방위면. 자좌(子坐), 병방(丙方)을 등진 방위면. 병좌 등(等) (2)성(姓)의 하나. 단일본(單一本)으로 본관(本貫)은 흥덕(興德) 등의 뜻으로 ①앉다 ②무릎을 꿇다 ③대질(對質)하다(관계자 양쪽을 대면시켜 심문하다) ④죄(罪)입다(죄받다), 죄받다(죄에 대하여 벌을 받다), 연좌되다 ⑤지키다 ⑥머무르다 ⑦자리, 좌석 ⑧사물(事物)을 세는 단위(單位) ⑨드디어, 마침내 ⑩잠깐, 우선 ⑪저절로,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설 립/입(立), 누울 와(臥)이다. 용례로는 함선이 암초에 얹힘을 좌초(坐礁),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음을 가부좌(跏趺坐), 팔기 위하여 물건을 늘어놓은 널조각을 좌판(坐板),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음을 좌시(坐視), 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위치의 등진 방위에서 앞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을 좌향(坐向), 조용히 앉아서 참선함을 좌선(坐禪), 책상이나 탁자 위에 앉혀 놓게 만드는 시계를 좌종(坐鐘),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으로 바둑을 달리 이르는 말을 좌은(坐隱), 두 다리를 틀어 얹고 앉는 자세를 부좌(趺坐), 거짓으로 죄를 씌운 자에게 그 씌운 죄에 해당하는 벌을 줌을 반좌(反坐), 예절을 차리지 않고 편하게 앉음을 평좌(平坐), 같은 자리에 잇대어 앉음을 연좌(連坐), 단정하게 앉음을 단좌(端坐), 서로 마주 대하여 앉음을 대좌(對坐),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을 바로 하여 조용히 앉음을 정좌(靜坐), 홀로 앉아 있음을 독좌(獨坐), 자리를 같이 하여 앉음을 동좌(同坐), 홀로 외롭게 앉아 있음을 고좌(孤坐),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는 좌정관천(坐井觀天), 자리에 편안히 앉지 못한다는 좌불안석(坐不安席), 서로 대립하여 겨루고 대항함을 각립대좌(角立對坐),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좌견천리(坐見千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좌이대사(坐而待死), 옷매무시를 바로 하고 단정하게 앉음을 정금단좌(正襟端坐), 창을 베고 갑옷을 깔고 앉는다는 침과좌갑(枕戈坐甲), 섶나무 위에 앉고 쓸개를 걸어 두고 맛본다는 좌신현담(坐薪懸膽), 사귐을 끊어서 자리를 같이하지 아니함을 할석분좌(割席分坐), 바늘 방석에 앉은 것처럼 몹시 불안함을 여좌침석(如坐針席), 혹은 앉기도 하고 혹은 서기도 함을 혹좌혹립(或坐或立), 마루 끝에는 앉지 않는다는 좌불수당(坐不垂堂), 어떤 자리에 오래 붙어 앉아서 다른 데로 옮기지 아니함을 좌지불천(坐之不遷), 가만히 앉아서 성패를 관망함을 좌관성패(坐觀成敗), 밤중부터 일어나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좌이대단(坐以待旦), 벌지 않고 먹기만 하면 산도 빈다는 좌식산공(坐食山空) 등에 쓰인다.
▶️ 作(지을 작, 저주 저, 만들 주)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㑅(작)의 본자(本字), 做(주)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乍(사, 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作자는 ‘짓다’나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作자는 人(사람 인)자와 乍(잠깐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乍자는 옷깃에 바느질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짓다’나 ‘만들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옷깃에 바느질하는 것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작업하기가 쉬웠었는지 乍자는 후에 ‘잠깐’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人자를 더한 作자가 ‘만들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作(작)은 (1)작품(作品) 제작(製作), 저작(著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작황(作況)이나 또는 농사(農事)의 뜻으로 나타내는 말 (3)작전(作戰) 등의 뜻으로 ①짓다, 만들다 ②창작(創作)하다 ③일하다, 노동(勞動)하다 ④행하다, 행동하다 ⑤부리다, ~하게 하다 ⑥일어나다 ⑦일으키다 ⑧이르다(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⑨비롯하다 ⑩삼다, 임명하다 ⑪닮다 ⑫농사(農事) ⑬일, 사업(事業), 공사(工事) ⑭저작(著作), 작품(作品) 그리고 저주 저의 경우는 ⓐ저주(詛呪)(저) ⓑ저주하다(저) 그리고 만들 주의 경우는 ㉠만들다(=做)(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을 찬(撰), 지을 조(造), 지을 제(製)이다. 용례로는 기계의 운동 부분의 움직임을 작동(作動), 사물 또는 사람의 이름을 지음을 작명(作名), 서로 헤어짐을 작별(作別), 만든 물품을 작품(作品), 문학이나 예술의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작가(作家), 일을 결정함을 작정(作定), 마음을 단단히 먹음을 작심(作心), 싸움을 진행하는 방법을 세움을 작전(作戰), 악곡을 창작함을 작곡(作曲), 글을 지음 또는 그 글을 작문(作文), 일터에서 연장이나 기계를 가지고 일을 함을 작업(作業), 농작의 잘 되고 잘못된 상황을 작황(作況), 움직이게 되는 힘을 작용(作用), 무리를 이룸을 작당(作黨),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재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듦을 제작(製作), 물건을 지어서 만듦이나 일부러 무엇과 비슷하게 만듦을 조작(造作), 기계 등을 움직이어 작업함을 조작(操作), 떨쳐서 일으킴 또는 일어남을 진작(振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 또는 그 움직임을 동작(動作), 토지를 갈아서 농작물을 심음을 경작(耕作), 썩 잘된 글이나 작품을 걸작(傑作), 처음으로 만듦을 창작(創作), 사람은 마음을 먹기에 따라 광인도 될 수 있고 성인도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작광작성(作狂作聖), 의견이 서로 달라서 일을 결정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을 작사도방(作舍道傍), 의리로써 형제 관계를 맺음 또는 그 형제를 일컫는 말을 작의형제(作義兄弟), 마음 먹은 지 삼일이 못간다는 뜻으로 결심이 얼마 되지 않아 흐지부지 된다는 말을 작심삼일(作心三日), 끊임없이 힘써 함을 이르는 말을 작지불이(作之不已),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을 마부작침(磨斧作針),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를 자기가 받음을 일컫는 말을 자작자수(自作自受), 낡은 것을 바꾸어 새 것으로 만듦을 일컫는 말을 환부작신(換腐作新),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뒤에서 일을 꾸밈을 일컫는 말을 이면공작(裏面工作),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남의 의견이나 주장을 제쳐놓고 제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방자하게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회빈작주(回賓作主) 등에 쓰인다.
▶️ 怠(게으를 태, 안락할 이)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허물어지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台(태, 이)로 이루어졌다. 마음가짐이 허물어지다의 뜻이 전(轉)하여 게으름 피우다의 뜻이 되었다. 怠자는 ‘게으르다’나 ‘거만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怠자는 台(별 태)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된 모습이다. 台자는 수저를 입에 가져다대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 역할만을 하고 있다. 怠자는 게으른 성품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로 心자가 의미요소로 쓰였다. 怠자는 게으르다는 의미에서 ‘나태하다’나 ‘게으르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의 태도는 거만함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거만하다’나 깔보다‘와 같은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怠(태, 이)는 ①게으르다, 게을리하다 ②거만(倨慢)하다 ③업신여기다, 깔보다 ④맺힌 데가 없다, 느리다 ⑤그만두다, 물러서다 ⑥위태(危殆)하다, 위험하다 ⑦피곤(疲困)하다, 지치다 ⑧게으름, 그리고 ⓐ안락(安樂)하다(이) ⓑ게을리하다(이) ⓒ기쁘다, 기뻐하다(이) ⓓ새의 이름(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게으를 권(倦), 게으를 타(惰), 게으를 해(懈), 게으를 나(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부지런할 근(勤)이다. 용례로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움을 태만(怠慢), 몹시 게으름을 태타(怠惰), 태만하여 조세를 납부하지 않음을 태납(怠納), 나태한 마음을 태심(怠心), 거드름스러워 예법이 없음을 태오(怠傲), 관무에 태만함을 태관(怠官), 게으른 종을 태노(怠奴), 해야 할 일이나 맡은 임무를 게으름을 피고 하지 않음을 태공(怠工), 게으르고 느림을 나태(懶怠), 잘못과 태만을 과태(過怠), 점점 게을러짐을 침태(浸怠), 피로하여 게으름을 피태(疲怠),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권태(倦怠), 게으르고 느림을 타태(惰怠), 어떤 법률 행위를 해야 할 기일을 이유없이 넘겨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을 해태(懈怠),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근태(勤怠), 나무람을 받을 만한 태만을 과태(科怠), 어리석고 게으름을 혼태(昏怠), 안락을 즐기며 게으름을 피우는 일을 예태(豫怠), 마음이 풀어져 게으름을 피움을 완태(緩怠), 언행이 거칠고 일을 게을리함을 황태(荒怠), 교만하고 태만함을 교태(驕怠), 성질이 완악하고 행동이 게으름을 완태(頑怠), 좋은 때를 얻으면 태만함이 없이 근면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득시무태(得時無怠),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