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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계곡
수락계곡에 대한 소개
숨겨진 아름다운 계곡, 수락계곡 대둔산 도립공원 내에 있으며 다양한 볼거리와 비경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최근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계곡이 바로 논산시 벌곡면의 수락계곡입니다.
석천암에서 군지계곡을 거쳐 흘러드는 맑은 물은 대둔산 제1의 명물로 한여름에도 차갑게 느껴질 정도이고, 수락폭포(화랑폭포)와 선녀폭포 등 곳곳에 폭포가 있습니다.
계곡에서 대둔산 정상 등반을 위해 절벽 사이에 놓아 만든 가파른 철제 계단은 계곡의 명물입니다.
주변에 관촉사·쌍계사·계백장군묘·충곡서원·개태사 등 문화유적지가 많다.
찾아가려면 논산 시내에서 수락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승용차로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서대전인터체인지로 나가 논산 방면 1번 국도를 타고 연산사거리에서 벌곡 방향으로 좌회전한 뒤 벌곡면소재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계곡 곳곳에 여러개의 폭포가 있어 가을이면 단풍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특히 가을철이면 노랗게 물든 단풍과 푸른 소나무가 기암괴석과 어울려 색조의 장관을 이룬다.
약 60도 경사의 가파른 220철제 계단인 절벽 사이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 계단은 대둔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객들을 위해 암벽 사이에다 설치해 놓은 것으로 수락계곡을 찾아 온 사람이라면 한번쯤 오르게 되는 명물로 꼽히는 다리입니다.
*수락계곡의 등산코스
수락계곡의 선녀폭포, 수락폭포, 비선폭포를 거쳐 마천대로 오르는 등산로는 충남지역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수락계곡, 군지계곡에서 정상인 마천대까지는 2시간정도 소요됩니다.
관촉사(논산)
관촉사(논산)에 대한 소개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에 자리한 관촉사는 논산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명승지다.
관촉사에는 독특한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 으뜸은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입니다.
높이 18m의 석불이 온화하고 자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 ‘백제의 미소’로 표현되곤 합니다.
은진미륵 앞에 선 석등과 오층석탑, 석문 등도 눈여겨볼 것. 불경을 넣어둔 윤장대의 축을 잡고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관촉사 앞마당에 서면 풍요로운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개태사(논산)
개태사(논산)에 대한 소개
* 고려 태조가 삼국 통일을 기려 창건한 사찰 *
충남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천호리(天護里) 천호산에 있는 사찰로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하였습니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창건된 사찰로 그 내역은《고려사》와《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약 4년간에 걸쳐 축조했습니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운은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합니다.
즉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잦은 방화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 방치되어 왔는데 1934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사찰이 재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선조시대에는 퇴락하여 폐사로 있던 것을 1930년 김광영(金光榮)이 새로 짓고 도광사(道光寺)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태광사(泰光寺)라고 하였습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인 사지석불입상(寺址石佛立像),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鐵鑊), 충남문화재 자료제247호인 5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있습니다.
예전에 이 절에서 쓰던 철확, 즉 큰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입니다.
*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입상 (보물 제219호)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경내(境內)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본존불은 높이 4.15m 크기로 복연(伏蓮:아래로 향한 연꽃) 의 방형 기단상에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부에 만들어진 방형의 불대(佛臺) 후면에 2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상의 형태는 크게 돌출된 육계에 둥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이마에 백호가 선명하고 이목구비의 형태가 뚜렷하나 얼굴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형상입니다.
불상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듯한 양손은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붙이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이로 미루어 본존은 아미타불로 추정됩니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시무외인, 여원인을 나타내고 있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다르게 있습니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보살상은 각각 지름 2m 내외의 팔각형 연꽃 대좌에 올려져 있으며, 높이는 3.12m 내외입니다.
새로이 만들어진 얼굴은 육계가 크며, 본존불보다 더욱 치졸하다.
머리띠 장식은 귀 뒤로 어깨까지 내려져 있으며, 양팔에는 팔찌를 돌리고 있습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양팔에서 좌·우로 늘어져 있고, 배에서 무릎까지 한줄의 매듭장식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문화재현황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219호)
개태사지철확(충남 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지 5층석탑(문화재자료 제274호)
연산화악리의 오골계(천연기념물 제265호)
계백장군 유적지
계백장군 유적지에 대한 소개
* 계백장군의 얼을 만난다, 계백장군 유적지 *
백제 말기 성충(成忠)·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 3충신으로 꼽히는 계백의 유허지로 최후의 결전장이던 황산벌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1966년 묘를 발견할 당시, 봉분이 반 이상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적면 사람들이 지석(支石)을 안치하고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 둘레 47.6m, 지름 15.15m, 높이 6.5m로 복묘하였습니다.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전백제계백장군지묘(傳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씌어 있습니다.
* 백제의 마지막 장수, 계백 장군 *
계백(階伯 ; ?~660)은 백제의 장군입니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습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습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습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1당 10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을 싸워 이겼으나 백제군은 결국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습니다.
이 황산벌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계백장군은 통한을 품고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계백장군 유적지 모습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소개
*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조선 인조 12년(1634)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숲말에 세워졌었습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물이 뜰까지 넘쳐들어 오므로, 고종 17년(1880) 현재의 자리인 임리 74번지(서원말)로 옮겨지었습니다.
고종 3년(1865) 서원철폐령에서도 제외된 서원이었습니다.
소슬 3문으로 꾸며진 입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양성당 좌측에 응도당 그리고 사우는 양성당 후면에 있고, 장판각, 정회당, 산앙루가 있습니다.
유림들이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에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사우의 전면은 1칸통을 개방하여 전퇴를 두었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퇴는 전돌 바닥입니다.
전면 기둥사이에는 사분합 띠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회벽입니다.
공포의 구성은 이익공외출목과 동일한 수법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내부의 양봉은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창방 위에 설치된 화반형의 초각반은 기둥 사이마다 1개씩입니다.
지붕가구는 퇴고주를 세워 퇴량과 대들보를 걸었는데 용재는 새우처럼 휘어진 것을 썼다.
대들보 위에 일종의 포대공을 얹어서 퇴고주와 함께 종량을 받쳤으며 다시 종량위에 파연대공을 두고 종도리를 받쳤다.
사우에는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여 김집 송준길 송시열선생 등 문묘에 배향된 네 분만을 모시고 있는 보기드문 선정 서원입니다.
돈암서원비문에 의하면 방, 대청, 툇마루, 행랑을 갖춘 응도당이 있었고, 응도당의 왼쪽에 거경제 오른쪽에 정의재가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그 건물이 어느 것인지를 분간하기도 어렵고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 돈암서원의 의의와 평가
광산김씨는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호서 명문 사족가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1871년 서원 훼철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책판(遯巖書院冊版)이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은 물론 기호 지역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나아가 호서 지역 사림의 동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당시 실질적인 세력권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 소유 - 광산김씨 종중
강경 옥녀봉 강경 옥녀봉에 대한 소개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하나로, 송재정(정자)과 봉수대에서 강경읍내나 금강을 조망하기에 좋다.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거칠 것이 없이 훤하고,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부여와 익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평야와 강이 조화를 이루고 저멀리 산이 배경처럼 서 있어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합니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습니다고 합니다.
때문에 옥녀봉은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습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옥녀봉 봉수대는 전북 익산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곳입니다.
송재정 바로 아래편에는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터가 자리하고 있어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하다.
죽림서원에 대한 소개
1626년(인조 4)에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세운 황산사(黃山祠)가 그 기원으로, 1665년(현종 6) ‘죽림’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이때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까지 배향하였습니다.
이어 1695년(숙종 21)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이곳은 1653년(효종4년) 송시열과 윤선거((尹宣擧)가 만나 주희(朱熹)의 사상을 비판하고 개혁적 사상을 가진 윤휴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곳입니다.
윤휴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사서의 경전을 주희와는 다르게 해석을 내렸는데 주희의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때문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지만 윤선거는 경전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은 윤휴의 학문이 높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때문에 두사람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쌍계사(논산)에 대한 소개
* 고려 초기 혜명이 창건한 사찰, 쌍계사(논산) *
쌍계사는 논산의 남방 대둔산의 북록 산곡간에 위치한 큰 사찰입니다.
고려 초기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을 건조한 혜명(慧明)이 창건하였습니다 합니다.
이 사찰은 불명산이란 산록의 동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보물 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습니다.
이 대웅전의 꽃무늬창살은 그 기교가 신비에 가깝다.
쌍계사의 중건 시기는 자세하지 않으나 현재 남아있는 중건비에 의하면 이 사찰이 고려말에 중건되고 있는 내용을 전하면서 그 이전에 백암(白庵)이란 명칭의 절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찰은 암자형의 불사로 고려시대에 존속되다가 말기에 크게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쌍계사에 가면 반드시 대웅전을 봐야 하는 이유 *
현재 사찰에는 보물 408호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의 좌측에 나한전과 칠성각이 있으며 대웅전의 전면 좌측에 명부전과 우측에 요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찰 입구에는 부도군과 중건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사찰에 유존된 유물로는 직경 1.82cm의 대형 법고와 전패 2개가 있으며, 공주의 갑사에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
[문화재 현황]대웅전(보물 408호
도정딸기마을에 대한 소개
봄에는 딸기 농사, 가을에는 곶감 만들기로 분주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느티나무 11그루가 마을을 수호하듯 늘어서 있는 마을입니다.
행정구역상으로 ‘인천4리’인 이 마을은, 진입로가 반듯하다고 해서 도정(道正) 마을로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마을 진입로 양쪽에는 딸기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빼곡이 들어서 있습니다.
일교차가 큰 도정마을에서 생산된 딸기는 달고 맛있어서 딸기따기체험을 하려는 도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또한 도정마을을 비롯한 양촌면 일대는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기로 소문난 두리감(월하감)의 산지로도 유명하며, 늦가을이면 집집마다 널어놓은 곶감더미가 장관을 이룬다.
도정딸기마을은 봄에는 딸기를 주제로 체험하고, 가을에는 곶감으로 농촌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봄과 가을에 찾으면 좋을 체험마을입니다.
딸기 체험으로는 딸기 인절미 만들기, 딸기쨈만들기, 딸기따기 체험 등으로 구성됩니다.
가을에는 밤고구마 캐기 체험과 곶감만들기 체험을 진행합니다.
논산 딸기삼촌농장에 대한 소개
딸기삼촌은 예전에 시장과 백화점, 마트에 출하를 해왔지만 중간 유통마진을 축소하고 소비자 직거래를 위한 딸기 체험농장을 운영 중입니다.
딸기삼촌농장에서 재배하는 딸기는 친환경 저농약인증을 받은 상품입니다.
다년간 자연농법과 친환경농법을 이용해 딸기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값비싼 미생물 제재를 통해 소요되는 천적 값만 해도 1년에 400여만원정도 소요되지만 정말로 안전한 상품성 높은 딸기를 소비자에게 제공합니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