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無不通) 북경(北京)의 고려영진(高麗營鎭)에 관하여(유리왕묘가 있다)
네티즌 필명 “思無不通”님이 중국 사이트에서 찾아낸 내용을 재정리하여 올려드립니다 思無不通님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思無不通) 북경(北京)의 고려영진(高麗營鎭)에 관하여
안녕하십니까?
차이나의 수도 북경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고려(고구려)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북경은 원래부터 우리의 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면 북경공항이 있는 북경시 순의구(順義區)에 바로 고려영진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나의 진(鎭)은 우리나라의 읍, 면, 동에 해당되는 행정구역으로서 자그마한 행정단위입니다.
이미 고려영진(高麗營鎭)에 관해서는 일부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북경의 순의구에 있는 고려영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gaoly.bjshy.gov.cn/
(고려영진(高麗營鎭))
(고려영진(高麗營鎭)의 위치)
고려영진정부가 만든 이 홈페이지를 열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给你一片天空, 可以自由呼吸。 给你一块土地, 可以耕耘你的追求。 당신에게 한 조각 하늘을 주면 마음대로 숨을 쉴 수가 있고, 당신에게 한 조각 땅을 주면 당신이 추구하는 바를 밭 갈을 수 있다.
고려영의 유래를 보면
据史料记载,中国唐朝年间有部分鲜族人内徙定居于此,逐步发展成集镇,是为高丽营的由来。 北京市顺义区高丽营镇历史悠久,有着丰厚的文化底蕴。 建于清朝康熙年间的七村清真寺,至今保存完好,是当地回族居民做礼拜的重要场所。 且自古商贾云集,购销两旺,成为远近闻名的"京北第一重镇"。 당나라 시기에 조선인(고구려인)들이 이 곳에 모여 살면서 발전을 한 것이 유래이며,
청나라 시기에는 강희(康熙)년간에 칠촌(七村) 청진사(淸眞寺)가 있었으며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 곳은 회족(回族)들이 예배를 보던 중요한 장소라 한다.
옛부터 장사아치들이 운집을 하여 거래가 왕성했으며, 이로서 이 곳이 "북경과 하북성의 제일중진"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 곳 고려영은 북경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며 인구가 3만명정도이며 2개의 초등학교와 2개의 중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차이나인들이 순의(順義)구를 설명하는 구절에 이 곳이 어양(漁陽)지역이였다고 설명합니다.
삼국사기에도 어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운영자 주) 기존 게시내용으로 삼국사기내용을 대신합니다
다음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49년)”의 기록입니다
(원문)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해 설)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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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이 바로 고구려의 땅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고려영이 있습니다. 차이나 북경에 가는 사람은 꼭 이 곳에 들려 봅시다.
(이상 思無不通님 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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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기존 게시글입니다
위 思無不通님이 소개해주신 글에 의한다면 역시 어양은 북경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송나라 고지도에 나오는 어양 엮시 더 서쪽으로 표시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하 참고바랍니다
(고구려 유리왕묘인가 ?)
유리묘, 유리하는 하북성 북경인근에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1) 우연의 일치일수 있습니다 (2)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구려 초기/말기의 전쟁지명이 하북성 북경유역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3) 서울을 방문한 장수왕의 후손이라는 분이 유리왕의 묘가 북경인근에 있다 주장한 바 있습니다 (4) 묘하게도 북경아래에 "유리하"가 있으며 (5) 북경북쪽에 "유리묘"가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 (6) 추적중에 있습니다 (7)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 말하겠습니다 (8) 누가 옳은지는 곧 밝혀집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왕묘"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기서 "마갑" 등 기마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합니다 발굴도록이 있다고 하니 입수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구려 모본왕 2년(49년) 평정지 어양, 상곡, 북평, 태원)
다음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49년)”의 기록입니다
(원문)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해 설)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세부 해설)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정사인 “후한서”에도 동일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후한서”에는 북평을 “우북평”이라 기재하여 후대에 “우”자를 첨가 기록하여 고구려 강역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려 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북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OOOO들은 이기록은 무시하고 “후한서”에 나오는 “우북평”이 맞다고 바락바락 우기는데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정사의 기록이니 일단 둘다 맞다고 보고 어느기록이 더 합리적인지 추적해 보면 될 것이다
역사를 너무 자국중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자제해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우리의 역사는 반도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이러한 “골빈” 생각은 빨리 버려야 한다
동이의 역사를 되도록이면 동쪽으로 밀어내려고 노력하는 중국인들의 심뽀를 모르는가 ?
중국 지형도를 놓고 보면 고구려 군사가 왜 북평, 태원까지 갔는지 알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운영자 생각이다
어찌하였건 고구려 모본왕 2년(49년) 평정지역인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다시 추적해 봅니다
(추적하는 순서는)
(1) 중국에서 제일오래된 고지도 상의 지명 확인 (2) 현재 중국군사지도상에는 어떻게 변경 내지 보존되어 있는지 확인 (3) 중국 고금지명사전 및 북경대 고금지명비교사전에 나타나 있는 지명위치 확인 (4) 정사의 원문에서 알려주는 위치 일부 확인
등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어
과연 모본왕 2년(49년) 평정지역인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이 어디였는지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번 설명을 하였지만 이외의 근거자료가 있거나 반론이 있다면 올려 주신다면 감사히 수용할 것이나
아무런 근거 없이 이기록을 무시하는 강단의 OOOO학자들의 “무지”와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O소리”에는 전혀 신경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학계에서 인정받은 바 없다”라는 상투적인 괘변은 정사의 기록된 대로 해석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뿐더러 국민의 알권리를 차단하고자 하는 나쁜 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망할놈들......(죄송)
(지명추적)
가장 좌측에 있는 지명 순서대로 알아봅니다
즉, 태원 → 북평(우북평 포함) → 상곡 → 어양
(1) 태원
(중국 북경대학교재 “고금지명비교표”상의 “태원” )
① 중국에서 가장오래된 지명확인이 가능한 송나라 “우적도”상의 태원
(송본지리지장도 상의 “태원)
② 현재 중국군사지도상의 “태원”
③ 현재 중국 산서성 지형도 상의 “태원”
("태원" 결론)
이 태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서성"에 그대로 표시되어 있으며
중국민족과 우리민족의 분쟁기점(완충지대 : 분지)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경도시로 매우 중요한, “태원분지”속에 그 “태원” 입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온달장군"이 이 "태원"을 지나 산서성 서쪽 끝 황하가 맞닿는 지점인 "유림관"까지 쳐들어 갔었지요
그 "태원"입니다
(2) 북평
(중국 북경대학교재 “고금지명비교표”상의 “북평” )
북경대 교재에 의하면 현재의 “부평”(유사형태화 지명변경)이 “북평”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정사인 후한서에는 이를 “우북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북평”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중국 25사는 청나라 건륭제때 교간한 것만을 볼수 있어 “우”자의 가필여부는 확인 할수 없으나 교간되기 전의 25사 원본을 볼수 있다면 반드시 밝혀질 사실이다
지금의 “북경 = 북평”은 명나라때 표시된 것이다
① 중국에서 가장오래된 지명확인이 가능한 송나라 “우적도”상의 “북평”
북경이 아니다 태행산맥에 붙어있는 산맥을 연하여 있는 도시이다
(송본지리지장도 상의 “북평")
② 현재 중국군사지도상의 “북평”
부평 = 북평
③ 현재 중국 산서성 지형도 상의 “북평”
지형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북평”은 절대 “북경”이 아니다 태행산맥에 붙어있는 산맥을 연하여 있는 도시이다
태행산맥을 가로질러 “태원”으로 갈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만큼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 였다는 것이다
여기를 방어하지 못하면 바로 “태원분지”가 공격을 당한다
어양에서 전투를 하고 방어할 중요지형도 없는 평지인 우북평(천진)으로 갔다가 태원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면 군사전략상 말이 되는가 ?
북경유역을 태행산맥 서쪽에서 칠수 있는 방법은
(1) 태원에서 상건하(습수)를 따라 상곡(탁록)으로 우회하여 북쪽으로 침투하는 방법과 (2) 태원에서 태행산맥을 종단하여 "북평(부평)"으로 넘어와 산맥을 따라 북경으로 공격하는
이 두가지 방법밖에 없다
④ 북평의 이동 : 명나라때 현재 “북경”으로 이동한다
이 “북평”은 후대(명나라)에 지금의 “북경”을 “북평”으로 표시를하고 있으며
후한서에는 후대에 “우북평”이라 “우”자를 삽입하여 모본왕 평정지를 동쪽으로 밀어내려 한 것 아닌가 의심이 가며
삼국사기에는 정확히 “북평”이라 표기하고 있어 이 북평이 태행산맥에 인접한 지금의 “부평=북평”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형도를 보아도 태행산맥에 인접한 “전투접경 지역”임을 알수 있다
⑤ “우북평”의 위치 지금의 “천진”지역을 “우북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북평”과 “우북평”을 절대 혼동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북평" 결론)
이 “북평”은 유일하게 태행산맥을 종단하여 “태원‘으로 넘어갈수 있는 교통 요충지로 명나라 이전까지 “북평”으로 불리었어나
(이하 운영자 생각)
후대에 유사형태화 지명변경을 통하여 “부평”으로 변경시켰으며 현재의 북경을 “북평”으로 명나라때 표기하고 “우북평”을 “천진”지역에 표시함으로써 동이의 주강역이었던 화북평원 전역을 동쪽으로 밀어내려 시도하였다
(3) 어양
(중국 북경대학교재 “고금지명비교표”상의 “어양” )
북경대 교재에 의하면 “어양”은 지금의 “북경 북쪽” 유역에서 “계(구)”지역까지가 고대 “어양”의 영역으로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① 중국에서 가장오래된 지명확인이 가능한 송나라 고지도상의 “어양”
② 현재 중국군사지도상의 “어양”위치
(계 = 어양)
③ 현재 중국 산서성 지형도 상의 “어양”
지형도를 보면 알겠지만 만일 중국민족이 상곡(탁록)유역으로 우회하여 침범하였을 경우에는 일차로 방어할 수 있는 돌출된 지형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보인다
(4) 상곡
(중국 정사 사마천의 사기본기 원문상 탁록在 상곡)
탁록에 상곡이 있었다 그 유명한 치우천자와 제후 소전의 아들 헌원과의 “탁록전투”로 유명한 그 탁록에 상곡이 속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북경대 교재상 지도)
북경대학교 교재상에도 상곡이 탁록지역에 표기되고 있어 윗 사실을 재삼 확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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