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28일
군청 앞 버스 정류장
그렇게 해 어제 저녁 울진에 닿자마자 이곳 분들하고 같이 촛불 시위를 했다. 아니,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아직 날이 어둡지 않을 때였으니 촛불 시위는 아니고 그저 작은 일인 시위였다. 나는 그저 무얼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나마 낯이 익은 선생님 뒤를 따라 군청 앞 버스 정류장으로 나섰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한 번 뵈었고, 읍내 목욕탕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난 죽변 중학교 선생님이 피켓을 목에 걸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걸 이래 만들면 어떻게 하나? / 아이다, 됐다. 잘 보이기만 하면 됐지, 그냥 해라. / 아이, 그래도 이기 이렇게 늘어지모 잘 보이지도 않지 않나? …’ 투박하게 만든 피켓, 그리고 피켓 두 장을 등과 배에 조끼처럼 서툴게 두르는 모습. 그냥 다 좋았다. 아니, 나는 그저 이 작은 읍내에서 선생님들하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다 좋았다. 뭔가 서툰 것도 좋았고, 다른 건 다 서툴면서 피켓만큼은 날이 선 구호들을 넣어 ‘운동권스럽게’ 만든 것도 그것대로 오히려 귀여웠다.
놀라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길 건너편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이 샘요, 모하시는데요? 하고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그러더니 기웃기웃, 눈을 가늘게 뜨면서 피켓에 적은 글귀를 읽느라 애를 썼다. 아아, 그거요? 울진서도 그런 거 하네요. 녀석들은 선생님에게 수고하시라고 커다랗게 외치더니 가던 길을 뛰어갔다. 그 모습이 꼭 머뭇거리다간 자기네한테도 저거 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고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이쪽저쪽에서 선생님을 알아보는 학생들이 불러대기 시작했다. 선생님, 모하시는데예? 하고 말하면서 다가와서는 피켓에 적은 내용을 읽거나 그거 우리도 하게 해주믄 안 돼예? 하면서 아주 재미있어하는 얼굴로 같이 끼어 하고 싶어 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엄지손가락을 추키면서 선생님 아주 멋지네예 하고 놀림에 장난을 섞어 감탄을 하며 지나갔다. 아이들뿐이 아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 어른들도 둘 가운데 하나는 그 자리에 있던 선생님을 알아보곤 했다. 그 어른들도 학생들처럼 선생님, 모하시는데얘? 하고 묻다가는 그란데 요새 우리 아는 개안아요? 하고 아이 얘기며 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손바닥만한 읍내 복판, 버스 정류장을 지키고 서 있는 동안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같이 나간 선생님들하고 아는 분들이었던 거다. 언젯적 학부모였거나 아니면 이웃 분, 그도 아니면 자주 다니는 가게에 장사를 하는 사람.
정말 달랐다. 혼자 속으로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모른다.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이게 시골인가 봐, 이래서 시골인가 봐, 이래서 지역인가 봐 하면서 말이다. 울진에서도 조그맣게 시위를 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당연히 나는 서울에서 하던 집회나 시위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겪고 본 것이 그 뿐이었으니 말이다. 무관심으로 그 앞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아니 관심을 가져주더라도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나누게 되는 친절함 정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건네려고 목청을 돋우거나 한 걸음 더 다가서던 기억, 그래도 외면하는 사람들, 그래도 쉬지 않고 말을 건네고 외치고 읽을거리를 손에 쥐어주려 애쓰는 모습. 그런데 어제부터 함께 하기 시작한 이곳 군청 앞 버스 정류장 시위는 아주 달랐다.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었고, 그 대부분은 정다운 얼굴이었다. 바쁜 걸음으로 외면할 일도 없었고, 그랬으니 억지로 우리가 하는 말에 귀 좀 기울여달라고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속에서 양념처럼 전쟁 이야기를 섞거나 우리나라 군대를 보내는 일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 가운데에는 아주 반색, 정색을 하면서 안 된다고, 모한다꼬 불쌍한 우리 아덜얼 싸움터로 보내냐면서 벌컥 썽을 내기도 했다. 서로 웃고 떠들고, 반가워하고 또 어색해하면서.
저녁, 술
군청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한 작은 집회는 저녁 일곱 시쯤 해서 일찍 마쳤다. 워낙 계획하고 있던 것이 저녁 여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 한 시간씩 둘이 나와서 한 사람은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 또 한 사람은 전단지를 돌리는 것이었다. 이 일을 나서서 준비한 선생님 말씀으로는 늘상 지역에 일이 있으면 뻔한 전교조 교사 몇이 모여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마음은 있어도 그런 식의 참여에는 어려워하던 사람들이 많이 하게끔 마음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워낙에는 일인시위를 하려 했는데 혼자서는 영 쑥스러워하거나 어려워하니까 두 사람씩 짝을 짓기로 한 거고, 실제로는 그 두 사람 뿐 아니라 준비하는 선생님 두서너 분이 함께 나와 일을 거들었다.
선생님 몇 분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니, 그게 길어져서 늦게까지 술도 마셨다. 그러면서 이 일을 해 나가는 일에 대해 더 여쭈어 물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 날로 시작한지 나흘째이니 아직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일의 많은 몫을 하고 있는 오은경 선생님은 앞으로 이 일을 파병이 철회될 때까지 계속 이어가게 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울진에서는 사람들이 없어서 무얼 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 군청 앞에 나가 있어도 지나는 사람들이 없어 한산하다는 얘기, 그래서 바로 전 날인 일요일에는 사람이 하도 없어서 전단지를 들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는 얘기, 여기에서도 해가 저문 뒤에 촛불 시위도 했으면 하지만 일몰 뒤 집회 허가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얘기, 앞으로는 오늘 같은 일인 시위를 한 시간 정도 하고 그 자리에서 촛불이라도 들면 어떨까 하는 얘기, 30일 이라크 주권 이양 일이나 돌아오는 토요일 같은 날 촛불 집회를 하면 어떨까 하는 얘기, 울진에서는 꼭 한 번 미선이 효순이 때 촛불 집회를 했다는 얘기…….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망나무 농성을 할 때 이야기를 잠깐 해 보았다. 그 때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평화의 꽃이라며 꽃을 한 송이씩 나누어주던 이야기, 그러면서 편안하게 그 둘레로 사람들이 함께 하던 기억. 아, 그리고 오늘 보니 시위에 나선 분들이 주로 선생님들이어서 그런지 참 많은 아이들,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던 게 생각났다. 학생들 뿐 아니라 지나가며 아는 척을 하고 인사를 나누며 지나가던 많은 아주머니들. 그런 분들에게도 무언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들.
오은경 선생님이 그러면 우리는 내일부터 종이학을 접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아이들에게 서명도 받고, 종이학도 함께 접고. 또 지금은 일인 시위를 신청한 분들이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이니까 교실에서 아이들과 학 접기를 해도 좋겠다면서 말이다. 와아, 좋아라. 그러면 내일부터는 책상도 좀 내야겠다, 학 접는 종이도 거기에 두고 그렇게 해야겠다, 떠오르는 구상을 하나하나 펼치는데 말만 들어도 기운이 나고 들뜨게 되었다. 이제 시작이지만, 이제 겨우 어린 싹을 틔우는 거지만 무언가 이 분들과 함께 하는 이 일에 푸릇푸릇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늦게까지 술을 먹었다, 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