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25.03.25 21:30 새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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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문한 것에 대한 일차적 답은 아주 쉬워. 그런데 그거를 답을 못하거든.
기초로 돌아가서... 다른 분들도 위에 적은 내용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지만...
그냥 (일차적) 답을 적습니다.
여러 차례 말했지만, 중론은 기본적으로 연기의 의미를 밝히는 겁니다.
불교의 인과법 즉 연기법...인(연)과, 연기...
말이 나왔으니 적는데, 빠라마타라는 거는 기본적으로 알아차림의 대상을 칭하는 거... 경험하는 것...
원인이나 결과는 판단작용... 여기서 원인이나 결과라는 판단을 경험한다고 하면 안되요.
어째서 그런가?
원인이나 결과라는 판단은, 원인 그 자체의 경험과 결과 그 자체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로, 시계 소리를 들었을 때, 경험한 거는 시계소리지... 시계 소리가 원인등이라는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시계소리가 원인등이라는 판단을 한 것, 나는 관대하니까 굳이 그런 거에도 경험이라는 포장을 해주자면, 그거는 판단의 경험...
너무나 당연히 '시계 소리'의 경험과 '그 시계 소리가 원인이라는 판단'의 경험은 다른 거라고... 참... 말쟁이들 때문에 적는 것만 쓸데 없이 어려워져요.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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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 편의상, 그냥 존칭 생략합시다.
논지로 돌아가서, 불교의 인과라는 말도 원인과 결과를 말하는 거라. 원인과 결과를 합쳐 인과...
원인과 결과? 고대 인도에서는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어야 가능한 표현이야. 불교라도 마찬가지...
원인을 조건으로 결과가 있다...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다. 이거 연기법이잖아.
중론은 그 언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는 거야. 원인과 결과라는 말을 쓰지만,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고... 동일성을 상정할 수 없다고... 연기법에서 그렇다고...
그렇다면 원인이라 이름하는 것 없이 결과라는 것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야. 연기법에서 그렇다고... 그래서 중론은 관십이인연품도 시설하고 있어.
연기가 인중유과나 인중무과를 타파하므로, 기본적으로 연기의 의미를 밝히는 중론은 중론 그 자체의 논리에 앞서, 연기에 의해서 인중유과나 인중무과가 타파되는 거라.
인중유과나 인중무과가 진리라면, 연기는 틀린 거야. 그런즉 연기에 터잡은 중론도 모두 개소리가 돼.
다만 우리네 불자는 연기가 옳다고 믿고, 그것을 나름 검증해서 확신을 가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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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확신을 가지는가?
시계 소리 등에서...
시계 소리를 들으려는 의도 즉 행온 곧 원인과 시계소리라는 색온 즉 결과 사이에 동일성을 긍정할 수 없다고.
무엇의 관점에서?
'법' 즉 '구체적 사실' 곧 '경험' 이른바 '빠라마타'의 관점에서...
하지만 들으려는 의도 즉 원인을 떠나 지금 듣는 바로 이 시계 소리라는 결과도 없어.
연기법이 옳다고...
말쟁이들 때문에 의도와 시계소리... 행온과 색온을 대비시켰어.
강학상, '시계 소리를 들으려는 의도의 마음'을 원인으로 '시계 소리를 듣는 마음'이라는 결과가 발생한다고 해.
원인도 마음이고... 결과도 마음이라고...
다만 '시계 소리를 들으려고 의도'와 분리해 '그 의도의 마음'을 따로 알려고 한다거나, '시계 소리'와 분리해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따로 알려고 하면 안돼. 그거는 이미 딴 사실들이라고... 그거는 분리 몬해.
분리몬하기에 혼동일으키지 말라고 의도와 시계소리만 말하는 거고, 그게 경험에 합치해.
어쨌든 원인도 마음, 결과도 마음이기에... 인습적 관점, 세속적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마음이라는) 동일성을 상정해 줄 수 있고 그런즉 인과라고 칭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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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 따라 성립한 것... 그것을 우리는 공이라고 그래.
의도와 소리... 의도에는 소리가 없고 소리에는 의도가 없지만... 의도가 있어 소리가 있어.
소리가 그 고유의 성품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의도가 그 고유의 성품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고유의 성품이 없고 그것이 없으면 없는 이것을 어떻게 있는 거라고 하겠어?
공이라는 것은 연기의 두 변의 성품이고, 즉 연기의 성품이야.
연기의 성품이기에 연기를 부정하면 안돼. 그래서 중론에 관십이인연품이 있다고... 관십이인연품이 왜 있는지 생각하라고 누차 강조한 바 있다고...
공공은 뭐냐?
여기서는 말이 많이 나올 수 있어.
쉽게 이해하는 방식은, 참으로 공하다면 공하다는 것도 없어야 한다... 이 정도야.
더 쉽게 말해, 연기는 방편이라는 것이고...
좀 어렵게 이해하자면, 우리의 조건에서(우리 인간의 조건에 맞춰) 연기의 모습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는 형식 즉 모습으로 시설되었다고 말해.
그리고 화엄종에서는 공공을 화엄이라고 그래.
반야부의 논리는 말이야... 하하... 이게 말이야... 중론 일부 떼어와서 마구 적용시켜서 되는게 아니야.
말에 먹힌다고...
지 딴에는 뭐나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말장난으로 반박하는 거 같지만... 그거는 그냥 내로남불할 뿐이여.
한번도 법 즉 구체적 사실 곧 빠라마타를 제대로 살펴 본 적도 없는 놈이 반야부로 논쟁한다?
그게 허공의 탭댄스 전문가여.
부처님이 인정한 사리푸타도 목갈라나도 모두 빠라마타를 살폈어.
빠라마타를 살피고 나서야 니가 살핀 빠라마타가 뭔지 논할 수 있는 거지...
관념만 가지고 말장난만 치는 애들이 무슨 반야부를 논한다는거야?
그러니까 빠라마타가 실재하지 않는다면서 허공의 탭댄스나 추지 말고, 빠라마타를 살피고 빠라마타의 공을 논하라고. 오케이?
빠라마타 말하는 이에게 빠라마타는 실재하지 않는다면서, 스스로 빠라마타를 살피려는 노력조차 안하지 말고 말이야.
공이 게으름 피우는 거 자랑하라고 시설된 말이 아니라고.
빠라마타가 뭔지, 원인과 결과의 의미가 뭔지, 하나도 모르면서 닥치는 대로 업어만 와가지고는 대나깨나 우이구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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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의도와 소리... 의도에 소리가 없고 소리에 의도가 없고... 얼마나 간명해?
뭔 말이 그리 많아.
심오하게 하라는 것도 아니야.
자기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 그거라도 해서 빠라마타를 가지고 이해해 보라고, 어려울게 엄어.
당연한 말이라고.
물론 그런 발상, 즉 그러한 방향의 지혜를 중론등의 도움 없이 형성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말이야.
단지 그럴 뿐이라고...
빠라마타를 살피면 중론을 이해하기 쉬워, 뜬구름 소리도 아니고...
빠라마타 즉 사실을 가지고 말하는 이에게 뜬금포, 딴지, 내로남불, 허공의 탭댑스 안한다고.
넷 초창기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사실을 보고 생각하라고... 그래야 이해를 한다...
첫댓글 연기는 '인중무과와 인중유과를 타파'하는 것이라는 중론의 논리와 빠라마타.. 이리로 옮겨왔습니다.
티벳에 딱셀이라고 토론 수행법이 있는데 법담할때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법담은 권장되는 겁니다. 토론이라 이름하든 논쟁이라 이름하든...
하지만, 얼마전 적었듯, 법담은 법 즉 빠라마타를 가지고 하는 거라구요.
위의 본글에도 적었듯, 빠라마타를 살피고 나서야 빠라마타와 관련한 논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중론에서 법의 발생과 소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들으려는 의도와 시계소리는 연기하지만 소리가 의도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시계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인연화합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원인없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발생하는 모습이 없어서 꿈에서 환인이 마술을 만드는 것과 같다.
발생한다는 것은 무엇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진제는 유를 부정하기에 발생한다는 표현을 할 수 없다.
시계소리라는 분별과 차별상이 있을때 시계와 의도가 화합해서 시계소리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시계소리라는 차별상은 분별적 인식을 조건으로 있는것이지 시계소리라는 실체적 법은 존재하지 않기에 발생한다고 할 수 없다.
[ 중론에서 법의 발생과 소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그래요?
관십이인연품은 중론이 아니예요?
@방문객 십이연기도 연기한 법은 있는 것.독립적 고정적 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유에서 유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무에서 유가 발생한다고 볼 수도 없다. 있다고 할 무엇이 없으니 발생한다고도 소멸한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의미 같습니다. 연기한 것은 자성이 없어서 독립적 고정적인 모습으로 표현할 수 없는데 인식함에 있어서 가명으로 법으로 있는 무엇으로 다른 것과 차별된 모습으로 독립적으로 고정적으로 표현할 뿐이라는 뜻이죠.
원인과 결과의 동일성을 긍정하면, 무아의 교의에 반합니다.
의도의 마음과 소리의 마음의 동일성이 긍정되면 무아의 교의에 반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에게 의도의 마음과 소리의 마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일성이 긍정되는 겁니다.
소리를 들으려는 나와 소리를 듣는 나...들으려는 것도 나, 듣는 것도 나라구요.
그런데 위와 같은 동일성을 부정하기만 한다면, 초단기 기억상실증 즉 찰나 기억상실증 환자는 이미 깨달은 걸까요?
또한 위와 같은 동일성이 상정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은 어떻게 있는 걸까요?
과연 동일하지 않은 것일까요?
위와 같은 식으로 고찰해 나가면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그거는 법담이예요.
딴지걸기와 말장난 그리고 허공의 탭댄스와 같은 거는 법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법담이라는 거에는 반드시 어려운 말이나 용어등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법을 가지고 그 법을 탐구하는 것...그게 법담이예요.
어설프게 용어를 남발하거나 뜻도 모르는 말을 닥치는 대로 사용하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실제로는?
용어 남발자들은 지금 이 꼬리말에 적은 정도의 생각조차 하지 않는게 태반입니다.
궁구하지를 않는데 무슨 법담이 가능해?
자신의 주장이 반박당할때 납득이 간다면 주장을 접지만 완전히 납득되지 않기 때문에 그 주장을 반복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주장에 일부는 긍정하지만 일부는 부정하는거죠. 글로 모든 걸 표현하진 못하니 부정하는 부분만 두드러져 보일 수 있죠.
현량에서는 시계소리는 들리고 비량으로 시계와 의도를 인연으로 시계소리가 발생한다고 추론한다.
하지만 시계소리라는 표상은 인식된 모습에 한에서는 있는것이고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지만 실재로는 그 표상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표상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 무슨 의미입니까?
학창시절 중론 강의도 듣고 그랬지만요.
저도 어쩔 수 없이 강학상, 그리고 관행상 쓰이는 용어들을 쓰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중론을 접하는 이들은 경계를 해야 합니다.
뭐를 경계해야 하나?
주식등에서 '꼬리가 머리를 흔든다'는 말이 있어요.
중론을 다루는 이들도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사태를 일으키는게 아닌가 점검하면서 해야 됩니다.
금융시장에서야 꼬리가 머리를 흔들어도 이해가 되지만, '와서 보라'는 가르침에서는 그래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공이라는 것은... 경험의 영역이 아니예요. 소위 '지혜'죠.
그런데 지혜라는 것은 경험에 터잡아야 해요.
불교를 소위 있는 그대로 아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와서 보라'고 하는 겁니다.
지혜로 경험을 유린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지혜가 아닙니다.
불교와 금융파생상품시장은 틀리단 말입니다.
무엇에 터잡는가를 놓친다면, 무엇에 토대가 있는가를 놓친다면, 그거를 두고 공병이라고 합니다.
공병 걸리지 말라고 공공이라는 말도 있는 거구요.
이게 참...
공이란, 연기의 이해인데... 연기의 모습 중 하나를 제시한 것일 뿐인데...
절대시해서 이현령 비현령하는 착각도인을 만들지...
표상은 변하지 않는 모습이고 자성을 의미합니다.
소리를 시계소리로 인식하는 것이 표상으로 인식하는 거죠. 시계소리라는 표상으로 기억하고 기억된 표상으로 재인식하는거죠. 실재하는 현상과 불일치하니 있는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주식을 합니다만..주식에서 현재가로 사고 팔지만 주식의 실제가치는 아니죠. 가치가 머리고 가격을 꼬리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가격을 보고 거래하면 도박. 가치를 보고 하먼 투자한다고 할 수 있죠.
시계소리가 실재하는 현상과 불일치합니까? 어떻게 불일치합니까?
인식된 모습과 동일성을 가진 모습으로 다시 인식되는 것은 현량에는 없죠. 아닌가요?
공격적 투자성향이면 국민연금 운용하듯이 투자자산의 일부를 도박식으로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느다고 생각하는데 몰빵이나 계속된 물타기는 문제가 되죠.
주식의 내재 가치는 보이는게 아닙니다. 그거는 머리속에 있는 거 뿐입니다.
자기 머리속 내재 가치가 현재가와 일치되는게 정의구현 따위인 것은 아니라구요.
대주주가 바라보는 내재가치와 개미가 바라보는 내재가지가 있을때 거래가는 대주주가 생각하는 쪽으로 움직일 확율이 높죠. 정보력의 차이 ㅜ ㅜ
주식 현재가 이야기한 이유가요. 그것은 머리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식된 모습과 동일성을 가진 모습으로 다시 인식...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구체적으로 적지 않으면 잘 몰라요.
최근 적었던 표현으로, 시계소리를 들으려는 의도를 일으키니 탁 탁 탁 시계소리가 들렸다.
위의 경험에서요. 구체적으로 적어줬으면 합니다.
머리속에서 용어가 나열되는 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위에 적었잖아요. 생각이 아니예요. 추론도 아니구요. 스스로 뜻을 알든 모르든, 그거는 그냥 글자를 읽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거는 생각이 아니라 글자 나열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읽기라구요. 초딩도 우리말로 된 헤겔미학책을 읽을 수는 있어요,
탁 하는 소리는 인식된 순간 그 소리를 일으킨 인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죠. 지각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그 대상은 이미 없는데 인식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냐는 겁니다.
탁 탁 탁 소리를 계속 인식할 때, 누구나 지나간 탁 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누가 그럽니까? 누가 앞에 지나가버린 시계소리가 있다거나 그거를 인식한다고 그래요?
무언가를 지각하는 순간 지각하는 그대로의 대상은 없다고 한다면 즉 촉은 한 찰나인데 다음 찰나에도 지각된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거죠.
지속되지 않는 것 무상한 것을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거죠.
찰나 인연 등등 그런 말들을 하기에 앞서서요.
경험상 누구나 과거의 시계 소리는 이미 없어진거죠.
아... 혹시 인식에 다른 찰나가 필요하다?
그러면 부처님은 그런 찰나가 필요 없어요?
그런 말이 의미가 있어요?
더군다나 그런 주장은 인식을 떠난 외부의 시계소리가 있었다는 사고와 연결될 거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사고는 공과 너무 멀어지는데?
그래요. 상좌부는 기본적으로 찰나생멸하기에 동일성이 상정되지만 무아라고 그래요. 인과를 끊는 것이 찰나생멸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답변 잘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아래에 적죠. 대댓글이 저는 더 혼란스러워서요. 가급적 사용하지 않습니다.
중론의 관십이인연품과 관련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정말 성의가 없는 견해? 견해라 처줄 수 없는 수준인데, 여하간 진속이제를 운운하면서, 관십이인연품은 속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은 실질적 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과거 적은 바 있는데, 자성이 없기에 생멸로 알려진다는 뜻으로 봅니다. 그래서 관십인연품이 거의 끝자락에 있죠.
즉 앞의 논의와 같이 연기의 이치(모습)를 살펴 본 즉, 생멸하기에 생멸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것이죠.
중론등 반야부의 진제와 속제의 관계는요
생멸의 부정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구요... "생멸하기에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안다"입니다.
위와 같은 시각은 화엄과도 무난하게 연결됩니다.
중론은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논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중론을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진제라는 이름때문에 더 있어보이고 끌려서든 뭐든 말이죠...
어쨌든 꼬리가 머리를 흔들면, 공병일 확율이 99% 이상일 겁니다. 절름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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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실참 내지 경험에서 생멸을 본 즉, 생멸하지 않는 것임을 안다...
생멸을 경험함은 불생불멸을 아는 것이다...
경험 내지 실참 곧 사실에서 발생하는 지혜... 그게 반야예요.
경험 내지 실참 곧 사실을 부정하는 거는 지혜가 아니라 그냥 망상이구요.
지혜는 결론이 아닙니다. 과보지... 발생한 거... 발생한 판단...
저는 일차적으로 위와 같이 이해합니다.
예전에는.. 상좌, 반야, 유식 등의 경론이 '진리의 총체적 조망'에 대한 개별적ㅡ독립적 입장인 줄 알았는데요,
알고보니, 그게 '저술된 시점에서의', 사상의 연대기적 흐름에 대응한..일종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더라구요.
즉, 중론이 '이것이 진리다'고 고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니라, 이전의 맥락 혹은 배경 위에 올려진거란 말이죠..
중론을 독립적으로 읽으면, 99%확률로 공병으로 가는듯.. 제 생각엔 초심자 접근불가 해야 됨..
드러나면, 감지되면 '있다'
그 반대면 '없다'
이 둘은 독자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연기한다.
빡대가리라서.. 이 이상은 머리 굴리기 싫음..
제가.. 가장 말단의.. '있다'라는 산냐에 속박된 중생은 아닌것 같은데(오히려 정반대..)
<감지됨으로ㅡ '있다'>고 간주?관념화?하는 것이
리얼 현실과 일치하는 듯..
차가 돌진하면,
그러한 사실이 ㅡ있으니깐ㅡ
피한다는..
진제로서는 있는것도 없는것도 어쩌고..
속제로서만 있다..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사고해야 되나..ㅡ..ㅡ;
습관상, 제 딴에는 조금 미로를 만들어서 생각을 하게끔 유도하는데요.
그냥 요 며칠 나온 내용을, 인과와 관련해 시간순으로 상정해 좀 쉽게 요약해 적자면요.
과거의 A와 현재의 B의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을 때, A를 원인이라 칭하고 B를 결과라고 칭합니다.
인중무과 내지 단견에서는요. 원인과 결과라는 단어는 뇌내 망상에서 나온 허구라는 주장입니다.
인중유과 내지 상견에서는요. 원인이 전변 즉 변화하여 결과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연기는, 일차적 모습에서는 단견을 가져오고 법칙성에서는 상견을 가져온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종합이죠? 그런데 양자를 배척한게 아니라 모두 끌어안은 거예요.
불교는 중생을 배척하지 않고 끌어안는 특성을 가집니다. 이거를 자비(의 모습 중 하나)라고 합니다.
논지로 돌아가... 연기... 이른바, 원인이 있을 때 결과가 있다.
그런데 지금 논의의 전제가, 과거의 A이고 현재의 B니까요.
결국 원인이 멸하고 결과가 발생한다(단견)... 법칙성을 띄우고(상견)...
경험 즉 사실에서 위와 같은 '판단'이 생기면, 그게 연기를 보는 거예요.
연기를 본다, 이거를 지혜라고 포장해줘요. 판단, 파악작용, 상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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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라는 것이, 사실에서 연기를 판단하는 것인데...
아함부나 니까야의 [경]을 보면, 지혜제일 사리푸타가 이미 아라한임에도 부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구체적 사실에서 발생한 판단(의 내용)...간단히 이름하기를 연기... 연기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네요.
부처님께서 대견하다면서 칭찬하십니다. (흐뭇 흐뭇) 그걸 알았어?
중론은요. '구체적 사실에서 발생한 판단' 즉 '소위 있는 그대로 구체적 사실을 아는 지혜'인 '연기'가 어떤 것인지 궁구하는 겁니다.
중론 전반부의 내용이 그거예요.
그 내용이 뭐냐? 연기에 따라 성립한 것은 '공'이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로 일체의 희론을 적멸하셨다...
원인에 결과가 없기에 결과에 원인이 없기에, 연기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말이 쓰이며...
발생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기에, 연기에서 발생과 소멸이라는 말이 쓰이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기에, 연기에서 있고 없다고 한다...
... ... ...
... ... ...
일체가 연기에 따를 때... 우리가 경험적으로 발생과 소멸 등등을 경험하는 것은, 발생과 소멸 등등이 없기 때문이다.
연기의 논리가 그렇다.
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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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성을 띈 발생과 소멸등이, 발생과 소멸등이 없는 증거입니다.
종합이죠? 상견과 단견의 종합처럼 말입니다.
반야부의 진제와 속제는 서로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속원융 즉 종합이예요.
이러한 종합을 두고, 위에서 자비(의 모습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반드시 중론의 논리가, 그런 식으로 판단의 내용 즉 연기를 분석함이 반드시 필요한가?
이거는 뭐... 강권할 사항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 상좌부도 중론을 필수로 보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저는 대승불교 행자니까, 또 전설에 따르면 중론을 저술한 나가르주나가 용궁에서 화엄경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나가르주나를 인도 화엄종의 초조다, 그런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그런 상황이다 보니, 중국 화엄종에서도 중론이나 반야부의 논리가 출발 토대가 되기도 하구요.
저야, 대승 그것도 화엄행자니까요. 자칭 화엄행자 수준이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는 수용합니다.
어쨌든 상좌부의 입장에 서더라도, 이거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중론의 논리, 중론이 제시한 연기의 모습은요.
다음의 부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열반은 불의 꺼짐이다.
언제나 제 자리...
열반은 불의 꺼짐이다!
완벽한 대칭의 세계.
무질서의 극과, 질서의 극.
그 한량없는 균형.
그 한량없는 가지런함.
절대 자유. 절대 평온
연기는 잘 몰르지만..
언제나 제 자리..죠.. -()-
오~~ 언제나 제자리.
그것도 멋진 표현이네요.
사실 [열반은 불의 꺼짐이다] 이보다 더 명확한 표현도 없는거 같아요.
단지 괜스리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족을 달아보는거죠.
불이 타다가 꺼진다라고 표현하지만 불이라는 것이 자체적으로 따로 있고 그것이 발생해서 타다가 꺼지는 것은 아니다.
타다가 꺼지는 연기적 현상에서 불은 발생하지 않는다.
씨앗에서 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연료에서 불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서 어른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마... 하하하
좌파들 보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 꼭 정치영역만이 아닌데, 불교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고 모든 분야에서 그런 거 같은데...
유마경에서 중생이 병을 앓고 있다는게 이런 건가? 뭐든 다 반대로 알아. '전도'가 중생의 특징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