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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꿈과 노래
아 3:1-5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 3:1-5 / [밤을 그리며] (신부) 밤이면 밤마다 임 그리워 잠자리에 들거만 임 그리워 잠 못드는 밤. 아무리 애타게 그리워해도 찾을 수 없어, 그대 내 사랑. 2)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보리라 마음먹고 성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네.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 다녀 봤으나 그 어디에서도 그리운 임 찾을 수 없었네. 3) 성안을 순찰하는 이들을 붙잡고 `이리도 애타게 찾는 내 사랑을 혹시 보기라도 했나요?' 물어 보고 4) 지나치다가 얼마 안되어 아, 그리도 그리던 내 임을 만났다네. 나 내 사랑을 꼭 붙잡고 친정집으로 데려왔다네. 어머니가 날 낳으신 그 방으로 들어갔다네. 5) 예루살렘 아가씨들아 우리만 있게 해다오. 겁 많은 노루를 생각해 봐요. 들사슴을 한번 생각해 봐요.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들 말아 주어요. 우리를 제발 깨우지 말아 주어요.
아가서를 겉으로 보면 남녀 간에 뜨거운 사랑의 편지처럼 보이지만, 영안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사랑을 노래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1-3) 본문의 주인공은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한두 번 찾은 것이 아니라 성 안으로 돌아다니면서 찾았다고 했습니다(2). 더 나아가 혼자 찾을 수 없어서 성을 순찰하는 사람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3). 이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5대 명언 중 하나는 “더 나은 삶을 계속 찾는 것이 최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본문에 적용하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찾는 것은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책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처럼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을 찾고, 문을 열면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축복하실 것입니다(계 3:20).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는 꿈(4-5) 지금부터 20년 전 2002년도의 전 국민적 화두(話頭)는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2002년까지 우리나라는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1승도 못한 축구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을 주최한 국가로서 최소한 1승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이 있었습니다. 기적같이 꿈은 이루어져서 1승을 거두고 더 나아가 16강, 8강, 4강까지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는 등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 곧 비전(Vision)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을 축복하시어 꿈꾼 그대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 41:41). 솔로몬의 꿈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찾으려고 온 성을 다니다가 드디어 만납니다(4). 이것이 꿈이냐? 생시이냐? 하며 놀랍니다. 그리고 그를 꼭 잡고 동고동락(同苦同樂)하자고 합니다(5). 진실된 성도라면 이런 마음과 자세로 주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요셉처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참된 주님의 신부로 날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고백합니까? 당신을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길 바랍니다.
아낌없이 사랑하는 것과 아낌없이 사는 것은 뜻이 같을 뿐 아니라 예수가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삶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속한다는 것은 인생을 껴안는 것, 즉 살며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 볼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빛나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 그 소망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그 빛으로 어둠을 내 쫓아 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 설 교 >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아 3:1-4 / 강문호 목사
아가서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중에 최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는 최고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UCLA 의학부에서 연구한 보고서는 놀랍습니다. 하루에 200번 정도씩 암세포가 우리 몸에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는 것입니다. 암에 안 걸리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의 피나 침에는 항암제가 있고, 미움의 감정을 가진 이의 피나 침에는 암을 유발하는 요소가 있다는 보고입니다. 암세포를 시험관에 넣고 사랑할 때 침을 뱉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암세포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움을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침을 뱉았더니 암세포가 순식간에 50배로 퍼져 나갔습니다. 사랑하면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 자기 건강에도 좋은 것입니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울 때 사랑은 제일 좋은 보약입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오래 산다.”
이런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이 바로 사랑하는 부부가 오랜 산다는 책입니다. 쥐는 평균 600일 사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 쥐를 매일 주인이 하루에 한두번씩 꼭 끼어 안아 주면서 사랑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900일 살았습니다. 사랑을 하면 오래 삽니다. 반대로 미워하면 핏속에 아드레날린이라는 독소가 서로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 졌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손해입니다. 독기를 품고 있을 때 숨을 조사하면 독이 들어 있고 사랑할 때 숨을 조사하면 맑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어느 보험회사에서 조사하였습니다.
남편이 출근할 때 “잘 다녀 오세요”라고 사랑스럽게 인사하며 키스를 하여주면 그렇게 하지 않은 남편보다 5년을 더 산다는 것을 밝혀 냈습니다. 교통사고율이 훨씬 감소한다는 통계입니다.
의부증이 너무나 심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 사무실에 전화를 하였는 데 여자 비서가 받았습니다. 부인은 “보통 사이가 아니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해명하여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부인은 고백하라며 대들었습니다.일방적이었습니다. 정신병적인 상태가 심각하여졌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하며 집 문을 열었을 때 부인은 부엌칼을 드리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쁜 짓을 한 당신은 죽어야 합니다.”
남편은 정신과 의사와 상의하였습니다. 원인은 부인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구박받고 친척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를 사랑하여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의부증이나 의처증 환자는 결코 병원에 스스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우자들이 잘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남편이 잘 처리하여 주었습니다. 지혜롭게 대처하여 나갔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집에 들어 갔습니다. 사무실에서도 아내가 전화할 것 같으면 비서가 전화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직장외의 외출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같이 갔습니다. 아내와 같이 교회에 가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점점 의부증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인을 치료한 약은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내와 기도였습니다. 부부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사랑이 약이었습니다.
아가서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아가서는 역사상 가장 사랑한 사람은 성 버나드입니다. 아가서 1장과 2장만 가지고 18년 설교하였습니다. 아가서 전체를 88번 설교하였습니다. 오늘 설교는 그의 설교중에 한 편을 각색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하나님을 말할 때 최고의 언어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1. 사랑은 찾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여인 술람미가 자기 남편을 잃었습니다. 어디 있는 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부부가 살다보면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아 3:1-2)
술람미 여인이 남자 솔로몬을 찾은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솔로몬이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찾는 이유는 당신이 나를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3장에서 찾는 데 2장은 온통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졌는 데 찾지 않는다면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남편이 밤에 돌아오지 않는 데 찾지 않고 자는 아내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돌아 오지 않는 데 어디 있는 지 찾지 않는 남자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유행가중에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을 때 찾아 다녔습니다. 사랑은 찾는 것입니다.
2. 사랑은 묻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찾아도 찾아도 찾지 못 하여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길거리에서 순찰자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아 3:3)
남편을 잃어버린 아내는 길거리를 헤메다가 순찰자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남편이 어디 있는 지 물었습니다. 성 버나드는 순찰자를 목사, 개혁자, 도움을 받아야 할 자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순찰자가 알려 주어서 찾았습니다. 사랑은 묻는 것입니다. 묻는다는 말은 대답하여 줄 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도움자가 있어야 합니다.
멘토가 있는 멘토리는 행복합니다.
영적 지도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갈 곳을 가보고, 갈 곳을 알고, 갈 곳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물을 사람 모세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물을 사람 멘토 바울이 있었습니다.
웃시아 왕에게는 물을 사람 멘토 스가랴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을 사람 멘토 나단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묻는 것입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 루즈가 옷에 묻었느냐고 묻는 것이 사랑입니다.
얼굴이 왜 안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즈음에 왜 힘이 빠졌느냐고 묻는 것이 사랑입니다. 묻는 것은 관심이고 관심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남자를 잃었을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행적을 물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사랑은 묻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출장 길에 샌프란시스코의 리츠칼튼호텔에서 하루 머물렀습니다. 그는 서양식의 푹신한 베개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후론트에 전화를 걸어 좀 딱딱한 베개를 갖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딱딱한 베개를 구해다 주어서 잠을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 곳에서 목적지 뉴욕 리츠칼튼 호텔을 예약하고 뉴욕으로 갔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방안에 들어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침대 위에 전날 밤에 자신이 베고 잤던 베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자신을 귀빈으로 알고 베개까지 신경을 써주는 호텔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지 평생 리츠칼튼 호텔만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랑은 관심이고 사랑은 묻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상처받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찾아도 남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상처입니다. 사랑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하기에 받는 상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최고로 상처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멸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셨는 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려면 사랑하지 않으면 됩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너무나 사랑하여 찾고 또 찾았지만 찾지 못 하였습니다. 묻고 또 물었지만 어느 곳에 있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허탈뿐이었습니다. 괴로움뿐이었습니다.
세상의 첫 부부 아담과 하와도 결국은 사랑하기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살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라고 사랑하던 고백이 사라졌습니다. 너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핑계로 일관하였습니다.
어느 사원이 직장에서 사장님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어머니는 자부에게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부엌으로 나가서 부뚜막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걷어 찼습니다. 고양이는 화가 나서 쥐를 잡아 먹었습니다. 상처는 마치 독화살같아서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그 화살을 빼서 남에게 쏘아 대게 됩니다.
군대에서 보면 상관에서 괴로움을 당한 사람이 꼭 부하를 괴롭힙니다.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은 아내는 시어머니가 되면 자부를 괴롭히게 됩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주게 됩니다.
한 자매가 어떤 남자와 결혼할 때 예수를 믿겠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결혼하고 나니 교회간다고 핍박이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일지키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성격이 거칠어서 아내를 술을 먹은 후 때리고 짓밟고 핍박하였습니다. 날이 갈 수록 더욱 심하여졌습니다. 딸이 5명이 되었는 데 이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교회 다니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혼을 각오하고 나니까 무엇도 두렵지 않아 떳떳이 주일에 교회에 나갔습니다. 오히려 교회간다고 꼬투리 잡으며 이혼하자고 하면 당장 응하리라 마음먹고 나니까 편하였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과 이혼을 위논하였으나 목사님은 이혼은 성경의 뜻이 아님을 알려 주었습니다. 40일 기도를 작정하였습니다. 기도중에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딸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지금까지는 아내로 살았고, 어머니로 살았고 자부로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이 가정을 향한 선교사로 살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선교사의 심정으로 대하였습니다. 가족들의 마음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짜증만 부리던 성격이 모두를 수용하는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는 차라리 포기하기에 상처가 없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사랑하기에 솔로몬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고 고통속에 있었습니다.
4. 사랑은 은혜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물어도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남편을 찾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찾지도 않은 곳에서 솔로몬을 만났습니다. 찾지도 않은 곳에서 솔로몬을 찾았습니다. 이제는 기진맥진하였을 때 사랑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노력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찾았습니다. 최선과 은총이 만나면 기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랑은 완성되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콩나물을 기를 때 실험을 하여 보았습니다. 두 그릇에 콩나물을 길렀습니다. 한 쪽 콩나물을 기를 때에는 그냥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그릇의 콩나물을 기를 때에는 물을 줄 때마다 쓰다듬어 주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콩나물 잘 자라게 하시고 이 콩나물을 먹는 사람마다 다 살찌게 하옵소서.”
그리고 콩나물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콩나물아! 사랑해.”
그리고 길렀더니 그 콩나물이 훨씬 더 잘 자라고 멋진 상품 가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받고 자란 콩나물도 존귀하여 집니다. 사랑에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은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꽃이 피워지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느 왕이 나라를 여기 저기 돌아 보았습니다. 민정 시찰이었습니다. 시골에 들어갔을 때 아주 예쁜 처녀를 보았습니다. 왕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그 처녀를 데리고 오라. 결혼하고 싶다.”
신하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폐하!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천민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시골로 내려 가서 거기서 결혼하고 싶다.”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도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살면 안 됩니다.”
왕은 너무도 그 여자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민이 되어 시골로 갔습니다. 그리고 천민이 되어 그 처녀를 사랑하며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킬케콜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쓴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이라는 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왕이 시골로 내려와 시골 처녀와 결혼한 이야기가 바로 아가서입니다. 솔로몬 왕이 시골로 내려와 술람미 여인과 결혼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결혼한 이야기입니다.
5. 사랑은 작은 천국입니다.
사랑하는 남자 솔로몬을 찾은 여인 술람미는 솔로몬과 함께 친정으로 갔습니다. 신부에게 가장 편안한 집은 친정입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집입니다. 자기가 자라난 곳입니다. 부담이 전혀 없는 집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집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여자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친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머니 품안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술람미는 친청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천국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랑
아 3:1-11 / 조정헌 목사
오늘 3장에서는 마음을 다하는 사랑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외적인 조건과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마 22:37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 15:8에 보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아가서 1:7에도 보면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라고 했습니다. 5:4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움직일 때 감정이 움직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억지가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억지로 사랑하는 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데 교회에 다니는 것... 그것처럼 고역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4에도 보시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없는 사랑입니다.
성장하는 교회, 화목한 가정에는 이런 감정들이 살아있습니다. 감정이 살아 있으면 눈빛부터가 다릅니다. 표정도 항상 생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 바로 감정입니다. 사랑에는 감정이 항상 실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 1:22에서도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는 사랑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워하는 사랑입니다.
3:1 이하에 보시면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항상 그리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인, 악인, 의로운 자, 불의한 자 등 세상의 모든 영혼을 다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누가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입게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하는 그리움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잠언 8:17에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영으로 우리에게 와 계신 주님, 육체로 다시 오실 주님을 오늘도 우리는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놓치지 않는 사랑입니다.
4절에 보시면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고, 만나고, 붙잡고,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받은 은혜는 절대로 쏟아버리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사랑을 받았는데 그 사랑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첫사랑을 놓쳐버리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딤후 4:10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엡 6:24에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내 어머니 집, 나를 잉태한 이의 방은 바로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그분을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다른 것들은 다 놓쳐버려도 예수님만큼은 절대로 놓치면 안됩니다.
마 28: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존중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5절에 보면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자연을 두고 맹세하는 진실한, 영원한 맹세입니다.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 자연을 두고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사랑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를 상대방에게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롬 12:10에도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6절 이하에 보시면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7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8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9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10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11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 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라고 했습니다.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기까지 거친 들을 헤치고 찾아오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그 거칠고 험한 광야를 헤치고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신부로 삼아주신 주님의 그 사랑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랑은 왕관입니다. 11절에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 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라고 했습니다.
사 61:3에 보시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다하는 사랑은 바로 그리워하는 사랑입니다.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항상 존중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이곳에 방문하신 주님과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차 대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필리핀 군인들이 일본군에서 패하여 포로로 수 천명이 잡혔습니다. 포로 수용소는 지옥과 같았습니다. 포로의 생명은 파리 생명과 같았습니다. 목욕물은 그만 두고라도 마실 물조차 없었습니다. 침대가 없는 것은 물론 이부자리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 하고 동물처럼 살았습니다. 게다가 전염병이 퍼져서 하루 밤에도 수많은 포로 병사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비둘기 한 마리가 철조망 안으로 날라와 떨어졌습니다. 독수리에 찢긴 상태였습니다. 한 쪽 날개가 거들거렸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포로들은 의사들에게 비둘기 치료약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돌아가면서 열심히 치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포로들의 관심이 비둘기였습니다. 배고프면서도 자기들이 먹을 음식을 비둘기에게 먹였습니다. 돌아가면서 애무하여 주었습니다. 정성껏 모두가 사랑하였습니다. 얼마 후 비둘기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비둘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한 달에 100명 가량 죽어 나갔는 데, 비둘기를 사랑하고부터는 40명 가량밖에 죽어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엔톨핀이 나오면서 모두 건강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자부가 시아버지에게 손자를 등에 엎혀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버님! 오늘 시장 갖다 늦을 것같아요. 손자 좀 엎어 주세요.”
그리고 예정보다 더 늦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줌과 똥을 몇 번 싸서 펑퍼짐한 데도 그대로 엎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미안해요. 수고하셨어요. 힘들지 않으세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즐거웠다.”
아이를 내려고 놓았습니다. 그런데 옆 집에 빌려온 빈 독을 갖다 주어야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갖다 주마.”
그리고 등에 지고 가다가는 쉬고, 가다가는 쉬면서 말했습니다.
“너무 무거워!”
그런데 알고보니 손자 몸무게와 독 무게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힘들어도 힘든지 모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겁고 힘듭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 모두가 즐겁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천국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친밀성
천국에는 친밀함만 있습니다. 친밀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2. 풍성함
부모와 있을 때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배부릅니다. 부모와 같이 있다는 자체가 풍요입니다.
3. 기쁨
천국은 항상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슬픔도 아픔도 상처도 없습니다. 항상 기쁨만 충만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과 친정 어머니 집으로 갔으니 금상첨화입니다.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결혼하고 60년간을 행복하게 산 신앙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동갑이었습니다. 70이 넘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할머니는 할아버지 건강을 끔찍히 챙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현미밥만 하였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보약도 자주 대려 드렸습니다. 운동도 자주 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각별하게 보살펴 드렸더니 85세가 되어도 건강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교통 사고로 부부가 동시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부는 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나오더니 환영하면서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인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 집에서 사세요.”
“아. 이 집은 너무 비싸겠네요.”
“여기는 천국입니다. 공짜예요. 그냥 살면 됩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베드로는 집을 소개한 후 부부를 일류 부폐 식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좋은 음식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야! 여기는 아주 비싸겠네요.”
“어허. 여기는 천국입니다. 공짜입니다.”
그 좋은 음식이 모두가 공짜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살이 찔가 두려워서 물었습니다.
“혹시 저 칼로리 식당은 없습니까?”
“여기는 천국입니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프지 않고 살이 찌지 않습니다. 여기는 천국입니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할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고래 고래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아니. 이 좋은 곳에서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할머니도 물었습니다.
“여보. 왜 그래요?”
그 때 할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할망구야. 할망구가 아니었으면 벌써 10년 전에 여기에 왔을 텐데... 현미밥을 먹이고 생식을 시키는 바람에 오래 오래 살며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이 좋은 곳에 이제 왔잖아? 여기에 와보니 그렇게 보약 많이 것이 후회가 되, 그렇게 운동많이 한 것이 후회가 되.”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가서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1. 사랑은 찾는 것입니다.
2. 사랑은 묻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상처받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은혜입니다.
5. 사랑은 작은 천국입니다.
마음에 사랑하는 자
아 3:1-5
오늘은 여러분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아가서를 본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IMF 사태로 긴장 상태가 고조되면서 웃음이 사라져 가는 요즘, 저는 정초부터 여러분에게 영적 부흥을 강도 높게 요구함으로써 무거운 마음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아가서를 통하여 긴장을 풀어드리려고 합니다. 한가지 명심할 것은 아가서 강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아가서를 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감미롭고 짙은 로멘스를 체험하고, 인생의 기쁨을 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가서란 히브리말로 쉬르 하쉬림( )이란 말인데, 노래 중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의 경치를 자랑하지 말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기 전에는 폭포를 말하지 말며, 아가서를 읽기 전에는 시를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가서는 신비함이 넘치는 시이며 노래입니다.
이 아가서는 솔로몬이 지은 것인데, 그가 젊은 시절,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열렬하게 사랑에 빠져 결국 혼인을 하였는데, 그 때의 화려하고 황홀하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기록한 시입니다. 이 시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조물주께서 주신 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성이라고 고백하였고, 술람미 여인은 들녘에서 양이나 치던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솔로몬의 큰 은덕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대화형식으로 짜여 있습니다. 내용은 활발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우아하여 독자들에게 감미로움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풍성한 영적 은혜를 온 몸으로 느끼도록 해 주는 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시를 유월절 마지막 날과 결혼식에서 낭독하였는데 오늘은 우선 3장에 있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순행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1-5)
밤에 신랑을 찾음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다"(아 3:1)는 말씀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연모하여 밤에 침대에서 찾은 경험을 고백하는 것인데,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실제 사항이 아니라 꿈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본문의 밤이란 단어는 "밤들"( 삘레일로드)라는 복수명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밤들이란 낱말의 뜻은 길고 지루한 겨울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학자는 밤들이란 "밤마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여하간 술람미 여인은 긴 겨울밤이 되었던, 매일 밤마다가 되었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솔로몬을 그리워하고, 애타게 기다렸고, 마음 조리며 찾아 다녔습니다.
여기서 아가서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할 영적 시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아가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고, 세 번째는 전형적인 메시아적 해석 방법인데, 메시아적 해석 방법이란 아가서에 등장하는 솔로몬 왕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그의 사랑하는 애인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극한 사랑은 성도를 향한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하고, 술람미 여인의 존경과 찬양은 성도들이 신랑 되시는 주님을 향하는 경외심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다. 우선 밤이란 말의 첫 번째 뜻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둡고 스산한 시련과 고통의 환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화초가 맑은 공기와 햇빛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때로는 밤도 있어야 성장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어두운 밤과 같은 고난의 시절이 있어야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영적 성장을 위한 필요악이란 뜻입니다.
두 번째, 밤이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을 믿으면서도 그분과 호흡을 같이 하는 깊은 교제가 없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에 젖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상에서 찾음
다음으로 그는 침상에서 신랑인 솔로몬을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타성이 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쉽고 안일한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주님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은 번영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의 상태를 아모스 선지자는 "상아 침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암 6:4) 켠다고 하였고, 호세아 선지자는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고 침상에서 부르짖었다"(호 7:14)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성도들도 침상에서 주님을 찾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줄어들고, 철야기도는 아예 심야기도로 바뀌었으며, 주일 성수는 주일 낯 예배로 만족하고 말았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의 풍속도는 약간 달라지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아 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게으름과 안일한 방법으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는 신앙 생활에는 주님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어렵고 고통스런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침상에 누어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인생의 폭풍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도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찾음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아 3:2)
침상에서 솔로몬을 찾아도 찾지 못한 술람미 여인은 정신이 버쩍 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환난도 때로는 유익하고, 고난도 성도들을 깨우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나라가 겪는 어려움도 당장은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그리고 오늘은 전전긍긍하여야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술람미 여인처럼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부흥의 동기이며 진행입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깨어나는 성도들을 반드시 유익하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잠에서 깨어난 술람미 여인은 성중을 다니면서 솔로몬을 찾습니다. 그가 돌아다닌 곳을 거리와 큰길이라고 하였는데, "거리"란 히브리어로 쉐와킴( )이라는 낱말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이나 집회장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리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제사의식을 진행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고, 큰길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 대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제사의식 속에는 생명의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큰길에서도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곳에는 많은 종파와 많은 학자와 많은 사상은 있으나 생명의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행순하는 자에게 묻다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아 3:3)
행순하는 자들이란 방범대원을 의미합니다. 시민들을 보호하고 우범자를 훈계하기 위하여 만물이 잠들어 있는 야밤에 거리를 순행하는 분들이 행순자이며 파수꾼들이고, 보초들입니다. 행순하는 자, 혹은 파수꾼은 하나님의 종들(겔 3:17)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한 시대를 비추는 위대한 파수꾼들을 많이 소개하는데, 엘리야, 엘리사, 에스겔과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고, 기독교 역사에는 마틴 루터, 죤 칼빈, 요한 낙스와 같은 인물들이 영적 행순자들입니다. 지금도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이 땅에는 많이 세움을 받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파수꾼에게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과 장소를 물었는데 이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우리도 물어야 하고 저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어떤 해답을 받았는지 본문에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으나 퍽 유익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아 3:4)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행순자들에게 묻은 것이 주님을 만나는 비결이었습니다. 이점도 명심하여야 할 사항입니다.
어미 집으로
이제 마지막 부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술람미 여인이 그의 사랑하는 애인을 만난 후의 행동인데,
첫 번째, 그는 사랑하는 솔로몬을 꽉 붙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술람미 여인의 행동은 반드시 본받아, 우리도 주님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 말씀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여인의 손이 아무리 강해도 남자의 뿌리침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솔로몬이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붙잡았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의 강력한 사랑을 믿고 신뢰하면서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였기 때문에 그를 강력하게 붙잡게 된 것입니다.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신뢰가 하나로 결합할 때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떼 놓을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결합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주님의 영원 불변의 사랑을 전적으로 믿으며 신뢰로써 그를 붙잡을 때 주님은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품에 안 듯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위로와 소망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두 번째, 그는 사랑하는 솔로몬을 만나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아 3:4)였다고 하였습니다. 내 어미 집이나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은 매우 깨끗하고 고상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 으슥하고 음침한 구석으로 가지 않고, 공개된 장소인 모친의 방을 찾았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깨끗하고 순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탐욕이나 명예의 수단으로 신앙을 가질 것이 아니라 순수함에서 나오는 사랑과 믿음, 그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그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그분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미 집,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이란 교회를 상징합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고 하였습니다. 즉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그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할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이 충만한 곳이어야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주님을 만나고, 포근한 사랑을 받고, 깊은 영적인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맺는 말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그의 사랑하는 자를 찾기 위하여 여러모로 수고를 합니다. 침상에서 찾기 시작하여, 거리와 큰길에서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만나지 못하였었는데, 행순하는 자들에게 물은 직후에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만일 술람미 여인이 헤매고 다닌 곳이 예루살렘 성이었다면 행순자 곧 파수꾼들을 만난 지점은 예루살렘 성문 근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성문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그곳은 바로 감람산이 됩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감람산입니다.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어디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번화한 도시 한 복판 거리입니까? 일과에 바쁜 사무실입니까? 저속한 연속극이 흘러나오는 T.V. 앞입니까? 아닙니다. 엘리야는 폭풍 속에서도, 지진 속에서도, 번개 속에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주님을 만납니다.
오직 은밀하게 기도하는 곳에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용하고 은밀한 기도의 골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의 사랑을 확인하며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체험하고, 위로와 소망을 돈독히 받으며, 깊으신 섭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가 3:1-11
찬송가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 정한조 목사
아가 3:1-11
찬송가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신랑을 찾아서(1-5절)
우리 민족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삼강오륜과 같은 윤리를 가치관으로 갖게 되었지만, 고려시대까지는 굉장히 활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예성강 하구에 대표적인 무역항인 ‘벽란도’가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이미 국제화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도 고려시대가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습니다.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을 떠올리면, 고려가요 중에서 남녀의 자유로운 사랑을 노래한 작품 만전춘, 이상곡, 쌍화점은 그것이 풍기문란을 일으킨다 하여 조선시대에서는 금서(禁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작품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_남녀가 서로 즐기는 노래’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의 남녀상열지사와 같은 것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내용의 적나라함 때문에 처음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왜 성경 속에 있어야 하는지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면 이러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한편의 오페라(가극)와 같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상당히 직설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지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아가서를 문자적으로 솔로몬왕의 술람미 여인에 대한 사랑, 즉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책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구태여 성경에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고, 최대의 절기는 그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입니다. 아가서를 유월절에 읽었는데, 만약 이 책이 연애시라고만 한다면 그렇게 중요한 절기에 낭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언’을 ‘성전의 뜰’에 비유하고, ‘전도서’는 성전 안의 ‘성소’에, 그리고 ‘아가서’를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성소’에 비유합니다.
그렇다고 아가서를 상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상징적 해석은 ‘솔로몬왕=하나님’, ‘술람미 여인=하나님의 백성’ 이나 ‘솔로몬왕=예수 그리스도’, ‘술람미 여인=교회’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솔로몬왕이 실제 자기 이름까지 거명(1:1)해 가면서 술람미 여인과 사랑을 노래한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바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의 사랑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그 사랑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예표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부부지간에 있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 여인의 임(솔로몬왕)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 즉 연애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전반부인 1-5절은 임을 그리워하는 여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지금 술람미 여인은 몹시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이 신분적으로 너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인은 꿈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밤’이라고 된 단어가 히브리어성경에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시간으로 나뉜 하룻밤 전체를 뜻할 수도 있고, 그제, 어제, 오늘 등 며칠 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술람미 여인은 밤새도록, 또는 여러 날 동안 꿈에서라도 임을 만나기를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보고 싶으면 꿈에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만약 어렸을 때 헤어진 가족이 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사여부라도 확인해 보고 싶고, 몹시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꿈에서라도 만나보고 싶어 질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도 사랑하는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밤에 침상에서’라는 말은 술람미 여인이 꿈속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꿈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 나섰습니다.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혹시 큰 길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성 안을 돌아다닙니다. ‘거리’와 ‘큰 길(광장)’이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성 안의 여러 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또 큰길(광장)은 시장이 열리는 곳이고, 재판이 벌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거리와 광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솔로몬왕)을 보았는지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을 만나면 모든 사람을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모든 사람을 만나도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도 동일합니다. 그 분을 만나면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을 만난 것과 같고, 그 분을 만나지 못하면 모든 사람을 만나도 마음에 진정한 만족도 없고, 마치 아무도 만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온 성안을 돌아다녀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여인은 순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3)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순찰하는 사람들은 그 성의 파수꾼들입니다. 지금도 파출소 경찰들이 마을을 돌며 살핍니다. ‘경찰(警察)’의 문자적인 의미가 ‘경계하여 살핌’입니다. 길거리나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각자의 목적이 있습니다. 상인들은 물건을 파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거기에만 집중합니다. 혹 자신의 가게에 물건을 사러온 사람이면 유심하게 볼지 몰라도 지나가는 사람을 집중해서 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 곳에 있기 때문에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볼 수도 없습니다. 또한 ‘행인들’은 문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유심하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명동시내나 인사동 거리, 망원시장을 지나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목적을 향해서만 가기 때문에 주위에 누가 지나가는지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거리나 광장을 지나며, 사람들에게 가장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순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유심하게 살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그 순찰하는 사람들에게 혹시 보았는지를 물었습니다.
특히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찾는 사람이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 마음’은 ‘내 영혼’, ‘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기 생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태도도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영원히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침내 술람미 여인은 성을 순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4-5)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마치 술람미 여인이 성을 순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는지 물어보다가, 순찰하는 사람 어깨너머로 자신이 찾는 사람이 눈 안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꼭 붙잡고 자기가 태어난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서로가 마음껏 사랑하기까지 방해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남녀가 만나 연인이 되면 서로가 집중해서 깊이 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 때는 주변에서 방해 하지 않고 서로가 잘 알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시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커플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겉에 나타난 것으로만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사랑은 시작하는 것보다 잘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선물과 이벤트가 많으면 사랑이 깊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서로 깊이 알아가는 것은 그 어떤 선물보다 중요합니다.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결혼(6-11절)
오늘 본문의 후반부인 6-11절은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결혼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마침내 여인은 자신의 처소에서 왕궁으로 가게 되는데, 몸에 뿌린 향품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향내를 내며 갑니다. 결혼식 당일에 신부화장을 곱게 한 모습이 연상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 어떤 향기를 발할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냄새를 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향기를 발하지 못하면, 악취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신부가 오는 모습을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감탄문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6절의 마지막에 있지만, 히브리어성경에는 처음에 나옵니다.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신랑인 솔로몬왕과 신부인 술람미 여인이 가마를 탄 모습을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7-8) 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왕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장한 군인을 60명이나 보냈습니다. 특히 야간 기습에 대비해서 허리에 칼까지 차게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일반인들은 할 수 없지만, 솔로몬왕이 이렇게 한 것은 그만큼 상대를 많이 배려하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자기 배우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한 인생으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여성(아내)에게 아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존중받는 것입니다. 그 느낌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남성(남편)에게 아주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배려(인정)를 받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 아내에게 배려(인정)를 받지 못하면, 밖에서 큰 일을 이루어도 마음에 있는 공허함은 잘 매워지지가 않습니다.
솔로몬왕이 타는 가마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9-11) 솔로몬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가마를 만드는 잣나무(레바논 나무)는 왕궁과 성전을 만드는 최고급 나무이고, 거기에다 은과 금으로 덧입혀져 있습니다. 또한 자색으로 깔개를 깔았습니다. 자색은 바로 왕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어머니가 씌워준 왕관이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신랑은 머리에 아주 좋은 관을 쓰고 혼인예식을 올렸습니다.
지금 솔로몬왕의 결혼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그가 임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혼인예식을 예표합니다. 그 때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존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하여 남편과 아내가 된다는 것은 곧 거기에 걸맞도록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총각이라는 비늘, 처녀라는 비늘을 벗고서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지어져 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지어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다운 신부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깊은 교제와 결혼을 통해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꿈에서라도 만나기 위해서 찾아다닌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연인을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영혼을 다하고,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함께 살게 하신 배우자와 가족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아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과 믿음에서 주님의 향기가 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를 주님의 신부라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은총을 더하여 주셔서,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의 삶과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다운 신부답게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를 가장 간절하게 찾았던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2.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와 당신의 가족들, 함께 살게 하신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며 존중하십니까? 또 상대에서 가장 배려 받고 존중받았다고 여겨졌던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3.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떤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까?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오늘도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지어져 가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성령은 무엇으로 받습니까?
갈 3:1-5 / 우인택 목사
내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데, 추석명절에 대한 설교는 별도로 준비한 ‘추석가정예배 순서지’에 있기에 오늘은 갈라디아서를 계속해서 상고합니다.
1. 지난 시간에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한 사도바울은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합니다(1절).
여기에서 ‘어리석다’라는 말은 ‘깨닫지 못하다’ ‘바보 같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입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직접 복음의 핵심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어떤 성도들보다도 ‘이신칭의’를 가슴 깊이 깨닫고 복음의 진리 위에 든든히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그러해야 할 그들이 ‘이신칭의’교리를 버리고 공로주의에 기초를 둔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에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바울이 이에 대하여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것은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한일서 4:19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헌신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며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인간의 헌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요 15:12).
그런데 공로주의는 세상 이방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바치는 것에 비례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교회지도자가가 공로주의의 덫에 걸려들게 되면 성도들이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도록 교회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예를 들어, 공로주의의 덫에 걸려든 교회는 각 개인의 전도실적을 강조하며 성도들을 서로 경쟁하게 만듭니다.
각 구역과 각 부서들도 서로 우위에 서려고 경쟁합니다.
다른 성도보다 먼저 권사·장로가 되기 위해 서로 경쟁합니다.
그러다 경쟁에 밀려난 성도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건축할 때에도 다른 교회보다 좋은 자리, 더 멋진 디자인, 더 큰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많은 돈과 인력, 심지어 편법까지도 불사합니다.
눈에 보이는 실적만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한 원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갈 1:9, 2:21).
왜냐하면, 지난 주일에 주신 2:20 말씀처럼 성도의 삶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대신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요 17:18-19).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요 13:34-35).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복음의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발적인 반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사 66:2-3).
그리고 사도바울도 그가 쓴 서신 여러 곳에서 자신의 공로를 조금도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10, 엡 2:8-9)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러한 이신칭의 신앙을 버리고 율법주의, 공로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1절 함께 읽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확실하게 듣고 믿었었지만, 그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는 조금도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믿음은 교회 안에 갇힌 믿음, 자기들만을 위한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그렇게 한 것은 세상의 극심한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박해가 두려워 숨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복음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매우 두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힘겹게 신앙생활을 하던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이 다가와 그러한 양심의 가책을 모면할 수 있는 ‘율법의 행함’이라는 면죄부를 제시했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갈라디아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성도와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가 ‘교회를 다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만의 차이라면 이러한 성도를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기는 믿는데 삶의 현장에서 전혀 적용되지 않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과연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사용되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고전 2:4-5)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씀합니다(고전 4:20).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10:4).
심지어 야고보서 2장에서는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 어리석은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어찌 모르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대로 생각하고 믿는 대로 행동할 수 없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헛것이요,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어지고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삶과 분리된 믿음,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어지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잠자는 믿음이 아니라, 믿는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칭찬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라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묻고자 하노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묻고자 하노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느냐?”
저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입니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입니까?”
성령은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초대교회로부터 지금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이 이에 대하여 오해하고 성령을 인간적인 어떤 노력이나 행위를 통해서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종교적이고도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받기 위해 성령충만 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을 받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이리저리 쫓아다닙니다.
산 속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결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큰 사명이 있거나(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살기에 힘쓰는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성령을 받기 위한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3-4절에서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만일, 갈라디아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버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으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목숨 걸고 지켜왔던 자신들의 모든 믿음이 부정되는 것이 되고, 또한 성도로서 당했던 모든 고통과 고난도 헛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도라는 이름 때문에 괜한 고생만 하다가 결국에는 구원도 받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후에는 지옥에 간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만큼은 자기 멋대로 마음껏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삽니다.
그들은 주일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자기 마음대로 여행도 가고, 음주가무로 자기 육체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보냅니다.
기도를 하겠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물질을 축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마음껏 육체의 쾌락을 즐길 수 있으며, 적당히 법의 망을 피해 쉽게 돈 벌고, 쉽게 출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되 바르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성도라는 이름하에 고생고생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로서 교리적으로도, 마음가짐에 있어서도, 그리고 삶의 모습에 있어서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바른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좋은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바울은 5절에서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명확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리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결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셨을 때에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어떤 한 사람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간질병에 걸린 아들의 병을 고쳐보려고 그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로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하자 소동을 벌이다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그에게로 달려와서 절을 하며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데려오게 한 후 그 아들을 붙들고 있는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심으로써 간질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 17:19).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만 있었다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물론 그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라도 능히 이루시는 성령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도 않으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고 그 믿음을 따라 행할 때 성령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내일부터 추석명절 연휴가 시작되는데,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이 성령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를 믿고 간절하게 기도할 때, 성령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로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는 가정,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는 가정,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처럼 불의 혀처럼 강력하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을 믿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주의자들에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 의에 빠진 것을 돌아보면서, 삶의 열매가 없는 신앙의 진보는 오히려 저희들에게 덫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믿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되, 오직 믿음으로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하게 쓰임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