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시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詩 해설, 정끝별시인
시집 한 권으로 ‘현대시 100년’ 에 길이 남은 시인들이 많
다.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 시인이 그렇다. 특히 유고 시집 한
권으로 길이 남은 시인들도 있으니 이상화, 이상, 윤동주, 기
형도 그리고 여기 이육사 시인이 그렇다.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이 따라다닌다. 지사(志士), 독립투사, 혁명가, 아나
키스트, 테러리스트, 의열단 단원 등, 1928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감되었을 때
수감 번호가 264(혹은 64), 이를 ‘대륙의 역사‘ 라는 뜻의 한
자 ’육사(陸史)‘ 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항일운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단지 17회 정도 감옥을 들락거
리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 만주. 북경 등지를 부단히 왕
래했다는 것, 북경 감옥에서 마흔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것
정도.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인지 안 들렸다는 것인지, 초
인이 있을 거라는 것인지 초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는 사람이 초인인지 나인지, 초인을 목놓
아 부르는 것인지 노래를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왜 천고(千古)의 뒤에야 오는 것인지 해석이 애
매한 부분이 많은데도 이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
는 무었일까.
하늘이 처음 열렸던 날부터 다시 천고 후까지, 휘달리던
산맥들도 범하지 못했으며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어 준 이
곳! 이 신성불가침의 시공간 속에서 흰 눈과 흰 말(馬), 매화
향기와 초인의 이미지는 돌올하다. 특히 까마득한 날부터 천
고 뒤로 이어지는 대서사적 시제와 감탄하고 묻고 명령하는
극적인 어조에서 ’광야‘의 고결한 미감과 강렬한 정서는 한
결 고무된다. 웅대하다는 말, 장엄하다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
는 시도 드물 것이다.
감옥에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시 ’꽃‘에서도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
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
노라” 라고 노래했다. 오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이 광야에서,
지금-여기의 눈보라 치는 겨울 추위를 이겨 내고 찬란한 꽃
을 피울 미래의 그날을 떠올려 본다. 시인이 기꺼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이유일 것이다. 기름을 바른 단정한 머리
에 늘 조용조용 말하고 행동했다는 , 올곧은 시인이 올곧은 삶
속에서 일구어 낸 참 올곧은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