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행촌(杏村) 이암(李嵒) 선생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최근 8년전에 있었던 김진명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확인했다. 평소 인물사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행촌의 존재에 대하여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 기사중에서 행촌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그 이후 행촌의 생애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본 칼럼에서는 행촌과 “농상집요(農桑輯要)”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필자가 특히 “농상집요”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외22대조가 되는 양진당(養眞堂) 강시(姜蓍) 선조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가의 역사와 관련하여 2015년에 “진주강씨 참판공파 행락동 가문의 역사 고찰”제하의 칼럼을 연재했다.
최근 2002년에 간행되었던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제하의 책을 읽다가 양진당이 행촌의 조카사위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양진당의 5남 강회계(姜淮季)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사위가 되므로 고려왕실과 사돈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진당이 행촌이 원나라에서 도입한 “농상집요”를 재간행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농학사(農學史)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실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양진당이 “농상집요”를 재간행하게 된 배경에 행촌의 조카사위라는 점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행촌의 생질녀(甥姪女)인 진주하씨의 남편이 된다는 것인데 어떤 내력으로 양진당이 행촌 가문의 조카사위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경위가 궁금하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농상집요”는 1273년(元 至元 10) 원나라 사농사(司農司)에서 간행된 이후 여러차례 재간행되었다는 것인데 당시 중국 북방 지역의 농법을 요약 정리한 책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기존에 간행되었던 제민요술(薺民要術)을 비롯한 모든 농서(農書)를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농상집요”를 고려에 도입한 행촌 이암은 고성이씨 문중의 후손으로서 서예에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송설체(松雪體)의 대가(大家)로 알려졌으며, 학자로서도 명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역임했다.
이러한 행촌이 1349년(충정왕 1)“농상집요”를 원나라에서 도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1372년(공민왕 21) 합주지사(陜州知事 : 陜川郡守)로 재임하고 있던 양진당이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제하의 서명(書名)으로 재간행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새롭게 알게 된 또 하나의 정보는 양진당의 증손(曾孫)들이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盟) 형제라는 것인데 강희안은 화훼원예(花卉園藝)와 관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서(古書)인 “양화소록(養花所錄)”을 저술하였다는 것인데, 특히 동생인 강희맹이 저술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이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쌍벽을 이루었던 점을 주목한다.
이상과 같이 행촌 이암과 “농상집요”의 연관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는데 평소 고려말 농업사정에 대하여 관료로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행촌이 원나라에서 “농상집요”를 도입하였으며, 그의 사후 조카사위인 양진당 강시가 “원조정본농상집요”제하의 서명으로 재간행한 이후 그의 증손들이 그러한 농학사상을 계승하였던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역사작가.<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