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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2003년 9월부터 잇따라 터진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사건 등 서울 시민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경찰
에 붙잡혔다.
경찰조사결과 유영철은 2004년 7월까지 보도방.출장마사지에서 일하는 여성 11
명도 무차별 살해한 뒤 시내 곳곳에 암매장
하는 등 혼자서 모두 21명을 살해하는 역대 최다 살인을 기록, `인면수심'의 극치를 보여줬다.
검찰은 11월29일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며, 재판부는 12월13일 형을 확정했다.
➡️ 2015년 미국 지상파 메인 뉴스 첫 흑인 앵커 탄생
미국에서 처음으로 흑인이 단독으로 지상파 방송의 메인 뉴스 앵커를 맡게 됐다.
18일(현지 시각) 앤드루 랙 NBC방송 회장은 저녁 메인 뉴스인 나이틀리뉴스의 진행자로 흑인인 레스터 홀트(56)를 정식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홀트는 종전 메인 앵커였던 브라이언 윌리엄스(55)가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가 거짓으로 들통나 지난 2월 하차한 뒤 임시 앵커로 활동해왔다. 흑인이 미국 지상파 메인 뉴스의 단독 앵커가 된 것은 처음이다.
캘리포니아주 출신인 홀트는 방송 경력 34년의 베테랑이다. 1981년부터 19년간 CBS의 뉴욕, LA, 시카고지국에서 근무했다. 이후 2000년 NBC로 옮겼으며, 2007년부터 주말 나이틀리뉴스의 앵커를 맡았다.
➡️2015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불법 체류 청소년에 55억원 기부
➡️2015년 하버드대 동문회 첫 한인 회장 나와
한인 변호사가 미국 명문 하버드대의 신임 동문회장으로 선출됐다.
하버드대 동문회는 신시아 토레스 현 동문회장의 후임으로 시카고의 법률회사 ‘시들리 오스틴’의 파트너인 폴 최(51·한국명 최정열) 변호사를 새 동문회장으로 선출했다고 하버드대 교지인 하버드크림슨이 18일 전했다. 하버드대 동문회장에 한인이 선출된 것은 최씨가 처음이다.
최 회장은 최홍영 전 위스콘신 의대 교수의 외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시카고로 이민 갔다. 그는 1986년 하버드대 경제학과, 1989년 하버드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부터 시들리 오스틴에서 기업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동안 사모펀드인 KKR의 ‘퍼스트 데이터’ 인수, 모건스탠리와 ‘디스커버 파이낸셜’의 분할 등 여러 건의 M&A와 기업 분할에서 법률 자문을 맡았다.
2002년엔 시카고 경제 전문지인 크레인스가 뽑은 ‘성공한 40세 미만 40인’에 선정됐고, 하버드대 시카고 지역 동문회장을 지냈다. 최 신임 회장은 7월 1일부터 하버드대 동문회장으로 활동하며, 임기는 1년이다.
➡️ 2015년 116세 세계 최고령 할머니 별세… 19세기 출생자 둘 남아
116세 세계 최고령자인 제럴린 탤리 여사가 미국 미시간주 자택에서 평온한 상태로 숨을 거뒀다고 현지 언론이 18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1899년 5월 태어난 탤리는 지난 4월 당시 기준 세계 최고령자였던 미국 아칸소주의 거트루드 위버(여·1898년 7월생)가 숨지면서 세계 최고령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숨졌다.
탤리의 사망으로 세계 최고령자 타이틀은 역시 미국인인 뉴욕의 115세 수재나 무샤트 존스(여·1899년 7월생)에게로 넘어갔다. 미국의 민간 연구기관인 노인학연구그룹(GRG)은 1800년대에 태어나 생존한 사람이 존스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2명뿐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대 세계 최고령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은 프랑스 여성 진 칼망이며, 122년 5개월을 살고 1997년 숨졌다.
➡️ 2012년 독일의 '한국학 대부' 브루노 레빈 교수 별세
유럽한국학회(AKSE) 창설자로 독일 내 한국학 연구의 대부(代父)로 불린 브루노 레빈(Bruno Lewin·87) 전(前) 독일 보훔대 명예교수가 지난 18일(현지시각) 별세했다.
그의 독일인 제자인 삿세 함부르크대 교수는 27일 이메일을 통해 레빈 교수가 지난 18일 별세했다는 사실을 전해 왔다.
레빈 교수는 독일과 유럽에 한국학 뿌리를 내리게 한 한국학 1세대 학자로 연구와 저술, 후진 양성 등 다방면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학문 여정의 출발점은 일본학이었지만 그 문화적 원류를 찾아 한국학으로 나아갔다. 독일 뮌헨대에서 일본어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독학으로 한국학을 공부했다.
청년 시절 연구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직접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와 경주까지 답사했다. 대부분 서구학자가 한국을 ‘일본의 뒷마당’ 정도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레빈 교수는 한국 문화가 당시 서구 학계에서 과소평가돼 있을 뿐, 실상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한국어 동사 형태론’ ‘한국어 입문’ 등 한국어와 한국사에 관한 연구는 물론, 한국 문화가 일본 문화 발전에 미친 역할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했다. 백제어가 고대 일본어 형성에 미친 영향을 밝혀낸 연구는 지금도 학계에서 회자된다.
1964년 그의 주도로 보훔대에 동아시아학부가 창설됐을 때는 교과 과정에 한국학도 포함시켰다. 이곳을 모태로 독일과 유럽의 한국학 학자들이 숱하게 배출됐다. 아이켐아이어 튀빙겐대 교수, 삿세 함부르크대 교수, 후베 본대학 교수, 도르멜즈 비엔나대학 교수가 후학들이다.
그의 한국학 사랑에 관한 일화도 많다. 독일 대학 당국이 그의 한국 문화 연구 업적을 기려 그의 공식 직함이었던 ‘일본어문학 교수’에 더해 ‘한국학 교수’까지 겸하게 하려 했을 때 스스로 사양했다. 자신이 겸임하면 별도의 한국학 정교수직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될까 봐서였다. 그 덕에 한국학 교수직은 1988년 따로 신설됐다.
그의 제자인 삿세 교수는 “레빈 교수는 학문적 깊이도 대단하지만 인간성과 유머를 겸비한 학자였다”고 회상했다.
➡️2010년 남아공 2010 월드컵 대한민국-아르헨티나 16강 놓고 격돌.
➡️2010년 주제 사라마구 사망(87세). 포르투갈의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2009년 첫 발생 50일만에 국내 신종 플루(인플루엔자AH1N1) 환자 100명 초과.
➡️2007년 베트남 국가주석 응우옌 민 찌엣 국가원수로는 미국 첫 방문.
➡️2006년 미국 성공회 처음 여성 수장 탄생 ; 캐서린 제퍼츠 셔리 주교.
➡️2004년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2004년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2002년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2002년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함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상 첫 16강’에 만족하지 않고 열띤 응원을 보낸 온 국민과 23명의 축구대표선수들이 함께 만든 드라마였다. 한국이 안정환의 연장 골든골로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에 짜릿한 2대1 역전승을 거두며 2002 한·일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8강 진출을 호언장담했던 일본은 빗속에 열린 16강전에서 터키에 일격을 당하며 울었다.
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한국은 설기현의 동점골에 이어 연장 후반 12분에 터진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를 2대1로 꺾었다.
한국은 출발이 좋지 않았다. 전반 4분 얻은 페널티킥 득점 기회를 날린 것. 안정환의 오른발 슛이 너무 약했고, 방향을 잡은 상대 GK 잔루이지 부폰이 몸을 날려 막아냈다.
선제골을 내준 것은 전반 18분. 토티가 왼쪽에서 코너킥을 올리는 순간, 골문 앞에서 기다리던 비에리가 한국 수비를 밀쳐내며 헤딩 슛, 왼쪽 네트를 흔들었다.
한국은 후반 A매치(국가대표간 경기) 100회 출장을 기록한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를 투입하며 반격을 폈다. 극적인 동점골은 후반 43분 터졌다. 황선홍이 오른쪽에서 올려준 공이 상대 수비 파누치의 몸에 맞고 튕기는 순간, 설기현이 왼발 슛으로 상대 네트에 꽂아넣은 것.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은 연장 후반 12분. 이영표가 좌중간에서 올린 공을 안정환이 달려들며 헤딩 슛, 천금의 골든골을 뽑아냈다. 전반 페널티킥 실수를 깨끗이 씻어낸 멋진 골이었다.
앞서 일본 미야기에서 열린 16강전에서는 터키가 전반 12분 터진 위미트 다발라의 헤딩골을 끝까지 지키며 일본을 1대0으로 제압, 7번째 8강 티켓을 손에 넣었다.
➡️ 1999년 1960년대 농구스타 박신자,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1960년대 한국 여자농구 최고스타였던 박신자씨가 1999년 6월 18일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박신자씨는 세계 여자농구 107년 사상 위대한 선수 및 지도자 25명에 포함되어 사진과 국제대회에서 획득한 메달 등이 영구전시되는 이같은 영예를 안았다.
이 전당은 1999년 6월초에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 건립됐다.명예의 전당측은 박씨가 1960년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계라고 말했다. 박씨는 1963년 제4회 페루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유일한 동양선수로 베스트5로 선정됐고, 1967년 제5회 체코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며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1967년 은퇴한 그는 1982년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을 맡아 한국 스포츠사상 첫 여성사령탑 기록을 세웠다. 1983년에도 여성으론 첫번째로 여자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박씨는 1971년 미8군 문관 스티븐 브래드너씨와 결혼했다.
1967년 4월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개최
1967년 4월 22일, 우리나라는 마지막 상대인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4승1패를 기록,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한국 구기종목 역사상 처음으로, 따낸 세계대회 은메달이었으며, 온 국민들을 열광시키고,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쾌거였습니다.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박신자(朴信子)는 대회 MVP를 수상했습니다.
➡️1996년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1994년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1990년윤보선 전(前) 대통령 별세
➡️1989년강수연, 모스크바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 1989년 차범근, 서독에서 축구선수 은퇴
차범근 선수가 1989년 6월 18일 서독에서의 축구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서독 분데스리가 기록은 3백8게임 출장에 98득점이었다. 차범근 선수가 서독 축구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78년 12월 30일이었다. 서독 프로팀인 다름슈타트클럽에 단신으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은 것이 그때였다. 그러나 차의 본격적인 서독생활은 1979년 7월 12일 프랑크푸르트팀과 입단계약을 맺으면서였다. 당시 연봉은 22만마르크(6천6백만원)였다.
그는 입단 첫 해 12골을 터뜨리며 소속팀을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팀으로 끌어올렸으며, 덕분에 다음 시즌 연봉 40만 달러(1억 1천만원)의 ‘갈색 폭격기’로 자리잡았다. 그의 서독생활은 19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진가를 더했다. 당시 레버쿠젠에는 차의 서독진출을 시기, 고의적인 파울로 척추뼈를 다치게 한 ‘독일 병정’ 겔스돌프가 있었지만 차범근은 모든 것을 화해하며 이적에 동의했다.
이적료 1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6천 마르크(1억6천만원)도 동양인 선수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적을 용서하는 차의 태도에 서독 축구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차는 은퇴후 쾰른체육대에서 본격적인 축구 정교사 코스를 밟아 자격증도 땄다.
독일의 코레아노 차붐
80년 프랑크푸르트 웨파컵 우승(1골 1어시스트), 세계 베스트11 선정. 독일 총리가 귀화추진.
86년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
88년 레버쿠젠 웨파컵 우승(1골),레버쿠젠 박물관엔 100년동안 최고의 윙포워드로 차붐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89년 MVP 선정.
프랑스 풋볼잡지에 세계4대인물 선정(펠레,마라도나,베켄바워,차붐)
스페인 풋볼지에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 5인에선정.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골기록 (리그 308게임 98골, 기타 49게임 18골) - 패널티킥 안하고 전부 필드골.
➡️1986년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 1983년 중국 전인대, 국가주석에 이선념, 국가중앙군사위주석에 등소평 선출
1983년 6월 18일 중공 전인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에 등소평이 선출됐다. 쓰촨성 출생 등소평은 고급중학졸업 후, 1920년 프랑스에서 고학하였다. 젊어서는 모택동을 지지했으나 1978년 3차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경제의 현대화 건설·사상 해방·문호 개방책이라는 대전환을 가지며, 1979년 미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3년 제6기 전인대에서 등소평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함에 따라 중국의 권력기관의 하나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서 등소평은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후 등소평은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11월 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장쩌민 총서기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3년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1983년일본 중의원 해산
➡️1983년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1982년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1982년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1981년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 1979년 카터, 브레즈네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 서명
미국 카터 대통령과 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1979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2차 미소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에 조인했다. SALT II는 1.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한 각종 미사일 총수 제한 2. 다목적유도복수탄두(MIRV)미사일과 전략폭격기 총수 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조인된 SALT II도 1979년 12월말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다.
➡️1976년코마네치,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1973년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1970년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1968년인텔 창업
➡️1967년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1965년송추에 무장간첩침투
➡️1963년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1963년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1962년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1956년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1955년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 1953년 이승만, 반공포로 전격 석방
1953년 6월8일, 유엔군ㆍ공산군 양측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다. 조기 종전을 원한 유엔군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ㆍ폴란드ㆍ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데가 반공포로들이 6개월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6월18일 새벽2시, 미군이 경비중인 부산ㆍ대구ㆍ광주ㆍ논산 등 포로수용소의 전원이 끊기고 철조망이 뚫렸다.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들의 대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만5600여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7400여명이나 됐다. 그러나 8000여명은 다시 철조망 신세를 져야했다.
➡️1952년중석불사건, 국회서 말썽 조사위 구성
➡️1949년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4년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 [1942년]원폭 제조 `맨해튼 프로젝트` 가동
원자폭탄 개념도. 야구공 사이즈의 플루토늄 구(球)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이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성공시켰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헝가리에서 망명한 물리학자 질라드는 아인슈타인을 설득, 핵분열이 군사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도록 했다.
지지부진하던 원자력 연구가 급물살을 탄 것은 1941년 12월 미국 과학연구개발청 장관 바네바 부시가 루스벨트로부터 최종승인을 얻어내면서였다. 전쟁 중인 데다가 실험실·제조시설 등을 비밀리에 건설하려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육군부가 실무책임을 떠맡았다.
1942년 6월 18일, 이를 위한 공병대가 발족됐고 9월에는 그로브스 공병대 준장이 최고 책임자로 임명됐다. 발족 당시의 이름은 ‘대용품개발연구소’였으나 8월에 ‘맨해튼 관구’로 바꿨다. 20억달러나 투입된 이른바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 연구를 주로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해 이 대학이 위치한 맨해튼이 암호명으로 쓰였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도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1936년스페인 내전 발발
➡️ 1928년 아멜리아 에어하트, 여성최초로 대서양횡단 비행에 참가
미국의 여성비행가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1928년 6월 18일 여성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참여했다. 그녀가 탄 `우정호`는 미국 뉴퍼들랜드를 이륙해 20시간 40분 만에 영국 웨일즈 파리항에 도착했다. 신문들은 그녀를 `레이디 린디`(여성 린드버그)로 불렀다.
1897년 미국 캔자스주 애치슨에서 태어난 에어하트는 1차대전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곡예비행을 처음 보고 비행기에 매료됐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때 조종을 배운뒤 몇년 안되어 비행기록 500시간을 돌파할 정도로 비행에 열심이었다.
이번 비행에 자신이 조종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한 에어하트는 마침내 1932년 5월 20일 단독으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해 꿈을 이뤘다. 거센 바람과 연료탱크가 새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3,241Km를 13시간 30분만에 돌파했다. 에어하트는 이후에도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미국 대륙을 단독 횡단했고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까지 논스톱 비행했다.
➡️ 1928년 극지탐험가 아문센 사망
노르웨이 출신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이 비행선 사고로 추락한 친구 노빌레를 구출하려다 1928년 6월 18일 북극권에서 조난당해 운명을 달리했다. 54세였다.
보르게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북극탐험을 꿈꾸며 자란 아문센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95년 1등항해사가 됐다. 북극점 정복의 제1인자를 꿈꾸던 아문센은 1909년 미국인 R.E.피어리가 그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으로 바꾸어 1910년 ‘프람호’ 로 남극탐험을 떠났다. 로스해의 고래만 대빙벽에 기지를 설치하고 동료와 52마리의 개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55일 만인 1911년 12월 14일,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것은 영국의 스콧 일행보다 35일 앞선 것이었다.
1925년 아문센은 비행정에 의한 북극비행을 시도했으나 실패, 다시1926년 엘즈워스와 이탈리아인 항공기술자였던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을 이용해 북극을 횡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북극 횡단 비행에 대한 신빙성의 논쟁은 죽기 전까지 아문센을 괴롭혔다.
1928년 노빌레 일행의 북극탐험대 비행선이 스피츠베르겐 근처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하기 위해 비행정으로 날아가던 중, 비행정와 함께 아문센의 소식이 끊겼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극지 탐험가, 로알 아문센
승리는 모든 것을 제대로 갖춘 자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그걸 성공이라고 부릅니다. 필요한 절차를 등한시한 자에게는 시간이 지난 후에 반드시 실패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불행이라고 부릅니다.
-아문센
인류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아문센과 그의 동료대원들은 남극점에 도달했다. 조국 노르웨이를 떠나온 지는 1년 반. 남극대륙에 도착한지 11개월 만이었고, 남극점을 향해 떠나온 지 두 달 만이었다. 아문센과 그 동료들은 남극점에 조국 노르웨이의 깃발을 꽂고 남극점에 세운 캠프의 이름을 ‘폴하임(Polheim: 극점의 고향) 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로서 아문센은 인류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사람이 되었다.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에는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들이 많다. 아문센이 원래 도달하고자 했던 목표점은 남극점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북극점에 최초로 가는 탐험가가 되기 위해 준비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9년 미국의 피어리가 북극점에 먼저 도착(1996년에 발견된 피어리의 일지에 의하면 피어리가 도착한 곳이 북극점이 아니라 북극점에서부터 40km 떨어진 곳이라고 밝혀졌다)했다고 발표되자 아문센은 생각을 바꾸었다. 첫 번째가 아니면 그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아문센은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혼자서 남극으로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기 시작했다.
같이 탐험을 준비하는 동료들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그에게 탐험 자금을 대는 노르웨이 국왕 호콘 5세도 아문센의 남극점 계획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스승격이었고 탐험배 프람호를 물려준 난센도 아문센의 남극행은 몰랐다. 아문센은 노르웨이를 떠나 마데이라에 도착해서야 그를 따르던 탐험대원들에게 남극점으로 갈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자금후원자들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거리라고 판단하고 전보를 통해 남극점 탐험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떠들썩하게 남극점 탐험 계획을 밝히고,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탐험길에 오른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스콧에게 남극으로 떠나면서 자신도 남극점 탐험을 하게 되었다는 도전장을 전보로 보냈다. 여러모로 매우 비밀스럽고 급습에 가까운 남극점 탐험이었다. 마치 전쟁에서 야밤에 급습을 하는 게릴라 전법처럼 그는 남극점 탐험을 시작했다.
1등, 최초라는 타이틀에 목말랐던 아문센은 남극 탐험 중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스콧보다 빨리 남극점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채 날씨가 풀리지 않은 9월 8일 서둘러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던 아문센의 탐험대는 결국 날씨 때문에 4일 만에 후퇴하여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은 동료를 버려두고 혼자서 먼저 가장 빠른 썰매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이기성을 보이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아문센 탐험단의 대원이었던 노련한 탐험가 요한센은 이른 출발을 반대했고, 또 후퇴가 결정되었을 때는 먼저 가버린 대장 아문센 대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미숙한 동료를 이끌고 돌아옴으로써 아문센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 대립에서 아문센은 요한센을 탐험대에서 격리했고 후일, 남극점 도달 후에도 그 영광을 요한센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그가 철저히 고립되도록 했다. 요한센은 결국 남극에서 돌아 온 후, 아문센과 그 동료들이 갖가지 훈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할 때 극도의 배신감과 절망감 속에서 자살하고 만다.
남극점에 노르웨이 깃발을 꽂은 아문센과 대원들
아문센은 또 50여 마리의 개를 썰매개로 이용하면서 이들이 지치고 기운이 빠지면 가차없이 죽여 남은 개들의 사료나 탐험대의 식량으로 쓰는 냉혹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아문센이 남극점으로 출발할 때 데리고 간 개는 50여 마리였지만 돌아왔을 때는 11마리만이 남아 있었다.
아문센은 독선적이고 독재적이며, 냉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극한의 추위와 생사를 가르는 모험 속에서 이런 독선과 독재, 냉혹함으로 동료들의 목숨을 지키고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하는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북서항로 최초의 개척자
아문센은 오슬로 근교 보르게(Borge)에서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선원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존 프랭클린이 쓴 북서항로 탐험기를 읽고 극지탐험가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이 그린란드 횡단 이후 국민 영웅으로 각광받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추위에 단련된 몸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창문을 닫지 않고 잤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꿈과는 달리 그의 어머니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아문센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크리스차니아(지금의 오슬로)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곧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이 21세에 뱃사람이 된 아문센은 스물다섯 살 때 1등 항해사 자격을 따고 벨기에 탐험대(벨자카호)의 남극 관측 탐험에 따라 나섰다. 이때 벨기에 탐험단은 뜻하지 않은 유빙에 갇혀 남극해에서 13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동료들은 거의 괴혈병에 걸리고 쇠약해졌지만 아문센은 그 동안의 체력단련으로 건강을 잃지 않았다. 앓아 누운 선장을 대신해 아문센은 배를 지휘해 무사히 유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남극해의 경험이 훗날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에 보탬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20 세기 초반,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미국의 북쪽을 돌아 항해하는 "북서 항로"는 유럽과 아시아간의 최단 항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져 많은 탐험가들이 이 항로개척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추위와 빙산으로 항로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북서항로의 개척은 16 세기부터 유럽 탐험가들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19세기에 들어서도 영국 존 프랭클린이 이끄는 영국 해군 함대가 캐나다 북방에서 전멸하는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어렸을 때 프랭클린의 책을 읽은 아문센은 북서 항로 개척의 도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03년 아문센은 난센의 도움으로 겨우 자금을 모아 승무원 6명과 함께 47 톤 청어잡이 엔진배 이외아호(Gjøa)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나 그린란드를 향해갔다. 그는 배핀만을 가로질러 랭커스터 해협을 거쳐가는 항로를 선택했고 이후에는 킹 윌리엄스 섬과 부시아 반도 사이의 레이 해협으로 향해갔는데 이 곳은 수심이 1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이외아호 정도의 작은 목선만이 통과가 가능한 뱃길이었다.
그는 킹 윌리엄스 섬에서 2회에 걸쳐 겨울을 나면서 에스키모(이누이트)들로부터 개썰매 사용법, 이글루를 짓는 법, 생고기를 먹는 법,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법 등을 배웠다. 이것은 훗날 남극점 탐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겨울을 나면서 아문센은 빅토리아 섬 부근의 지도를 만들기도 하고 자석상의 북극의 위치(북자극)을 발견하고 스키로 그 지점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1905년 겨울을 보내고 킹 월리엄스 섬을 떠난 아문센의 이외아호는 빅토리아 섬 남쪽을 항해하여 8월 17일 캐나다 북쪽 제도를 빠져 나왔다. 이로서 그는 북서 항로를 뚫은 최초의 탐험가가 되었다.
항로는 뚫었지만 또다시 알래스카의 유빙에 갇힌 아문센은 800km를 걸어 북서항로의 횡단을 보고하는 전보를 치고 다시 배로 돌아왔다. 이 전보는 막 스웨덴에서 독립한 노르웨이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는 기쁜 소식이었다. 유빙에 갇혀 있던 아문센은 다음해 얼음을 탈출하여 베링 해협을 통과했다.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 경쟁
1909년 피어리가 북극점 발견을 발표 한 후, 목표를 남극점으로 계획을 바꾼 아문센은 사실 스콧에 비해 준비된 탐험가였다. 아문센은 풍부한 항해 경험과 추운 지방의 오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을 몸으로 익힌 사람이었지만, 스콧은 산뜻한 해군 장교로 출발해 갖추어진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는 지식인 스타일의 탐험가였다. 아문센이 경쟁과 생존을 위해 남극점 도달을 목표로 했다면 스콧은 주변의 지지와 낭만적인 관점에서 남극점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아문센과 스콧의 남극점 탐험은 그 준비과정부터가 달랐다.
1911년 아문센의 탐험대와 스콧의 탐험대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남극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 탐험대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아문센은 다소 험하고 미지의 길이지만 남극점에서 100km 가까운 고래만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스콧은 에레베스에 둥지를 틀었다. 스콧이 택한 길은 이전 탐험가의 조사가 있었던 길이었다.
아문센이 타고 있던 배 프람호(전경)와 스콧이 타고 있던 테라노바호(후방)가 만났던 모습(1911년)
털옷을 입는 남극의 아문센. 그는 에스키모인들을 따라 짐승 털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썰매개로 허스키를 사용했다.
남극에서 아문센은 유럽탐험대의 기존 방식을 버리고 자신이 탐험을 하면서 살펴본 에스키모의 생존법을 선택했다. 에스키모야 말로 추위를 가장 잘 이기는 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방한복으로 짐승 털가죽으로 된 가볍고 따뜻한 에스키모 인들의 옷을 선택했다. 이와 함께 아문센은 썰매를 끄는 수단으로서 에스키모인들의 개인 '허스키'를 사용하였다. 허스키는 추운 지방에서 자란 개들이라 남극의 추위에도 끄떡 없었다. 아문센은 허스키가 끄는 썰매를 타고 마치 에스키모인들처럼 지치고 약해진 개들을 차례로 식량으로 이용했다. 잔인하긴 하지만 덕분에 식량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그만큼 행군 속도가 빨랐다.
한편 스콧 탐험대는 아문센과 달리 기존의 탐험 스타일을 그대로 따랐으며 문명인 유럽의 기술을 이용하려 했다. 스콧의 탐험대는 모직으로 된 유럽식 방한복을 착용하였다. 그 옷은 추위에는 강했지만 습기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추운 날씨에 젖은 옷은 더한 오한을 불러 왔다. 스콧 탐험대는 이동하는 것도 아문센과 다른 방법을 택했다. 스콧은 만주산 조랑말을 남극으로 데려와 썰매를 끌게 했다. 아무리 만주의 추위를 견딘 말들이라고 하더라도 남극의 혹한은 견디기 어려웠다, 조랑말은 얼마 안가 모두 얼어 죽었다. 신사적인 스콧의 탐험대는 죽은 조랑말을 식량으로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가져온 엔진 달린 기계식 이동 장치도 연료가 얼어붙어 쓸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식량을 실은 엄청난 무게의 썰매를 직접 끌고 다녔다. 당연히 행군 속도가 크게 떨어졌다.
아문센은 행군을 하면서 돌아올 길을 생각해 지나간 길에 착실히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식량을 비축해두고 어디서나 잘 보이게 깃발을 꽂아 주었다. 차례로 식량을 떨어뜨려 놓고 왔기 때문에 행군 속도는 나날이 빨라졌다. 아문센은 결국 스콧보다 35일 먼저 남극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오로지 돌아오는 것만을 목표로 하여 베이스캠프를 차례로 거치면서 안전하게 대원모두를 살려서 96일만에 귀환할 수 있었다.
반면 스콧의 탐험대는 초인적인 힘을 다해 남극점에 도착했지만, 이미 아문센이 도착한 사실을 알고 실의에 빠졌다. 돌아오는 길도 문제였다. 오는 길에 베이스캠프의 표식을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데다, 학술적 연구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두 썰매에 싣고 이동했다. 날씨는 급작스럽게 나빠졌고 베이스캠프를 찾지 못한 스콧의 대원들은 무거운 썰매를 끌고 혹한과 눈보라 속을 헤맸다. 그리고 결국 그들 모두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스콧 일행은 1912년 11월 눈 속에 파묻힌 텐트 속에서 일기장과 함께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아문센 보다 한 달 뒤에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뒷줄 맨 오른쪽)과 그의 대원들. 안타깝게도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북극점 통과와 돌연한 최후
남극 탐험으로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지만 아문센은 만족하지 못했다. 자신이 처음 목표했던 북극점도 가서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가 본 유일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1918년 아문센은 모드호를 타고 다시금 탐험길에 올랐다. 그러나 모드호는 북극으로 가는 동안 긴 시간 표류했고 결국 아문센은 북극점에 도착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3년간의 항해 동안 북동항로를 발견해 북서항로와 북동항로의 개척자가 되었다.
배가 아닌 방법으로라도 북극점에 가고 싶었던 아문센은 5년 후인 1925년 미국의 L.엘즈워스와 함께 비행정(飛行艇)에 의한 북극비행을 시도하였으나 또 실패했다. 북극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문센은 이듬해 다시 엘즈워스, 이탈리아의 U.노빌레와 함께 비행선 노르게호(號)로 스피츠베르겐으로부터 알래스카의 테러까지의 북극점 상공 통과 횡단비행에 성공하였다. 1996년 피어리가 도달한 곳이 북극점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문센은 북극점을 통과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가 되어 결국 남극점과 북극점 두 곳을 가본 인류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1928년 아문센은 함께 북극점을 통과한 이탈리아의 노빌레의 북극 탐험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노빌레 일행을 구출하기 위해 비행정으로 포롬세 기지를 출발 북극을 향했다. 노빌레 일행은 아문센이 아니라 2차 구조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러나 아문센이 탄 비행정은 돌아오지 못했다. 얼마 후 그가 타고 떠났던 비행기의 파편이 발견되면서 아문센은 북극에서 조난사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탐험가다운 최후였다. 아직 비행기 동체와 아문센의 유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로는 [남극점](1912), [북극해 최초 횡단](1927, 엘즈워스와 공저) 등이 있다.
➡️1925년히틀러 ‘나의 투쟁’ 출간
➡️1921년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글렌 출생
➡️1919년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신궁 세움
➡️1918년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출생
➡️1907년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청년회원 등
➡️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1907년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1907년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1904년대한매일신보 창간
➡️1891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출생
➡️1845년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라베랑 출생 - 1880년 말라리아 기생충 발견
➡️1815년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1814년 3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과 나폴레옹이 벨기에의 워털루에 진을 쳤다. 영국군 9만 5천명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 12만 명 등 모두 20여만명이 넘는 연합군을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했다. 이에 맞선 나폴레옹군도 12만 5천명에 달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도주하는 나폴레옹 군대.
워털루에 집결하기 전 웰링턴은 북쪽으로부터 진군해 왔고,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는 블뤼허는 측면을 보조하며 웰링턴과의 합세를 시도했다. 라인강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가 그리고 러시아 연대들이 예비군대로서 독일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해 왔다. 이들이 모두 집결하기 전 이들을 분열시켜야 했던 나폴레옹은 서둘러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6월 16일 프로이센 군대의 일부를 격퇴시킨 나폴레옹은 17일 워털루로 진군했다.
6월 18일 나폴레옹은 휘하의 평범한 그루쉬 장군에게 프로이센 군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워털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웰링턴을 공격했다. 1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네 번이나 공격했으나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루쉬가 쫒았던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는 그루쉬를 따돌리고 워털루로 무사히 집결, 웰링턴과 합류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다. 프로이센 군대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내려진 나폴레옹의 공격 명령으로 결국 나폴레옹군은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항복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나폴레옹의 패배로 유럽에는 이른바 빈체제가 성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체제를 유럽 전역에 다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812년 영국, 미국 전쟁 개전
➡️1769년 영조, 난장형 폐지
➡️68년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 즉위
68년 6월 9일 5대 황제 네로가 자살하자 로마제국 원로원이 68년 6월 18일 에스파니아 속주 총독 갈바를 제6대 로마제국 황제(제일인자)로 인정했다. 에스파니아 주둔군이 황제로 옹립한 갈바와 함께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올 것이라는 소문에 황급히 결정된 것이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 갈바를 당시로서는 황제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네로 타도의 선봉장이었던 갈리아 총독 빈덱스도 네로를 대신할 황제로 갈바를 천거했을 정도였다.
갈바는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프랑스)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라인강 방위군 사령관, 아프리카 속주 총독, 원로원 의원을 역임한 후 서기 60년에 황제 속주인 에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8년동안 속주총독으로 근무했으나 한번도 속주민에게 고발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https://youtu.be/bZp4NKImvhw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