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교수가 쓴 글에 내가 답글 단것입니다.

[시몽]

미당 서정주 선생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갓 입학한 나에게 ‘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다. 시문학사는 함동선 교수에게, 시론은 김은자 교수에게 배웠고, 시 창작 실기는 서정주 선생과 구상 선생으로부터 배웠다. 창작을 가르친 두 분은 강의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구상 선생은 학생의 시가 왜 잘못되어 있는지, 한 행 한 행 꼼꼼히 지적을 해주셨다. 시에 대한 강평이 끝나면 내 시는 살이 다 뜯겨나가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시란 살을 다 발라낸 뒤에 남은 바로 그 뼈여야 한다는 것을 구상 선생은 가르쳐주셨다.

서정주 선생은 내가 칠판에 판서한 시(그때는 컴퓨터가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전이었다)에 대해 “이건 시라고 할 수 없네”, “앞으로 제발 이런 시는 쓰지 말게”라는 말로 기를 완전히 죽인 뒤에 ‘머리로 쓰는 시’와 ‘가슴으로 쓰는 시’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학우들의 비판에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데 강평을 하시면서 한술 더 떠 그런 말씀을 하시니 나는 괴로워 미칠 지경이 되곤 했다. 대학 4년 동안 내가 마신 술의 태반은 스승의 사형 선고 때문이었다. 시를 쓰겠다고 대학에 들어온 제자가 밤을 꼬박 새다시피 하며 쓴 시에 대해 “이건 시라고 할 수 없네”, “앞으로 제발 이런 시는 쓰지 말게”라는 판결을 내리시니 뼈에 사무치는 절망감, 그 처절한 괴로움이라니.

하지만 한 해 한 해 단련이 되어갔다. 79학번이지만 심신이 골아 있어 한 해 휴학을 하고 1980년부터 학교를 다녔는데 그 1학년 때 『한국문학』 100만원 고료 신인상 공모 예심 통과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2학년 때 『시문학』 주최 전국 대학생 문예 공모에 당선되었고 3학년 때는 신춘문예에 투고했더니 2개 신문에서 최종심에 올랐다. 4학년 늦가을이 되자 스승은 수업이 끝난 어느 날 따로 나를 부르셨다.

“찬바람도 불기 시작하는데 이번 신춘에 도전을 해볼 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작품 정리를 해서 갖고 오게.”

여기저기 찔끔찔끔 써놓았던 작품들을 1주일 동안 대학노트 한 권에다 정서를 해보았더니 60편 정도가 되었다. 다음 시간에 노트를 드렸더니 그 주의 주말에 집으로 찾아오라는 말씀. 수업시간에 주셔도 되는데 집으로 오라고 하신 것은 나를 당신의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말당(末堂) 영감’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흐흐, 말당 영감 같으니라구. 몇 해 동안 혹독하게 꾸지람만 하시더니 미안한 마음이 좀 들기는 한 모양이지.’

토요일 아침에 전화를 드렸더니 스승은 사당동 예술인 마을에 있는 당신의 집으로 찾아오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셨다. 사모님의 안내로 안방에 가서 무릎을 조아려 앉았더니 스승은 환히 웃으면서 노트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아아, 그 화통한 웃음! 말 그대로인 파안대소!

지난해에 낸 시집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는 권말에 문학평론가의 해설 대신 미당 서정주 선생에게 올리는 긴 편지글을 실었다. 내 마음속에서 엄청난 빚으로 존재해온 스승에 대해 ‘부채 청산’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출판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해설의 글을 썼던 것이다. 편지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선생님은 노트를 되돌려주시면서 “갖고 가서 보게”, 이 한마디만 하실 뿐 제 시의 개선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씀이 없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습니다. ◎는 A학점의 시, ○는 B학점의 시, △는 C학점의 시, 아무 표시가 없는 것은 D 내지는 F학점이라는 뜻인 듯했습니다. 이런 부호만 있을 뿐 선생님의 글씨는 한 글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생님의 취향과는 전혀 다른 모던한 시에 ◎ 표시가 많았습니다. 신춘문예를 의식하고 쓴 시들(그 당시에는 ‘신춘문예 경향’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었거든요)에는 하나같이 아무 표시가 없거나 간간이 △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신춘문예 심사를 해오신 선생님인지라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지 않고 적당히 기성 시인의 흉내를 내는 시에는 가혹한 평을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은 「畵家 뭉크와 함께」였습니다. 바로 선생님이 뽑아주셨지요. 황동규 선생님은 최종심에 오른 기형도의 「겨울 판화」 연작에 애정을 가지셨던 듯한데 연장자인 서정주 선생님의 제자 사랑 고집을 꺾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서정주 선생은 이와 같이 나를 참 많이 아껴주셨고, 나를 문단에 내보내주신 분이다. 그 편지는 스승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솔직히 고백한 글이다.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스승에 대해 나는 왜 ‘미움’의 감정을 갖게 된 것일까.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영안실로 가 조문을 하긴 했으나 장지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구상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는 유족인 양 사흘 밤낮 꼬박 영안실을 지켰었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잘못된 정치적 행보에 대한 참회의 말씀을 하지 않은 데 대해서 앙앙불락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스승의 친일작품 때문이었다. 1984년이었을 것이다. 휴가병의 신분으로 서점에 들러 산 계간지 『실천문학』은 친일문학 특집호였는데 그 책에서 나는 스승의 시 「松井伍長 頌歌」와 소설 「崔遞夫의 軍屬志望」을 보았다. 한마디로 말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조선의 학생들이 몽땅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은 말로만 듣던 친일시, 친일소설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개성의 인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죽은 것은 그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을 치며 통곡해도 한이 안 풀릴 일인데 “고운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하면서 예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단에 내보내주신 고마움은 백골난망이었지만 친일시 4편, 친일수필 1편, 친일소설 1편 등 자진해서 쓴 친일작품이 모두 6편에 달했고 광복 후에는 자신의 친일을 극구 변명하는 「從天順日派」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임종하실 때까지 ‘일본이 패망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식의 변명으로만 일관하셨다. 솔직한 사죄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 나는 1년에 두세 번 전화로만 안부를 여쭈었을 뿐 찾아뵙지 않다가 그만 부음을 듣게 되었다. 스승의 사후, 스승을 향해 쏟아지는 온갖 비난을 들으며 나는 내심 피눈물을 흘렸다.

스승이 가진 지 어언 7년이 지났고 이제 8년째로 접어든다. 이제는 ‘말당 선생’에 대한 내 마음의 앙금도 다 씻겨 내려가 나는 사죄의 뜻을 시집 한 권에 담아서 펴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 시집에 실린 시는 전부 스승을 의식하면서 썼던 것이다. ‘미당 극복’은 근 25년 동안 내 시업의 모토였다. 그러나 시인의 곧지 못한 자세는 타산지석으로 삼기로 했기에 말당 선생은 어쩌면 나의 반면교사이기도 했다.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는, 스승이 말씀하신 ‘가슴으로 쓰는 시’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시정신이란 건 감성으로건 지성으로건 반드시 가슴의 감동이란 걸 거쳐야만 하네.” 아아, 나는 지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시를 쓰고 있는가. 마냥 부끄러워 고개를 깊이 숙일 따름이다. 나는 스승의 영향으로 기교의 시보다는 정신의 시를, 충격의 시보다는 감동의 시를 쓰고자 노력해왔다. 스승은 지성의 힘으로 절제한 감동이 진정한 감동이라고 했다. 25년 동안 시를 써도 터득하지 못한 이 오묘한 진리!

스승의 발치에도 못 이르렀기에 나는 오늘도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고운 정과 미운 정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긴 세월, 그래도 나는 미당 서정주 선생한테 시를 배웠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국화 옆에서」와 「귀촉도」 같은 시는 나 같은 범인이 쓸 수 있는 시가 아니다.

ㅡ『문학의 문학』(2008 봄호)




IP : 203.90.55.xxx



김광한
수정 삭제
218.232.193.xxx 반갑습니다.저는 62년도에 중앙대 문리대(당시)국문학과에 입학을 해서 군대를 다녀와 69년도에 졸업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문예창작과가 생기기 전이지요.학장이 백철 박사였고 주임교수님이 남광우 박사, 양재연, 최진우 김상선 교수가 조교로 있었고 유목상 교수도 조교수로 계셨습니다.강사로 조병화선생님과 작고 하신 최인욱 교수님이, 그리고 태평광기를 번역한 김일근 교수님이 계셨지요. 선배로는 연극영화과의 신세훈, 시인이신 전달문,그리고 바로 윗학년에 평론의 임준렬(임헌영)이 계셨지요. 그분들은 지금도 친교를 하지요.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최인욱 선생이 어찌나 강의를 열정적으로 하시는 지 앞자리에 앉으면 침벼락을 맞곤 했어요.우리는 과(科)가 그래선지 문학다운 수업을 받지 못했어요. 영문과에 신상웅 선배가 있네요.몇년전에 국문학과 동창회에 가보니 죄다 늙어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요.아 이명재 선배도 있군요.저는 소설을 쓰기때문에 시는 잘 모르지만 이승하 교수가 중앙대동문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어요.참으로 오랜세월이 지났군요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마음이 아픈 것은 인자하시고 따뜻하셨던 백철교수님이 사후에 무슨 친일이 어쩌고 하는데 정말 싫더군요.그 심정 이해가 갑니다.좋은 날 되세요. 2008-03-01



이승하
수정 삭제
61.252.251.xxx 김광한 선배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일간 꼭 뵙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김영옥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2008-03-01

[난정주영숙]

그러고보니 우리 인연이 참으로 막강합니다....특히 이명재 선생님은 제 평론을 심사해주신 분이에요. 한참 후에야 그 분이 중대 출신이라는 걸 깨달았지만요^^*

[난정주영숙]

ㅎㅎㅎㅎㅎ 말당 선생님^^

[시몽]

매우 귀여운 분. 앞으로는 나한테 심사맡겨요ㅎㅎ심사할것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