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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9,57-62
루카복음의 후반부가 어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전반부의 강조점은 우리가 들어야할 말씀이었다면 후반부는 우리가 말씀을 따라 걸어야할 길이 강조됩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51)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매일미사에 잘 해설되어 있는 것과 같이(그분 얼굴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을 보시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명만을 보시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목적에 얼굴을(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사람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 하십니다.
재물이, 돈이 없으면 오늘도, 내일도 불안한 이 세상에 예수님은 가난을 얘기하십니다. 이 가난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기 위해서 나의 안전을, 미래를 하느님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사람의 청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오히려 매정해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그 당연함을 포기해야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니 포기를 요구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무엇이 나에게 우선인지? 자문할 때입니다.
매정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자비를 믿고 "예"라고 응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눈을 떼고 세상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곁눈질 하는 사람은 그분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따르려면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어느 길이 그분이 걸어가신 길인지 자문하고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10월1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루카 9,57-62
의지는 가치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9장 57-62절을 통해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려는 세 사람의 대화를 묵상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라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지금의 비틀거림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오늘은 그 목적지의 ‘가치’에 대해 묵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 목적지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예수님의 ‘의지’를 결정합니다.
그 가치가 높을수록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은 바로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제자들의 의지입니다.
한 사람은 "어디든지 주님 가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자발적으로 나서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답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루카 9,60) 그리고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을 말리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하시지만,
동시에 그들이 '알고 따르도록'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끝까지 갈 의지가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려면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결혼도 그렇고 산을 오르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의지 없이 이뤄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무엇보다 결혼과 비유됩니다.
결혼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 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절대로 말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막연한 사랑만으로 결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을 앞둔 연인에게 선배 부부가 해주는 조언과 같습니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고, 때로는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인내해야 한다.
재정적인 어려움, 육아의 고됨, 시댁과의 갈등 등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준비가 되었느냐?"
이 조언은 결혼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 대신 현실을 직시하고 더 깊은 사랑으로 결단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 그 가치를 찾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한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산소통 없이 등정하고, 지구상의 8,000미터 이상 14좌를 모두
무산소로 완등한 산악인입니다.
산소통 없이 8,000미터 이상의 고산에 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문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쓴' 행위입니다. 폐가 터질 듯한 고통, 극심한 추위, 환각을 일으키는 고산병, 그리고 단 한 걸음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빙벽의 공포가 그를 덮쳤을
것입니다.
수많은 동료 산악인들이 8,000미터 이상의 고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 죽음의 영역, '데스 존(Death Zone)'을 아무런 기계적인 도움 없이 헤쳐나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저런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메스너는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길을 택했을까요?
그가 결국 정복하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높은 봉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한의 고산에서 느끼는 고독과 죽음의 두려움,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 그는 이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고, 그것을 넘어섬으로써 '인간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확장하려는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산소통 없이 오르겠다는 그의 원칙은 '최고의 순수함으로 산과 하나 되고 싶다'는 이상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장의 육체적 고통이나 생존 본능, 혹은 주변의 '무모하다'는 비난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의 가치', 즉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려움을 정복하는 순수한 정신의 승리가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궁극적인 가치가 그에게 멈추지 않는 의지를 선물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지금?’ 대부분의 명상 수행에서는 지금, 여기에 대한 가치를 최고로 둡니다.
그러나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제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화가 난 제자들과 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버지의 뜻을 이뤄주는 순간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습니다.
저도 하루 중 잠자기 전을 가장 가치 있게 여깁니다.
이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어온 습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잠자기 전에 오늘 얼마나 행복했는지 점수를 매겼습니다.
저에게 잠은 죽음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내고 평생 모은 것을 바치고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서기 위해 천사와 씨름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분 앞에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의지가 줄었습니다.
잠에 대한 가치를 그만큼 잃었던 것입니다.
많은 경우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자니 평안한 잠자리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의지가 평소에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술의 또한 커다란 해악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순간, 잠과 죽음.
이 다음에 나와 셈을 하기 위해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야 하는 상황.
이 가치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잠을 통해 죽음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 순간에 최대한 가치를 두고 살 때 감정의 휘둘림 없이 매일의 의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9,57-62
저는 오직 이 순간만을 바라봅니다!
지난번 폭우로 인해 피정 센터 산책로가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굵게 파여 걷는데 지장이 되기도 하고 보기도 흉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강의나 미사 시간 외에 틈틈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모래와 시멘트가 혼합된 재료를 레미탈이라고 하는데, 한 포대당 무게가 40킬로입니다.
우선 30포대를 사 와서 비벼서 훼손된 곳을 메꾸기 시작했습니다.
레미탈에 물을 부은 다음 잘 섞이게 저어줘야 합니다.
땀이 나면서 산모기들이 달라붙습니다.
레미탈 한 포대 들 때 마다 허리가 휘청거립니다.
몇 시간 일하고 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립니다.
그렇지만 조금씩 복구되어가는 산책로를 보니 마음이 기분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고된 육체노동으로 하루를 보낸 저녁 시간, 대체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 하루 일당이 얼마 정도 되나 싶어 알아봤더니, 조금 실망했습니다.
15~20만원입니다.
거기다 소개비라든지 이런 저런 명목으로 3만원 정도 떼고나면 남는 것은 고작 12~17만원입니다.
단순 육체 노동이 힘들지만,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땀을 쫙 흘리고 나면 마음도 맑아지고, 정신도 맑아집니다.
단순하고 작은 일이지만 몰입하고 헌신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스트레스나 상처가 치유됩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역시 단순하고 작은 일을 기쁘게 했고, 그 일을 기도화함을 통해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별볼일 없고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일들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 그녀가 선택한 중요한 노선이었습니다.
24년이라는 짧은 생애는 하늘 나라에서는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일상 안에서 마주치는 아주 작은 사건들, 작은 기쁨들, 작은 성취, 작은 오해, 실망, 고통, 그 모든 것들을 한 송이 어여쁜 꽃으로 생각하며 매일 주님 발치 앞에 갖다 바쳤습니다.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짧은 생애를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는 제가 작다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깨닫게 해주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과 미소함과 무능함에만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불완전에서 완전에로, 나약함에서 강건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제 약함을 보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매일매일 새로운 불완전을 발견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영성 안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아쉽다 못해 서글플 정도로 짧은 생애(24세)였지만, 대신 자신에게 부여된 삶의 질, 사랑의 질을 최대한 높이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노력이 주어진 하루 하루, 매 순간에 전력투구하기였습니다.
“저희 삶은 지나가는 한 순간 날아가 버리는 한 순간입니다.
오, 나의 하느님, 이 지상에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 하루뿐입니다.”
생명이 끝나갈 무렵 큰 고통 중에 있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가 순간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오직 이 순간만을 바라봅니다.
저는 과거는 잊고 앞날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우리가 낙담이나 절망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흔히 과거나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는 탓입니다.”
결핵으로 인한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데레사 성녀는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의 입술에는 기쁨에 찬 찬미가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게 데레사 성녀는 ‘승리의 작은 길’을 꿋꿋이 걸어갔습니다.
“저는 노래하겠습니다.
가시덤불 속에서 꽃을 따야 하더라도 노래할 것이며, 가시가 길고 따가우면 그만큼 제 노래는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강론>
(2025. 10. 1. 수)(루카 9,57-62)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신앙생활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57-62)”
1)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만’ 따르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보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쉽든지 어렵든지 간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생활은 ‘완성된 생활’이 아니라,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2)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함께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율법학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8,19).
이미 율법학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은, 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았는데도 먼저 나선 것은 훌륭한 일이긴 한데,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의 각오가 충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잠시 앉아서 쉴 곳도 없다는 뜻이고, 어디에서나 냉대와 배척을 당하고, 박해와 미움을 받는 당신의 실제 처지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 것이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처지를(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은, 당신의 삶은 ‘미물들’보다 더 고달픈 삶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수락도 아니고 거절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아니면 기가 꺾여서 그냥 돌아섰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생각’이나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각만(말만) 하지 말고
실제로 실천해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3) 두 번째 사람의 경우는, 루카복음만 보면, 아직 제자가 안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그리고 그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미 제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라는 말씀은,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 선포’ 라는 사도직 수행을 세속 일 때문에 중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뜻은 같습니다.
‘따름’과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사’ 라는 집안의 중대사를 대수롭지 않은 세속 일로 무시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오해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고, 그 일을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나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충실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4) 세 번째 사람은, 말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따를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표현만 보면, 우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다음에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 사람은 말만 그렇게 하고 그냥 가족들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참으로 버림과 따름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여기서 ‘뒤를 돌아보다.’ 라는 말은, 미련과 아쉬움 등을 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따라야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의 이야기에서 엘리사 예언자의 일이
연상되는데, 엘리야 예언자가 엘리사를 제자로 불렀을 때, 엘리사는 ‘버림’과 ‘따름’을 먼저 실행한 다음에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1열왕 19,19-21).
그래서 복음에 나오는 세 번째 사람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