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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가
궁궐의 깊숙히 위치한 장소, 그 누구도 찾지 않을 만큼 그늘진 그곳에서 사람의 살과 살이 맞닿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퍼진다.
짝.
"더러운 년. 왜? 사람들 앞에서 단휘랑 입맞춤하니까 기분 좋았니?"
"...."
비단 옷을 곱게 차려입고 험악한 인상을 쓴 여자는 척보기에도 화려한 신분임을 증명하는 듯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석으로 휘감아져있었다.
제나라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 딸,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아버린 최후의 왕족이자 황녀였다.
"왜 말을 안해! 기분 좋았냐고 묻잖아! 너, 우리 나라가 망했다고 너같은 버러지까지 날 무시하는거야? 그래?!"
평소 건강이 안좋은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퍼렇게 독이 선 말을 내뱉는 황녀의 이름은 채화였다.
뺨을 때리고 악다구니까지 친 까닭에 숨이 차올랐는지 채화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 앞에 소녀를 죽일 듯 째려보았다.
채화는 그 소녀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제국이 멸망하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왕족이 죽었다.
평소 병 때문에 몸이 허약하다고 소문이 난 채화라 제나라를 점령한 우나라에서는 채화를 방에 가두어 놓고 그 어떤 외부인의 침입도 금하였다.
마치 자신이 어서 죽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나마 출입이 허용된 것은 단 한명 , 자신의 약혼자인 단휘 뿐이였다.
본래 채화의 호위무사였던 단휘는 채화의 아버지였던 제나라의 황제가 돌아가시던 날, 그의 명령을 받들어 채화와 혼인을 약속하였다.
물론 자신이 싫다면 그 아무리 아바마마의 명령이라도 받아 들이지 않을 채화였다.
채화가 단휘를 연모하기 시작한 것은 처음 단휘를 보았던 5년 전, 그녀로서는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여도 꼭 이루고자 했던 소망이였다.
"새려! 앞으로 한번 더 이런 일이 있을 시엔 니 몸 어디 한 구석에 구멍나는 건 각오해야 할꺼야!"
새려는 채화에게 손찌검과 폭언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이것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였다. 새려는 2개월 전부터 채화 대신 공식석상에서 황녀 역할을 해왔다.
지금까지 채화가 약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채화를 살려 둔 우나라지만 요즘 들어 낌새가 이상하여 아무도 모르게 채화가 자신과 닮은 새려를 찾아 대역을 사용해왔다.
그것이 바로 새려인 것이다. 처음에 새려는 아프신 어머니의 약을 사서 집에 돌아가던 중 어떤 남자에게 납치를 당한 후 도착한 곳이 궁이란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등장한 채화, 자신과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똑 닮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진 새려였다.
처음 자신의 대역이 되라는 황녀의 명령을 들었을 때, 새려는 거부의 뜻을 밝혔다.
어디서 암살을 당해 개죽음을 당할 자신을 우려한 것도 있었지만 병으로 인해 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려는 더더욱 궁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채화는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을 제시하고 새려의 어머니도 돌봐주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확실히 자신이 몸을 팔아도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만큼의 돈은 벌 수 없었기에 새려는 황녀의 제안을 승락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의 시초였을 줄이야 ...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채화마마"
"썩 꺼져버려"
아직도 얼얼한 볼을 부여잡고 새려는 문을 나섰다.
약간 비릿한 맛이 나는 것이, 필시 연약한 살이 터졌을 것이다.
"오늘도 맞았느냐?"
새려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단휘, 채화의 약혼자이자 제나라의 황실친위대의 장이였던 남자다.
"채화마마께서 속이 많이 상하신 모양입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하여도 입맞춤은 심한 것이였지요."
오늘 낮에 있었던 기우제에서 단휘와 갑작스러운 입맞춤을 했던 일이 떠올라 새려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분명 연기인 것을 알지만, 단휘가 사랑을 속삭이거나 몸을 맞대면 정신을 잃을 만큼 현기증이 나는 새려였다.
"흠, 그것은 내가 그런 것이니 너에게 화낼 일이 아니였다. 어디 보자, 부었을 것이다."
"아니옵니다. 자고 나면 다 가라앉을 것입니다."
"내일이면 시커멓게 멍이 들어있을 것이다. 내 처소로 가자. 얼음으로 찜찔이라도 하자구나."
"괜찮습니다. 필요하다면 제 스스로 하겠습니다."
"니가 혼자 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안다. 저번에 채화한테 맞아 발이 부었을 때도 그대로 나두어 며칠 못걷지 않았느냐."
단휘는 더이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새려의 팔을 이끌고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새려를 의자에 앉히고 얼음을 깨어 손수건에 싸서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나로 인해 이리된 것이다. 내가 하겠다."
새려는 바로 코앞에 어른거리는 단휘의 얼굴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의 신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지체높으신 분이며 채화마마의 약혼자이신 분이지만...
새려도 어쩔 수 없는 계집인지라 그를 향해 가는 연모의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과 같이 그가 한없이 다정해질 때이면 ...
그는 누구에나 다정한 사람이였다. 마당에 다리를 다쳐 쓰러져있는 새 한마리에도 신경을 쏟으며 간호해 주는 이가 그였다.
어쩌면 새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유 역시, 동정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한 감정이 연모가 아니라 동정이라고 생각한 새려는 급격히 얼굴이 어두어졌다.
"제게 왜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것입니까."
"니가 채화에게 맞지 않았느냐."
"그런 것이라면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저 같은 미천한 자가 맞는 형태라도 그분의 살결에 닿는 것 조차가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걸요."
"그래서, 맞은 것이 영광이냐? 신분이 미천한 자라고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다소 건방지다고 느낄만큼 퉁명스러운 새려의 말에 단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사람은 동정인 것이다. 절대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새려는 자꾸만 그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연기를 하는 동안 새려는 단휘에게 채화였지만, 새려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의 마음, 그의 눈빛, 그의 숨결, 그의 손길 그 모두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우나라 황태자를 만나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곳에 너는 가지 못하겠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저는 채화님께 아무런 언질도... "
"그렇게 퉁퉁부은 얼굴로 어딜 간다는 것이냐. 우나라 황태자를 만나는 자리다. 위험이 전혀 없는 자리니 내일은 채화가 직접 나가라고 내 말하마. 그러니 너는 그저 푹 쉬거라"
"알겠습니다."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일은 푹 쉴 수 있겠다며 가벼운 마음을 안고 새려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을 무렵, 새려의 처소로 채화가 찾아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녀는 다짜고짜 새려의 뺨을 쳤다. 어제 맞아 터진 곳이 또 다시 터진 듯 했다.
"다 너 때문이야."
"무슨 일이십니까."
"다 너 때문이야. 다 니년의 음모인거지? 우나라의 황태자한테 뭐라고 한거야? 뭐라고 하면 그가 그렇게 니 말을 잘 들어주니?!"
새려는 채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곧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바닥에 주저 앉아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쩜 좋아, 황태자가 나한테 청혼을 해왔어. 꼼짝없이 혼인할 수 밖에 없단 말이다."
채화의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채화가 우나라의 황태자와 혼인한다?
그렇다면 .. 단휘와의 혼인은 무산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쩌면 나도....
채화는 눈물 그치고 맘을 다잡은 듯 굳은 얼굴로 새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단휘 포기 못해. 이대로 난 그 남자랑 혼인 못해."
"채화마마, 그렇다면 거절을 하시는 것입니까? 거절을 하면 혹 저들이 제나라 국민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 "
"그러니까 니가 해 "
"네?"
채화의 말에 새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혼인, 나 대신 니가. 앞으로 남은 여생동안 평생 내가 되어 우나라의 황태자와 혼인해줘야겠어"
"싫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어째서 제가!!"
"니 년의 어머니. 지금 내가 부리는 자들에게 보호 받고 있다는 것, 알지? 지금 내가 뱉는 한마디로 영영 못볼수도 있어. 그래도 싫어?"
새려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따위는 없는 질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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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도 시간이 흘러가고 혼인날이 되었다. 멍한 정신으로 남의 일을 보듯 혼인을 마친 새려는 신혼방에 들어 한번도 본 적 없는 우나라의 황태자를 기다렸다.
아니 어쩌면 혼인식이 시작할 때부터 끈덕지게 단휘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데리고 나가주길, 얼른 이곳에서 빼내어 그 다정한 손길로 나와 함께 가자 말해주길.
하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역시 자신은 , 그저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대신하여 다쳐줄 수 있는 소모품이였던 것이다.
단휘가 사랑하는 채화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 그녀 대신 활과 칼을 맞아 줄 수 있는 방패, 그저 그 정도였던 것이다.
끼익.
오래된 문고리가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이제는 새려의 남편이 될 우나라의 황태자가 들어왔다.
새려는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부부사이에 왠 인사가 그리 정중한가. 그만 하게"
예상보다는 예의있고 다정한 말투였다. 웃음기 머금은 그의 목소리에 새려는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새려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 역시, 원래는 채화를 향하는 것이였겟지.
왜 나는, 하나도 얻을 수 없는 것이지.
채화는 일국의 황녀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고, 모든 이루고 싶은 것을 모두 이루었다.
왜 나는, 왜.... 왜 나는 내 사랑 하나 어찌 못하는 것인가. 어째서... 억지로 하는 혼인 조차 누구 대신이여야 하는 것인가.
새려는 자신을 침대 위에 눕히고 서서히 웃을 벗겨가는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라면,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이라면 ...
그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하도록,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도록 다 없애버리겠다.
더 이상 바보 같이 당하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새려는 옷 사이로 끈질기게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방해받았던 탓인지 황태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제 약혼자였던 단휘, 그 자를 ......죽여주시옵소서."
"어째서? 한때 약혼자이지 않았느냐?"
"아바마마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신 혼사이옵니다. 저의 의사따위 없었습니다."
"부탁은 그것뿐이냐?"
"예.. 그 자를 ... 죽여주십시오, 그것이면 됩니다. "
새려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며칠 후, 그는 새려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도대체 왜 ...? 라는 의문의 눈길로 새려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목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온다.
저 목소리로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 하였다. 비록 연기였지만 그는 내게 사랑한다 말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저 입술로 나와 입맞춤을 하였다. 저 눈으로 날 품었다.
피로 얼룩져있는 그의 손이 보인다.
저 손으로 나의 손을 마주잡았다. 아직도 그의 손이 내 손에 있는 듯 따듯하다.
그가 죽은 듯 더 이상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새려는 두 눈을 감았다.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가 죽었다. 그녀가 죽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전하"
죽어간다.
*뭔가 쓰다보니 싸이코패스같이 됬어요. ㅠ ㅠ
무서운 얘기가 된 듯 해요. 뭔가 쓰면서 저도 음, 내가 생각한 주인공은 이런 애가 아닌데;;;
그냥 사랑으로 인해 파멸로 가는 여자를 그리고 싶었는데
이건 뭐 그냥 자기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니까 남자를 죽여버리는 이상한 돌아이 여자가 되버렸네요
재밌게 봐주셨음 좋겠네요!
첫댓글 헐 ㅋㅋㅋ끝에 이렇게 무섭게 끝날줄이야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