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05 12:08 [배지헌 칼럼]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프로야구 가을 잔치의 초대 손님은 그 나물이 그 밥이었다. 삼성과 SK를 필두로 두산, 롯데가 4강을 다투고 가끔씩 KIA가 ‘깜짝’ 게스트로 참가하는 정도였다.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우승팀도 삼성 아니면 SK 아니면 삼성. 2010년부터는 3년 연속 삼성과 SK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한번 굳어진 서열은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다르다. 가을야구 초대 손님의 면면이 확 바뀌었다. 단골 초대 손님이던 롯데와 SK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이따금 초대받던 KIA는 아예 명단에서 지워졌다. 삼성과 두산만이 ‘힘겹게’ 게스트의 자리를 지켰다. 대신 LG 트윈스와 넥센 히어로즈가 새로운 초대손님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LG - 두산 - 넥센 세 팀끼리 누가 먼저 입장할지 정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는 단계다(물론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삼성 앞에서는 전사독 앞의 강건마, 지대호, 융가리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6년 연속 똑같았던 4강 판도가 올 시즌 들어 크게 요동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팀 전력 보강 여부가 순위를 결정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롯데와 SK는 기존 주력 선수를 FA로 내보내는 등 전력 보강에 소홀했던 반면, LG와 넥센은 활발한 트레이드와 FA 영입으로 전력 강화를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스토브리그에서 각 구단의 성적표가 고스란히 올 시즌 순위에 반영된 셈이다.
여기에 ‘9구단 체제’가 또 하나의 변수로 작용했다. 올해는 프로야구 32년 역사상 처음으로 9개 구단 체제로 페넌트레이스를 치른 시즌. 신생팀 NC가 새롭게 리그에 가세했고, 1팀씩 돌아가며 3~4일의 휴식기가 주어졌다. 20년 넘게 8개 구단이 주 6회 경기를 치르는 루틴에 익숙해져 있던 프로야구로서는 꽤나 과격한 변화를 경험한 셈이다. 그리고 이 9구단 변수는 4강 판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롯데는 이웃 NC와의 맞대결에서 8승 2무 6패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우선 신생팀 NC 변수. 신생 구단은 기존 팀들에겐 변별력 떨어지는 수능 문제 같은 존재다. 신생팀 상대로는 2승 1패를 해도 뭔가 아쉽다. 자칫 동률을 이루거나 3연전 2패 이상 당했다가는 치명타다. 3연전 전패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NC가 신생팀치고는 꽤나 만만찮은 상대였다는 점. 4월 한달간은 언어영역처럼 모두에게 점수를 골고루 나눠줬지만, 5월부터는 난이도 높은 수리탐구 영역으로 변신해 기존 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상대전적을 보자. NC전에서 가장 큰 재미를 본 팀은 1위 삼성(11승 1무 4패)과 4위 두산(12승 4패)이다. 특히 NC는 삼성을 상대로는 6월 15일까지, 두산에겐 5월 12일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연패만 거듭했다. 2위 넥센 역시 NC 상대로 초반 7경기에서 5승 2패를 거두는 등 9승 7패로 맞대결을 끝마쳤고, 3위 LG는 10승 6패로 우위를 점했다. 특히 LG는 NC의 시즌 첫 승 제물이 되는가 하면, 4월 30일부터 열린 3연전에서는 시리즈 전패를 당하며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팀 전력이 궤도에 오른 7월 이후로는 9차례 맞대결에서 7승(2패)을 거두며 일방적인 우세를 보였고, 승수 쌓기에 큰 보탬이 됐다.
반면 4강에서 탈락한 팀들은 대체로 NC 상대로 고전하거나 상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였다. NC를 홈 개막전 전패 늪에 빠뜨렸던 롯데는 5월 재대결에서 1무 2패, 7월 마산 원정에서 3연패를 당하는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최종 전적은 8승 2무 6패. 전적상 우위를 보이긴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기록이다. 더 충격적인 건 NC 상대 유일하게 열세(6승 9패)를 기록한 팀인 SK. SK는 4월 마산 원정에서 1승 뒤 2연패를 당하며 NC에 창단 첫 우세 시리즈를 내준 것을 시작으로, 5월 홈경기에서도 1승 2패에 그치는 등 ‘비룡 잡는 공룡’에 호되게 당했다. 시즌 5할 승률(.504)에도 4강 진출에 실패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다.
그 외 KIA 역시 NC 상대로 8승 1무 7패로 간신히 앞섰고, 최하위 한화는 8승 8패 호각세로 어렵사리 자존심을 세웠다. 그러나 NC 상대로 10승 이상 챙긴 상위권 팀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수준이다.
< NC 상대 기존 8개 구단 전적 >
삼성 : 11승 1무 4패
넥센 : 9승 7패
LG : 10승 6패
두산 : 12승 4패
롯데 : 8승 2무 6패
SK : 6승 9패
KIA : 8승 1무 7패
한화 : 8승 8패
9구단 체제로 인한 휴식일 변수도 순위 판도에 영향을 준 요인이다. 4일 휴식 후 3연전, 2~3일 휴식 후 2연전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큰 수혜를 입은 팀은 1위 삼성과 2위 넥센이다. 삼성은 4, 5월에 열린 4일 휴식 후 3연전을 5승 무패로 화려하게 시작했다. 또 4일 휴식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무려 8일을 쉬고 경기에 나섰는데도 NC전 3연승을 시작으로 내리 5연승을 거뒀다. 휴식일 이후 2~3연전에서 삼성이 거둔 최종 성적은 8승 1무 3패. 휴식일 이후 치르는 경기에 강했다는 점은, 3주간 휴식 이후 치르게 될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의 우세를 예상하게 하는 요인이다.
넥센 역시 휴식일 변수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넥센은 4일 휴식 뒤 치른 첫 3연전에서 삼성을 상대로 3연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또 5월 중순 두산을 상대로도 2연승을 거두며 4일 휴식 뒤 시리즈에서 초반 5연승을 내달렸다.휴식일 뒤 시리즈에서 넥센의 최종 성적은 10승 5패. 9개 팀 중 가장 많은 승수를 쉬고 난 뒤 경기에서 거뒀다.
눈여겨볼 팀은 3위 LG 트윈스. LG는 시즌 초반에는 휴식일 뒤 시리즈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첫 시리즈에서 삼성에 2패만 당했고, 두 번째 차례에서도 KIA에 먼저 2패를 당하며 어렵게 시작했다. 그러나 초반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6월말 열린 SK전에서 1패 뒤 2연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휴식일 뒤 시리즈에서도 패배보다는 승리가 많아졌다. 최종 전적은 7승 8패. 시즌 초반 1승 5패로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중반 이후의 선전이 눈에 띈다. 이에 비해 4위 두산은 5승 9패에 그치며 시즌 내내 휴식일 이후 시리즈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 강력한 우승후보라던 당초 예상이 빗나간 데는, 휴식일 이후 경기에서의 부진도 한 몫을 했다.
SK는 NC 상대로 유일하게 상대전적 열세를 기록한 팀이 됐다.
반면 하위권 팀들은 SK(7승 6패)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휴식일 이후 시리즈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가장 크게 부진했던 팀은 3승 9패에 그친 NC 다이노스. NC는 초반 세 차례 시리즈에서는 1승 8패에 그치는 등 유독 쉬고 난 뒤 경기에서 고전했다. 5월 이후 5할에 가까운 승률을 올리면서도 좀처럼 8위를 벗어나지 못한 원인이다. 9위 한화 역시 4승 1무 11패로 휴식일을 전혀 반전의 계기로 삼지 못했다.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든 팀은 KIA 타이거즈. KIA는 휴식일 이후 시리즈에서 3승 1무 8패에 그치며 시즌 중반 순위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특히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열린 LG전에서 3연패를 당한 게 결정적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는데, 4일 휴식 직후 열린 첫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된 경우가 두 차례나 있었다. KIA는 그 경기들에서 모두 패배했다. 롯데 역시 5승 1무 7패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기존 8개 구단 NC전 + 휴식일 이후 시리즈 전적 합계 >
삼성 : 19승 2무 7패
넥센 : 19승 12패
LG : 17승 14패
두산 : 17승 13패
롯데 : 13승 3무 13패
SK : 13승 15패
KIA : 11승 2무 15패
한화 : 12승 1무 19패
9구단 변수로 인한 각 팀의 승패를 합쳐보면, 최종 순위와 놀랄 만큼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예년보다 전력이 떨어진 삼성이 9구단 변수 아래서 많은 승수를 쓸어담았고, 다음으로는 넥센과 LG가 크게 재미를 봤다. 새로운 변수의 등장은 6년간 굳어져 있던 순위 판도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년 시즌 1년 더 9개 구단 체제를 이어간 뒤, 2015년부터는 10개 구단 체제라는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찾아올 예정이다. 그 변화의 틈바구니에서 누가 살아남아 승자가 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프로야구 순위 싸움, 앞으로가 더욱 흥미진진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