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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함
아 4:1-6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아 4:1-6 / [곱기도 하여라, 내 사랑] (신랑) 아, 아리따워라 그대 너무나 아름다워라.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내 사랑아. 너울 뒤에 아른거리는 그대 두 눈은 비둘기같이 사랑으로 빛나는구나. 그대 머리칼은 염소 떼처럼 길르앗 언덕에 물결 치는 염소 떼처럼 어깨 위에서 춤추는구나. 2) 그대 이는 털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과 같이 희기도 하여라. 새끼 없는 어미는 하나도 없는 양과도 같이 쪽 고르게도 났구나. 3) 그대 입술은 심홍빛 오라기. 입술을 뗄 때마다 아,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너울 뒤에는 석류같이 발그스레한 그대 두 볼. 4) 그대 목덜미는 미끈하고 둥그런 다윗 망대. 천 개나 되는 방패가 걸려 있듯 목덜미 따라서 목걸이가 둥그스레 걸려 있구나. 5) 그대 젖가슴은 나리 꽃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쌍둥이 새끼 사슴. 6) 땅거미 길어지면 저녁 선들바람 불어오면 나 그대에게 갈래요. 몰약산으로, 유향 언덕으로 가서 쉴래요.
열왕기상 11장 3절은 솔로몬 왕은 700명의 아내와 300명의 첩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절세미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골 여인, 술람미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눈, 머리털, 이(1-2) 솔로몬은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7가지로 노래하였습니다. 곧 눈과 머리털과 이와 입술과 뺨과 목과 유방입니다. 7가지에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비둘기와 같은 눈입니다(1). 비둘기는 순결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검고 윤택한 머리털입니다(1). 머리털의 영적인 의미는 성도의 아름다운 행실입니다. 이런 영적 교훈을 망각한 삼손은 머리털이 깎이고 두 눈이 뽑혀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회개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머리가 자라고 하나님의 능력이 다시 임하여 블레셋 왕과 군대를 한순간에 처단하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셋째, 암양과 같은 이입니다(2). 사람의 이는 미관(美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잘 씹으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는 육신의 양식을 잘 먹는 것처럼 영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으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입술, 뺨, 목, 유방(3-6) 넷째, 홍색 실 같은 입술입니다(3). 홍색 실은 빨강색 리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술을 주신 것은 말하고 먹고 립스틱만 바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술로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뺨입니다(3). 술람미 여인의 뺨은 마치 석류열매 같다고 했는데 석류의 열매는 짙은 붉은 색입니다. 사람이 수치심을 느낄 때 얼굴이 붉어집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목입니다(4). 성경에서 목은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믿지 않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였습니다(출 33:5). 마지막으로 두 유방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5).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유방이란 자녀를 낳고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불신자를 전도하고 초신자를 양육하는 아름다운 영적인 유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눈과 이, 머리털, 입술과 뺨 그리고 유방은 당신의 신랑이 되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 늘 묵상합시다.
헬라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 사랑은 가치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 가치를 창조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할 때 숨겨져 있고 가려진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사랑은 현재를 비추는 영원한 미래의 불빛이다. 따라서 사랑은 전혀 모양을 바꿀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미완료 시제입니다. 마치 꽉 채워 넣어야 하는 그림에서 한 칸이 비어있는 듯한 우리 인생을 주님이 오셔서 채우실 하나님의 거룩한 미완료 시제입니다.
< 설 교 >
사랑으로 섬기자
아 4:1-6 / 임덕순 목사
올해의 교회표어는 “사랑으로 섬기자” 이다.
그것을 위해서 관심과 접근, 이해와 관용, 필요를 채움 이라는 실천사항을 제시하려 한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고, 상대가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할 때, 왜 그렇게 할까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하려고 해보고, 그리고 상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것을 채워주는 일을 하자 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우리가 사랑을 해야만 하는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 사랑만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 내가 평안히 살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죄가 점점 더 심각해져간다. 연말의 퍽치기, 자녀버린 비정의 애비,
오늘의 사회현상을 보라. 뉴스와 활자들을 보라, 모두가 죄로 도배되고 있다.
음란, 사기, 횡령, 착취, 차별, 모함, 살인, 전쟁, 왜? 사람의 마음이 악해서 그렇다.
시기적으로 볼 때, 창조시는 성선설을 말할만하나, 타락 후에는 성악설이 현실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모두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사람이 지은 죄는 필경 형벌을 불러온다. 용서를 받아 없애거나, 형벌을 받아 지우거나 하지 않고는, 지은 죄는 언제라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리고 죄는 죄를 낳고 점점 더 큰 죄로 커지면서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고 세상을 파괴해 간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쇠창살을 덧댈 것인가? 총을 한 자루 사놓을 것인가? 딸을 집 밖에 안 내보내고 기를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더 사나워지면 누가 감히 덤비지 못할까? 무장을 하면 될까?
창과방패는 누가 이길까? 방패가 강해질수록 창은 더 강해지는 법이다.
군비경쟁으로 세계가 평화를 얻지 못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지만 평화를 얻지 못하였고 전 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요즘 더 큰 테러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아무리 보복을 해도 공포 속에서 살아갈 뿐이지 평화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평화에 갈급하여 인사도 샬롬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을 세우고 사는 삶에서 얻는 것은 피곤과 낙심과 파괴뿐이다. 그것 때문에 상대가 물러서지도 않고, 상대가 부드러워지지도 않는다. 내가 총을 쏘면 이웃들이 모두 긴장하고 내게로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그렇게 하고서야 평안한 생활을 할 길이 없게 된다. 차라리 내가 이웃에게 떡 한 접시 돌리고 나야 평안한 잠을 잘 수가 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고 하셨다. 죄악 세상에 대한 대안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남의 죄를 평가하는 집안에 있는 나는 선한 사람인가? 나는 이웃에게 악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웃 또한 나 때문에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을까?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내 입에서 더러운 것이 뛰쳐나온다. 말씀을 상고하는 내 마음속에 사악한 생각이 들랑거린다. 이 일을 어찌할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탄식해도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온유함, 겸손함, 사랑, 봉사, 이것은 적의 예봉을 꺾는 아주 부드럽지만 훌륭한 무기이다. 적으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놓게 하고 허리를 풀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바람은 햇볕을 이기지 못했다. 사랑이면 빈자도 부자도, 유식자도 무식자도, 어른도 아이도 모두가 녹고 만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들이 되자.
오늘날 사람들이 사나워진 것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렇다. 컴퓨터에 빠지고 TV에 빠져서 가족간에도 대화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따스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 못해서 그렇다. 그러니 사랑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자.
2.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장)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당신의 생명을 내버린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본문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겉으로 볼 때,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이다. 검은 피부의 술람미 여인, 햇빛에 그을려 거무틱틱하고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1:6)
그럼에도 솔로몬왕의 눈에는 얼마나 아름답기만 한지, 끝없는 예찬이 이어진다. 성경중에서 이처럼 닭살스러운 곳이 없다. 요즘말로 말하면 아가서는 닭살성경이다. 그런데 사실은 솔로몬은 예수님, 술람미 여인은 우리 성도를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 속에 애정행각을 그린 듯한 아가서가 있는 것이다.
닭살이란, 남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제 눈에 안경이라고 서로 너무 좋아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닭살스럽게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는 아주 특별한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하나님 가족이고, 그리스도의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
행17:에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으시고 그 많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서 사람들을 거기 보내어 살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시간이 날줄이라면 공간은 씨줄이다.
그런데 영원한 시간 중에서 2000년대라는 같은 시간과 이 넓은 지구공간 속에서 한국이라는 공간에 우리들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셨기 때문에 한정하셨다고 표현한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신앙, 같은 목사 아래서 산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관계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 우선 어설픈 객관성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이 같다고 무조건 편드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했고, 어느 지역이나 학력이나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며, 우리 애들을 볼 때도 나는 남의 입장에서 보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나는 정말로 객관적인 사람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객관성이란, 타인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이는 이렇고 저는 저렇다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 객관성을 가지면 그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따지게 되고 그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드러나게 되어있고 사람은 평가에 의해서는 그 누구라도 사랑할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가 옳지 않다는 것을 요즈음 깨달았다. 어떻게 애비가 자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자식을 남과 비교하고 장단점과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참 아비가 아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자식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부모답다.
나는 몇 주일 전부터 성가대가 찬양하는 시간에 성도여러분을 둘러보면서 여러분의 얼굴을 내 마음의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워서 그렇다. 나이가 많건 적건, 여러분은 나의 영적인 자녀들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셔서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이다. 그래서 난 여러분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난 늘 마음으로 여러분을 내 손으로 쓰다듬기를 원한다. 여러분이 잘 하는 것은 칭찬하고 여러분이 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제 책망할 것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들으라.
사랑이란 객관성을 버리고 주관성을 갖는 것이다.
내가 딸을 낳았을 때, 객관성이 가득한 내가 볼 때는 별로 예쁘지 않은데 우리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내 손녀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예쁜 것이지 얼굴이 예뻐서, 머리가 좋아서, 예쁜 짓을 해서 예쁜 것이 아니다. 무조건 내 손녀니까 예쁜 것이다. 우리 장로님들 체신 머리 없이 손자 예뻐하는 것을 보았다. 길 장로님 승훈이 얻고 기뻐하는 것 보았고 전 장로님 승신이 얻고 체신 머리 없이 기뻐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본 증인이 아닌가?
시어머니는 - 왜 네 발은 계란 같으냐? 네 버선은 왜 오이씨 같으냐? 고 밉게만 보지만,
친정어머니는 - 딸의 잘못하는 것조차도 장점으로만 보는 것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은 서로 시각만 바꾸면 된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관성이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으셨다. 사43:에 보면 네가 물가운데로 지날때에 너를 건져낼것이고 네가 불가운데로 지나게 되었을 때, 내가 너를 보호하겠는데, 너를 건지기 위해서 내가 애굽을 희생하고 구스와 스바를 내어던질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착하고 가치가 있어서인가? 거기 너희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라고 하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면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고 하셨다. 너는 내 꺼니까 내가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관성이다.
이제 주관적인 사람이 되자. 비교하여 선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서로를 가까이 가자. 서로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감싸주며 발을 주물러주는 사랑을 실천하자. 사랑으로 섬기자. 자기 가족을 섬기고, 우리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가자.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거칠고 무서운 사회를 아름답게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방식이다.
미운 사람
아 4:2-8 / 엄기호 목사
우리말에 ‘주는 거 없이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닌 데도 밉다는 말입니다. 미운 사람, 보기 싫은 사람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사실 미운 물건은 없애 버리든지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어 놓으면 되고, 미운 동물은 팔아 버리든지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 보기 싫은 사 람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것도 하루 종일 혹은 일평생을 함께해야 한다 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 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미운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친구가, 동료가 어느 날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은 과거의 사랑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해서 관계를 깨뜨립니다. 요즘 날로 증가하는 이혼율도 사랑의 관계가 한순간 미움의 관계가 되어 낳은 결과입 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의 대상이 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두 사람의 관계가 미움의 관계가 되었을까요? 오늘 신랑에게 미움을 받는 신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연 신랑이신 예수님께 미움을 받 고 있는 신부는 아닌가 반성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한시라도 빨리 사랑하는 신부를 만나고 싶어서 낮의 고된 직무에도 불구하고 밤길을 달려와 사랑하는 여인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신부는 문을 열어 신랑 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신부가 신랑이 온 것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깨어 있는 상태(2절)로 신랑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신부는 일어날 생 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누워있고 싶어 했습니다. 성경에는 잠자다가 망하고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아는 벌거벗고 잠자다가 아 들들에게 망신당하고, 롯은 딸들을 범했으며, 사울왕은 물병과 창을 다윗에게 모두 빼앗겼고, 요나는 배 밑창에 들어가 자다가 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이밖에도 유 두고는 졸다가 3층 다락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사도 바울에 의해 다시 살았습니다. 예 수님께서도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며, “결실할 때 보이는 가라지는 천국의 아들들이 잠자는 사이에 마귀가 씨를 뿌리고 간 것”(마 13:25 이하)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잠에 취한 성도와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이 문을 두드려도 여 전히 잠을 청하는 성도가 많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잠들면 생활에 환난과 고난이 옵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교통이 끊 어지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찬송이 잠들면 심령이 메마르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없 으며, 말씀에 잠들면 빛을 잃고 갈 길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외로우면 기도하고, 괴로우면 찬송하고, 마음이 약할 때는 예수님을 의지하 고, 갈급할 때는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담대함을 얻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안일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밤길을 달려온 신랑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지 않은 신부는 바로 게으른 신부입니다. 여인은 신랑이 애타게 찾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척했습니다. 그 것은 신부가 이미 몸을 씻고 옷을 벗고 누웠으므로 다시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사랑하 는 사람의 간절함을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시 때때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부르시는 주님을 지극히 사소하고 안일한 이유로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그녀는 이기적인 신부입니다. 신부는 자기밖에 몰랐고, 자 기밖에 모르는 신부는 밤새도록 신랑이 밖에 서서 이슬을 맞아 머리가 흠뻑 젖어 추 위에 떨고 있건만 잠에 취해 동정심마저 잃었습니다. 이어서 게으른 신부는 핑계를 댑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 받는 자의 나태함이 나타납니다. 또 “ 내가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랴”라는 신부의 말을 통해 사랑 받는 자의 방 종을 봅니다. 게으르면 마음으로 원해도 얻지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죄의 장벽으로 사랑과의 친교도 끊어지게 하고, 결국에는 핑계하고 변명하는 모습만을 보일 뿐입니 다. 옷을 벗은 상태는 모든 일을 포기한 무책임한 상태를 말함이요, 발을 씻었다는 것은 의욕과 협조조차 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신부가 신랑이 돌아오기 전에 어찌 옷을 벗고 누울 수 있고, 발을 씻을 수 있습니까?
신부인 교회가 신랑 되신 주님이 오시기까지 어떻게 봉사의 옷을 벗을 수 있고, 헌신 의 옷, 충성의 옷, 사랑의 옷을 벗을 수 있습니까? 직분의 발, 종의 발(섬김의 발, 순종의 발)을 씻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신랑이 올 때까지 옷을 벗지 않고, 발을 씻지 않은 채 신랑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아름다운 신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오실 때,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문 두드리는 신랑
본문 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 랑이 신부를 애타게 만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홀맨 헌터(William Holman Hunter)의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의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서계신 문밖 에는 문고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안에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잠긴 문은 영적으로 황폐한 것,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 무관심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회개의 문, 기도의 문, 찬송의 문, 말씀의 문을 열어 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을 영원히 닫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랑 되신 예수님과 영원히 먹고 마시며 부족함 없는 만족 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회를 놓친 신부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넣는 것을 보고 신부의 마음이 동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문 을 열어 보았지만 이미 신랑은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허겁지겁 달려 나가 찾아보지 만 신랑은 간 데 없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찾기 위하여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밤길에서 뜻밖에 봉변을 당합니다. 그녀는 야경을 돌던 경비병들에게 매를 맞았으며, 거리의 여자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게다가 병까지 났습니다(8절). 본문에서 애절하게 사랑하는 자를 찾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이 여인이 사랑하는 자를 만나고자 하는 것만큼 예수님을 사모하 면서 찾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병이 난 적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 급하니이다”(시 42: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병이 나도록 신랑을 사모하여 찾아다니는 신부의 갸륵한 마음처럼, 다시 오 실 그리스도를 애타게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미운 사람 이 되지 않기 위해 잠에서 깨어납시다. 안일하고 나태하며 방종한 자세에서 벗어납시 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지금 예수님을 모셔 들입시다. 무관심과 황폐한 영혼으로 인해 닫힌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예수님을 환영 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입시다. 그래서 신랑 되신 예수님께 사랑 받고 인정받는 아 름다운 신부가 되어, 충성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부 단장 3계명
아 4:6-8 / 강문호 목사
부부가 지켜야할 10계명이 있습니다.
1. 둘이 동시에 화내지 마시오.
2. 불났을 때 외에는 집안에서 고함을 지르지 마시오.
3. 눈이 있어도 흠을 보지 말고, 입이 있어도 실수를 말하지 마시오.
4. 아내는 남편을 다른 남편과 비교하지 마시오.
5. 아픈 곳을 긁지 마시오.
6. 분을 품고 잠자리에 들어가지 마시오.
7. 처음 사랑을 잊지 마시오.
8.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영화 감독 강제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로 히트를 치고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화 감독으로 몇 번 영화를 만들었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이제는 가난에 쪼달리게 되었습니다. 방송 대본을 한 편 썼습니다. 자기가 쓴 대본의 연극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방송 작가도 돈을 많이 번데. 당신에게 생활비를 못 주어서 미안해. 영화를 찍어도 실패만 하니 방송작가로 직업을 바꿀가?”
이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편하게 살고 싶다면 방송 작가가 되세요. 나는 당신하고 안 살아요. 내가 결혼한 것은 영화 감독 강제규와 결혼한 것이지 방송작가 강 제규와 결혼하 것 아니잖아요.”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다시 아내와 영화 감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히트 작품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나왔습니다.
9. 어떤 것도 숨기지 마십시오.
10. 서로 감싸주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신랑되는 남자가 신부에게 요구하는 3계명이 있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신부된 우리에게 요구하는 3계명이기도 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깊은 사랑을 그려놓은 책입니다.
제1계명 살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신랑은 신부에게 친청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옛날 모든 것을 버리고 신랑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하자고 말합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세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오라”(8)
신부 술람미의 고향은 레바논입니다. 신랑 솔로몬은 레바논 신부의 친정에 와서 말하는 장면입니다. 신부가 태어난 집, 신부가 자란 집을 떠나 예루살렘 신랑의 집으로 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부의 제1조건은 신랑이 가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지금 신랑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4곳을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다른 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라마나욧은 성령의 영성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신하들을 그 곳에 보냈습니다. 가기만 하면 그 곳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직접 갔습니다. 사울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땅마다 그 곳만 흐르는 독특한 영이 있습니다. 술람미는 네 곳에서 살았습니다. 신랑 솔로몬은 네 곳을 이제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레바논 산은 3,088m입니다. 길가메시 옛 서사시에는 레바논산은 “신의 거처” “백향목산” “이스타르의 거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에스겔 31장에서도 레바논산은 신의 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레바논 산에 자라고 있는 백향목은 하나님이 직접 심고 기르시는 나무로 전설적으로 내려 오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경외의 산입니다. 사자와 표범이 득실거리는 산입니다.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접근하지 못 하는 산입니다. 인간을 공격하는 맹수가 있을 뿐 아니라 신령한 신들이 사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신부가 그런 신비스러운 곳에 있으니 내려 와서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레바논은 술람미의 고향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합니다. 더구나 옛날에는 고향을 떠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부는 아무리 신적인 곳이라 할지라도 신랑과 함께 떠나야 하는 것이 신부입니다. 떠날 수 없는 곳을 신랑 때문에 등질 수 있어야 신부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도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봉사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아 보이는 여자인데 그 남편과 자녀들은 교회에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남편과 둘이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긴 시간 마음놓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아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불같은 고약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한 번만 화를 냈다 하면 아이들과 저는 숨어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올바른 교회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지를 않습니다.”
목사님은 부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해주었습니다. 아내는 목사님의 충고를 듣고 말했습니다.
“잘못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부인은 목사님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남편이 낚시대를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 오다가 실수하였습니다. 새로 사다 놓은 산드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비싼 등이었습니다. 천정에 달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남편은 낚시대로 그 전등을 건드렸습니다. 산산조각났습니다. 남편은 당황하였습니다. 아내가 불호령을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남편은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빗자루를 가지고 오더니 산산조각난 전등을 쓸어 모이며 남편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그럴 수도 있지요. 다시 사면 돼요. 괜찮아요.” 그 다음 주일 아침예배에 그 남편은 아내와 나란히 교회에 나왔습니다. 남편은 그 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제의 살던 자리를 떠나야 참된 신부입니다.
아마나산이 나옵니다.
아마나는 “끊임없이 흐름” “영원” “불변”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끊임없이 하자는 말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사랑도 그래야 합니다. 왕하 5;12을 보면 아마나는 아마나 강의 발원지입니다. 검룡소로부터 한강이 흐르는 것처럼, 뜬봉샘이 금강의 발원지인 것처럼 아마나는 길고 긴 아마나 강의 발원지입니다.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부 사랑이 그러기를 주님을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과의 사랑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술람미 신부는 아마나산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배웠습니다. 그런 것을 배웠으니 그 곳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남편은 사진 찍어 작품을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이 없습니다. 건달같습니다. 밤낮 놀러 다니는 것같습니다. 항상 경치 좋은 곳만 찾아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관광만 하는 것같습니다. 아내가 뼈꼴 빠지에 양품점을 경영하면서 가정 경제를 이어가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카메라입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 카메라는 군인의 총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남편은 카메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작가용 카메라라 대단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말도 못 하고 실망에 차있었습니다. 아내가 알았습니다. 아내는 빚을 내서 카메라를 사주었습니다. 남편은 감격하였습니다.
“여보! 그 카메라 잘 잃어버렸어요. 이제 사진찍기는 그만 두고 취직해서 돈 좀 벌어 와요. 저 혼자 고생하잖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아내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스닐산이 등장합니다. 스닐은 “흰 산”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성결입니다. 신부는 성결하여야 합니다. 대상 5;23을 보면 높은 산입니다. 흰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결하게 보입니다. 신부 술람미는 그 곳에서 성결을 배웠습니다. 성결을 몸에 익히고 떠나야 합니다. 신랑을 따라 떠나야 합니다.
헤르몬산이 등장합니다. “성별”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레바논 산중에 가장 높은 산입니다. 요단강의 발원지입니다. 2,814m입니다. 신부는 성별되어야 합니다. 신부가 그런 곳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신부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곳에서 성결하게 그리고 절개를 지키며 살고 있는 여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부된 우리는 네 산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나야 합니다. 신랑 예수님과 함께 떠나야 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아마산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신랑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스닐산처럼 성결한 신부가 되어 신랑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헤르몬산처럼 거룩하게 성별되어 신랑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재2계명 신랑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향으로 단장하라.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리스도가 좋아하는 향으로 단장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라고 하는 말은 신랑 솔로몬이 첫날 밤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신랑은 이제 신부와 함께 몰약산과 유향산으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몰약산과 유향산은 실제 산 이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두 산은 없습니다. 그리고 몰약과 유향은 이스라엘에서 생산되지 않습니다. 화장품 종류입니다. 최고 화장품입니다. 몰약산과 유향산으로 가겠다는 것은 신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부의 몸에는 몰약과 유향의 향기가 흐르고 있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신랑되신 예수님은 단장하고 기다리는 신부에게 오시겠다고 하시는 예언입니다. 신부 단장은 몰약과 유향입니다. 꿀이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하여도 벌이 옵니다. 돈이 있으면 쓰리꾼이 눈독을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집은 문을 열어놓고 외출하여도 도둑이 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좋아하는 영성으로 단장하고 있으면 주님은 찾아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중세기에 가장 유명한 성자로 지목되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말틴(Martin)입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온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에 말틴은 헝거리에서 태어 났습니다. 말틴은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말틴은 수도승이 되어 경건한 삶을 살기를 소원하며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말틴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황제를 위한 군대가 따로 있었는 데 그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말틴도 그 군대에 입대하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틴은 자기의 소원과는 달리 아버지의 권유로 프랑스에서 근무하는 기병대에 입대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습니다. 말틴은 아미엔스(Amiens) 정문 밖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옷도 입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불쌍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말틴은 이 거지를 보자 말자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옷 자락을 반 발라냈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거지에게 입혔습니다.
그 날 밤이었습니다. 말틴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거지에게 준 옷자락을 입고 말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은 말틴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신비한 기적이 말틴을 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교회 중직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튤스(Tours)에서 감독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말틴은 감독 자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숨어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말틴과 함께 살던 거위들이 꺽꺽 울어대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수도승의 길을 걸었습니다. 늘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시면서 기사와 이적으로 함께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향기로 단장된 신부에게 주님은 빨리 오고 싶어 하십니다. 아름다운 신부에게 예수님은 다가 오십니다. 예수님은 향기를 가진 신부를 찾으십니다. 신부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제3계명 사자와 표범의 눈을 가지라.
신랑은 신부에게 말합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세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오라.”
신랑이 신부를 사자굴이 있고, 표범이 있는 위험한 산에서 내려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랑은 신부가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한 경험이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살던 곳에는 사자와 표범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부는 사자와 표범과 싸운 경험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싸우고 떠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운전기사를 채용할 때 큰 사고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 고용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큰 경험을 가지고 조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모진 훈련을 받은 신부일수록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7-9)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려면 사자와 표범같은 눈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양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 이리에게 당하게 됩니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니까 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나오자 말자 목사입니다. 세상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감리교 감독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 세상을 알았습니다. 악한 곳이었습니다. 바벨론 시스템에서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보를 사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양의 눈으로 살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사자와 표범의 눈으로 살아야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랑은 사자산, 표범산에서 훈련받은 신부에게 이제는 같이 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신조는 이것이었습니다.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그리고 무대뒤로 조용히 사라진다.
이해가 갑니다.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신혼 여행지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시고 계십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는 정말 행복하였습니다. 일생동안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여 주면 흠잡을 데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들들 볶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제 그렇게 잉꼬 부부로 살았냐는 듯이 짜증을 부리면서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만 들지 않으면 기물들을 던지고 깨뜨리고 잠도 못 자게 들들 볶아 댔습니다. 옆에서 보다 못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 데 할머니 좀 사랑해요. 지금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잖아요.”
그 때 할아버지는 목사님 손을 붙잡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저 할머니는 나에게 평생 싫은 소리 한번 안 듣고 살았어요. 너무 곱게 살았어요. 이제 내가 죽게 되면 험란한 세상에서 별별꼴을 다 보고 살텐데 살기 힘들 것같아요. 그래서 내가 세상에 적응시키고 죽으려고 일부러 그래요.”
할아버지는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깊은 속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속이 깊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훈련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혹한 훈련을 받고 세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신랑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세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오라.”
훈련받은 곳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랐습니다. 변화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셨습니다. 좋았습니다.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살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곳에서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내려 오셨습니다. 훈련받은 병사는 전쟁터로 가야 합니다. 공부끝낸 학생은 배운 것으로 직장에 공헌하여야 합니다. 사자와 표범 훈련을 받은 신부는 세상에 내려와 신랑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부된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가혹한 영적 전쟁을 하고 이기고 신부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훈련받은 신부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흠없다고 말하는 신랑
이렇게 3가지 계명을 지킨 신부에게 신랑은 말합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7)
신랑은 신부에게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대로 신부는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집 딸입니다. 일을 많이 하여 얼굴이 검게 타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오빠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은 흠많은 여자입니다(1;5-6)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수많은 예루살렘 여자들중에 하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2;1) 그러나 부족하고 흠이 있는 여자를 신랑은 아무 흠이 없다고 인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흠많고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흠없고 완전하여졌다고 인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허물과 죄투성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나가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 죄를 짊어지신 후에 우리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무 흠이 없구나.”
결혼한 신랑 신부는 동침후 아무 흠이 없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신명기는 우리에게 상세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흠이 발견되면 신부를 죽이고, 흠이 없는 데 신랑이 누명을 씌우면 신랑을 벌금을 내고 평생 그 여인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맞이하여 그에게 들어간 후에 그를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이르되 내가 이 여자를 맞이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가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그 처녀의 부모가 그 처녀의 처녀인 표를 얻어가지고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처녀의 아버지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에게서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나 보라 내 딸의 처녀의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펼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을 씌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평생에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2:13-21)
그런데 주님을 우리를 보시고 선언하여 주십니다.
“아무 흠이 없구나.”
이것은 전적인 십자가 은혜입니다. 신부를 사랑하기에 흠이 있어도 흠이 없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른 결혼 풍습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하고 일년 동안은 병역이 면제됩니다. 직장 생활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 24:5)
평생에 가장 소중한 날은 결혼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짝을 만나 평생을 새 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년동안은 슬픈 일을 가정에 당하여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행복을 깨뜨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일년 동안은 동네 위원회에서 돈을 줍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필요한 곳에 가서 공부하고 즐깁니다. 여행도 합니다.
신혼의 사랑과 새 생활에 흠뻑 빠지게 하여 줍니다. 여인들은 떠나 온 가족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혼자 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것을 금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시 45:10-11)
우리가 우리 할 일만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흠이 없다고 하시며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의 아름다움
아 4:1-6
이 말씀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술람미 까지 행차를 할 때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오늘은 솔로몬 왕의 고백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부분 일곱 가지를 꼽으면서 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꼽은 일곱 가지 아름다운 곳은 눈과 머리털과 이와 입술과 뺨과 목과 유방입니다. 오늘은 이 일곱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생각하려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앞서 두 가지를 전제하겠습니다.
첫째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나 말씀을 들을 때는 항상 경건한 마음과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지개를 켠다든지 큰 입을 벌려 볼품없게 하품을 하는 것 등은 불경건한 자세입니다. 속히 시정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특별히 아가서를 읽을 때는 더욱 경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가서를 인간의 속된 사랑으로 전락시키고 말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오늘 말씀에 있는 일곱 가지 아름다운 부분을 성경에 기록된 순서대로 말씀드리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신앙적 영적 자세에 따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비둘기와 같은 눈입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아 4:1)
솔로몬이 제일 먼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곳은 눈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입니다. 신부가 쓰고 있는 베일 속에서 반짝이는 술람미 여인의 눈길이 비둘기 한 쌍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같이 아름답고 곱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왜 술람미 여인의 눈을 비둘기에 비유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비둘기는 순결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노아는 지면에 물이 마른 여부를 알기 위해 처음에는 까마귀를 날려보냈는데,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까마귀는 수면에 떠있는 많은 송장들을 뜯어먹기 위해 방주로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보냈는데 비둘기는 정결한 짐승이어서 앉을 장소가 마땅치 않아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비둘기는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은 눈빛이 맑고 깨끗하고 순결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눈만 아니라 그의 마음씨가 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돈과 명예와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들 때문이 사회가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눈도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마음도 청결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복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술람미 여인의 뺨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뺨이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너울 속의 뺨은 석류 한쪽 같다"(아 4:3)고 하였습니다. 한쪽이란 석류 한 개를 두 쪽으로 나누어 양 볼에 한쪽씩 부친 것 같다는 뜻인데, 베일을 쓰고 신랑을 맞는 그의 다소곳한 얼굴이 수집음과 설레임으로 볼그레해 지는 것이 그렇게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미혼 여성들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히죽히죽 웃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이고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볼그레한 색을 성경에서는 수치를 당할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례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지도 아니하였다"(렘 8:12)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언제 얼굴을 붉히면서 수집어 하고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그것은 죄를 범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따라서 뺨이 볼그레하게 어여쁘다는 말의 영적인 의미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깨닫고 마음을 열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회개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얼굴가죽이 두터운 사람,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뉘우치면서 얼굴을 붉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암양과 같은 이입니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아 4:2)
술람미 여인의 이가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양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이가 희고, 윤기가 있다는 뜻이고, "쌍태를 낳은 양과 같다"는 것은 이가 아래위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손상되거나 충치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이가 군형을 이루지 못하여 뻐드랑 이가 되었든지, 누렇게 황금색이 짙으면 그 얼굴의 아름다움은 손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이가 희고 아름답게 정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는 미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잘 씹으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가 건강하다는 것은 신체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가 나쁘면 소화기능이 약해지고 음식물 섭취도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건강도 좋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영적인 이도 잘 정렬되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건강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의 건강한 이는 무엇에 필요합니까?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진미가 나올 때까지 씹고 또 씹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으면 그래서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리면, 주님은 아름답다고 하지 아니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제일 처음 믿기 시작하였어도 말씀의 진미를 알지 못하고, 어린 아이들 같이 젖이나 먹음으로 결국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는 입술입니다.
"네 입술은 홍색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아 4:3)
입술이 홍색실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때도 붉은 색깔의 루즈를 입술에 발랐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간 여성들이 입술에 루즈를 바르는 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의도인 것 같은데, 요즘은 붉은 색이 아니라 아프라카 흑인들의 입술 색깔과 같이 검으티티한 색깔도 있는 것을 봅니다. 여하간 입술의 붉은 색은 기력이 강장하고 혈기가 왕성한 여성의 특징인데, 루즈를 바르지 않아도 그런 색을 띠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붉은 색에 대하여 또 다른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그 성에 살던 기생 라합의 가족들은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고 구조를 기다렸는데, 붉은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입은 아름다운 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제단의 숯불로 지져 정결케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결한 입을 소유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씻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우선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하는 신앙의 입을 가지고, 거짓과 악담과 불평과 불만과 시기와 후욕 등등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은 일체 입에 담지 않는 거룩하고 깨끗한 입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입을 가져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에서 주님을 높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침에는 기도의 입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낮에는 전도의 입술을 열어 복음을 전하고, 저녁에는 찬양의 입술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시는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고 하였는데, 여러분의 입에서 아름답고 덕스러운 말씨가 쏟아져 나와 이웃에게 덕을 끼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심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입은 루즈를 바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이고 남 성도들도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입입니다. 믿습니까?
다섯 번째는 검고 윤택한 머리털입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아 4:1)
길르앗 산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넓은 평야지대를 가르치는데, 지금은 이곳을 골란고원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도중 이곳을 점령하자 루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는 모세에게 이곳을 기업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은 우양이 많고 그곳은 목초지가 매우 좋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풀이 많고 물이 맑은 곳에서 자란 염소와 양들의 털은 기름지고 윤택하며 검은 색깔도 더욱 선명합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머리털이 길르앗의 좋은 초장에서 먹고살진 염소의 털과 같이 기름지고 윤택하며 아름답게 빛난다고 하였습니다.
머리털의 영적인 의미는 성도의 아름다운 행실을 의미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빚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단정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인데, 이와 같이 성도의 아름다운 행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상도들이 주님께 영화를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는 것처럼 아름다운 행실로 자신을 단장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 아름답다는 칭찬을 듣는 방법이며, 다른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름진 꼴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말씀의 꼴을 먹고 마시고 마음과 생활에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소금이 되는 삶이며 빛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에게 보기에 아름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섯 번째는 목입니다.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같고"(아 4:4)
성경에서 목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부서로 표현되고 있는데, 때로는 완악한 마음, 불순종과 불신앙의 자세와 마음을 뻣뻣한 목, 혹은 목이 곧은 백성으로 표현하였고, 음란하고 방탕한 사람의 목을 길게 드리운 목이라고 하였습니다(사 3:16). 그러나 술람미 여인의 목은 무거운 짐에 눌린 목도 아니고, 교만한 목도 아닙니다. 다만 복음으로 자유와 해방을 맞은 자의 목으로써 바로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이었습니다.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중동지역의 여성들이 목에 구술 목거리를 겹겹이 두른 것을 계단식 망대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망대는 견고한 것을 특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망대"는 더욱 견고하여 난공불락이어야 합니다. 그의 목을 망대에 비유한 것은 그의 의지의 견고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적군들이 맹공을 가할지라도 함락시킬 수 없는 것처럼 신랑 솔로몬을 향한 일편단심은 확고 부동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원수 마귀는 총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들이 맹공을 가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 하고 함락시킬 수 없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이런 믿음을 가졌고,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또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목은 든든합니까?
최후로 두 유방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아 4:5)
사랑하는 남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아름다운 유방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남녀를 막론하고 풍만한 유방이 있어야 하고, 노유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유방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유방이란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유방이란 자녀를 생산하고 그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야 할 아름다운 유방은 전도를 하고 전도한 초신자를 좋은 신앙인이 되도록 지도하고 가르칠 수 있을 때, 좋은 유방이 있는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도 못하고, 전도를 하여 교회로 인도하기는 하였으나 그를 키우지 못하고, 오히려 다시 세상으로 보내는 신자는 아름다운 유방이 없는 신자입니다. 자! 이제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유방이 있습니까? 아니면 유방은 말라붙고 입도 말라붙어 평생토록 전도도 못하는 신자는 아닙니까? 주님은 지금 여러분의 유방을 보시기를 바라십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일곱 가지 비밀
아 4:1-5 /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 박사(조직신학)
1. 사랑하면 서로 칭찬하고 칭찬 받아야 한다.
2. 본문은 단순한 외적 찬양을 넘어 신실한 교회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찬사를 상징한다. 여기에 담긴 사랑의 비밀을 살펴보자.
1) 비둘기 같은 눈(교회와 성도의 순결과 경건)을 칭찬하다(1절)
비둘기는 온유(마 11:29)와 순결을 의미한다. 솔로몬이 보기에 술람미 여인의 눈은 너울 속에 있는 비둘기 같았다. 너울은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우는 데 쓰는 일종의 베일이다. 이삭의 배필 리브가가 썼던 바로 그것이다(창 24: 65). 이 너울을 벗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랑이다. 그리고 신랑은 신부의 너울을 벗기며 최초로 신부의 눈을 볼 것이다. 수줍게 살며시 올려다보는 신부의 눈은 했을까? 솔로몬은 어여쁜 신부의 눈을 칭찬하며 그녀의 순결과 온유함을 칭찬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다(레 11: 44-45). 술람미 여인처럼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께 온유함과 신앙적 순결함을 인정 받아야 한다.
2) 길르앗 산에서 내려오는 염소 같은 머리털(교회와 성도의 도덕적 순종과 신앙의 선행)을 칭찬하다(1 후반절)
넓게는 요단강 동편, 헤르몬산 남쪽 지역(창 37:25)을 가리키는 길르앗(민 32:1)은 거대한 초원을 거느린 목축하기 좋은 땅이었다. 그래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민 32:1-42) 지파가 탐욕을 품었던 땅이었다. 비옥한 이곳 목초지에서 자란 염소는 털이 길었다. 당연히 숱도 많았고 진했다. 긴 머리는 아름다움과 도덕적 순종의 덕을 말한다(고전 11:10. 15; 딤전 2:11; 벧전 3:4). 단정하면서도 아름답고 진한 긴 머리결을 가진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찬사를 받았다.
단정한 긴 머리는 신앙의 선행과 영광(고전 11:15)을 나타낸다. 믿음은 단지 믿음에 그치지 않는다. 반드시 도덕적 순종과 선행으로 그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전 11: 2-1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면 반드시 순종과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3) 쌍태 낳은 양의 희고 가지런한 이(교회와 성도의 깨끗함과 질서)를 칭찬하다(2절)
양은 순종의 상징으로 제사의 제물이었다(레위기). 양의 이빨은 식물을 섭취할 뿐 남을 해하지 않는다. 희고 가지런한 이는 사랑스런 미인의 상징이다. 술람미 여인은 건강하고 고른 치아를 가진 미인이었다.
질서정연한 이빨은 교회의 균형과 질서정연한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교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과 질서가 있어야 한다. 목욕한 양은 희고 깨끗하다(사 1:18).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교회와 성도는 희고 정결해야 한다. 유월절 어린양 제물이 되신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정결케 함을 잊지 말라.
4) 홍색 실 같은 입술과 어여쁜 입(교회에 주신 복음과 구원의 복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다(3절)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운 입술은 관능적이고 매력적이다. 술람미 여인의 입술은 홍색실 같고 입은 매력적이었다. 홍색실은 실에다 정성을 드려 짙은 홍색의 물감을 들인 실로 성막의 재료(출 25: 4)와 제사장의 의복(출 28: 5) 그리고 정결 의식(레 14: 4)에 사용되었다. 젊고 매력적인 술람미 여인의 입술 빛깔은 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과연 그 입술과 입을 통해 나오는 사랑의 언어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솔로몬은 그만 그 매혹적 입술에 감격하고 있었다.
복음(그리스도의 복 된 소식)을 전하는 성도의 입술도 홍색실(피 상징)처럼 아름답다(롬 10:15; 사 52:7). 홍색실은 구원(수 2:18, 21)과 유월절 문설주의 피(출 12:7)를 떠올리게 한다. 성도는 입술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입술이 되어야 한다.
5) 석류 한쪽 같은 뺨(교회와 성도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찬양하다(3절 후반)
너울 속 석류 한쪽 같은 뺨은 석류 한쪽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중동 지방의 석류는 정말 빛깔이 아름답고 속이 알차고 빛난다. 그 석류 속 알알이 알이 차서 빨갛게 박혀있는 석류 알맹이는 열정과 풍성한 열매를 상징한다. 솔로몬은 너울 속으로 빛나는 신부의 아름다움 뺨을 목격하며 온 세상이 축복으로 붉게 물드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붉은 석류는 은밀한 부끄러움 즉 회개(스 9:6; 겔 16:63)의 상징이면서 신비로운 알맹이의 충만과 풍요를 동시에 나타낸다. 신부(술람미 여인)에게는 신랑(솔로몬)만 볼 수 있는 은밀한 아름다움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보고 계신다. 성도의 그 은밀함은 믿음과 회개로부터 나옴을 잊지 말라! 여러분에게는 신부 같은 그 은밀한 아름다움이 있는가?
6) 방패가 달린 망대 같은 목(교회와 성도의 견고함)을 찬양하다(4절)
사랑은 굳건한 망대 같아야 한다. 예루살렘 성에는 무기도 보관할 수 있고 외부 침입자를 감시하며 천개의 방패가 달린 다윗이 세운 망대가 있었다. 대개는 목이 긴 여인이 아름답다. 방패가 달린 망대 같다는 표현을 볼 때 술람미 여인의 목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여 더욱 아름답고 보였을 것이다.
망대처럼 늘씬한 목은 굳은 마음을 나타낸다. 신앙은 망대처럼 굳건하고 단단해야 한다. 견고한 목은 굳은 신앙의 상징이다.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 18)라고 말하는 굳건한 믿음의 고백을 보라!
7)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은 유방(교회와 성도의 신앙의 균형과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찬양하다(5절)
쌍태 어린 사슴(노루)은 아마 가젤(gazelle) 즉 영양(羚羊)을 말할 것이다. 영양은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 사람들 눈에 띠지 않는 산악 지역에 은밀하게 사는 동물이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유유히 사는 영양은 신비롭다. 아름다운 백합화 향기를 풍기는 신부의 유방은 신비롭고도 아름답다.
유방은 신앙의 균형을 상징하고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백합화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상징한다(사 35: 1-2; 마 6:28). 마르고 쭉정이 같은 사랑이란 없다. 모든 사랑은 풍성해야 한다. 본문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인한 풍요로움과 영광의 풍성함을 상징한다(사 66:11). 교회는 말씀 선포와 교육(케리그마와 디다케)의 신령한 젖(벧전 2:2)을 먹여 사랑스럽고 풍성한 신앙의 아들딸들을 길러내야 한다(살전 2:7-8).
2. 나가면서
1) 신부 없이 가정 없듯 "교회 없이 구원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2) 교회가 복 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칭찬이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3) 당신은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의 신부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신부로서(엡 5:18-21)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곱 가지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