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속의 시방 세계
하루는 24시간이다. 누구에게나 독같다. 그러나 24시간을 느끼는 심리적
시간은 전혀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시간의 무게가 똑같을수는 없다.
두 사람이 체력 등 기본적인 조건이 동일한 가운데, 농구 시합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한 사람은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농구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농구 자체를 즐긴다면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더 지치게 될까? 농구를 하는 내내 누가 더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시간의 무게에 짓눌리며 늙어가게 될까?
두사람이 농구를 하는 물리적 시간은 똑같다.
그러나 심리적인 시간은 많은 차이가 난다.
농구는 수단일 뿐, 다른 목적을 위해 농구를 하는 사람은
열 시간의 중노동처럼 시간의 무게에 시달릴 것이다.
농구 자체를 본 목적으로 신나게 즐기는 사람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가 버릴 것이다. 이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지금 여기'의
실존하는 삶속으로 마음이 온전히 녹아들어 행위자와 행위가
둘 아니게 된다면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게 된다.
미래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의 순간을 수단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두 마음의 갈등구조 속에 빠져든 것에 다름 아니다.
매 순간이 그대로 수단이며 목적일 때 비로소 두 마음이 아닌,
온전한 한마음으로 시간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창조성이 발현(發現)되며 신명나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이 끊어지고 공간마저 사라진 가운데
한마음만이 너울거리며 노동이 춤이 되고 춤이 노동이 되는
화엄의 세상에 대해 고인들게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신라시대 화엄의 법석을 펼치신 의상조사께서는 법성게를 통해
시공(時空)을 초극(超克)한 화엄 법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셨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티끌 속에 시방 세계가 머금어져 있다.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들이 또한 이와 같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헤아릴 수 없는 원겁이 곧 일념이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일념이 곧 무량겁이다.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