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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선생연보(寒水齋先生年譜)
신사년(1641) 명 나라 의종황제(毅宗皇帝) 숭정(崇禎) 14년 우리나라 인조대왕 19년
5월 8일(임오) 해시에 선생이 한성(漢城) 동현(銅峴)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조모 강 부인(姜夫人)이 데려다가 길렀는데, 선생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몸가짐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모두 덕기(德器)가 될 줄 알았다.
임오년(1642) 선생의 나이 2세
계미년(1643) 선생의 나이 3세
갑신년(1644) 선생의 나이 4세
을유년(1645) 선생의 나이 5세
병술년(1646) 선생의 나이 6세
정해년(1647) 선생의 나이 7세
항상 왕고(王考) 증 찬성공을 모셨는데, 공이 매일 닭이 운 뒤에 일어나니 선생도 닭이 울면 일어나는 것으로 상규(常規)를 삼았다. 모든 크고 작은 전어(傳語)나 빈객들의 통자(通刺 명함(名銜)을 전하는 것)를 모두 스스로 담당하고 조보(朝報)의 정목(政目)도 모두 입으로 외어 고하였으므로 사류(士類)의 진퇴와 시론의 득실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뚜렷이 기억하여 후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빠뜨리거나 잊은 것이 없었다. 선생은 평생 동안 반드시 파루(罷漏) 이전에 잠에서 깨었는데, 선생은 매양 “내가 5, 6세 때부터 할아버님을 모시고 잤으므로 이렇게 습성이 되었다.” 하였다.
무자년(1648) 선생의 나이 8세
기축년(1649) 선생의 나이 9세
찬성공의 임지(任地)인 여산(礪山)에 있었다.
이때 군(郡)에 의심스러운 송사(訟事)가 있어 군수가 여러 번 바뀌었으나 판결이 나지 않았다. 찬성공이 개좌(開坐)하여 문안(文案)을 살펴보고 있는데, 선생이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피차의 송안(訟案)을 집어 살펴보고는 싱긋이 웃고 돌아가니, 찬성공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 송사는 판결하기가 쉽습니다. 저들 피차가 모두 세전지물(世傳之物)이라 한다면 그 문권(文券)이 동시대 동일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서 종이의 길이나 글씨의 교졸(巧拙)이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않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것이 반드시 위조일 것입니다. 어찌 이로써 증거를 삼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공이 두 문권을 시험해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드디어 이로써 힐문하니 위조한 자가 과연 승복하였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이미 산학(算學)이 성취되어 아무리 산학에 능한 늙은 아전이라 하더라도 풀기 어려운 것이 있을 적마다 반드시 와서 물으면, 선생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대답해 주었다.
경인년(1650) 효종대왕 원년 선생의 나이 10세
여산에 있었다.
선생이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므로 찬성공이 매우 사랑하여 밤이면 항상 품속에 품고서 입으로 《시전(詩傳)》을 전수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는 문득 줄줄 외웠다. 날마다 이렇게 하여 《시전》 전질을 모두 구전(口傳)으로 배웠다 한다.
이해에 시남(市南) 유계(兪棨) 선생이 마침 여산 관아에 왔다가 선생을 보고서 극찬하면서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허여하였다. 선생이 요청하여 《서전(書傳)》 기삼백 주(期三百註)를 배우는데 한번 듣고는 이내 깨달았으므로 시남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신묘년(1651) 선생의 나이 11세
여산에 있었다.
임진년(1652) 선생의 나이 12세
여산에 있었다.
계사년(1653) 선생의 나이 13세
여산에 있었다.
갑오년(1654) 선생의 나이 14세
찬성공이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었으므로 찬성공을 따라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을미년(1655) 선생의 나이 15세
전주 이씨(全州李氏)에게 장가들었다.
세종대왕의 별자(別子)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후손인 군수 증 영의정 중휘(重輝)의 딸이다.
병신년(1656) 선생의 나이 16세
아들을 낳았는데 이내 죽었다.
정유년(1657) 선생의 나이 17세
무술년(1658) 선생의 나이 18세
찬성공의 임지인 영천(榮川)에 있었다.
영천군에 제민루(濟民樓)가 있는데 선생이 이 누에 올라 지은 율시(律詩) 한 편을 영천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고, 뒤에 이 시를 판각(板刻)하여 이 누에 걸었다고 한다. 또,
큰소리로 태공법을 읽고 / 大讀太公法
길게 양보음을 읊었네 / 長吟梁甫吟
내 나이 아직 팔십이 못 되었으니 / 吾年未八十
무엇 때문에 눈물로 옷깃을 적시리 / 何事淚霑襟
라고 읊은 절구 한 수가 있는데, 이때 효종이 큰 뜻을 품고 문무(文武)의 인재를 구하였기 때문에 이런 시를 지은 것이다.
연당(蓮堂)에서 글을 읽을 때 하루는 저녁에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우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소리가 멀리에서부터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러나 선생은 단정히 앉아 글만 읽으며 못 들은 체하니 그 소리가 창밖에까지 와서는 멈추었다. 조금 있다가 시자(侍者)가 와서, 이 연당 근처에는 본래부터 이런 괴변이 있었다고 하였다.
8월 7일(임신) 아들 욱(煜)이 출생하였다.
기해년(1659) 선생의 나이 19세
경자년(1660) 현종대왕(顯宗大王) 원년 선생의 나이 20세
관학(館學)에서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의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청하는 소(疏)와 동춘당(同春堂) 송 선생(宋先生)을 만류하도록 청하는 소에 참여하였다.
선생이 남학 장의(南學掌議)로서 상소의 일을 주도하였다.
신축년(1661) 선생의 나이 21세
가을에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였다.
12월 진사 회시(進士會試)에 합격하였다.
선생이 과장(科場)에 들어가니 부제(賦題)가 가고(家稿) 중에 있는 잘 지은 부(賦)의 제목과 같은 행운을 만났으나 그것을 쓰지 않고 스스로 지어 올리고서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가정의 교훈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서였다.”고 하였다.
임인년(1662) 선생의 나이 22세
봄에 진사 방목(進士榜目)에 올랐다.
이때 찬성공은 선산(善山)을, 고(考) 증 의정공은 강릉(江陵)을 맡고 있었는데, 강 부인(姜夫人)과 비(妣) 이 부인(李夫人)도 모두 무고하였다. 선생은 선산에서 강 부인을 모시고 강릉으로 가서 문희연(聞喜宴)을 베풀었다.
제천(堤川)에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이때 백씨(伯氏)의 임소인 제천에 와서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강릉으로 가는 길에 찾아 배알하였다.
11월 찬성공이 별세하였다.
선생은 자신이 양육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복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예를 행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한결같이 복을 벗기 전과 같이하여 심제(心制)의 뜻을 부쳤다.
계묘년(1663) 선생의 나이 23세
관학이 율곡(栗谷)ㆍ우계(牛溪) 양현(兩賢)의 종사(從祀)를 청하는 소에 참여하고, 또 변무소(辨誣疏)에 참여하였다.
김강(金鋼) 등이 상소하여 양현을 헐뜯고 무함하니, 선생은 관학(館學)의 소색(疏色 소를 담당한 사람)으로 상소하여 변무하였다. 선생이 성균관에 들어갈 적마다 당시의 명사들이 모두 선생을 추앙하고 존중하여 모든 사론(士論)을 반드시 선생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11월 1일(을축) 이 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선생의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넘었으므로 기혈(氣血)에 손상이 와서 두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수염과 머리에 흰 털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갑진년(1664) 선생의 나이 24세
1월 이 부인을 광주(廣州) 저자도(楮子島)에 임시로 폄장(窆葬)하였다.
을사년(1665) 선생의 나이 25세
1월 담제(禫祭)를 지냈다. 동춘당 송 선생을 배알하였다.
이때 동춘 선생이 서울에 왔으므로 선생이 가서 배알하니 동춘 선생이 매우 기대된다고 칭찬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먼저 춘옹(春翁 동춘당)을 섬겨 깊은 돌보심과 사랑을 받았다.” 하였고, 온양 행궁(溫陽行宮)에서 진대(進對)할 때에도 동춘ㆍ우암 두 선생을 함께 스승이라고 칭하였다. 선생이 동춘을 스승으로 섬긴 것은 실로 소년 시절이었기 때문에 왕래하며 수업하고 출입한 전말을 후인들이 추고(追考)하여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3월 강 부인이 별세했다.
거상(居喪)하기를 찬성공의 상사 때와 같이 하였다.
병오년(1666) 선생의 나이 26세
관학 유생(館學儒生)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거듭 율곡ㆍ우계 두 선생의 종사(從祀)를 청하고, 또 우암 선생을 만류하도록 청하였다.
선생이 소두(疏頭)가 되었다.
정미년(1667) 선생의 나이 27세
상소하여 바다에서 표류해 온 중국 사람을 잡아 청국(淸國)으로 보내지 말기를 청하였다.
이때 진득(陳得)ㆍ증승(曾勝) 등 1백여 인이 제주로 표류해 왔는데 모두 중국옷을 입고 중국말을 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명 나라 사람이라 말하고, 또 영력황제(永曆皇帝)가 바야흐로 한 지역을 보유하고서 숭정(崇禎)의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였다. 제주 목사 홍우량(洪宇亮)이 이 사실을 상주(上奏)하니, 당시 조정의 의논은 만약 그들을 잡아서 청 나라로 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장차 국가에 화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대신 이하가 모두 두려운 생각을 품고 있었으므로 잡아 보내기로 하는 의논이 굳어져서 깨뜨릴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분개하며 “명 나라 유민(遺民)을 잡아 죽을 땅으로 보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대의에 관계된 것이다.” 하고서 드디어 뜻을 같이하는 몇몇 사람과 밀소(密疏)를 올려 송환의 불가함을 극론하였고, 의정공(議政公)도 그런 내용으로 상소하였으나, 그 상소를 모두 궁중에 머물려 두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때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이 조당(朝堂)에 요청하기를 “제주 목사를 시켜주기 원한다. 그러면 부서진 배를 수리해 주고 의복과 식량을 주어 곧장 제주에서 본토로 되돌려 보내겠다. 혹시 저 청 나라에 발각되어 시끄러운 말이 있을지라도 내가 한 일이라고 스스로 떠맡으면 조정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는 또한 깊이 살피지 않았다. 의정공과 선생의 소가 나옴에 미쳐 민공(閔公)이 선생의 손을 잡고 크게 경복(敬服)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무신년(1668) 선생의 나이 28세
정시(庭試)에 나아갔다.
선생의 시권(試券)이 높은 등급에 들었으나, 한 고관(考官)이, 다른 고관이 사(私)가 있다고 오해하고서 강력히 다투며 선생의 시권을 뽑아 버렸다. 이윽고 탁명(坼名)하고 나서는 서로 돌아보며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 시권을 소매 속에 넣고 와서 선생에게 보이고서 매우 탄식하며 애석해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과거에 되고 안 되는 것은 운명이다.” 하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3월 6일(갑진) 이 부인(李夫人)을 청풍(淸風) 황강(黃江) 선산(先山) 곁에 장사 지냈다.
기유년(1669) 선생의 나이 29세
관학(館學)이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부묘할 것을 청하는 소에 참여하였다.
선생이 태학 장의(太學掌議)로서 소의 일을 주도하였다. 이때 소에 참여한 유생이 매우 많았는데, 상소하고 난 뒤 이상 경억(李相慶億)이 새로 전장(銓長 이조 판서)이 되어 선생을 찾아와서 제생(諸生) 중에 쓸 만한 사람을 묻자 선생이 색목(色目)에 구애되지 않고 5, 6인을 골라 적어 주니 이상이 이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의 중망과 이상의 공정한 집행이 당시에 미담으로 전해졌다.
경술년(1670) 선생의 나이 30세
신해년(1671) 선생의 나이 31세
5월 4일(갑인)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였다.
의정공이 오랫동안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곧은 도리와 감언(敢言)으로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우암ㆍ동춘 두 선생께서도 모두 의정공을 깊이 허여하였다. 의정공은 시사가 날로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서울에 있으며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장차 송추(松楸)로 돌아가서 만년을 보낼 결심을 하였으나, 마침 춘궁(春宮) 찬도(贊導)의 직임을 띠었고 세자빈(世子嬪)을 맞는 대례(大禮)가 앞에 닥쳤기 때문에 감히 지레 물러날 수가 없어서 마침내 선생에게 명하여 먼저 가서 은거지(隱居地)를 수리하게 하고 단오(端午)에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선생이 송추에 도착한 뒤 5월 3일 저녁에 집안에서 부리는 종이 와서 의정공의 수서(手書)를 전하였는데 바로 병이 생긴 4일째 되는 날에 쓴 편지였다. 필획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선생은 시약(侍藥)할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여 하루 낮 이틀 밤에 3백여 리를 달려가 보니 의정공은 이미 별세한 뒤였다. 선생은 의정공의 유지(遺志)를 따라 상구(喪柩)를 모시고 돌아와 선산에 장사 지내고서 이어 눌러앉아 살 계획을 하였다.
7월 의정공을 황강(黃江)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
선생이 이때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여 궤전(饋奠 제사 지냄)의 여가에 매양 《중용(中庸)》을 한 번 읽었는데 삼년상을 마치도록 하루도 폐한 적이 없었다. 선생이 글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중용》과 《주역(周易)》에 힘을 쓴 것이 가장 깊었기 때문에 정의(精義)를 강해(講解)한 것에 전인(前人)들이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항상 베낀 《주역》 두 책을 책상 위에 두고서 조석으로 펴 보았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다.
임자년(1672) 선생의 나이 32세
봄에 의정공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11월 26일(정유) 의정공의 장례(葬禮)를 행하였다.
이 부인(李夫人)과 합장(合葬)하였다.
계축년(1673) 선생의 나이 33세
7월 담제를 지냈다.
수원(水原)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이때 우암 선생이 영릉(寧陵 효종 능)을 천장(遷葬)하는 일 때문에 와서 수원 만의촌(萬義村)에 머물고 있었다. 선생이 가서 배알하고 이어 의정공의 갈문(碣文)을 청하니, 우암 선생이 선생에게 화양동(華陽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아들 욱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갑인년(1674) 선생의 나이 34세
2월 청주(淸州) 화양동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선생이 가서 배알하고 거듭 의정공의 갈문을 청하고, 이어 계사(繫辭), 《계몽(啓蒙)》, 홍범내편(洪範內篇) 등의 글을 강론하고, 또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 《대학(大學)》의 의의(疑義)를 질정하니, 우암 선생이 일일이 머리를 끄덕이며 그 정명(精明)함을 극찬하였다. 이때부터 군(君)ㆍ사(師)ㆍ부(父)를 한결같이 섬기는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하여 왕래하며 자세히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거의 거른 해가 없었다.
4월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이상 상진(李相尙眞)이 이조 판서가 되어 윤 상서 계(尹尙書堦)에게 인재를 묻자 선생으로 대답하였다. 이상이 사람됨을 물으니 윤공은 “물을 것도 없다. 그 사람됨이 영공(令公)의 비류(比類)가 아니다.” 하였다. 제수의 명이 내림에 미쳐 이상과 윤 상서가 주고받은 말을 듣고는 선생이 말하기를 “윤장(尹丈)은 선고(先考)의 집우(執友 뜻을 같이하는 벗)이고, 또 담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여 살았는데 먼저 용납하는 말을 하였으니 혐의가 없을 수 없다.” 하고서 드디어 공릉 참봉을 배수(拜受)하지 않았다. 대개 선생은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이미 당세에 대한 생각이 없었으니 여기에서도 거취가 구차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다.
8월 현종대왕이 승하하였으므로 나아가 반차(班次)에 따라 궐하(闕下)에 서서 곡하였다.
동교(東郊)에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서 성 동문 밖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선생이 가서 배알하였다.
9월 봉은사(奉恩寺)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윤이건(尹以健) 형제와 함께 가서 배알하였다. 이튿날 우암 선생을 모시고 배를 타고서 서빙호(西氷湖)에 이르렀다.
을묘년(1675) 숙종대왕 원년 선생의 나이 35세
1월 우암 선생 신변소(尤菴先生伸辨疏)에 참여하였다.
이때 우암 선생을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이 있었다. 선생이 그 억울함을 변명하려고 초소(草疏)를 가지고 서울로 들어왔으나 여러 문생(門生)들이 이미 소청(疏廳)을 개설하였으므로 드디어 이담(李橝)의 소하(疏下 소두(疏頭)의 반대)에 참여하였다.
가서 귀양 가는 우암 선생을 작별하였다.
우암 선생이 진천(鎭川)에서 출발하여 덕원(德源) 배소(配所)로 가는 도중 평구역(平丘驛)을 지날 때 선생이 가서 배알하고, 이어 모시고 쌍수역(雙樹驛)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15일(병자) 손자 양성(養性)이 출생하였다.
3월 집안 식구를 이끌고 산골로 들어갔다.
이때 시사가 크게 변하자 선생은 두메산골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선영(先塋) 밑 고산촌(孤山村)에 살다가 뒤에 황강촌(黃江村)으로 이사하여 드디어 거처로 정하였다. 우암 선생이 선생이 거처하는 방을 수암(遂菴)이라고 이름 하였는데, 이는 대개 설 문청(薛文淸 명 나라 학자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 중의 “내 마음이 진실로 학(學)에 뜻을 두면 하늘이 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윤5월 도담(島潭)ㆍ구담(龜潭)을 두루 유람하고 퇴도서원(退陶書院)을 찾아보았다.
두 아우 상명(尙明)ㆍ상유(尙游)와 아들 욱(煜)이 시종(侍從)하였다. 나양좌(羅良佐)도 종행(從行)하였다.
10월 소백산(小白山)을 유람하였다.
이어 북벽(北壁) 의림지(義林池)를 유람하고 돌아왔다.
병진년(1676) 선생의 나이 36세
10월 도성(都城)으로 들어가서 외조부 도정(都正) 이공(李公)의 수연(壽筵)에 참여하고서 돌아왔다.
11월 회덕(懷德) 흥농촌(興農村)의 동춘 선생을 천장(遷葬)하는 곳에 다녀왔다.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가서 제사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유봉(酉峯)으로 들어가서 윤증(尹拯)을 심방(尋訪)하여 그와 더불어 정수사(淨修寺)에서 함께 자고 이어 백마강(白馬江)ㆍ고란사(皐蘭寺)를 탐방(探訪)하고 돌아왔다.
정사년(1677) 선생의 나이 37세
6월 3일(무신) 손자 정성(定性)이 출생하였다.
무오년(1678) 선생의 나이 38세
2월 첨정(僉正) 강공(姜公)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첨정공은 바로 강 부인(姜夫人)의 조부이다.
8월 5일(계유) 외조부 도정공(都正公)의 상에 곡하였다.
도정공이 한 달여 동안 설사로 고생할 적에 선생이 산골에서 나와 간병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아 쌀쌀한 가을 날씨인데도 마루에서 밤을 보낸 것이 20여 일이었다. 상사를 당하자 성복(成服)하고서 돌아왔다.
10일(무인)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장인 이공(李公)에게 제사 지냈다.
11월 부평(富平)으로 가서 도정공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기미년(1679) 선생의 나이 39세
1월 음양오행도설해(陰陽五行圖說解)를 지었다.
문집(文集)에 보인다.
태극설(太極說)을 지어 계제(季弟) 상유(尙游)에게 보여 주었다.
계공(季公)이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에게 묻기를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혼연(渾然)한 태극의 전체가 각각 일물(一物) 속에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니 태극과 성(性)은 이물(二物)이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인(人)ㆍ물(物)의 성에 편(偏)ㆍ전(全)이 없을 수 없는데 어찌하여 전체가 각각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가?” 하니, 현석이 답하기를 “천명(天命)이 유행하는 시초의 근원을 가지고 말하면 진실로 인ㆍ물에 편ㆍ전의 다름이 없지만, 형기(形氣)가 구체(拘滯)된 뒤에 미쳐서는 또 물의 강유 대소에 따라 저절로 그 이(理)가 같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물[水]에는 다만 물의 성만이 있고, 불에는 다만 불의 성만 있어서 다시 원초(原初)의 혼연한 태극의 전체가 아니다. 그런데 반드시 태극의 전체를 오행이 각각 갖추어진 속에서 억지로 찾고자 한다면 아마 이런 이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계공이 다시 의심스러운 곳을 물었으나 현석의 대답이 또 분명하지 못했으므로 계공이 현석과 문답한 것을 선생에게 질문하니 선생이 태극설을 지어 답하고, 겸하여 현석에게도 보여 주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그 이(理)를 말하면 전(全)하지 않음이 없지만, 그 성을 논하면 편과 전이 있다. 어째서인가. 하늘이 부여한 이는 일찍이 같지 않음이 없으되 인ㆍ물의 품수(稟受)에는 자연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공허하고 광막하여 조짐이 없으나 만상(萬象)이 성하게 갖추어 있는 것이 통체(統體)인 하나의 태극이고, 만물 가운데 한 이(理)가 관통하는 것이 각각 갖추어진 하나의 태극이다. 그러나 통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흩어져 만 가지가 된 것이 쪼개어 나눈 것이 아니다. 천지 사이의 모든 물건은 형체가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피차를 말할 수 있고, 피차가 있은 뒤에야 바야흐로 대소 편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건에 이미 형체가 없고 피차가 없다면 비록 대소 편전을 말하려 해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다만 이의 본체만을 말한 것뿐이고, 만약 인ㆍ물의 성을 논한다면 또 그에 대한 설이 있다. 대개 기(氣)가 아니고서는 이(理)가 붙을 곳이 없고, 이가 아니고서는 기가 주재(主宰) 받을 곳이 없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할 때는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되는 것이므로 성(性)의 명칭이 여기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기질(氣質)의 품수(稟受)가 각양각색으로 같지 않기 때문에 기에 붙어 있는 이 역시 각양각색으로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율곡(栗谷)의 시에 ‘물은 방원(方圓)의 그릇을 따르고 공기는 대소의 꽃을 따른다.’고 한 것이 가장 잘된 비유이다. 이러므로 금수(禽獸)의 성(性)이 사람과 같지 않고, 초목의 성이 또 금수의 성과 같지 않은 것이니, 이로써 보면 성의 본체가 원초(原初)에는 전(全)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성에 편(偏)ㆍ전(全)이 있는 까닭은 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가 전하면 성도 전하고 기가 편하면 성도 편하다는 것을 의심할 것이 뭐가 있는가. 율옹(栗翁)의 ‘사람의 성이 물(物)의 성이 아닌 것은 기가 국한되기 때문이고, 사람의 이가 물의 이인 것은 이가 통하기 때문이다.’고 한 이 한마디 말씀이야말로 천고에 전해지지 않은 묘리를 발명(發明)했다고 할 수 있다. 성이 바로 이이고 이가 바로 성이지만, 지금 이것을 나누어 둘로 한 것은 내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성현들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일음 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하니 계(繼)하는 것이 선(善)이고 성(成)하는 것이 성(性)이다.’ 하셨고, 주 선생(朱先生)이 말하기를 ‘인의예지가 바로 성(成)한 성(性)이지만, 그 상면(上面)에 또 일음 일양의 도를 계(繼)한 선(善)이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理)가 같다고 하면 가하지만 성(性)이 같다고 하면 불가하다.’고 하였다. 경전에 실려 있는 이와 같은 유가 매우 많으니 상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뒤에 우암 선생이 이 설을 보고는 선생의 설이 옳다고 극찬하였다. 전설(全說)이 문집에 실려 있다.
경신년(1680) 선생의 나이 40세
4월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8월 서울로 가서 외조부 도정공의 대상(大祥)에 참제(參祭)하였다.
윤8월 12일(무술) 화양동(華陽洞)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이때 우암 선생이 성은(聖恩)을 입어 장기(長鬐)에서 돌아왔으므로 선생이 가서 배알하고 그대로 머물러 《춘추호전(春秋胡傳)》의 의의(疑義)를 강론하였다.
신유년(1681) 선생의 나이 41세
8월 19일(기해) 화양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심경석의(心經釋疑)》를 교정하였다. 9월 7일(병진)에 교정을 마치고는 우암 선생을 모시고 파계(巴溪)를 유람하고서 8일(정사)에 하직하고 돌아왔다.
10월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대학(大學)》 문목(問目)이 있었다.
11월 청주(淸州)에 묵방(墨坊)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화양에 있는 우암 선생을 문후(問候)하러 가다가 묵방에 도착하니 마침 우암 선생이 그곳에 와서 있었으므로 그대로 모시고 음성(陰城)까지 갔다가 하직하고 돌아왔다.
임술년(1682) 선생의 나이 42세
1월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월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12월 여강(驪江)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퇴계집(退溪集)》의 의의(疑義)를 강론하였고,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교정에 참여하였다. 최방언(崔邦彦)ㆍ이희조(李喜朝)와 함께 《정서(程書)》 분류의 일을 하였다.
계해년(1683) 선생의 나이 43세
2월 연풍(延豐)에 갔다.
황세정(黃世禎)과 함께 동춘 선생(同春先生)의 연보(年譜)를 교정하였다.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의 특별한 추천으로 인하여 6품에 초수(超授)하는 명이 있었다.
5월 14일(을묘) 여강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6월 1일(임신) 우암 선생을 모시고 충주(忠州) 남창촌(南倉村)에 갔다.
9일(경진) 집으로 돌아왔다.
우암 선생이 주자봉사(朱子封事)에 대한 차의(箚疑)를 올리고, 이어 논술하여 선생을 천거하였다.
그 차자에 “권모(權某)는 학술이 정명(精明)하고 더욱 주자(朱子)의 글에 힘을 썼으므로 강독(講讀)을 돕는 사람으로 갖출 만하니, 작록(爵祿)으로써 구속하지 마시고 신하를 벗으로 삼는 도를 다하신다면 성학(聖學)을 밝히고 성치(聖治)를 돕는 데 반드시 현저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8월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차의(箚疑)를 교정하고는 우암 선생을 모시고 파계(巴溪)와 선유동(仙遊洞)의 수석을 구경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화양에서 우암 선생을 모시고 있을 때 하루는 협실(夾室)에 앉아 있는데 상을 잘 보는 사람이 큰 방으로 들어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그 사람이 창을 사이에 두고 선생의 음성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이가 누구입니까? 내가 일찍이 세상에 대인(大人)으로는 오직 대감 한 분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대감과 같은 대인이 또 있습니다.” 하였다. 우암 선생이 웃으며 “음성을 듣고 아는 것이 얼굴을 보는 것만큼 자세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선생을 불러 들어와 앉으라 하였다. 선생의 상을 살핀 관상쟁이가 말하기를 “명성ㆍ덕(德)ㆍ수명ㆍ지위가 대감과 같으나 다만 말분(末分 말년(末年))이 좋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
11월 23일(경인)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25일(임진)에 우암 선생을 모시고 마암(馬巖)으로 갔다.
12월 7일(갑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승하 소식을 듣고서 우암 선생을 모시고 문의현정(文義縣庭)에 들어가서 곡하였다.
12일(기유) 청풍부정(淸風府庭)에 들어가서 성복(成服)하였다.
우암 선생이 문의에서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떠났고, 선생은 서원(西原)에서 우암 선생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중제(仲弟) 상명(尙明)의 편지에 답하였다.
중공(仲公)이 선생께서 왕명에 응하지 않은 것을 부당하게 여겨 잠시 출사(出仕)하기를 권하였기 때문에 답서를 보내어 출사하기 어려운 뜻을 논하였다. 대개 대신(臺臣)이 특별 천거하면서 초야에 묻혀 있는 선비는 들어 쓰지 않고 다만 서울에 사는 화족(華族)의 자제들만 취하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인혐(引嫌)하고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뜻이 오로지 여기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갑자년(1684) 선생의 나이 44세
2월 아우 상명(尙明)의 상에 곡하였다.
중공(仲公)은 용모가 뛰어나고 풍채가 빛났으며 재지(才智)가 민첩하고 말솜씨가 좋았으며 견해가 탁월하고 조예가 깊었으므로 선생이 매우 애지중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찍 죽으니 선생이 애석해하며 슬퍼하기를 마지않았다. 손수 묘지(墓誌)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5월 회덕(懷德)에 가서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알현하고 나서 동춘 선생의 묘소에 배알하였다. 그리고 판교(板橋)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6월 우암 선생께 하직을 고하고 돌아왔다.
9월 계조모(季祖母) 박씨(朴氏)를 모시고 황강(黃江)으로 돌아왔다.
박씨가 아들도 없이 과부가 되었으므로 중공(仲公)을 양자로 삼았다. 중공이 죽은 뒤에 선생은 중공의 처자를 집 안에 데려다 두고 살피고 또 박씨까지 모셔왔다. 모셔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씨가 이상한 병에 걸리자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병을 살펴보고 정성을 다해 구호(救護)하였으며, 돌아감에 미쳐서는 상사와 제사를 예로써 하였다. 종조(從祖)의 묘지가 길지(吉地)가 아니라 하여 새로 자리를 잡아 이장하고서 박씨를 합폄(合窆)하였는데, 모든 송장(送葬)의 절차를 다시 여한(餘恨)이 없이 하였다.
11월 지평(砥平)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을축년(1685) 선생의 나이 45세
1월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차의(箚疑)를 교정하는 일 때문에 편지를 보내어 불렀으므로 계공(季公)과 함께 갔다.
2월 화양에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교정의 일로 또 부르므로 즉시 달려갔다.
8월 영월(寧越) 육신사(六臣祠) 봉안제문(奉安祭文)을 지었다.
아울러 엄흥도 종향제문(嚴興道從享祭文)도 지었다.
11월 윤효교(尹孝敎)의 편지에 답하였다.
윤증(尹拯)의 아비 선거(宣擧)가 일찍이 강도(江都)에서 실절(失節)한 허물이 있었으나, 스스로 “부끄럽고 한스러워 모든 것을 버리고 학문에 종사하여 속죄할 생각이다.” 하니, 우암 선생은 그 뜻을 불쌍히 여기고 새사람이 된 것을 가상히 여겨 그와 교분을 가졌다. 그 뒤 윤휴(尹鑴)가 《중용》을 개주(改註)하여 성현을 업신여기자 우암 선생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척(指斥)하였으나, 선거는 드러내 놓고 윤휴를 돕는 뜻이 있었다. 우암 선생이 또 선거를 꾸짖으니 선거는 말씀이 엄하고 의리가 바른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윤휴와 절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으려 할 때에 미쳐 우암 선생에게 주려고 쓴 편지에, 윤휴와 화목하게 지내며 정신을 모아 함께 힘을 합쳐 국사를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력히 말하였는데, 이것은 또 윤휴가 예론(禮論)을 주창하여 우암 선생을 해치려는 마음이 이미 드러난 뒤에 있은 일이다. 계축년(1673, 현종14)에 이르러 윤증이 이 편지를 우암 선생에게 올리고 또 그 아비의 갈문(碣文)을 청하였다. 우암 선생은 그 편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선거가 속으로는 일찍이 윤휴와 절교한 적이 없으면서 겉으로만 사람을 속인 것을 알고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하였으므로, 우암 선생이 지은 갈문이 윤증의 뜻을 채울 수가 없었다. 윤증은 다시 지어줄 것을 누차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깊은 원한을 품었고, 또 흉당(凶黨 남인(南人))들이 우암 선생을 원수로 여겨 미워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떨어지고자 하여 이에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암 선생을 극력 비난해 배척하였다. 그리고 또 우암 선생과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말이 매우 도리에 어긋나고 거만하여 드디어 사생(師生)의 의리를 끊어 버렸다. 윤증은 또 그 아비가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을 매우 잘한 도리라고 하여 그 아비가 원래 뉘우칠 만한 허물이 없으니 일찍이 이 때문에 참회하여 자폐(自廢)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우암 선생은 이때에 또 선거가 평생 참회한다고 한 것이 오로지 가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경악하여 때때로 사람을 대하여 선거의 허물에 대해 사리를 따져 배척하니, 윤증은 더욱 방자히 틈을 벌려 다만 서로 절교할 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이 당초에는 윤증과 동문(同門)의 벗으로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인륜에 죄를 얻은 것을 보고는 드디어 그와 절교하였다. 효교(孝敎)는 바로 윤증의 가까운 친족이고 선생에게는 이종(姨從) 동생이 되는데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벼이 절교했다고 책망하였으므로 선생이 마땅히 절교해야 한다는 도리로써 답하였다. 그 답은 문집에 실려 있다.
나양좌(羅良佐)의 편지에 답하였다.
양좌가 윤증이 배사(背師)한 것을 옳다고 여겨 선생에게 글을 보내어 드러내 놓고 윤증을 편들고 우암 선생을 침범 배척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답서를 보내어 꾸짖고 절교하였다.
병인년(1686) 선생의 나이 46세
2월 우암 선생이 그 증손(曾孫) 한원(漢源)ㆍ유원(有源)과 종손(從孫) 군석(君錫)의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종손을 보내어 선생에게 빈(賓)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23일(정미) 선생이 소제(蘇堤)로 가서 계관(戒冠)하였다.
선생이 도착하자 우암 선생이 주인의 예를 행하려 하였다. 선생이, 사생(師生)이 대등한 예를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니 우암 선생은 곧 그 종손(宗孫) 아무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27일(신해) 송촌(宋村)으로 가서 동춘 선생 영시례(迎諡禮)에 참석하였다.
3월 5일(기미) 돈암서원(遯巖書院)을 알현하였다.
7일(신유) 동춘 선생 묘소(墓所)를 참배하고 돌아왔다.
22일(병자) 화양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화양동으로 들어와서 편지를 보내어 선생을 불렀으므로 선생은 즉시 달려가서 차의(箚疑)를 교정하고서 이어 우암 선생을 모시고 속리산(俗離山)으로 가는 길에 파곶(巴串)ㆍ선유동(仙遊洞)ㆍ공림사(空林寺)를 유람하였다. 우암 선생은 등에 종기가 나서 지레 돌아갔으나, 선생은 송공 주석(宋公疇錫)ㆍ민공 태중(閔公泰重)ㆍ이공 희조(李公喜朝)ㆍ윤주교(尹周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속리산을 유람하여 경치를 다 구경하고서 돌아왔다.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4월 12일(정유) 집으로 돌아왔다.
제수의 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 화양으로부터 돌아와서는, 요량하지 않고 조정에 들어가면 반드시 낭패를 당하는 것인데 하물며 지금은 시대로 보나 의리로 보나 모두 물러나 숨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가묘(家廟)에 고하였다.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4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청안(淸安)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편지로 진천(鎭川) 반탄(盤灘)에서 회합하자고 약속하였으므로 선생이 즉시 달려가서 청안에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그러나 반탄의 계획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우암 선생을 모시고 화양으로 돌아왔다. 우암 선생이 회천(懷川)으로 돌아가니 선생이 수행하다가 중도에서 하직하고 돌아왔다.
8월 23일(을해) 화양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또 편지를 보내어 부르니 즉시 달려가서 《주자대전(朱子大全)》ㆍ《율곡별집(栗谷別集)》ㆍ《맹자(孟子)》의 양기장(養氣章) 및 《계몽(啓蒙)》을 강론하고 《차의(箚疑)》를 교정하였다. 9월 11일(임진)에 우암 선생이 회천으로 돌아갔으므로 하직하고 돌아왔다.
10월 한수재(寒水齋)가 낙성되었다.
재(齋)가 낙성되자 우암 선생이 한수(寒水)라고 명명하고서 손수 편액을 썼으며, 또 소서(小序)를 지어 “회암 선생(晦菴先生)이 옛 성인들의 연원을 차례로 서술하기를 ‘삼가 천 년의 마음을 생각해 보니 가을 달이 찬물에 비치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라고 하였다. 나의 벗 권치도(權致道)가 청풍강(淸風江) 가에 작은 서재(書齋)를 짓고 그 속에서 글을 읽으면서 나에게 편액을 써 달라고 청하기에 삼가 이 한수라는 두 글자로써 걸어 준다.” 하였으니, 대개 오도(吾道)를 부탁하는 뜻이 이미 여기에 나타났다.
11월 충주(忠州) 덕주사(德周寺)에서 김공 수증(金公壽增)ㆍ황공 세정(黃公世禎)ㆍ홍공 득우(洪公得禹)와 회합하였다.
이어 용추(龍湫)를 구경하고 3일 만에 돌아왔다.
열락재(說樂齋)가 낙성되었다.
원근의 학자들이 점점 모여오므로 한수재 동쪽 강 언덕의 높이 솟은 곳에 몇 칸의 집을 세워 학업을 익히고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자못 경치가 좋았다. 우암 선생이 그 편액을 열락이라 쓰고, 장암(丈巖) 정공 호(鄭公澔)가 기(記)를 지었다.
정묘년(1687) 선생의 나이 47세
3월 다시 청룡사(靑龍寺)에서 황공(黃公)ㆍ홍공(洪公)과 회합하였다.
동춘 선생의 연보를 수정하였다.
4월 흥농(興農)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주서(朱書)》의 분류(分類)와 《정서(程書)》를 강론하였다.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화양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12월 도성(都城)으로 들어갔다.
박태적(朴泰迪)의 아내가 된 누이가 병이 위독하다는 것을 듣고 도성으로 들어가서 병을 살피었다.
무진년(1688) 선생의 나이 48세
1월 박씨의 며느리가 된 누이의 상에 곡하였다.
성복(成服)한 다음 산골로 돌아왔다.
3월 용인(龍人) 갈천(葛川)으로 가서 누이의 장례에 회장(會葬)하였다.
4월 화양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우암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부르므로 인하여 가서 배알하였다. 김공 창협(金公昌協)과 함께 차의를 교정하고서 이어 선지(先誌 선인(先人)의 묘지(墓誌))를 청하였다.
지평에 제수되었다.
소명(召命)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6월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벽루(寒碧樓)에서 이공 희조(李公喜朝)ㆍ김공 창협(金公昌協)과 회합하였다.
김공이 이때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있었다. 이튿날 김ㆍ이 두 공과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와서 한수재에서 함께 잤다.
8월 28일(무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승하 소식을 듣고 부정(府庭)에 들어가서 곡하였다.
9월 3일(임신) 성복(成服)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1689) 선생의 나이 49세
1월 20일(무자) 흥농(興農)으로 가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차의(箚疑)를 품정(稟定)하였다.
이때 효묘(孝廟)의 어찰을 봉진(封進)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우암 선생이 마침 병이 심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대신 어찰을 봉진하면서 함께 올리는 상소문을 기초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원자(元子)의 위호(位號)에 대한 일로 입시했던 여러 신하가 다 죄를 입자 우암 선생이 상소하여 여러 신하들이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논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잇따라 삭출(削黜) 원찬(遠竄)의 명이 내렸다. 그러므로 소를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2월 9일(정미) 우암 선생을 제주(濟州)에 천극하라는 명이 내리니 선생이 모시고 흥농을 출발하였다.
11일(기유) 여산(礪山)에서 유숙하였다.
우암 선생이 차의의 서문(序文)을 엮어 선생에게 주며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차의를 그대와 중화(仲和 김창협(金昌協))가 헤아려 수정하여 고쳐라.”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의심나는 곳은 마땅히 문목(問目)을 올려 여쭙겠습니다.” 하자,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나의 노쇠함이 심하여 비록 스스로 처리한 것도 매양 잘못 교감되었음을 걱정하였다. 그대 두 사람이 직접 상의하여 소세(梳洗)하면 무슨 의난처(疑難處)가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작은 곳은 삼가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마는 관계가 중대하여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감히 갖추어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우암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중화와 편안히 지내며 강론(講論)하는 것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동보(同甫 이희조(李喜朝))가 꽤나 자상하고 세밀하니 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3일(신해) 금구(金溝)에서 유숙하였다.
우암 선생이 묻기를 “윤휴의 죄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주자를 깔보고 업신여긴 것이 가장 크다고 할까요?” 하자, 우암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그렇다. 사람이 진실로 성현을 업신여긴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고서, 또 선생에게 이르기를 “여러 벗들은 흩어져 돌아가더라도 그대는 나와 함께 며칠 더 가야 하겠다. 내가 그대에게 조용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였다.
14일(임자) 태인(泰仁)에서 유숙하였다.
하루를 머물렀다. 닭이 울자 일어났는데,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 선생의 수적(手蹟)이 매우 많고 석담일기(石潭日記) 같은 유 또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공(李公)과 율곡의 비문을 산정할 때 왕복한 글 및 행장의 초본을 신재(愼齋 김집(金集))가 모아서 깊이 간직하였다가 말년에 나에게 전수한 것도 있는데, 이것을 모두 치도(致道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점이 있다. 그러나 치도는 이것을 힘써 지켜, 설혹 율곡 자손이 가져가겠다고 해도 이것은 여느 물건과는 다르니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초에는 박화숙(朴和叔)과 함께 이것을 지키려고 했었지만 지금 화숙이 저 모양이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날 소생(小生)인들 어찌 무사히 집에 있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럴 경우 장차 이 물건을 어느 곳에 맡겨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그대의 윤자(胤子) 상사(上舍 진사(進士))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고, 또 그대의 집이 궁벽한 곳에 있으니 보존하는 데 별 걱정이 없을 것이다. 후일에 주손(疇孫 우암의 손자 주석(疇錫))이 살아서 돌아오거든 그와 더불어 함께 지키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분류에 대해 그대와 범례를 의정하려고 정본(淨本)을 화양(華陽)에 가져다 두었으니 돌아갈 때에 가지고 가서 수정하라. 그리고 《근사록(近思錄)》 및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실려 있는 것은 주자설(朱子說)과 섭씨주(葉氏註)를 아울러 채집(採集)하여 본조(本條) 밑에 재록(載錄)하는 것도 좋을 듯하니 잘 헤아려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어류》를 소절(小節)로 분류한 것이 흥계(興溪)의 서가(書架) 위에 있으니 역시 가지고 가서 검교(檢校)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퇴계서(退溪書)》의 차의(箚疑)를 시작하여 겨우 1권을 끝냈으니 치도가 그 일을 마쳐 나의 뜻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선생이 사양하니,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일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부디 힘써 하라.”
하였다.
16일(갑인) 우암 선생과 작별하였다.
우암 선생은 정읍(井邑)으로 떠나고, 선생은 회정(回程)하여 전주(全州)에서 유숙하였다.
17일(을묘) 여산(礪山)에서 유숙하였다.
문곡(文谷) 김 상공 수항(金相公壽恒)의 적행(謫行 귀양 가는 행차)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머물러 기다렸다. 18일(정사)에 김공을 만나 담화를 나누고 작별하였다.
28일(병인) 집으로 돌아왔다.
4월 25일(신묘) 우암 선생을 나국(拿鞠)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를 무릅쓰고 해상(海上)을 향해 출발하였다.
아들 욱(煜)이 수행하였다.
5월 7일(임인) 여산 문수사(文殊寺)에 머물렀다.
서울 소식을 탐지하기 위하여 머물렀다.
18일(계축) 이사안(李師顔)이 와서 우암 선생이 도중(島中)에서 보내신 고결서(告訣書)를 전하였다.
고결서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 성인의 밝은 교훈인데, 나는 80여 세가 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어 하늘이 부여한 막중한 임무를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네. 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있네. 나는 한평생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었네. 그런데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 않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곳도 있으므로 초록해서 대략의 해설을 붙여 동지들과 상의하여 역시 후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성취하지 못하였네. 돌아보건대 이 세상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와 중화(仲和)뿐이니, 모름지기 동보(同甫)ㆍ여구(汝九 이기홍(李箕洪))ㆍ미백(美伯 최방언(崔邦彦)) 및 기타 함께 일할 만한 사람들과 협동해서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주 선생(朱先生)께서 일찍이 절실하고 긴요한 한 말씀으로 문인들을 가르쳐 말하기를 ‘다만 《맹자》의 도성선(道性善)ㆍ구방심(求放心) 두 장만을 취하여 힘쓰는 곳으로 삼으라.’고 하였고, 또 임종할 때 문인들에게 ‘직(直)’ 한 자를 전수하며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직(直)일 뿐이다.’ 하였네. 이는 대개 공자께서 ‘사람이 생존하는 것은 직인데 직하지 못하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면하는 것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하셨고, 맹자가 전성(前聖)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호연장(浩然章)에도 역시 ‘직’ 한 자로 양기(養氣)의 요체(要體)를 삼았기 때문일 것이네. 주자가 또 큰 영웅도 반드시 전긍 이림(戰兢履臨)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결단코 알 수 있네. 전일에도 깊이 강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써 행하지 못하여 상인(常人)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참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족히 경계가 될 만하기에 감히 고하는 바이네. 이 밖의 일들도 천만번 노력하기 바라네. 서로 만나 결별하지 못하는 한이 그대나 내가 어찌 다르겠는가. 피곤함이 심하여 스스로 글을 쓸 수가 없어 대략 이와 같이 입으로 불렀네.”
또 다음과 같은 별지(別紙)가 있었다.
“현묘조 때 호서의 한 선비가 상소하여 만력황제(萬曆皇帝 명 나라 신종(神宗))의 사당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그때 이론하는 자들이 ‘존귀하신 천자를 편방(偏邦)에서 제사 지낼 수 없고, 또 그 제사 의식도 정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핑계하였네. 나 역시 그때 그 건의가 끝내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서 다만 ‘이때에 이런 말이 나오니 그 사람의 뜻이 가상하다. 가상히 여기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였으나, 또 따르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개연히 여겨 왔네. 그 뒤 화양동의 석탑(石塔)에 숭정황제(崇禎皇帝 명 나라 의종(毅宗))의 어필을 새기고 나서 또 조각돌에 새겨 환장암(煥章菴)에 간직해 두었는데, 또 문곡(文谷)의 애사(哀詞)가 있었으므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항상 환장암 뒤편 왼쪽에 한 채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고 써서 봄가을로 무이신례(武夷神禮)에 따라 건어(乾魚)로써 제사를 올리는 동시에 술은 서실(書室) 텃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결하게 빚고 오직 축사만은 성대하게 칭송하고자 하였네. 이 일을 마음속으로 경영한 지 오래였는데 이루지도 못하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큰 한이 어디 있겠는가.
존귀한 천자를 편방에서 제사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실로 무식한 말이네. 당 나라 때 초소왕(楚昭王)의 사당에 유민(遺民)들이 사사로이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그래도 국민들 옛 덕을 사모해서 한 칸 띳집에서 소왕을 제사하네.[猶有國人戀舊德 一間茅屋祭昭王]’ 하였고,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일찍이 태수로 있는 주에 우제(虞帝)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낸 것을 주자가 글에 드러내 밝혔으니, 이것이 의거할 만한 전거가 아니겠는가. 문곡(文谷)의 시 역시 화운(和韻)할 사람이 화운해 짓게 하여 종이를 잇대어 붙여 큰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환장암 안에 간직해 두는 것도 한 가지 일일 것이네.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가지고 온 것이고 돌조각에 새긴 것은 이택지(李擇之)가 모각(摹刻)한 것이네. 이 일을 김(金)ㆍ민(閔)ㆍ이(李)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성사했으면 좋겠네. 이 일은 공력이 크게 드는 것이 아니어서 성사하기가 어렵지 않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 해도 이미 주자와 남헌(南軒)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저상(沮喪)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처음에는 효묘(孝廟)를 배향(配享)하려고 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은 사체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반드시 대죄(大罪)로 여길 것이므로 감히 마음도 먹지 못하였네. 해마다 제관(祭官)은 충현 송공(忠顯宋公)의 자손이 본주(本州)에 살고 있으니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만, 그 밖에 홍(洪)ㆍ변(卞) 제군도 좋네. 일찍이 《이정전서(二程全書)》를 베끼는 일을 계획할 적에 그대가 아무 안사(按使)를 단치(斷置)했던 것은 의리가 매우 정밀하였는데, 이 일을 더욱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네. 신종황제를 기리는 데는 위덕(威德)을 주로 삼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사람이 은덕을 입은 것을 보태고, 의종황제는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정도(正道)를 주로 삼아야 하네.”
6월 2일(정묘) 우암 선생이 돌아오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남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삼례(參禮)에서 유숙하였다.
6일(신미) 장성(長城) 읍내에서 우암 선생을 배알하였다.
압송해 온 금부랑(禁府郞)의 방금(防禁)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어두워진 뒤에 비로소 들어가서 배알하고 닭이 울자 나왔다.
7일(임신) 우암 선생을 모시고 출발하여 천원역(川原驛)에 도착해서 후명(後命 유배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이 내린 것을 들었다.
서쪽에서 오는 금부랑의 노문(路文 지방 출장 관원의 공문서)을 접하고 후명이 내렸다는 것을 알고는 밤에 비를 무릅쓰고 정읍(井邑)에 도착하였다.
8일(계유) 우암 선생이 정읍에서 명을 받았다. 선생이 유명에 따라 치상(治喪)하였다.
이날은 방금(防禁)이 조금 풀렸으므로 선생과 김만준(金萬埈)이 함께 들어가서 배알하였는데, 우암 선생은 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여 경각을 지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눈을 떠 선생을 보고서는 손을 잡고 분부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기를 바랐는데, 지금 나이 80이 넘도록 끝내 듣지 못하고 죽는 것이 바로 나의 한이네. 이 시대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나는 웃으며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네. 이후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겠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후사(後事)에는 무슨 예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르게나. 그러나 대체는 《가례(家禮)》를 주로 삼고 《가례》에 미비된 곳은 《상례비요》를 참작해 쓰게나.”
하였다. 또 묻기를,
“선생님의 지금 처지가 평소와 다른데 공복(公服)을 사용해야 합니까?”
하니, 우암 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간혹 조정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그때마다 다른 사람의 공복을 빌려 입었고 일찍이 스스로 공복을 만든 일이 없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심의(深衣)를 쓰는 것이 마땅하네.”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그 다음에는 어떤 옷을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주자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계실 때 상의하상(上衣下裳)의 옷을 입으셨네. 그러므로 나도 이 제도를 모방하여 옷을 만들어 두었으니 집안사람에게 물어 찾아 쓰게나.”
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그 다음은 어떤 옷을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난삼(幱衫)이네. 이것은 황명(皇明) 태조(太祖) 때에 숭상하던 옷이니 이것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의 학을 주로 삼고, 사업은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신 뜻을 주로 삼아야 하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비록 큰일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항상 ‘인통함원 박부득이(忍痛含寃迫不得已)’라는 여덟 자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傳守)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의 학문은 치지(致知)ㆍ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ㆍ실천(實踐)ㆍ확충(擴充)인데, 그 시종을 관통하는 것은 경(敬)이네.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지은 주자 행장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가 직(直)일 뿐이므로 공자 맹자 이후로 서로 전하신 것은 오직 이 하나의 직자뿐이었네.”
하고, 또 말하기를,
“옛사람이 소릉(昭陵)을 복위(復位)하기에 앞서 어째서 정릉(貞陵)의 복위를 청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조정에 들어가서 한 일이 오직 정릉을 복위시킨 한 가지 일뿐이었네만, 이로 인해 거의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네.”
하였다. 이어 권이진(權以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말을 들으니 몽조(夢兆)가 참으로 이상하네.”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 꿈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정릉 추복(追復)의 의논이 일어났을 때 정릉 곁에 사는 늙은이의 꿈에 한 부인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한 대인(大人)의 신구(伸救)에 힘입어 장차 태묘(太廟)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나는 그 사람의 화를 구제해 줄 수 없으니 통한스럽다.” 했다 한다. 우암 선생이 또 말하기를,
“만약 정상적인 때라면 내가 어찌 태조의 추시(追諡)를 우선으로 삼았겠는가. 다만 오늘날 존주(尊周)의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거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에 대해 마음을 다했던 것이네. 박화숙(朴和叔)의 생각이 나와 다르기는 하였지만 이는 참으로 얻기 쉬운 벗이 아니네. 우연히 이 일에 있어서만 이러했을 뿐이네.”
하였다.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금부의 관리들이 들어왔으므로 선생이 물러 나왔다. 이날 우암 선생께서 명을 받으니, 선생이 한결같이 유명(遺命)에 따라 상을 치루었다.
11일(병자) 성복(成服)하고 가마기제(加麻期制)를 행하였다.
김공 만준(金公萬埈)이 입을 복(服)에 대해 의심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전에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상에 동춘 선생이 우암 선생에게 입을 복에 대해 의논하자,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사계 선생께서 평소 우리들을 보신 것이 어찌 중문(仲文)보다 지나쳤겠습니까. 중문이 이미 기복(期服)을 입었으니 우리의 복도 마땅히 중문과 같아야 합니다.’고 하였으니, 오늘 우리의 복제(服制)도 이 예(例)를 준용(準用)하여 서구(叙九)와 같이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중문은 바로 사계 선생의 손자 창주공(滄洲公) 익희(益煕)의 자(字)이고, 서구는 바로 우암 선생의 손자 교리공(校理公) 주석(疇錫)의 자이다.
12일(정축) 상례 행차를 따라 정읍을 출발하였다.
15일(경진) 흥농(興農) 옛집에 도착하였다. 성빈(成殯)하는 것을 살폈다.
28일(계사) 집으로 돌아왔다.
7월 7일(신축) 회덕(懷德)을 향해 출발하였다.
역로(歷路)에 글을 지어 가지고 동춘 선생 묘소(墓所)에 고하였다.
10일(갑진) 흥농에 도착하여 우암 선생 영연(靈筵)에 곡하였다.
14일(무신) 수원(水原) 만의(萬義)로 가서 임시로 장사 지낼 곳을 살펴보았다.
17일(신해) 제문(祭文)을 지어 곡하며 전(奠)을 올렸다.
18일(임자) 회장(會葬)하였다.
계공(季公) 및 욱(煜)도 모두 따라갔다.
19일(계축) 흥농으로 반우(返虞)하였다. 영연에 하직하고 돌아왔다.
역로에 갈천(葛川)에 들러 누이 박씨 부(朴氏婦)의 무덤에 성묘하였다.
20일(갑인) 궁촌(宮村)에 도착하였다.
선생의 손아래 처남 이 상국 유(李相國濡)가 이때 궁촌에 있었다.
21일(을묘) 평구(平丘)로 가서 귀양 가는 노봉(老峯) 민 상공 정중(閔相公鼎重)과 작별하였다. 곡운(谷雲) 김공 수증(金公壽增)을 방문하고, 청음(淸陰) 김 선생(金先生)의 묘소에 참배하고 또 문곡(文谷) 김 상공(金相公)의 영연에 곡하였다.
이공 희조(李公喜朝)가 와서 만났다.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22일(병진) 해천(蠏川) 외가(外家)의 선산(先山)에 참배하였다.
25일(기미)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연풍(延豐)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였다.
경오년(1690) 선생의 나이 50세
6월 회덕으로 가서 우암 선생의 연사(練事 소상(小祥))에 참석하였다.
10월 9일(병신) 여강(驪江)으로 가서 수촌(睡村) 이 상공 여(李相公畬)를 조문(弔問)하였다.
11일(무술) 지평(砥平)으로 가서 외재(畏齋) 이 상공 단하(李相公端夏)의 상(喪)에 곡하였다.
그리고 이어 택풍당(澤風堂 이식(李植))의 유적을 살펴보았다.
12일(기해) 돌아오는 길에 여강(驪江)에 도착하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공 유중(閔公維重)의 묘에 참배하였다.
17일(갑진)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단양(丹陽)으로 가서 퇴우당(退憂堂) 김 상공 수흥(金相公壽興)의 상구(喪柩) 행차를 맞이하여 곡하였다.
김공의 상구가 적소(謫所)에서 출발하여 단양으로 지나갔다.
민공 진원(閔公鎭遠)의 경의문목(經義問目)에 답하였다.
이때 민공이 관직에서 떠나 독서하면서 경학에 뜻을 두어, 의심되는 것이 있거나 터득한 것이 있으면 문득 갖추 기록해서 선생에게 질정하였다. 《논어》ㆍ《소학》ㆍ《대학》에 대한 문답이 문집에 실려 있다.
신미년(1691) 선생의 나이 51세
4월 자부(子婦) 김씨(金氏)의 상에 곡하였다.
6월 우암 선생의 상사(祥事)에 참석하였다.
윤7월 자부의 상구(喪柩)를 임시로 폄장(窆葬)하였다.
8월 정절서원(靖節書院)에 가서 평양(平陽) 박 선생 팽년(朴先生彭年)의 봉안제(奉安祭)에 참여하였다.
29일(신해) 동춘 선생의 묘에 참배하였다.
제문을 지어 동춘의 손자인 송공 병원(宋公炳遠)의 묘에 제사하였다.
9월 화양으로 들어갔다.
지난날의 자취를 어루만져 보고 오래도록 감통(感慟)해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양산(陽山)을 경유하여 야유암(夜游巖) 등 여러 절경을 구경하였다.
연풍(延豐) 장암(丈巖)으로 가서 정공 호(鄭公澔)를 방문하였다.
임신년(1692) 선생의 나이 52세
3월 3일(임자) 자부(子婦)를 괴곡(槐谷)으로 이장하였다. 송공 주석(宋公疇錫)과 함께 가서 구담(龜潭)을 유람하였다. 연풍으로 가서 이공 선(李公選)의 상구(喪柩) 행차를 맞아 곡하였다.
이공의 상구가 적소에서 출발하여 연풍으로 지나가므로 송공 주석과 함께 맞이하여 곡하였다. 고문(告文)이 있었다.
12월 회덕(懷德)으로 가서 송공 주석의 상에 곡하고 진천(鎭川)으로 가서 민공 태중(閔公泰重)의 상에 곡하였다.
모두 제문이 있었다.
계유년(1693) 선생의 나이 53세
1월 윤공 계(尹公堦)가 적소(謫所)에서 죽어 부고(訃告)가 오니 설위(設位)하고 곡하였다.
2월 천안(天安)으로 가서 윤공의 상구 행차를 맞아 곡하였다.
상구 행차를 따라 진위(振威)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역로(歷路)에 우암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4월 제천(堤川)으로 가서 민공 진하(閔公鎭夏)의 이장(移葬)에 회장(會葬)하였다.
갑술년(1694) 선생의 나이 54세
1월 6일(갑진) 부평(富平)으로 가서 외삼촌인 판서 이공 지익(李公之翼)의 상에 곡하였다.
외조부 도정공(都正公)의 산소에 참배하였다.
9일(정미) 안산(安山)으로 가서 종가(宗家) 사당에 참배하고 이어 직곶(職串)에 있는 선영에 성묘하였다.
18일(병진) 집으로 돌아왔다.
5월 소제(蘇堤)로 가서 우암 선생의 사제(賜祭)에 참석하였다.
15일(임자) 송공 기태(宋公基泰)의 소(疏)를 대신 초잡아 주었다.
송공이 어찰(御札) 및 유소(遺疏)를 봉진하려 하므로 선생이 그 소를 대신 지었다.
20일(정사) 집으로 돌아왔다.
6월 농암(農巖) 김공(金公)의 편지에 답하였다.
김공이 이때 제수하는 명을 받고서 편지로 출처(出處)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나아가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으로 답하였다. 그 편지가 문집에 보인다.
박현석(朴玄石)의 편지에 답하여 《율곡별집(栗谷別集)》의 일에 관해 논하였다.
《율곡별집》에 집록(輯錄)한 문인어록(門人語錄)은 후인들이 기술한 것이어서 틀리고 어긋난 곳이 많고, 또 다른 사람의 문자를 혼록(混錄)한 것이 있는데도 박공이 감수하면서 산정하지 않으니, 선생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 박공의 편지가 온 것을 계기로 이를 논하였다.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9월 손자 정성(定性)을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노봉(老峯) 민공(閔公)의 이장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11월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제수되었다.
12월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을해년(1695) 선생의 나이 55세
1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하는 것을 방백이 막기 때문에 직접 정원에 올렸다.
2월 장령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겸 시강원 진선에 제수되었다.
4월 소명(召命)이 있자 상소하여 사절하고 재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삼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자년(1696) 선생의 나이 56세
2월 누암서원(樓巖書院)에 가서 향사(享事)에 참여하였다.
6월 특별한 유지(諭旨)로 부르는 명이 있었으나 상소하여 사절하였다. 종부시 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7월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9월 예랑(禮郞)이 명을 받들고 와서 왕세자가 영소전(永昭殿)에 전알(展謁)할 때 빈궁(嬪宮)도 함께 전알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물었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다시 와서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19일(임신) 누암(樓巖)으로 가서 우암 선생의 진상(眞像)을 원사(院祠)에 봉안하였다.
정공 호(鄭公澔)ㆍ송공 상기(宋公相琦)와 함께 유숙하였다.
10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중궁전과 빈궁이 종묘에 전알하는 것의 가부를 물으니, 헌의하였다.
선생이 전에 문의(問議)를 받았으나, 초야에 있는 몸으로 방례(邦禮)를 논하는 것이 참람하고 외람되다 하여 감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이 누차 물어 마지않는데 한결같이 끝내 대답하지 않는 것은 또 감히 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임금이나 대부(大夫)가 와서 물으면 대답하는 것은 고의(古義)에 의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23일(병오) 우암 선생의 개장(改葬) 소식을 듣고 만의(萬義)로 갔다.
30일(계축) 제문을 지어 우암 선생에게 제사 지냈다.
11월 2일(을묘) 우암 선생의 면례(緬禮)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우암 선생 화상찬(畫像贊)을 지었다.
정축년(1697) 선생의 나이 57세
4월 우암 선생 연시례(延諡禮)를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회덕을 향해 출발하여 청주(淸州)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묵방(墨坊)에 도착하여 이공 수언(李公秀彦)의 집에 유숙했는데, 연시례 날짜를 물려 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왔다.
5월 집의에 제수되자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누암서원(樓巖書院)에 가서 향사에 참석하였다.
9월 재차 상소해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10월 회덕에 가서 우암 선생 연시례(延諡禮)에 참여하였다.
무인년(1698) 선생의 나이 58세
6월 이공 희조ㆍ민공 진원과 종당사(宗堂寺)에서 회합하였다.
민공이 본도 감진어사(監賑御史)로 마침 와서 서로 만났다.
9월 특별한 유지(諭旨)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절하였다.
유지에 “아, 전후의 비답에서 나의 뜻을 누차 자세히 말했으나 정성과 예가 지극하지 못하여 나를 멀리하는 그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무안해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어렵고 근심스러운 일이 눈앞에 넘치는 이때를 당하여 산림(山林)에 은거해 있는 선비들도 오히려 갓의 먼지를 털어 쓰고 일어나 나오는데, 하물며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사림의 촉망을 지고 있는 그대이겠는가.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세신(世臣)의 의리로 볼 때 결코 한결같이 돌아보지 않고 멀리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니, 그대는 모름지기 나의 이런 뜻을 살펴 마음을 고쳐먹고 길을 떠나와서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돕고 춘궁(春宮)을 도우라.” 하였다.
집의에 제수되자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특명으로 통정대부 호조 참의에 제수하자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노산군(魯山君) 및 신비(愼妃) 복위(復位)의 가부를 물으니, 헌의(獻議)하였다.
이때 전 현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노릉(魯陵) 및 신비의 위호(位號)를 회복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소장을 내려 백관에게 헌의하게 하고, 또 밖에 있는 유신에게도 물었다. 그러나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한쪽 사람들의 종주(宗主)로서 그 의논을 강력히 막으니, 조정의 의논이 의혹하는 이가 많았다. 선생이 헌의하여 노릉은 복위하는 것이 가하지만, 신비는 복위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상은 끝내 선생의 의논을 채용하여 노릉을 추복(追復)하여 단종(端宗)이란 묘호(廟號)를 올리고 신비는 복위시키지 않았다. 대개 국가의 이 거조는 실로 억만년 큰 경사의 터전이니, 선생의 이 의논은 마땅히 우암 선생의 정릉(貞陵) 복위에 대한 의논과 함께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11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단종대왕 및 왕비의 신주를 곧장 영녕전(永寧殿)으로 올리는 것의 여부를 물으니, 선생이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기묘년(1699) 선생의 나이 59세
1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5월 잇따라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5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9월 상이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존문(存問)하고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25일(경신) 고조고(高祖考)의 조주(祧主)를 받들기 위하여 여강(驪江)으로 갔다.
10월 조주를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명(召命)이 내렸으므로 상소하여 사절하고 이어 식물(食物)의 하사에 대해 사은(謝恩)하였다.
경진년(1700) 선생의 나이 60세
7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공 득우(洪公得禹)의 부고가 왔으므로 설위(設位)하여 곡하고서 가마(加麻)하였다. 상소하여 겸 시강원 찬선, 성균관 좨주를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동춘 선생의 천장(遷葬) 소식을 듣고 공주(公州)로 갔다.
면례(緬禮) 날짜를 물려 정하였으므로 회덕(懷德)으로 향하였다.
10월 15일(갑술) 흥농으로 가서 우암 선생 영당(影堂)에 배알하였다.
16일(을해) 동춘 선생 면례에 갔다.
명정(銘旌)을 썼다.
금담서원(黔潭書院)에 배알하였다.
이 서원에 동춘 선생을 배향(配享)하였다.
18일(정축) 화양서원(華陽書院)에 배알하였다.
20일(기묘) 집으로 돌아왔다. 3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계성묘(啓聖廟) 영건(營建)의 당부를 물었으나 병으로 인해 대답하지 않았다.
11월 예랑이 다시 와서 묻자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12월 4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사년(1701) 선생의 나이 61세
1월 5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계성묘(啓聖廟) 위판(位版)의 서제(書題) 및 축폐(祝幣)ㆍ변두(籩豆)ㆍ악일(樂佾) 등의 일을 묻자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3월 정사(呈辭)하여 사직하니 하유하여 체직을 윤허하고, 이어 빨리 오라고 불렀다. 이공 광하(李公光夏)ㆍ곡운(谷雲) 김공(金公)의 부고(訃告)가 왔으므로 설위하여 곡하고서 가마(加麻)하였다.
5월 이공 광하의 애사(哀辭)를 지어 아들 욱(煜)으로 하여금 대신 고하게 하였다.
6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것의 당부를 물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7월 찬선ㆍ좨주에 제수되었다.
8월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2일(병자)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승하 소식을 듣고서 열락재(說樂齋)에서 곡하였다.
병으로 인해 부정(府庭 소재 군청(郡廳)의 뜰)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27일(신사) 소재에서 성복(成服)하였다.
9월 병으로 인해 급히 달려가 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대죄하였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국장(國葬) 전에 사가(私家)의 연사(練祀)와 상사(祥祀)를 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의 여부를 물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12월 13일(을축) 음죽(陰竹)에 당도하여 상소하고서 대죄하였다.
인산(因山)에 맞추어 가기 위하여 서울을 향해 가다가 음죽에 도착해서는 병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상소하여 대죄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15일(정묘) 현정(縣庭)에 들어가서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16일(무진) 현정에 들어가서 하현궁 망곡례(下玄宮望哭禮)를 행하였다.
17일(기사) 집으로 돌아왔다.
임오년(1702) 선생의 나이 62세
2월 누암서원(樓巖書院)에 가서 향사(享事)에 참여하였다.
제생(諸生)과 더불어 옥산강의(玉山講義)를 강론하였다.
3월 11일(임진) 화양(華陽)을 향해 출발하였다.
장암(丈巖) 정공 호(鄭公澔)의 집에서 유숙하고서 12일(계사)에 정공과 함께 출발하였다.
14일(을미) 화양서원에 배알하고서 돌아오는 길에 문산(文山) 이공 기홍(李公箕洪)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16일(정유) 집으로 돌아왔다.
29일(경술) 누암서원에 가서 배알하였다.
정공(鄭公)과 함께 잤다. 이어 제생을 모아 놓고 며칠 동안 경의(經義)를 강론하고서 돌아왔다.
4월 단암서원(丹巖書院)에 배알하였다.
며칠을 머물면서 《동춘선생별집(同春先生別集)》을 교정하였다.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므로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재차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7일(정묘) 인현왕후의 연일(練日)이므로 부정(府庭)에 들어가서 망곡하였다. 정사(呈辭)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윤6월 관학 유생 어유귀(魚有龜) 등이 상소하여 선생을 부르라고 청하였다.
7월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로 선생을 불렀다.
유지에 이르기를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차 장성해서 행하고자 함이나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자기의 포부 펴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내가 전후에 부른 것이 간곡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대가 동강(東岡)의 언덕을 고수하며 마음을 고쳐먹고 나오지 않는 것은 실로 현자를 좋아하는 나의 정성이 처음과 같지 않은 데서 연유한 소치이니, 부끄러워 잠시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재앙이 자주 생겨 국가 형세가 위태로우므로 자나 깨나 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아, 과인의 몸을 인도하고 동궁을 돕는 막중한 책임을 오늘날 임천(林泉)에서 덕을 길러 일찍부터 중망을 지고 있는 이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모름지기 갈망하는 나의 뜻을 살펴 약매(若浼)의 마음을 돌리고 속히 조정으로 나와서 지극한 나의 신망에 힘껏 부응하라.” 하였다. 서계(書啓)는 문집에 보인다.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사관이 복명(復命)한 뒤에 다시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로 불렀다. 사관을 보내어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렸다.
8월 16일(을미) 인현왕후의 상일(祥日)이므로 부정(府庭)에 들어가서 망곡하였다.
계미년(1703) 선생의 나이 63세
6월 이하성(李廈成)이 상소하여 우암 선생을 무함(誣陷)하므로 선생이 상소하여 변무(辨誣)하고, 이어 경(經)을 훼손하고 현인(賢人)을 무함한 박세당(朴世堂)의 죄를 지척하였다.
소는 문집에 보인다. 이때 박세당이 《사서사변록(四書思辨錄)》을 지어 주자의 장구(章句)와 집주(集註)를 다 바꾸고, 또 이상 경석(李相景奭)의 비문을 지으면서 우암 선생을 무함하니, 관학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이 상소하여 경을 훼손하고 현인을 무함한 세당의 죄를 변론해 배척하고, 이어 이상(李相)이 삼전비(三田碑)를 지으면서 오랑캐에게 아첨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 오랑캐에게 음식 접대를 받아 명분과 의리에 죄를 얻은 일까지 언급하였다. 그러자 이상의 손자 하성(廈成)이 선조를 위하여 억울함을 송사한다고 칭하면서 상소하여 우암 선생을 무함하였으므로, 선생이 상소하여 변론하니, 비답하기를 “대로(大老 우암)가 무함을 당하는 것은 실로 사문의 변고이니 세도를 생각함에 근심스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를 생각하는 나의 뜻을 살펴 멀리하려는 마음을 속히 돌려 길을 떠나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변무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던 날에 이 명이 내렸다.
7월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인현왕후 재기일(再期日)에 동궁(東宮)이 길복(吉服)을 입는 것의 당부를 물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8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사변록(思辨錄)》을 변파(辨破)하라는 일로 하유하였다.
상이 유신들로 하여금 《사변록》을 변파하는 설을 지어 올리게 하니, 계공(季公)이 당시 옥당에 있으면서 그 일을 책임졌으므로 왕복하며 선생께 품의, 질정해서 책으로 저술하였는데, 상이 또 선생으로 하여금 논저(論著)하게 하기 위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으나, 선생은 유신들의 논변이 명백, 자세하고 이미 책으로 만들어졌으니 지금 다시 분수를 넘어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서계는 문집에 보인다.
재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랑이 다시 와서 《사변록》의 일로 하유하니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12월 3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갑신년(1704) 선생의 나이 64세
1월 사관을 보내어 비답하였다.
비답하기를 “나의 부름이 빈번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하고 예가 지극하지 못하여, 동강(東岡)의 뜻을 고수한 채 아득히 조정으로 나올 기약이 없으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경은 과매한 내가 경을 더욱 간절히 생각하는 뜻을 살피고 동궁을 서연(書筵)에서 보좌하는 것이 급하다는 것을 생각하여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사직하지 말고서 속히 와서 나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화양동(華陽洞) 만동사(萬東祠)가 완성되어 7일(정미)에 신종(神宗)ㆍ의종(毅宗) 두 황제에게 향사(享祀)하였다.
선생은, 우암 선생이 죽으면서 남긴 부탁을 받은 뒤로 정성을 다해 경영하여 이때에 이르러 화양동 우암 선생 서실(書室)의 약간 남쪽, 의종황제의 어필(御筆)을 새긴 석감(石龕) 밑에서 큰소리로 부르면 들릴 수 있는 거리에 하옥(廈屋)의 제도에 따라 사당을 세우고, 우암 선생의 유의(遺意)를 취하여 사당 이름을 만동(萬東)이라 하고, 선생이 스스로 두 황제의 제문을 지어 몸소 제사를 지냈는데 4변(籩) 4두(豆)ㆍ태뢰(太牢)ㆍ3작(爵)을 올리고 지방(紙榜)으로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그 지방을 태우는 것으로 정식을 삼았다. 또 따로 축문이 있어 제사 때마다 이 축문을 사용하였는데, 이 역시 선생이 지은 것이었다. 명 나라가 망한 것이 갑신년(1644) 3월이었는데 사당의 완성이 명 나라가 망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 있었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처음에는 봄가을로 첫째 달 첫 번째 정일(丁日)에 제사 지내기로 정하였으나, 뒤에 대보단(大報壇)의 향례(享禮)가 3월에 있으니 국가의 행사에 앞서 사천(私薦)을 하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계월(季月)로 바꾸어 행하였다. 우암 선생의 영정을 예전에는 사당 밑에 있는 서실에 봉안했기 때문에 사당이 완성됨에 미쳐 선생이 제문을 지어 고유(告由)하였고, 매번 황제의 제사가 끝난 뒤에는 일체군신제사동(一體君臣祭祀同)의 뜻에 따라 영정에 1변ㆍ1두를 올렸다.
좌상 이공 여(李公畬)의 편지에 답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정공 호(鄭公澔)를 통하여 사당을 지어 두 황제에게 제사 지내고자 한다는 뜻을 은미하게 상에게 주달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신종황제의 사묘(祠廟)를 세우고자 하여 연석에서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이 신종황제의 은덕이 아님이 없는데도 보답할 길이 없으니 내 마음이 감개(感慨)하다. 선정(先正) 신(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신종황제의 사묘를 세우고 척화 삼신(斥和三臣)을 묘정(廟庭)에 종향(從享)할 뜻을 가졌었는데, 이 일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에 좌상 이공 여와 판서 민공 진후(閔公鎭厚)가, 송시열이 일찍이 뜻을 가졌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하였는데, 상하가 그 뜻에 따라 사묘를 세워 지방으로써 제사 지내고 있다는 일을 구체적으로 대답하자, 상이 드디어 이공으로 하여금 조가(朝家)에서 사묘를 세울 뜻으로 선생에게 묻게 하였으므로 이공이 편지로 선생에게 물었다. 그래서 선생이 답서하였는데, 그 대략에,
“탁월하신 예지(睿智)가 백왕(百王) 중에 우뚝하신데 만약 찬성(贊成)하지 않는다면 존주(尊周 중국(中國)을 높임)하시는 우리 성상의 뜻을 천하 후세에 드러내 밝힐 방법이 없고, 모든 신하들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만약 청 나라의 힐책을 염려한다면, 우리나라가 명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니, 지난날의 덕을 추념(追念)하여 간략하게 보답하는 사전(祀典)을 거행하는 것은 인정이나 천리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바인데 저들에게 무슨 해가 있어 힐책하겠습니까. 만약 하국(下國)에서 천자를 제사하는 것이 참람하다고 한다면, 기(杞)ㆍ송(宋)이 하(夏)ㆍ은(殷)을 제사한 것을 가지고 참람하다는 기롱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분명한 증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또 만약 기ㆍ송은 하ㆍ은의 후손이기 때문에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면 역시 할 말이 있습니다. 군신ㆍ부자는 한가지이니 지금 자손이 없는 구군(舊君)을 구신(舊臣)이 제사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합니까.”
하였다. 이공이 이런 내용으로 상주하니, 상의 의사가 드디어 결정되어 유사에게 명하여 금원(禁苑)에 사묘를 세우게 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대체로 불편하게 여겼으나 드디어 단을 쌓아 보답의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였으니 지금의 대보단(大報壇)이 바로 그것이다.
2월 사관을 보내어 신종황제의 사묘를 세우는 것의 당부를 물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3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공(季公)의 편지에 답하였다.
만동사(萬東祠)가 낙성된 뒤 우암을 배향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후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민공 진후(閔公鎭厚)가 이 의논을 듣고는 부당하다고 하였다. 또 대보단에 친제(親祭)할 때를 당하여 배신(陪臣)을 아헌관(亞獻官)ㆍ종헌관(終獻官)으로 충당해 차임하자, 민공은 또 배신이 잔을 올리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겨 계공에게 물으니, 계공이 그가 물은 것을 가지고 선생에게 질문하였으므로 선생이 답하였다. 편지가 문집에 보인다.
5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하기를 “풍헌(風憲)의 장(長)을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 당초에는 조령(朝令)을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지금에 와서도 인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오늘날 한재가 보통이 아니어서 위태로운 생각으로 마음을 태우고 있으니, 국가와 휴척을 함께하는 세신(世臣)의 의리로 볼 때 결코 동강(東岡)의 뜻을 고수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겸양만을 고집하지 말고 빨리 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7월 3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1일(기미) 우암 선생의 진상(眞像)을 모셔다가 누암원사(樓巖院祠)에 봉안하였다. 정장(呈狀)하여 사직하니 체직되었다.
8월 누암서원에 가서 향사에 참여하였다.
11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대보단 제사 때 쓸 음악의 예절을 물었다.
서계는 문집에 보인다.
을유년(1705) 선생의 나이 65세
2월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이조 판서에 이배(移拜)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4월 대사헌에 체배(遞拜)되자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재차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병술년(1706) 선생의 나이 66세
2월 대사헌에 제수되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재차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9월 화양에 들어가서 만동사 및 서원 향사에 참여하였다.
우암 선생의 서원이 예전에는 화양동 밖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만동사 곁으로 옮겨 세우고 영정도 이 서원으로 옮겨다가 봉안하였다. 그리고 매번 만동사의 향사를 마치고는 서원에도 향사를 올렸다.
정해년(1707) 선생의 나이 67세
2월 송강(松江) 정공 철(鄭公澈)의 묘표(墓表) 음기(陰記)를 썼다.
9월 액정서의 관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식물(食物)을 하사하니, 상소하여 사례(謝禮)하였다.
11월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무자년(1708) 선생의 나이 68세
2월 재차 상소해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윤3월 이조 참판에 제수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농암(農巖) 김공(金公)의 부고(訃告)가 왔으므로 열락재(說樂齋)에서 망곡(望哭)하고 가마(加麻)하였다.
조카 섭(燮)을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6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만동사에 가서 향사에 참여하였다.
12월 직재(直齋) 이공 기홍(李公箕洪)의 부고가 왔으므로 곡하고 가마하였다.
손자 양성(養性)을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기축년(1709) 선생의 나이 69세
2월 대사헌에 제수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만동사에 가서 향사에 참여하였다.
제생들과 더불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10월 4차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경인년(1710) 선생의 나이 70세
3월 상소하여 찬선ㆍ좨주를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諭旨)로 부르니 상소하고서 대죄하였다. 또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였다.
7월 재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옷감과 음식물의 하사까지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어 격쟁인(擊錚人) 박필기(朴弼基)가 우암ㆍ동춘 두 선생을 무욕(誣辱)한 일을 변론하니 사관을 보내어 비답하였다.
비답에 “풍헌(風憲)의 직임을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 박필기가 유현(儒賢)을 무욕한 것은 지극히 해괴한 일이므로 이미 정배의 명을 내렸으니, 이런 패만한 말을 입에 올릴 것이 뭐 있겠는가. 옷감과 음식물을 내린 것은 현자를 은혜로이 기르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서 속히 길을 떠나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윤7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3차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우암 선생의 묘표(墓表)를 지었다.
우암 선생이 임종할 때에 묘도(墓道)에 풍비(豐碑 공덕(功德)을 기록한 큰 비석)를 세우지 말고 선생으로 하여금 단표(短表 작은 비석)에 간략히 기록하라고 분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문(碑文)을 완성하였다.
신묘년(1711) 선생의 나이 71세
3월 만동사에 가서 향사에 참여하였다. 문인 이간(李柬)에게 인물(人物)의 성(性) 및 기질(氣質)의 성을 논하여 답하였다.
답서에 말하기를 “율곡 선생(栗谷先生)이 말하기를 ‘사람의 성이 물(物)의 성이 아닌 것은 기(氣)가 국한(局限)되어서이고, 사람의 이(理)가 바로 물의 이인 것은 이가 통하기 때문이다.’ 하였네. 이른바 이가 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름인가 하면 바로 태극(太極)의 전체가 각각 하나의 물 가운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고, 이른바 기가 국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이름인가 하면 바로 사람과 물이 받은 바의 성(性)에 편(偏)ㆍ전(全)의 다름이 없지 않기 때문이네. 오직 사람만이 오행(五行) 수기(秀氣)의 전체를 받았기 때문에 오상(五常)의 전덕(全德)을 다 얻었지만 물은 겨우 그 형기(形氣)의 일편(一偏)만을 얻었기 때문에 전체에 관통할 수 없는 것이네. 이것이 《중용혹문》에 매우 분명하게 실려 있네. 《맹자》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주에 ‘인ㆍ의ㆍ예ㆍ지의 품수(稟受)를 어찌 물이 얻어서 온전히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한 것도 역시 이 뜻이네.” 하고, 또 말하기를 “연전에 고명(高明)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도[未發時] 선악이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오성(五性)이 감동한 뒤에 선악이 나누어지는 것이니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어찌 선악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니, 고명이 웃으며 ‘그렇습니다.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도 선악이 있다고 운운(云云)한 것은 덕소(德昭 한원진(韓元震))의 견해입니다.’고 하였네. 나는 이와 같다면 덕소가 오해하였다고 여겼었는데, 뒤에 덕소가 왔기에 그의 소견을 물어보았더니 매우 그렇지 않았네. 그의 생각은, 대개 태어난 처음부터 바로 기질(氣質)의 성이 있어 청(淸)ㆍ탁(濁)ㆍ수(粹)ㆍ박(駁)이 각양각색으로 같지 않은데, 그 본령(本領)의 미악(美惡)이 이와 같기 때문에 발한 뒤에 숙특(淑慝)의 종자(種子)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아직 사물과 교접하지 않았을 때에 악념(惡念)이 항상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었네. 이 설이 소견이 없지 않으므로 내가 일찍이 인가(印可)한 적이 있네……” 하였다.
4월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5월 3일(신묘) 부인 이씨(李氏)가 세상을 떠났다.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문인 한덕전(韓德全)을 보내 제문을 가지고 성군 만징(成君晩徵)을 제사 지내게 하였다.
성군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별천(別薦)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거해 학문을 익혔으며 지행(志行)이 돈후 고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선생이 매우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다.
7월 27일(갑인) 부인을 충주(忠州) 북촌 개천동(北村開天洞) 속곡(束谷)에 장사 지냈다.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9월 재차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3차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사단칠정이기호발변(四端七情理氣互發辨)을 지었다.
전설(全說)이 문집에 실려 있다. 선생은 《중용》 서문의 형기(形氣) 두 자를 논하여 말하기를 “인심생어형기(人心生於形氣)의 기(氣)는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기발(氣發)의 기는 심(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글자는 비록 같으나 가리킨 바는 매우 다르다. 그리고 예로부터 여러 현인들이 매양 ‘인심 도심’이라 말하였는데, 이미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면 어찌 사단 칠정만을 유독 이와 같이 말할 수 없겠는가. 우연히 잘못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 형기의 ‘기’ 자는 본래 단지 이목구비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이 마음이 발용(發用)하는 기(氣)까지 아울러 가리킨 것이 아니다. 종래의 독자들은 모두 이 형기의 ‘기’를 기발의 ‘기’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이기호발(理氣互發)이니 심성이기(心性二岐)니 하는 논이 이로 인해 생겨났다. 선생에 이르러 비로소 이것을 변론하여 주자의 본뜻을 밝혔으니, 율곡 선생의 기발이승일도론(氣發理乘一道論)이 이에 더욱 분명해졌다.
농암(農巖) 김공(金公)의 지각설(知覺說)에 대해 변론하였다.
김공이 지각을 논하여 말하기를 “지각을 마땅히 심의 용[心之用]으로 보아야지 지의 용[智之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김공이 일찍이 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변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도 깊이 변론하지 않았다. 김공이 죽은 뒤 문집이 간행(刊行)됨에 미쳐 선생이 비로소 그 전설(全說)을 보았는데, 그 설의 대략에 “지각은 기의 영[氣之靈]이고, 지(智)는 성의 정[性之貞]인데 어찌 기의 영을 성의 용[性之用]으로 삼을 수 있는가.” 하고, 또 “지각은 일심의 용[一心之用]을 오로지하는 것이고, 지(智)는 오성의 하나[五性之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데, 어찌 인심의 용을 오로지하는 것으로 오성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편벽되이 소속시키겠는가. ……”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매양 학자들을 위해서 변론하기를 “대개 지각을 지의 용[智之用]이라 하는 것은 지각의 기(氣)를 지의 용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곧 지각에 발현하는 지의 이치[智之理]를 지의 용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기를 성의 용으로 삼는 것인가. 또 지(智)가 성중(性中)에 있으면서 오성을 포함하고 있으니 일심을 오로지하는 지각으로 오성을 포함하고 있는 지에 소속시킨들 어찌 편(偏)ㆍ전(全)이 서로 맞지 않는 걱정이 있겠는가. 농암의 소견은 지각은 크게 여기고 성(性)은 작게 여겼으므로 그 설이 편벽되기 쉬워서 심과 성을 갈라 두 개의 용으로 여긴 것이니 그 실수 또한 작지 않다고 하겠다.” 하였다. 또 문인의 편지에 답하기를 “비유하건대 마음이 거울이라면 지(智)는 거울의 밝음이고, 지각은 거울의 비춤이고, 시비를 분변함은 거울이 곱고 미움을 구별하는 것이네. 그런데 지금 심의 용과 지의 용을 나누어 보는 것은 아마도 정미롭지 못한 듯하네.” 하였다.
임진년(1712) 선생의 나이 72세
1월 특지로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2월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이조 판서에 이배되자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5월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였다.
비답하기를 “전후의 비답에서 이미 간절히 바라는 나의 뜻을 자세히 말하였으나 나의 정성과 예에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어 멀리하려는 경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섭섭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의 형세로 보건대 이조의 장에는 경이 아니고서는 안 되겠기에 경에게 이조 판서의 자리를 주어 반드시 초치(招致)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은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본래 은거하는 사람이 아니니, 한재가 매우 혹심하여 밤낮으로 속을 태우고 근심하는 이때를 당하여 나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경은 과매한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고 직무가 오랫동안 폐해지는 것을 생각하여 겸양만을 고집하지 말고 즉시 길을 떠나와서 사림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4차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5차 상소해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였다.
비답하기를 “전후에 독실히 권면한 것이 오로지 지성에서 나온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헤아리지 못하고 이처럼 겸양만 하는가. 더구나 내가 평소에 경의 얼굴을 알지 못했으므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매양 간절하니,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으로 볼 때 어찌 대궐에 연연해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나의 지극한 뜻을 끝내 저버릴 수 없을 것이고 도정(都政)도 천연시켜서는 안 될 것이니, 멀리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 마음을 고쳐먹고 와서 간절한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6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7차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9월 만동사에 가서 향사에 참여하였다.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0월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사년(1713) 선생의 나이 73세
1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선온(宣醞)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사례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두 번째 올린 소에 대한 비답을 내렸다.
3월 사람을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송군 일원(宋君一源)을 제사 지내게 하였다.
송군은 우암 선생의 적증손(嫡曾孫)인데 학행이 있었다.
3차 상소해 사직하고, 이어 경연 중에 특별히 하유한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이에 앞서 주강(晝講)에 선생의 아우 상유(尙游)가 부제학으로 입시하였는데, 강이 끝나자 상이 상유에게 이르기를,
“대사헌을 전후에 간절히 부른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닌데도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끝내 조정으로 나올 기약이 없으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말로 이루 다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국사가 어렵고 근심스러움이 이와 같으니 유현(儒賢)이 조정에 나와서 경연에 출입한다면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대사헌은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몸을 깨끗이 하여 은거하는 무리가 아닌데 평소에 그의 얼굴도 알지 못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대사헌에게 전하여 꼭 올라오게 하라.”
하니, 상유가 대답하기를,
“오늘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셨으니 감격스러워 눈물이 흐르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평소에 신의 형의 뜻을 대략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전후에 내리신 은명에 끝내 감히 달려와 받들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신의 형은 매양 ‘나는 세록의 신하로서 본래 은일의 무리와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찍이 학술로써 자처한 적도 없고, 이른 나이부터 병에 걸려 오랫동안 시골에 있었던 것인데, 조정에서는 그에게 학문의 공부가 있다고 여겨 누차 정초(旌招)하면서 점점 높은 작질(爵秩)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만약 상의 총애와 보살핌에 감격하여 나와서 명에 따른다면 실로 물러남을 인하여 나오기를 매개(媒介)한 혐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감히 나올 수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지금 나이가 70여 세로 정신과 근력이 거의 다 소모된 데다가 계속된 질병으로 성한 곳이 없으니, 비록 전부터 서울에서 벼슬살이하고 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둘러 고로(告老)하고서 사직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초야의 병들고 늙은 몸이 어찌 은례(恩禮)가 특별하다 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조정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이 그가 감히 나올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하교하신 뜻으로 신의 형에게 알리기는 하겠습니다마는 신의 형의 평소 가지고 있는 뜻이 이러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위 조항에서 말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지나친 겸양에서 나온 것이고, 아래 조항에서 말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어려움이 많은 이때를 당하여 비록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진실로 나이가 늙었다 하여 귀휴(歸休)나 치사(致仕)를 허락할 수 없는데, 하물며 유현(儒賢)이 올라오면 근력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에랴. 지금 대사헌으로 불렀지만 온 뒤에는 반드시 직무로 얽어매지는 않을 것이니, 올라오기 전에는 결코 사직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다. 선비가 세상에 나서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고자 함이다. 지금 만약 생각을 고쳐먹고 올라와서 경연에 출입한다면 반드시 돕는 바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아직까지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나의 뜻을 몸받아 속히 올라오라는 뜻으로 경이 자세히 전유하라.”
하였다. 시독관 이택(李澤)이 아뢰기를,
“삼가 권상유(權尙游)에게 내리신 분부를 듣건대 실로 측석(側席)하는 성상의 성심(盛心)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상유가 성교(聖敎)를 사서(私書)로써 통보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마는 정원에서 특별 유지로 간절히 부른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상유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으니 형편이 장차 사서(私書)로써 전통(傳通)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친히 내려가서 면대해서 성지(聖旨)를 전하는 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택이 이와 같이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별유(別諭)는 예사로운 것이고, 지금 상유에게 친히 하교하신 것은 실로 이수(異數)라는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부제학에게 친히 하교하여 전통하게 한 것은 실로 남다르게 우대하는 뜻이다. 우선 사서로써 면대하여 전유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사양하는 그의 상소를 기다려 다시 간절히 부르는 거조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때 상의 은총이 날로 깊어져서 부르기를 빈번히 하였는데, 경연 중에 전교를 내리기까지 한 것은 또 보통에서 벗어난 일로 반드시 불러들이고야 말겠다는 뜻이었다.
선생의 집우(執友 좋은 벗) 이공 희조(李公喜朝), 정공 호(鄭公澔) 같은 이들도 모두 한번 나아가기를 권하면서 어떤 이는 ‘나아가서 세상일을 담당해야 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번 나아가서 은명에 감사해야 된다.’ 하기도 하였으나, 선생은 확고하게 초지(初志)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개 선생이 학문은 한결같이 고정(考亭 주자(朱子))으로 근본을 삼고, 사업은 효묘(孝廟)가 하고자 했던 뜻으로 주의를 삼아 이것을 평소의 신념으로 세웠으며, 또 우암 선생의 유탁(遺託)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항상 북창청풍 희황상인(北窓淸風羲皇上人)이라는 8자를 벽에 써 붙이고서 스스로 정절(靖節 도잠(陶潛))에 비유하며 소장에 위청(僞淸)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
그 출처ㆍ은현은 비록 우암과 같지 않은 것 같지만 그 도는 같았다. 우암은 큰 뜻을 분발하여 장차 큰일을 하려는 효묘를 만났으므로 나아가서 밝은 명을 받들어 은밀하게 대계(大計)를 도왔고, 선생은 춘추(春秋)의 의리가 점점 어두워지고 와신상담의 계획이 날로 잊혀 가는 때를 당하였으므로 구학(丘壑)에 은거하여 도해(蹈海)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이른바 ‘우(禹)ㆍ직(稷)ㆍ안회(顔回)가 처지가 바뀌었으면 다 그러했을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강상(綱常)을 부여잡고 대의(大義)를 밝힌 것은 일찍이 나가거나 들어앉았다 해서 다름이 있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성상의 보살핌이 비록 융숭하였지만, 조정이 조용하여 수양(修攘 내수(內修) 외양(外攘))의 계획을 전혀 들을 수 없었으니 평소 확고히 자정(自靖)한 선생으로서 어찌 쉽게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또 사문(師門)의 화는 영원히 잊지 못할 지극히 원통한 일인데, 갑술경화(甲戌更化)로 비록 복관(復官)의 명이 내리기는 하였으나, 전후에 우암을 무함하여 더럽힌 것이 아직 다 밝혀지고 씻어지지도 않은 데다가 윤증(尹拯)의 무리들이 오랫동안 조정의 의논을 주도하면서 남몰래 스스로의 안전책을 꾸며 명분과 의리가 날로 없어져 가므로 우암의 도를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방법이 더욱 없었으니 선생이 또 어찌 당세에 뜻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선생이 일찍이 이런 사정을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선생의 출처 대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려 유시하였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얼마 전 경연에서 특별히 부제학을 앞으로 불러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말하여 경에게 전하게 했던 것은 경이 나의 뜻을 몸받고 양찰하여 속히 올라오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 경의 소를 살펴보건대 바라던 바와 크게 어그러졌으니, 어쩌면 나의 진정한 뜻이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것이 끝내 이에 이르렀는가. 놀랍고 부끄러워 할 말을 모르겠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고자 해서인데, 하물며 경은 세록의 신하로서 산림의 인망을 지고 있고, 스스로 국가와 휴척을 함께해야 하는 의리가 있으며, 본래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자가 아님에랴. 매우 곤란한 이때를 당하여 내가 어찌 경을 버릴 수 있으며, 경도 어찌 나를 버리고 태연할 수 있겠는가. 은거의 뜻을 고수할 수 없음이 판명되었으니, 경은 반드시 만나고야 말겠다는 나의 정성을 몸받아 겸양만 고집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정에 나와서 경연에 출입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도우라.”
4월 4차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첩손(妾孫)이 그 조모를 위해서 3년을 대복(代服)하는 것의 당부(當否)와 신녀 태영(申女泰英)의 일을 물었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윤5월 정장(呈狀)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8월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9월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을 지었다.
《가례원류》는 시남(市南) 유 선생(兪先生)이 편집한 것이다. 대개 유 선생이 임천(林川)에 귀양살이할 적에 이 책을 편집하여 처음에는 집해(集解)라고 이름하였다. 그 뒤 방면되어 금산(錦山)으로 이사해 살면서 그 중본(中本)을 등사할 적에 문인 윤증(尹拯)의 아비 선거(宣擧)가 사는 곳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도 일찍이 그 일에 참여해 도왔었다. 유 선생이 뒤에 그 책을 윤증에게 부탁하여 수윤(修潤)하게 하였고, 갑진년 임종할 때에 또 편지로써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유 선생이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나도록 윤증이 수윤본(修潤本)을 그 자손에게 돌려주려 하지 않으니 유 선생의 손자 상기(相基)가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누차 간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윤증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시일만 끌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에 상신(相臣) 이이명(李頤命)이 경연에서 진달하여 호남 도신(湖南道臣)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니, 윤증은 마지못해 수윤본을 상기에게 내주었으나, 이내 후회하고서 바로 도로 찾아가며 말하기를,
“이 책은 우리 아버지와 함께 편찬한 것이니 시남 혼자서 만든 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고, 윤증의 아들 행교(行敎)는 곧장 말하기를,
“우리 집의 책이다.”
하였다. 상기가 누차 편지를 보내어 다투었으나 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서로 절교까지 하고서 드디어 그 집에 보관하고 있던 책으로 판각하였다. 그리고서 선생에게 서문을 청하였다. 선생이 서문을 쓰고 나서 또 서문의 뒤에 쓰기를,
“과거 유 선생이 이 책을 편집할 적에 원근의 벗들과 상의하여 정정한 것이 매우 넓었는데, 뒤에 미촌(美村 윤선거)이 살고 있는 곳이 매우 가까웠으므로 간혹 참여하여 도운 일이 없지 않았다. 유 선생이 만년에 미쳐 문인 윤증에게 부탁하여 수윤해 일을 마치도록 한 것은 실로 주자가 《의례통해(儀禮通解)》를 문인 황간(黃榦)에게 부탁하여 완성하게 한 뜻과 같은 것이었고, 또 임종할 무렵에 편지를 보내어 거듭 권면한 것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지금 윤증은 그만 ‘스승의 분부가 계셨는지의 여부를 기억할 수 없다.’고 하면서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이 간절히 부탁한 뜻이겠는가.
아, 예라는 것은 인심을 바르게 하고 풍교를 맑게 하는 것인데 지금 곧 아버지처럼 섬겨야 할 자리에 소진ㆍ장의의 수단을 사용하였으니, 저 예[彼禮 윤증이 수윤한 예]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유 선생의 높은 식견으로도 당초에 그가 이러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 사람을 알아보기란 역시 어려운 것이다. 형칠(邢七)의 낭패가 본래 저의 기량(伎倆)이니 무엇을 꾸짖겠는가.”
하였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군상(君喪)의 복제로 참최 삼년의 당부를 물었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이 문집에 보인다.
12월 26일(기해) 상에게 병환이 있어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였다는 것을 듣고서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28일(신축) 여주(驪州)에 도착해서는 병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어 상소하고 대죄하였다.
갑오년(1714) 선생의 나이 74세
1월 8일(경술) 상의 병후(病候)가 약간 안정되었다는 것을 듣고 여주에서 돌아왔다.
22일(갑자) 상의 병후가 더하다는 것을 듣고 출발해 서쪽으로 가다가 충주(忠州) 읍촌에 머물렀다.
24일(병인) 누암서원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
28일(경오) 상의 병후가 다시 안정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상소하고 대죄하였다.
2월 사관을 보내어 상소에 대한 비답을 전하였다.
너그러운 비답으로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5월 상소해 사직하고서 이어 대죄하니 너그러운 비답으로 체직을 윤허하였다.
9월 특별한 유지로 부르니 상소하고서 대죄하였다.
10월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11월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을미년(1715) 선생의 나이 75세
2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려 유시하였다.
비답하기를,
“지난번 소비(疏批)에서 이미 나의 뜻을 유시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양찰하지 않고서 이렇게까지 사면을 원하는가. 더욱 놀라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사뢰(私誄 개인의 제문(祭文)ㆍ애사(哀辭) 따위)는 공가(公家)의 문자와 다른 것이고 보면 그 제문에 운운한 것이 선정(先正 우암)에게 조금의 손익도 없는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것을 가지고서 나오기 어려운 꼬투리로 삼는가. 모름지기 겸양만 하지 말고 생각을 고쳐먹고 조정으로 나와서 나의 지극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이때 최석정(崔錫鼎)이 관유(館儒)를 대신하여 지은 제윤증문(祭尹拯文)에 우암 선생을 무함하고 헐뜯으니 선생이 정씨(程氏)를 헐뜯은 것을 듣고는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않은 윤화정(尹和靖)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로 삼았기 때문에 비지가 이와 같았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수교(修校)를 마쳤다.
우암 선생은 《주자전서(朱子全書)》가 실로 의리의 부고(府庫)이니 주 선생(朱先生)의 마음을 찾고자 하면 이 전서를 버리고서는 찾을 수 없다 하여 젊어서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 읽기를 폐하지 않았으니, 대개 평생에 공력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암 선생은 “《전서》 속에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이따금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으니 초학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고서 만년에 드디어 주석(註釋) 내는 일에 착수하여 ‘차의(箚疑)’라 이름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미한 뜻과 깊은 이치를 드러내 밝혀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함이었는데, 선생과 더불어 상의하고 토론하여 초고를 확정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일이 방대하여 미처 완성을 보기 전에 제주(濟州)로 귀양길을 떠났기 때문에 마침내 이 책을 선생에게 부탁하여 수정 윤색하여 완성하게 하였고, 또 농암(農巖) 김공(金公)과 더불어 이 일을 함께 하라고 부탁하였다. 선생이 이 부탁을 받고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수교(修校)하였는데, 김공이 문목(問目)으로써 질문해 오면 그 장점은 채집하고 단점은 버려 마땅하게 되기를 힘썼다. 김공이 죽음에 미쳐서는 선생 혼자서 이 일을 담당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교를 마쳤다. 연신(筵臣)의 건의로 인하여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였다.
3월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존문(存問)하고 음식물을 하사하니, 상소하여 사례하고 겸하여 본직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로 불렀다.
서계(書啓)가 문집에 보인다.
4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10월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였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지난달에 내린 특별 유지는 진실로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경이 깊이 헤아리고서 나를 멀리하는 마음을 돌릴 줄로 생각했는데, 경의 서계를 보건대 소망과 크게 어그러졌으니, 성의가 부족했음에 스스로 부끄러워 할 말이 없다. 아, 세도는 물이 흐르듯이 더욱 낮아지고 국세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 때를 당하여 세도를 만회하고 국세를 부지할 책임이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을 지고 있는 경에게 있지 않고 누구에 있단 말인가. 이 점이 바로 내가 더욱 돈독한 성의로 거듭 불러 마지않는 이유이다. 더구나 내가 경의 얼굴을 모르므로 자나 깨나 생각하며 간절히 한번 보고 싶어 하니, 평소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으로 생각이 이에 미친다면 누누이 말한 비지가 있기 전에 반드시 마음을 고쳐먹고 올라왔을 것이다. 아, 군신 사이에 귀한 것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인데, 지금 나의 이 말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지성이 있는 곳에는 끝내는 반드시 감동하는 것이므로 결코 나와서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사관을 보내어 지극한 나의 뜻을 거듭 고하는 바이니 경은 겸양만 고집하지 말고 즉시 출발해 와서 나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11월 부제학 정공 호(鄭公澔)의 파직으로 인해 상소하여 대죄하고, 이어 윤증(尹拯)이 전후에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진달하였다.
정공이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지으면서 스승을 배반하고 책을 도둑질한 윤증의 죄를 깊이 지척(指斥)하였는데, 상이 이 글을 보고서 특명으로 정공을 파직하였다. 호남 유생 유규(柳奎) 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소하여 선생이 지은 서 후문(序後文) 및 우암 선생 묘표(墓表) 중의 말을 들어 선생을 침범하여 헐뜯으니, 상은 서 후문은 짓지 않는 것이 옳았다는 내용의 비지를 내렸다. 태학생 윤지술(尹志述) 및 8도 유생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하여 억울한 모함임을 변명하였으나 모두 엄한 비답을 받았다. 선생은 드디어 상소하여 죄를 청하고, 또 《원류(源流)》의 곡절과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전말을 진달하였다. 그 소(疏)의 대략에,
“신이 어릴 때부터 고(故)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의 문하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가례원류》에 대해 자세히 들었는데, 이 책은 유계가 임천(林川)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편집한 것입니다. 근래에 또 듣건대 진선(進善) 정양(鄭瀁)의 집에 유계가 편집한 《가례집해(家禮集解》 5책이 있다고 하기에 신이 가져다 보니 실로 《원류》의 초본(初本)이었습니다. 정양의 인장이 완연하니 필시 당초에 베껴 놓은 것인 듯한데 언제 《원류》로 이름을 고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유계가 방면된 뒤에 금산(錦山)으로 거처를 옮겨 증 참의 윤선거(尹宣擧)와 문을 마주 대하고 살았는데, 실로 이때에 중본(中本)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으로 지금 생존해 있는 이가 없으니 선거가 얼마만큼 참여해 도왔는지 후생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뒤에 유계가 성은을 입고 조정으로 들어와서는 공무로 바빠서 수윤(修潤)할 겨를이 없이 문인 윤증에게 부탁하여 수윤해 완성하게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전후의 편지가 모두 유계의 문집에 실려 있으니 상고해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중본(中本)이 오랫동안 윤증의 집에 있었으니 선거가 다시 수윤의 일을 도운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선거가 고 참판 이정기(李廷夔)에게 준 두 통의 편지에 모두 유씨(兪氏)를 주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거가 지은 유계의 행장에 유계가 처음으로 편집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서 칭찬해 마지않았으니, 오늘날에 믿을 수 있는 증거로 이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자손된 자가 자기 집안의 물건으로 만들고자 하니, 그 선인의 뜻과 어쩌면 그렇게 서로 어긋난단 말입니까.
신이 가장 의아해하는 것은, 윤증이 유상기(兪相基)에게 답한 글에 ‘이른바 부탁을 받았다는 말은 끝내 기억할 수 없다.’고 한 사실입니다. 윤증이 아무리 늙어 정신이 어둡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잊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옛말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살아 있는 자가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는데, 가령 유계가 다시 살아난다면 윤증의 마음이 부끄럽겠습니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가 《강목(綱目)》ㆍ《소학》을 편찬할 때 문인들에게 편집하게 한 것이 매우 많았고, 《근사록》은 여조겸(呂祖謙)이 실로 그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책을 말하는 자들이 ‘주자가 만든 책이다.’ 하고 그 밖의 사람을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윤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윤증이 유계를 제사한 제문에 ‘선생께서는 저를 자질(子姪)처럼 보셨고 저는 선생을 부형처럼 섬겼다.’ 하였으니 은의(恩義)가 돈독하였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전에 받은 부탁을 사후에 배반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소진ㆍ장의의 수단이라고 한 것입니다. 윤증이 40년 동안 아비처럼 섬긴 스승을 무함해 헐뜯고 배척해 절교하여 원수처럼 보더니, 지금 유계에게도 또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천리ㆍ인정에 차마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형칠(邢七)의 낭패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 군신(君臣)과 사생(師生)은 의리로 결합된 것입니다마는 예경(禮經)에 살았을 때 섬기고 죽은 뒤 장사 지내는 예를 논하면서 천륜(天倫)의 부자(父子)와 동일한 예(例)로 병칭(幷稱)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이 군ㆍ사ㆍ부가 사람의 대륜(大倫)이기 때문에 이 중에 하나라도 폐하면 사람으로서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윤증이 한 행위를 생각해 보건대 첫째도 배사(背師)이고 둘째도 배사인데, 세상의 인심이 어둡고 막혀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 스승을 아비와 한가지로 섬기는 의리가 거의 인멸되었으므로 신은 이것을 두렵게 여겨 감히 서(序)의 후문(後文)에 대략 논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호(鄭澔)가 유현(儒賢)을 침범하여 모욕했다는 이유로 먼저 죄를 입었습니다. 신은 윤증의 친구로서 그의 옳지 못함을 보고서 절교한 지 이제 오래인 데다가 지금 변론해 배척한 이 말이 침범해 모욕한 정도뿐만이 아니니, 그 죄범(罪犯)을 논하면 실로 정호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규(柳奎)라는 자가 한 장의 소를 올려 신의 스승의 묘문(墓文)의 일까지 아울러 언급하면서 신을 침범하고 모욕하는 데 온갖 힘을 다 쏟았다 하니 신은 또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개 신의 스승이 화를 입은 것이 이미 윤휴의 무리가 다시 기용된 데서 연유하였는데, 윤증의 헌등(騫騰 득의(得意))이 또 이때에 있었습니다. 신의 스승이 죽기 전에 이것을 누차 문자 사이에 형언하였으니, 지금 묘문을 지으면서 어찌 이에 의거해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상께서 이미 유규가 선정을 위해 신구했다고 여기시어 그의 말을 가납하셨으니, 유현을 침범해 배척한 신의 죄가 더욱 깊습니다……”
하니, 병신년(1716) 1월에 소비(疏批)하였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경이 정호의 일로 인해 상소하여 죄를 기다리기까지 하는 것은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상소에서 ‘첫째도 배사(背師)이고 둘째도 배사이다.’고 하였는데, 저 선정(先正 윤증)의 도덕으로서 어찌 이러함이 있겠는가. 경은 공평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또한 대죄하지도 말고 올라와서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이 상소하여 비지가 타당하지 않다고 간절히 간하니, 특명으로 파출하고 멀리 귀양 보내기까지 했다.
시를 지어 최군 징후(崔君徵厚)에게 곡하였다.
징후가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뜻을 독실하게 가지고 실행에 힘을 썼으므로 선생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나이 41세에 죽었다.
병신년(1716) 선생의 나이 76세
3월 유봉휘(柳鳳輝)ㆍ정식(鄭栻)의 무함하는 차자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가례원류》의 서문이 나온 뒤부터 윤증 무리의 휴우(睢盱 좋지 않은 눈으로 봄)가 날로 심하여 반드시 선생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였는데, 지난해 내린 소비(疏批)에 또 상이 좋아하지 않는 뜻이 있는 것을 보고는 기회를 타서 헐뜯고 무함하는 데 다시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의 소가 더욱 매우 패악하였고, 또 연중(筵中)에서 참소한 것이 더욱 심하니 상은 서 후문(序後文)을 궁내(宮內)에서 불태워 없애라는 전교를 내렸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윤득화(尹得和), 태학생 김순행(金純行) 등이 상소하여 무함임을 변명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봉휘ㆍ정식이 차자를 올려 선생의 파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윤증의 문도 최석문(崔錫文) 등이 또 그 스승의 신유의서(辛酉擬書)를 들어 상소하여 우암 선생을 헐뜯고 무함하면서 선생까지 언급하니 상은 은혜로운 비답을 내렸다. 판부사 이여(李畬)가 차자를 올려 변론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특명으로 서용하여 대사헌 겸 찬선 좨주(大司憲兼贊善祭酒)에 제수하고서 사관을 보내어 각별한 유지로 불렀다.
7월 2일(기미)에 전교하기를,
“신유의서 및 선정 신 송시열이 지은 윤선거 묘문(尹宣擧墓文)을 모두 등사해 들이라.”
하였다. 6일(계해)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지금 의서를 자세히 보건대 글 속에 과연 과격한 말들이 많으니 전에 올렸던 이 판부사의 차자의 변론이 옳다. 윤증을 전혀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많은 선비들의 원한을 풀기 위한 변론이 괴이할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선생의 특별 서용을 명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가례원류》의 서 후문을 불태우라 했던 명이 잘못이었음을 이제 깨달았으니 수권(首卷)을 본원으로 내려 보내어 종전대로 인쇄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적신(賊臣) 오명윤(吳命尹) 등이 반유(泮儒)라 칭하면서 상소하여 윤증을 신구(伸救)하니, 전교하기를,
“작년에 내린 전교는 의서와 묘문을 보기 전에 있은 것이고, 오늘의 처분은 의서와 묘문을 본 뒤에 있은 것이다. 내 마음에 의심이 풀려 시비가 자명해졌으니, 이번 처분은 비록 후세에 대고 할 말이 있다고 해도 가할 것이다. 아비와 스승 중 누가 중하고 경하냐 하는 설은 지금 다시 제기할 것이 아니다. 서(序)와 발(跋)을 도로 인쇄하는 것은 또한 그 순서의 일일 뿐이다.”
하였다. 당시에 오명윤(吳命尹) 등이 수선지지(首善之地)에 있으면서 정인(正人)을 해치는 말들을 주워 모아 한 장의 소(疏)를 올려 선정(先正 우암)을 모욕하면서 꺼리는 바가 없었고 유현(儒賢 수암)을 헐뜯는 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심지어 서문을 다시 불태워 없앨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멀리 귀양을 보내는 것이 마땅한 바이로되, 우선 가장 가벼운 벌에 처하여 소두(疏頭) 오명윤을 정거(停擧)시켰다. 또 옥당의 차자와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석문(錫文)ㆍ봉휘ㆍ정식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낼 것을 명하고, 그 밖에 정인을 해친 무리들도 모두 삭출하였다. 그리고 선생을 대사헌에 제수하고서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로 불렀는데, 그 유지에 이르기를,
“지난번 《가례원류》를 간행하여 올리던 날에 내가 곡절을 자세히 모르고 있던 차에 갑자기 서문을 보고는 경을 의심하여 처분을 너무 서둘러서 은례(恩禮)가 쇠박(衰薄)했던 것이 매우 부끄럽고 한탄스러워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지난 잘못을 이미 깨닫고서 경의 관직을 처음의 상태로 회복하였으니 불평스러운 생각으로 끓어오르던 사림의 답답한 심정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사관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하는 바이니 경은 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마음을 고쳐먹고 올라오라.”
하였다. 대개 상이 평소에 지성으로 선생을 존경하고 예우하였는데, 갑자기 견책과 파면의 거조가 있었던 것은 비단 뭇 소인에게 속임을 당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대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정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선생이 지은 서문 및 상소한 말을 보자 선생이 편벽되이 한쪽 편만 든다고 의심하여 갑자기 은례(恩禮)가 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묘문 및 의서를 봄에 미쳐 묘문에는 원래 윤선거를 헐뜯어 욕한 말이 없는데, 의서에는 터무니없는 날조가 끝이 없어 실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상이 비로소 윤증의 심보가 매우 패악하고 처신한 도리가 무례하였음을 깨닫고 지난날에 내렸던 처분을 깊이 후회하고서 즉시 선생을 서용하여 복직시키고 다시 서문을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윤증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승선(承宣)을 보내어 화양서원(華陽書院)에 치제(致祭)하고 친히 서원의 편액을 써서 내리니 30년 동안 정해지지 않았던 사문(斯文)의 시비가 이때에서야 크게 정해졌다.
특지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8월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였다.
정유년(1717) 선생의 나이 77세
3월 대가(大駕)가 장차 온천(溫泉)으로 거둥하려 하니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고, 사학 유생 심봉위(沈鳳威) 등이 상소하여 대가가 행궁(行宮)에 머문 뒤에 선생을 초치하여 함께 데리고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3일(무오) 대가가 온천으로 거둥했다는 것을 듣고 행궁을 향해 출발하였다.
5일(경신) 병으로 괴산(槐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상소하여 대죄하였다.
9일(갑자)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로 불렀다.
유시하기를,
“내가 경을 간절히 부른 것이 무릇 몇 번이었으나, 나의 정성이 미덥지 못하고 예가 극진하지 못하여 경이 조정으로 나올 기약이 아득하기만 하니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지난해 특별한 유지로 부른 뒤 다시 권면하여 기어이 멀리하려는 경의 마음을 돌리고자 하였으나, 마침 나의 병이 더해 신음으로 날을 보내다 보니 뜻만 가졌을 뿐 시행에 옮기지 못하여 서운한 마음 더욱 금할 길이 없다. 온천에 목욕하기로 처음 작정한 때부터 경의 덕스러운 용모를 만나 볼 수 있고 꼭 초치하려던 나의 마음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되어 마음이 절로 즐거워 손꼽아 기다렸다. 지금 내가 이곳에 와서는 경을 그리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하는 바이니 경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깊이 헤아려 안심하고 사관과 함께 와서 나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서계(書啓)가 문집에 보인다.
10일(을축)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였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어제 사관이 가는 편에 겨우 은근하고 간절한 뜻만을 갖추어 보냈을 뿐인데, 지금 경의 소를 보건대 경이 이곳으로 오기 위하여 괴산까지 왔다는 것을 알았으니 기쁘고 흐뭇한 마음 진실로 깊다. 부디 질병으로 핑계하지 말고, 또 대죄하지도 말고 겸양하지도 말고 안심하고 와서 힘써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11일(병인) 재차 상소하여 해직시켜 주기를 빌었다.
14일(기사) 사관을 보내어 친절히 타이르고 이어 사관과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유지는 다음과 같다.
“일전에 내린 특별 유지는 진실로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경이 깊이 헤아리고서 행재소로 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경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소망과 크게 어그러졌으니, 어쩌면 정지(情志 마음)가 미덥지 못한 것이 끝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놀랍고도 부끄러워 뭐라 말할 수 없다. 경은 세록의 신하로서 본래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자가 아니니, 국가와 휴척을 함께하는 의리로 볼 때 나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 도내(道內)에 와 있으니 이는 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인데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나의 서운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경이 본직(本職)을 한결같이 사양해 왔으니 지금 나오기 어려워하는 것이 혹시 이 때문이라면 조가(朝家)에서 유현(儒賢)을 예우함에는 작질(爵秩)의 유무에 관계하지 않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사직의 윤허를 아끼겠는가. 경은 부디 나의 이러한 뜻을 몸받아 포의로 입대하여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서계(書啓)가 문집에 보인다.
같은 날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여 본직의 체직을 윤허하고 빨리 오도록 하였다.
18일(계유) 앞으로 나아가 청안(淸安)에서 묵었다.
19일(갑술) 청주(淸州)에 당도하였다.
22일(정축) 전의(全義)에 도착하여 율곡 선생 사당(祠堂)에 배알하였다.
율곡 선생의 후손 연(綖)이 이때 현감이 되어 사판(祠版)을 현아(縣衙) 안에 모시고 있었다.
23일(무인) 대가의 환궁일(還宮日)이 이미 정해졌다는 것을 듣고는 나아가 온양 금곡(金谷)에 도착하여 상소해 찬선(贊善)ㆍ좨주(祭酒)의 직명(職名)도 해면(解免)해 주기를 비니, 함께 온 사관으로 하여금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경이 이미 행재소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기쁜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일전에 본직의 해면 요청을 억지로 윤허한 것도 부득이해서였는데, 겸대(兼帶) 및 찬선까지 아울러 해면을 윤허하는 것은 내 마음에 실로 섭섭한 바가 있으니, 부디 이로써 겸양하지 말고 나의 전에 내린 유지를 몸받아 속히 사관과 함께 들어와서 갈망하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25일(경진) 다시 함께 온 사관으로 하여금 겸대의 체직을 윤허하니 빨리 들어오라는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사관이 소비(疏批)를 전한 뒤에, 선생은 직명이 아직 다 해면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회계하니, 전교하기를,
“나의 뜻을 약간 유시하였는데, 경은 두 직명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나오기 어려운 꼬투리로 삼고 있으니, 유현을 위안하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잠시 해면하기를 아끼겠는가. 아울러 우선 경의 뜻을 힘써 따라 주는 바이니 모름지기 나의 이런 뜻을 몸받아 즉시 들어올 것으로 다시 유지를 전한다.”
하고, 그날로 정사를 열어 선생을 부사직(副司直)에 부직(付職)하였다.
사관을 따라 행궁으로 가서 입대하였다.
사관이 다시 상의 명으로 유지를 전하였다. 선생이 드디어 명을 받들고 사관을 따라 행궁으로 나아가니 즉시 인견을 명하였다. 선생은, 비록 직명이 해면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산인(山人)으로 자처하여 야인(野人)의 복장으로 나아가 보일 수 없어서 곧 행궁을 호위한다는 뜻으로 군복(軍服)을 입고 입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산림에서 덕을 길러 일찍부터 유림의 중한 인망을 지고 있었으니, 내가 반드시 불러다가 좌우에 두고 조석으로 가르침을 받고자 한 마음이 어찌 조금이라도 해이한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의 정성이 얕고 예가 박하여 전후에 부른 것이 비록 근실하였으나 멀리하려는 경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다만 스스로 서운해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온천으로 거둥이 결정된 뒤에 경의 사는 곳이 온천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끝이 없어 밤낮으로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지난번 경의 소를 보고서 괴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놀라워 특별히 사관을 보낸 것인데, 경은 후소(後疏)에서 또 본직을 사양하였기 때문에 경을 오게 하는 것이 급하여 드디어 체직을 윤허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올린 소에서는 또 두 직명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겸직까지 아울러 체직시키는 것은 실로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들어줄 수가 없어 들어오라고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직되기 전에는 끝내 올 의사가 없다고 하기 때문에 부득이 아울러 체직을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매우 서운하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보잘것없는 몸으로 30년 동안 지극히 융숭한 은례(恩禮)를 입었으니 신이 비록 분골쇄신하더라도 성은의 만분의 일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분의(分義 군신 간의 도리)가 비록 엄중하지만 염치 또한 중합니다. 신의 직명을 돌아보건대 전혀 근사하지도 않기 때문에 끝내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누차 소명을 어기다 보니 쌓인 죄가 깊어 하루도 감히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간곡하게 신의 처지를 헤아리어 직명의 체직을 윤허하시고서 반드시 한번 보고자 한다고 전교하셨는데, 신하로서 어찌 한번 임금을 뵙고 싶은 소원이 없었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은혜로운 전교에 감격하여 감히 이렇게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계속해서 간절히 부른 것은 그 뜻이 행궁에서 한번 만나 보고 말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궁할 때에 경과 함께 돌아가고자 해서이다. 오늘날 재이가 잇따라 일어나 많은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만약 경과 함께 돌아가게 된다면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이번 걸음에 나를 따라 함께 서울로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퇴탁(退托 물러갈 핑계)할 생각을 가지겠습니까마는 신의 나이가 80에 가까운 데다가 고질병마저 있어 집에 있을 때에 뜰 사이도 출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편치 못하시어 온천으로 거둥하시는 거조가 있기까지 하다는 것을 듣고는 신이 아무리 거의 죽어가는 목숨이라 할지라도 감히 집 안에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없기에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힘을 내어 출발했으나 오래도록 중도에서 지체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늙고 병든 몸으로 강행하기 어려워서인데 성상께서는 매양 겸양이란 말씀으로 전교하시니 신은 이미 지극히 황공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분부에 또 함께 돌아갈 것으로 말씀하시니 신은 진실로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80의 나이에 노쇠한 병이 또 이와 같으니 신의 근력으로 어찌 강책(强策) 치신(致身)할 수 있는 길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분부를 받들 수 없을 듯하여 더욱 황공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함께 국사를 다스리는 것이 내가 반드시 초치하려 했던 본뜻이었으니 단지 한번만 보려 한 것이 아니었다. 경이 지금 이곳에 오니 내 마음의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런데 만약 친히 만나 보고도 함께 돌아가지 못한다면 내 마음이 더욱 서운할 것이다. 경은 본래 세록의 신하로서 국가와 휴척을 함께할 의리가 있고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자가 아니니, 어렵고 근심스러운 이때를 당하여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 함께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비록 이러하시나 병든 늙은이의 근력으로 어떻게 상경(上京)할 수 있으며 상경한다 하더라도 어찌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병의 증상에 항상 금방 죽을 것 같은 증세가 있어 숨이 거의 끊어지려고 하여 조석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올라갈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비록 높고 병환이 비록 이와 같으나 이곳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올라가는 데 대단히 강행하기 어렵지는 않을 듯하니 반드시 함께 올라가서 함께 국사를 다스리는 것이 나의 무궁한 바람이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번에는 죽음을 참고 왔지만, 이러한 병의 상태로 또 상경한다면 반드시 길에서 엎어져 죽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염치를 잃은 소신의 수치는 족히 말할 것이 없지만 국가가 백성을 기르는 도리에 어찌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좌상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나이는 비록 높으나 근력이 아직 건장함을 상께서 이미 굽어 살피시고 간절하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옛사람 중에도 후거(後車)에 태운 분이 있었으니 지금 만약 병이 있다면 뒤따라 올라오게 해도 좋을 것인데, 또 무엇 때문에 동시에 어가(御駕)를 따르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진실로 옳다. 또 무엇 때문에 동시에 어가를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상이 아뢰기를,
“청풍(淸風)에서 이곳까지 와 이곳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의 원근이 별로 차이가 없으니 천천히 올라간다면 또 어찌 강행하기 어렵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동시에 어가를 따라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천천히 올라오기를 바란다. 얻기 어려운 이런 기회를 얻어 조용히 면대하고서도 끝내 함께 돌아가지 못한다면 국사의 망애(罔涯 곤란이 끝이 없음)는 이미 말할 수 없거니와 사림의 실망은 더욱 어떠하겠는가. 반드시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기 바란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올라가는 데는 실로 강행하기 어려운 바가 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황공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우상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이 노인이 한평생 나오지 않던 끝에 처음으로 군부(君父)를 배알하였으니, 비록 그대로 따라 상경할 것으로 분부하셨지만, 그 말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과연 정성을 다해 간절히 권면하신다면 어찌 끝내 부지런히 권고(眷顧)하시는 성상의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로하고 또 병이 들어 어가를 따라갈 수 없다 하더라도 천천히 올라오면 조금도 방해될 것이 없으니 간절한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실로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우상이 아뢰기를,
“30년 동안 간절히 예소(禮召)한 끝에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곳에 왔으니, 이것이 어찌 그 얼굴이나 한번 보기 위해서였을 뿐이겠습니까. 그로 하여금 소회를 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들어올 때 반드시 나의 안면을 보았을 것이나, 나는 안질이 심하여 경의 안색을 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서운하다. 내가 비록 경의 얼굴을 못 보지만 들어올 때 보니 근력은 매우 강건하였다.”
하였다. 좌상이 아뢰기를,
“그에게 전립(戰笠)을 들게 하고서 그 안색을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옛날에도 초야에 있는 신하로서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기를 청한 자가 있었으니, 신도 한번 청광(淸光)을 우러러보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나와서 보라.”
하였다. 선생이 앞으로 나아가 우러러보기를 마치자,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환궁할 날이 멀지 않고 또 성상의 환후가 더해 가는 때를 당하여 아무리 묻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조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은례(恩禮)가 이와 같은데 어찌 함께 상경하지 않고 뒤에 처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략 이미 말하였거니와, 재이가 잇따라 일어나고 사방에 기근이 들었으니 장차 무슨 계책으로 구제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자 한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지식이 없는 데다가 지금은 또 늙어 정신이 흐려서 젊었을 때 조금 들은 것마저도 이미 다 사라져 없어졌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듣건대 천하 만사가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에 지극히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분명하고 쉽게 처리할 수 있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도는 성의(誠意) 정심(正心)이 중요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실로 노유(老儒)들의 상담(常談)이어서 매우 신기하지 않지만, 다스림을 하는 근본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전에 우리 효종대왕께서 항상 경연에 납시어 매양 성의 정심을 학문의 주(主)로 삼으시어 충분히 강론하셨습니다. 신의 스승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이 가장 오래 시강하였는데 성조(聖祖)께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을 경들에게 바란다는 내용으로 전교하셨다는 것을 신도 평소에 들었습니다. 성의 정심의 학문은 바로 전하의 가법(家法)이니 후왕(後王)으로서 마땅히 계술(繼述)해야 할 것이 오직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주자(朱子)가 임종하기 3일 전에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내는 소이(所以)와 성인이 만사를 응대하는 소이는 직(直)일 뿐이다.’ 하였는데, 신의 스승 송시열이 임종할 때에도 일찍이 이 말로써 문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대개 직 자가 포함하고 있는 뜻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사람의 생리(生理)는 직(直)하다.’ 하셨고, 맹자는 ‘직(直)으로 길러 해침이 없으면’이라고 하였는데, 《대학》의 성의 정심과, 《중용》의 정일(精一)이 모두 이 뜻이니, 천고(千古)의 성현들께서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 이 한 직 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조께서 이미 위에서 발휘하셨고, 신의 스승이 아래에서 정성껏 인도하였으니 지금 전하께서 근본을 단정히 하고 훌륭한 정치를 내는 도는 다만 이것을 깊이 몸받아 힘써 행할 뿐입니다. 신이 어전에 아뢰는 데 어찌 다른 설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바가 모두 정언(正言) 지론(至論)이니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각별히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성인(聖人 공자(孔子))의 공 중에 《춘추》보다 큰 것이 없고, 《춘추》의 의리에는 또 존왕(尊王)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 의리가 밝지 않으면 사람이 사람이 되지 못하고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해(四海)에 오랑캐의 비린내가 가득한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만이 잃지 않아 예의의 나라가 된 것이 모두 성조의 공이 아님이 없습니다. 대개 천지가 뒤집히는 호란(胡亂)을 겪은 뒤로, 우리나라의 국력이 약소(弱小)하여 국치를 설욕하는 일을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신 바는 아니나, 춘추 대일통(春秋大一統)의 의리는 바로 천경(天經) 지의(地義) 민이(民彝)여서 하루도 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조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10년 동안 항상 와신상담의 뜻을 간절히 하시어 하루도 이 의리를 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이 매양 이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개 신의 스승은 평생 이 의리를 지켜 은밀히 대계(大計 효종(孝宗) 북벌계획(北伐計劃))를 도와 몸으로 순국하기로 기약하였으니, 군신의 한마음 한뜻이었던 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조명(照明)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도 즉위하신 이후로 또한 효묘(孝廟)의 마음으로 전하의 마음을 삼으시어 반드시 이 일을 오늘날 천하의 제일의 의리로 삼아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보답의 제사를 올리기까지 하시니, 마치 해가 중천에 뜬 것처럼 의리가 크게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세도가 날로 낮아지고 인심이 점점 나쁜 곳으로 빠져 들어 심지어 대의를 비난하고 헐뜯기까지 하여 신의 스승의 당시 정성스러웠던 진심을 거짓으로 돌리는데도 온 세상이 괴이하게 여길 줄을 모르니, 신은 이렇게 가다가는 대의가 날로 더욱 어두워져서 인심과 세도가 이적으로 빠져 들까 두렵습니다.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을 비록 급히 이루기는 어려우나, 신이 바라건대 전하가 효묘께서 뜻하고 일삼던 것을 깊이 따라 행하여 항상 잊지 않으신다면 선인(先人)의 뜻과 일을 잇는 효도가 이에서 지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춘추》의 의리는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지금 경이 아뢴 바가 더욱 간절하니 마땅히 더욱더 마음에 두겠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위 무공(衛武公)은 90의 나이에도 오히려 억계(抑戒)를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춘추가 높기는 하지만 위 무공에 비하면 차이가 있으니 만약 큰 뜻을 분발하여 그치지 않고 부지런히 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고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위 무공에 대한 말은 더욱 감탄할 만하니 마땅히 더욱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성상의 환후가 근간에는 어떠하십니까. 삼가 듣건대 처음 온천에 오셨을 때에 수라(水剌)가 날로 늘어나고 여러 증상이 날로 감소되었다 하니 신민의 경변(慶忭 손뼉을 치며 기뻐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듣건대 환궁하실 날짜를 갑자기 앞당겨 정하고 지난밤에는 또 다른 증상이 생겼다 하니 신은 밤새도록 우려를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자못 한기(汗氣)가 있어 비체(痞滯)는 조금 덜하지만, 고달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목이 마르고 어지러운 것은 아직 낫지 않았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조용히 조섭하는 중이시니 신은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도가 불행하여 화가 문장(門墻 사문(師門))에서 생겼으니 사문(斯文)의 변괴인지라 지극히 한심하다. 내가 이미 밝게 살피고서 시비를 크게 결정하였으니 앞으로는 혹 선비들의 추향이 바르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성덕이 광명하시어 시비를 밝게 살피셨으니 세도와 사문의 경사가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시골에 있을 적에 성상의 분부를 들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멀리 앉았기 때문에 안색을 볼 수 없어 매우 답답하니 앞으로 나아와서 가까이에 앉으라.”
하였다. 선생이 앞으로 나아가 용상(龍牀) 밑에 엎드리니 상이 선생의 손을 잡고 눈을 들어 한동안 바라보고서 분부하기를,
“분명히 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끝내 그 안면을 분별하여 알 수 없으니 진실로 답답하다.”
하고, 이어 또 분부하기를,
“이렇게 서로 만나는 것은 지극히 얻기 어려운 기회이다. 지금 경이 내 곁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은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멀리하려는 마음을 속히 돌려 함께 돌아가기를 바란다.”
하니, 좌상이 아뢰기를,
“은례(恩禮)가 이처럼 융숭하니 어찌 감히 받들어 따를 방도를 생각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서로 만나고 나니 마음이 매우 기쁘다. 전교를 저버리지 말고 함께 가기를 바란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조섭에 방해가 될 듯하니 신이 물러가서 문자로써 아뢰겠습니다.”
하고서, 물러났다. 상이 이르기를,
“근력이 아직 왕성하여 심히 노쇠하지는 않았다.”
하자, 좌상이 아뢰기를,
“비상한 은례를 보았으니 국가의 경사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물러간 뒤에 반드시 사면할 것입니다마는 지금 그가 이곳에 왔는데 어찌 놓아 보낼 수 있습니까. 공경을 다하고 예를 다하여 기어이 함께 돌아가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나의 생각도 바로 그러하다.”
하였다.
26일(신사) 아들 욱(煜)의 병이 위독하다는 것을 듣고는 상소문을 남겨 두고 급히 돌아왔다.
선생의 이번 걸음은, 대개 마침 대가(大駕)가 가까운 곳에 임하여 간절히 부르심이 더욱 정성스러웠기 때문에 성은의 보살핌에 감격하여 한번 천안을 뵙고서 평소 임금을 향모(向慕)하던 정성을 펴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직명이 다 체직되어 다시 혐의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행궁(行宮)에 가서 등대(登對)까지 했던 것이다. 이미 간 이상 또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다 말씀드려 성덕(聖德)을 돕고자 하였으나, 나아가서 뵙던 날에 성상께서 바야흐로 조섭 중에 계시어 오랫동안 입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만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관계가 큰 성학(聖學)을 익히고 대의(大義)를 밝힐 것만을 가지고 대략 진달하고서 물러났다. 그리고 후일 다시 입대하여 계속해 품은 생각을 진달하여 성상의 권고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아들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면결(面訣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결별함)이 급하였기 때문에 상소문만을 남겨 두고 곧장 돌아왔다. 당시의 일은 천고(千古)에 성대한 제회(際會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남)라고 할 수도 있고 또한 천고에 지극한 통한이라고도 할 수 있다.
28일(계미) 집에 도착하였는데 이날 저녁 아들의 상을 당하였다.
욱(煜)은 총명 개제(愷悌 얼굴과 기상이 온화하고 단아(端雅)함)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였으며, 집에 있어서는 효우(孝友)하고 관직에 임하여서는 청백(淸白)하였으며, 문사(文辭)가 전아(典雅 법도에 맞고 아담함)하고 필법(筆法)이 민묘(敏妙 민첩하고 아름다움)하였으며,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薬)ㆍ산수(算數)의 유(類)에까지 모두 널리 통하였으니 대개 세상에 드문 재주였다. 선생이 일찍이 부자간의 지기(知己)라고 허여하였는데, 불행히 먼저 죽었기 때문에 선생의 젊었을 때의 언행 중에 기록할 만한 것들이 많이 빠지고 유실되어 기록하지를 못하였다.
4월 3일(정해) 사관을 보내어 소비(疏批)를 내렸다.
비답하기를,
“어제 전석(前席)에서 경의 용모를 친히 보고는 여러 해를 두고 그리워했던 끝이라서 기쁘고 흐뭇한 마음 실로 깊어 마치 병이 몸에서 떠난 듯하였다. 아, 현자(賢者)를 얻어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급선무로서 태평한 치세(治世)에도 오히려 그러한 것인데, 하물며 매우 어려운 이때이겠는가. 지금 내가 꼭 초치(招致)하고야 말려는 것은 대개 경을 권면해 조정으로 나오도록 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리고자 해서이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해 간절히 권면한 것이 누루(縷縷)할 뿐이 아니었으나, 몸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는 경의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서운한 마음 자못 심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다시 진정을 토로하여 멀리하려는 경의 마음을 기어이 돌리려 하였는데, 방금 경의 소를 보건대 아들의 병으로 인해 소(疏)를 남겨 두고 돌아갔으니, 나의 정지(情志 마음)가 믿음을 받지 못함이 어쩌면 이에 이르렀는가.
이에 나도 모르게 경악스럽고도 부끄러워 마치 좌우의 손을 잃은 것 같다.
아, 경은 선정(先正 우암)의 적전(嫡傳)으로 사림의 모범이 되었으니, 선정이 평소 우리 성조(聖祖 효종)를 섬기던 것으로써 나를 섬겼으면 하는 것이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아, 국가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는 경의 순수한 정성으로 한결같이 겸양만 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유현(儒賢)의 거취는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자중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사관을 보내어 거듭 나의 뜻을 고하는 바이니 경은 나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서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고서 속히 길을 떠나와서 소자(小子)의 마음도 위로하고 사림의 바람에도 부응하라.”
하였다. 사관은 함께 갈 목적으로 그대로 머물렀다.
10일(갑오)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17일(경자) 사관을 보내어 인재(人才)에 대해 물었다.
서계가 문집에 보인다.
사관을 보내어 소비(疏批)를 전하였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인접(引接)을 마치고서도 머물기를 간절히 권면하였는데, 경은 아들의 병이 갑자기 위독하여 돌아갈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돌아갔으니 실망스러운 마음 자못 심하였다. 그러나 잠시 뒤에 경이 끝내 아들을 잃는 아픔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경의 사정을 생각하며 슬퍼하였다. 이런 때에 강박(强迫)하는 것은 남의 처지를 살펴 너그럽게 헤아리는 도리에 흠이 되기 때문에 후일을 기다려 정성스레 권면하기로 하고, 내려가 있는 사관은 우선 올라오도록 하였으나 나의 마음 더욱 서운함을 견딜 수 없다. 경은 나의 이러한 마음을 몸받아 편안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생각하여 상례(喪禮)를 잘 다스려 장사를 잘 치르고 장사를 마친 뒤에는 곧이어 다시 길을 떠나와서 간절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5월 12일(을축) 새로 복상(卜相)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하고 사관을 보내어 특별한 유지로 불렀다.
서계는 문집에 보인다.
22일(을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6월 8일(신묘) 아들을 속곡(束谷)에 장사 지냈다.
부인(夫人)의 묘(墓) 밑이다.
9일(임진)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였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경은 선정(先正)의 적전(嫡傳)으로 일찍부터 유림의 중한 인망을 지고 있었으니, 이러한 때에 삼사(三事 삼공(三公))에 경이 아니고서 누구이겠는가. 나의 뜻은 경을 이공(貳公 찬성(贊成))에 특배(特拜)하던 날에 이미 결정하였다. 지금 정승을 세우는 데 과연 현덕(賢德)을 가진 사람을 얻었으니 기쁜 마음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신하로서 안위에 관계된 자는 연로(年老)하여도 치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 모두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어려움이 많은 이때이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마음을 편하게 가져 사직하지 말고 속히 와서 조정으로 나와 도를 논하여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하라.”
7월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비답을 전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7일(무자) 사관을 보내어 특별 유지로 빨리 오라고 불렀다.
서계가 문집에 보인다.
15일(병신) 동궁에게 상서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면려하는 경계를 진술하였다.
이때 세자가 대리청정하였기 때문에 상서하여 사직하고 이어 면려하는 경계를 진술하였다.
9월 2일(계축) 동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상서에 대한 답을 전하였다.
4일(을묘) 좌의정 겸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9일(경신)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초모(貂帽)의 하사를 사양하였다.
20일(신미) 예랑(禮郞)이 명을 받들고 와서 세자가 청정(聽政)한 뒤에 고묘(告廟)ㆍ반교(頒敎)하는 당부(當否)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이 이전의 문의(問議)에는 모두 대답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대신에게 수의(收議)하는 형식으로 와서 물었기 때문에 선생이 감히 대신으로 자처할 수 없어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 또 유신에게 수의하는 형식으로 와서 묻자 대답하였다. 이 뒤로 문의에 대해 혹 대답하기도 하고 대답하지 않기도 한 것은 모두 묻는 형식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대답하고 대답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그 이유를 다 밝히지 않는다.
25일(병자) 사관을 보내어 소비(疏批)를 내렸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난모(煖帽)를 하사한 것이 어찌 다만 대신을 우대해서일 뿐이겠는가. 빨리 나와서 일을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나의 속에 있는 말을 남김없이 다 말하였으니, 국가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경의 의리로 볼 때 결코 한결같이 돌아보지 않고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세자가 대리청정하여 보익(輔翼)이 진실로 급한 이때에 조석으로 가르침을 바치는 데 큰 덕을 가진 경이 아니고서 그 누구이겠는가. 경이 조정으로 나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는 것이 또 큰 가뭄에 비를 바라는 심정일 뿐만이 아니다. 소(疏)의 끝에 진술한 말이 세자를 면려하고 경계한 것이지만, 경이 만약 연석에 출입하며 세자로 하여금 날마다 격언을 듣게 한다면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클 것이다. 경은 정성스러운 비지를 몸받고 어렵고 근심스러운 시사를 생각하여 겸양만 고집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영수(領受)하고서 즉일(卽日)로 길을 떠나와서 나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10월 17일(정유) 상서하여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렸다.
비답하였다.
“전후의 서본(書本)에 대해 내린 답에 정성스럽고 간절한 뜻을 자세히 말하였거니와, 더구나 지금은 경의 지위가 정승에 올랐고 또 사부(師傅)까지 겸하였으니, 내가 존경해 믿고 치적이 이루어지기를 우러러 바라는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는가.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책무가 지극히 중한 것이고 보면, 좌우에서 보좌해야 하는 경의 의리로 볼 때 결코 한결같이 겸양만 하여 목마른 듯이 바라는 나의 생각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세덕(李世德)의 공사(拱辭) 중에 막된 소리로 선정(先正 우암)을 욕한 것이 끝이 없고 침범하여 모욕하는 말이 경에게까지 미쳤으니 이보다 더 경악스러운 일이 다시 어디 있겠는가. 상서의 말미(末尾)에 진술한 바로서 우국, 애민한 선정의 정성을 더욱 볼 수 있으니, 터무니없는 사실을 얽어 무함한 세덕의 정상이 더욱 통탄스럽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 빨리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려 생각을 고쳐먹고 조정으로 나아와 즉시 일어나 공사(公事)를 보아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하라.”
재차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12월 4일(갑신) 상이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감귤을 하사하였다.
10일(경인) 승지를 보내어 서답(書答)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일(신유) 홍만우(洪萬遇)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고서 대죄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만우의 상소문 속에, 산인(山人)이 동궁(東宮)을 조호(調護 보호)하는데 마땅히 이럴 수는 없다는 등의 말로 선생을 침범해 모욕하였으므로 선생이 상소하고서 대죄하였다. 소(疏)는 문집에 보인다. 비답하기를,
“아, 국가가 험난한 때를 당하여서는 현덕(賢德)의 선비를 얻어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것이니, 소자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세자가 청정을 대리하여 부탁한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좌우에서 보좌하는 책임을 큰 덕을 가진 대신이 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특별 유지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성의가 진실하지 못하여 경이 조정으로 나아올 기약이 더욱 아득하니 놀랍고 부끄러운 심정 이미 말할 수 없어 병중에서도 경을 그리는 마음 항상 간절하다. 경은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자가 아니므로 본디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국가와 휴척을 함께할 의리가 있으니, 결코 한결같이 돌아보지 않고서 반드시 초치하려는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경이 홍만우의 상소로 인하여 이 진장(陳章 상소)을 올렸으나, 이 일은 변파(辨破)하기 어렵지 않다. 전에 비록 미안한 전교가 있었으나, 경이 먼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내 특지를 다시 반포해서 처분이 크게 정해졌다는 것을 즉시 들어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이 다시 지난 일을 거론하지 않고 곧장 동궁에게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만을 한 것이며, 경이 본직(本職 수암에게 제수된 좌의정)에 대해 지나치게 겸양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고묘(告廟)에 대한 순문(詢問 자문)에 헌의(獻議)하지 않았던 것이니, 이 두 가지가 각각 마땅한 바여서 원래 조금도 미진한 바가 없는데, 만우가 기간(惎間 해쳐 이간시킴)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여 못할 짓 없이 위협하고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현인을 무함하고 정인(正人)을 해친 상태가 매우 통탄스러우므로 이미 삭출 형벌을 시행하였다. 이런 위험한 말을 어찌 족히 입에 담을 것이 있겠는가. 경은 전후 정성스럽고 간절했던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또 대죄하지도 말라. 그리고 빨리 와서 세자를 보좌하여 나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만우의 말을 변명하고, 관학 유생이 또 상소하여 변무(辨誣)하였는데, 상이 모두 너그러운 말로 비답하였다.
무술년(1718) 선생의 나이 78세
1월 동궁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진강할 책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師傅)로 여겨 물었기 때문에 감히 대답하지 않았다.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2월 사관을 보내어 상서에 대한 회답을 내렸다.
회답은 다음과 같다.
“근자에 홍만우(洪萬遇)의 소는 견사(遣辭 글자를 배열하여 글을 지음)와 용의(用意)가 극히 위험하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이 무리의 정상이 성감(聖鑑) 앞에 도망하지 못하여 처분이 엄정하셨고, 경에 대한 위안 또한 지극하였으니, 경은 다시 털끝만치도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경이 만약 융숭한 성상의 권고(眷顧)를 헤아리고 또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생각하여 빨리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려 생각을 고쳐먹고 조정으로 나아온다면 사풍(士風)이 바르게 되고 사설(邪說)이 절로 소멸될 것이며, 전석(前席)을 출입하며 나로 하여금 날마다 격언을 듣게 한다면 국사에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적지 않을 것이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공경을 다하고 예를 다하여 반드시 경을 초치하고야 말려는 이유이다. 하물며 이제 봄 날씨가 화창하여 지난날의 병이 으레 나을 것이니 경은 간절한 나의 마음을 헤아려 다시는 병으로 핑계하지 말고 속히 길을 떠나와서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상서 끝에 진술한 바는 진실로 매우 간절하므로 시강원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예랑(禮郞)이 명을 받들고 와서 동궁이 알성(謁聖)할 때에 취사(取士)의 당부(當否)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빈궁(嬪宮)의 상(喪)에 양전(兩殿)의 복제(服制)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3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대전(大殿)과 동궁이 일을 볼 때의 복색(服色)을 물으니 헌의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보인다.
상서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동궁이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4월 사관을 보내어 강씨 옥사(姜氏獄事)의 신원(伸冤)에 관한 당부를 물으니 헌의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보인다.
5월 대전(大殿)과 동궁이 액정인을 보내어 절선(節扇)을 하사하였다. 상서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회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관을 보내어 빈궁 상의 기년(期年) 이내에 왕세자의 가례(嘉禮)를 정하여 행하는 것의 당부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6월 사관이 다시 와서 물으므로 헌의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보인다.
상서하여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회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동궁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진강할 책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였다.
서계가 문집에 보인다.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8월 사관을 보내어 상서에 대한 회답을 내렸다.
답은 다음과 같다.
“경은 유림(儒林)의 석덕(碩德)으로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인망(人望)을 지고 있었다. 지난해 온양(溫陽) 행궁(行宮)에서 성상께서 경의 덕스러운 용모를 한 번 접견하시고는 존경하는 예가 더욱 돈독하였으며, 경을 세워 정승으로 삼으시고는 권우(眷遇)가 더욱 융숭하셨다. 내가 대리(代理)한 뒤에 미쳐서도 일찍이 정성을 다해 반드시 초치하라는 뜻으로 자상하게 나를 권면하셨으므로 내가 성지를 받들어 전후에 돈독하게 타이른 것이 정성스럽고 간절할 뿐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마음을 고쳐먹을 뜻이 없으니 다만 부끄러운 마음만 더해질 뿐,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하물며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은 근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결코 질병으로 핑계를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아, 어려운 일은 눈앞에 가득한데 낭묘(廊廟)에는 쓸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경이 조정으로 나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 더욱 간절하다. 경은 성상께서 그리워하시는 마음을 헤아리고 또 도움을 바라는 나를 생각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 속히 와서 상하의 바람에 부응하라.”
9월 상서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단의빈(端懿嬪)의 상에 대전의 복제로 기년(期年)과 대공(大功) 중 어느 것이 합당한가를 물었으나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11월 예랑이 다시 와서 물으므로 헌의하였다.
이때 경묘(景廟)가 동궁으로 있었는데 세자빈(世子嬪)인 단의왕후(端懿王后)가 죽으니 예조가 대전(大殿)의 복제를 의논해 올리면서, 참판 박봉령(朴鳳齡)이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상(喪)에 세종대왕이 대공복(大功服)을 입은 예를 인용하여 아뢰니 상이 명하여 대공으로 결정하라 하였는데, 그 뒤에 봉령이 또 상소하여,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상에 기복(期服)을 입었는데, 당초 품계할 적에 명성대비의 고사까지 아울러 거론하지 않았으니 대죄한다고 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대신들이 모두 기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하므로 드디어 기년복으로 고쳤다. 그러자 사론(士論)이 기년복을 입는 것은 부당하다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옥당 이중협(李重協)이 상소하여 복제의 잘못을 말하면서 다시 의정(議定)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대신(大臣)으로 자처할 수 없어 처음에는 헌의하지 않았으나, 다시 문의하라는 명으로 인해 끝에 가서야 헌의하였다. 헌의의 대략에,
“《의례(儀禮)》를 보건대 천자와 제후는 절방기(絶旁期 기년복에 해당하는 방계의 상에 복을 입지 않음)하고 오직 정통(正統)에만 복이 있다 하였는데, 대개 아들에게는 기년복을 입고 며느리에게는 대공복을 입는 것은 정복(正服)이고, 삼세전중(三世傳重)의 아들인 경우에는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는 것은 가복(加服)입니다. 그러나 며느리에 대해서는 가복한다는 예문(禮文)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례도(儀禮圖)》에 대공으로 기록한 것이 이것입니다. 후세에 위징(魏徵 당(唐) 나라 명상(名相))의 주의(奏議)로 인하여 기년으로 올려 지금까지 인습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가(私家)의 예이므로 왕조(王朝)의 고례(古禮)와 다름이 있습니다.”
하였다. 문인 윤봉구(尹鳳九)가 편지로 묻기를,
“오늘날 빈궁의 복제를 기년으로 정한 것은 본래 부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헌의에 과연 대공을 주장하셨으니 진실로 사림의 바라는 마음을 위안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문세(文勢)가 조창(條暢 조리가 분명함)하지 못한 흠이 있어 보는 자들이 의혹을 면할 수 없으니 깨우치시는 한 말씀이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의례》에 천자와 제후는 정통에만 복이 있는데, 적부(適婦)에게는 대공복을 입는다 하였고, 비록 승적(陞適 지차(支次)로서 적자(適子)가 됨)한 며느리라 하더라도 강복(降服)한다는 예문이 없으니, 또 정통에만 복이 있다는 말을 이끌어 승적한 며느리에게는 복이 없다는 전거(典據)로 삼아서는 안 되네. 대개 나의 생각에는 비록 적부(適婦)라 하더라도 대공에서 멈추어야 하니 오늘의 복제는 반드시 기년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이번에 보내온 편지를 받아 보건대 나의 글에서 말을 만든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렵게 한 것이거나, 아니면 보는 자들이 멋대로 보아 지나치게 의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문인 성도행(成道行)이 전일에 이중협(李重協)이 논한 복제의 일이 어떠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소(疏)에 ‘단의빈(端懿嬪)의 복제는 상께서 마땅히 대공(大功)으로 개정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 소가 이미 아홉 달이 지난 뒤에 나왔으므로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개 그가 말한 대공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장하여 말한 바가 도리어 위징(魏徵)의 예를 주장한 것은 어째서인가? 《의례》에 ‘천자와 제후는 절방기(絶旁期)한다.’ 하였고, 또 ‘아들을 위해서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으며, 또 ‘적부(適婦)를 위해서 대공복을 입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정복(正服)이네. 또 ‘삼세전중(三世傳重)일 경우이면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가복(加服)이네. 그런데 그 밑에 며느리에게는 가복한다는 예문이 없네. 예에 또 ‘며느리는 정(正 아버지의 뒤를 이음)ㆍ체(體 형의 뒤를 이음)로 논할 수 없다.’는 글이 있네.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는 것은 바로 정ㆍ체ㆍ전중의 세 가지 일이 있기 때문이지만, 며느리의 경우는 외성(外成 출가(出嫁)해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정ㆍ체 두 글자로 논할 수가 없고 다만 전중의 한 가지 일만이 있을 뿐이네. 그리고 장자를 위하여 가복하는 데 대하여 4종의 설이 있으나 마땅히 의논할 바가 못되네. 장자나 중자(衆子)를 막론하고 이미 전중하였다면 모두 적(適)이니 적부(適婦)를 위하여 대공복을 입어야 하네. 천자와 제후는 본래 절방기(絶旁期)하는 것이고 보면 적부 이외의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네.
세종대왕께서는 예제(禮制)에 밝으셨기 때문에 《대전(大典)》에는 위징의 설을 채용하여 사서인(士庶人)이 통행(通行)하는 제도로 삼으셨고,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상에는 《의례》의 ‘적부(適婦)를 위하여 대공을 입는다.’는 예문을 사용하셨네. 이번 빈궁의 복제도 당초에 그대로 대공을 정했다면 실로 《의례》의 정복(正服)에 부합하였을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았으니 개정(改定)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네. 그런데 지금 적부가 아니기 때문에 기년복을 입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대공복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면 이는 위징의, 며느리의 상에 혹 기년복을 입기도 하고 대공복을 입기도 한다는 예가 본래 왕조(王朝)에 통행할 수 없는 예라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서 하는 말이며, 또 《의례》에 적부(適婦)의 적(適) 자가 오로지 전중(傳重) 한 가지 일만을 위해서 설치된 까닭을 모르고 하는 말이네.”
하였다. 도행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예의 뜻을 모르고 또 선생의 본의도 알지 못하여 어지러운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들어 알고 있네. 그러나 상께서 단지 복제만을 물으셨기 때문에 나 또한 예의 뜻이 이와 같으니 대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만으로 대답하였을 뿐이네. 만약 적(嫡)ㆍ서(庶) 여부를 물으셨다면 서(庶)로 적에 올랐다 하더라도 또한 적부(適婦)가 된다고 마땅히 대답하였을 것이네. 오늘날 문의하신 바가 다만 복제일 뿐인데 내가 도리어 적ㆍ서를 논한다면 모르기는 하지만 어찌 마땅하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신군(申君) 계징(啓澄)이 ‘적(嫡)ㆍ적(適) 두 글자의 뜻이 각기 다르니 적(嫡)은 정처(正妻)가 낳은 자식을 이름이고, 적(適)은 승중(承重)한 아들을 이름이다.’ 하였는데, 뒤에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니 과연 이런 말이 있었네.”
하였다. 대개 헌의 가운데 《의례도(儀禮圖)》를 말한 것은, 바로 천자와 제후는 절방기(絶旁期)하는 것이고 보면, 적자부(適子婦) 이외에는 이미 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의례도》 가운데 단지 적부는 대공이니 비록 승적(陞嫡)한 며느리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대공을 입어야 한다고만 한 것이다. 또 주자(朱子)께서 만정순(萬正淳)에게 답한 글을 상고하건대 또한 승적한 며느리를 적부(適婦)라고 통칭(通稱)하였으니, 지금 인거(引據)한 바는 진실로 이미 전거(典據)가 있다.
12월 《정서분류(程書分類)》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성선(性善)을 논하여 문인 한계진(韓啓震)에게 답하였다.
답한 글은 다음과 같다.
“기질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 품수(稟受)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청수(淸粹)한 자는 현(賢)ㆍ지(智)가 되고, 탁박(濁駁)한 자는 우(愚)ㆍ불초(不肖)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자(朱子)의 설(說)이네. 현ㆍ지한 자는 정(正)에 감동되어 그 드러나는 것[發]이 모두 선(善)하니 이것이 이른바 천리(天理)이고, 우ㆍ불초한 자는 사(邪)에 감동되어 드러나는 것이 모두 불선(不善)하니 이것이 이른바 인욕(人欲)이네. 그러나 아무리 우ㆍ불초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느낀 바가 바르고 아직 인욕이 그 사이에 싹트지 않았을 때이면 잠시 동안에는 천리가 발현하는 것이니 척교(跖礄 도척(盜跖)과 장교(莊礄))도 측은(惻隱)한 마음이 드러날 때가 있는 것이 이것이네. 이때에는 아무리 탁(濁)한 자일지라도 기(氣)가 자주(自主)하지 못하고 단지 이(理)의 명(命)만을 들으므로 선이 드러나 나오는 것이니 이에서 성선(性善)이 필연임을 볼 수 있네. 그런데 지금,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청기(淸氣)에서 발하여 선정(善情)이 된다고 한다면 오로지 하나의 기(氣) 자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양(陰陽)의 기(氣)를 논하여 이탁(李濯)에게 답하였다.
답한 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왕 노재(王魯齋)의 조화론(造化論)은 조화 이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미처 설파하지 못하였는데, 고견(高見 남의 의견에 대한 존칭)의 잘못된 곳이 오로지 이 설을 주장하는 데에 있으므로 지금 대략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이른바 음(陰)은 하강(下降)하고 양(陽)은 상승(上升)한다는 것은 대개 도서(圖書) 괘획(卦劃)에 의거해 말한 것이네. 하도(河圖) 중에 양의 생수(生數 일(一) 삼(三))는 아래에 있고, 성수(成數 칠(七) 구(九))는 위에 있으며, 음의 생수(生數 이(二) 사(四))는 위에 있고 성수(成數 육(六) 팔(八))는 아래에 있으며, 선천도(先天圖) 중에, 복괘(復卦)의 양이 생겨나는 것은 아래에 있고 구괘(姤卦)의 음이 생겨나는 것은 위에 있기 때문에 음은 하강하고 양은 상승한다고 한 것이네. 도서 괘획은 모두 이기(二氣 음양)가 순환하는 것과 사시(四時)가 유행(流行)하는 묘리를 묘사한 것이고 보면 그것을 적당히 배치하여 벌여 놓는 데 형세가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네.
그러나 저 음양이 생겨나는 것은 모두 땅속에서 시작하여 점점 상하 사방으로 방출(放出)되어 육극(六極 상하 사방) 사이에 가득 차는 것이고 다만 상승하는 하나의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네. 이른바 음양이란 단지 한 기운[一氣]의 소장(消長)일 뿐이네. 땅속에서 자라나서 육극의 끝까지 가고 자란 것이 극에 달하면 또 사그라지며, 땅속에서부터 시작하여 육극의 끝까지 이르고 사그라진 것이 극에 달하면 또다시 자라나는 것이네. 대개 겨울에는 양이 땅속에 있고 여름에는 음이 땅속에 있기 때문에 깊은 우물물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니, 음양이 모두 땅속에서 생긴다는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네.
주자의 말에 ‘겨울 11월 12월에는 양이 땅속에서 자라 음기(陰氣)를 땅속에서 몰아내어 모두 땅 위에 있게 하기 때문에 땅 위가 지극히 춥고, 여름 5월 6월에는 음이 땅속에서 자라 양기를 땅속에서 몰아내어 모두 땅 위에 있게 하기 때문에 땅 위가 지극히 덥다.’ 하였네. 선현(先賢)의 설도 이미 이러하였는데, 어떤 이는 ‘양의 자람은 땅속에서 시작하여 상하 사방의 끝까지 이르고 음의 사그라짐은 상하 사방의 끝에서 시작하여 땅속으로 들어간다.’ 하였으니(농암(農巖)의 설), 그렇다면 양이 비로소 생겨날 때에는 어째서 그렇게 지극히 작고도 미약하며, 음이 비로소 생겨날 때에는 어째서 그렇게 지극히 넓고도 드러난다는 말인가. 이 말은 그 절반은 얻었으나 남은 절반은 잃은 것이네.
만약 노재의 말처럼 양이 땅속에서 생겨나서 위로 하늘 끝까지 가고 음이 하늘 위에서 생겨나서 아래로 땅 끝까지 이른다고 한다면 음양의 소식(消息)이 단지 땅 위 일면(一面)에만 있어 하나의 길로만 통하는 것이고, 지하(地下)에서 천상(天上)까지와 땅의 사방에서 하늘까지의 곳에는 일찍이 음양이 없는 것이네. 그렇다면 주천(周天) 안에 음양이 있는 곳은 6분의 1에 불과하고 나머지 6분의 5에는 텅 비어 일물(一物)도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따로 음양에 속하지 않은 한 기운이란 것이 있다는 말인가? 의리도 없고 말도 되지 않으니 바라건대 고명(高明 남에 대한 존칭)은 잠시 그 설은 버려두고서 다시 나의 설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 나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기해년(1719) 선생의 나이 79세
1월 상서해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초상화를 그렸다.
화사(畫師)는 바로 관서(關西)의 김진여(金振汝)이다.
4월 상서해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렸다.
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정성을 다해 간절히 부른 것이 무릇 몇 번이었으니 진정 정성 어린 나의 말을 깊이 헤아려 줄 것으로 바랐는데, 겸양이 더욱 견고하여 조정으로 나아올 기약이 더욱 아득하니 놀랍고 부끄러운 나의 심정 이미 말할 수 없다. 성상께서 병을 정양(靜養)하시는 속에서도 한결같이 더욱 경을 생각하시어, 성심을 더욱 돈독히 하여 꼭 초치하고야 말라는 뜻으로 나에게 누누이 권면하셨으니 간절히 바라시는 성상의 뜻을 끝내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인데, 하물며 내가 대리한 뒤로 존중하여 믿고 성공하기를 바란 바가 오로지 덕이 높은 유상(儒相)에 있었으니, 군신은 일체이어서 서로 따르는 의리로 볼 때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서 위기를 부지하여 세도를 만회할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겸양만을 고집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기를 경에게 간절히 바란다. 경의 나이가 비록 높지만 정력이 아직 왕성하니 승상부(丞相府)에 누워 도(道)를 논한다 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보내 준 약간의 물건이 어찌 늙은 신하를 은혜로 기르는 나의 뜻을 표시하기에 충분하겠는가. 경은 성상의 융숭하신 권고(眷顧)와 의지하려는 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빨리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려 서둘러 와서 상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학질(瘧疾)을 앓았다.
5월 태의(太醫)가 명을 받들고 약물을 가지고 와서 간병하였다.
동궁이 궁관(宮官)을 보내어 계속 강독할 책자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상서하여 약물을 하사한 데 대해 감사하고 겸하여 계속 강독할 책자에 대해 진술하였다.
6월 사관을 보내어 상서에 대한 답을 내렸다.
답은 다음과 같다.
“경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듣고 염려되는 마음 바야흐로 깊었더니 신명(神明)이 도우시어 병이 절로 완쾌되었다 하는바 기쁘고 반가운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강목(綱目)》을 아직 다 강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강독하려 하였다. 그런데 경이 상서(上書)한 말이 이와 같으니 이제 시강원(侍講院)으로 하여금 다시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에게 물어 품의해 처리하게 하겠다.
전후에 간절히 권면한 것이 정성스러울 뿐이 아니었으되, 나의 정지(情志)가 진실하지 못하여 경이 조정으로 나아올 기약이 더욱 아득하니 섭섭하고 부끄러운 마음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경은 군신은 일체여서 서로 따른다는 뜻을 깊이 생각하여 빨리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려 길을 떠나와서 목마른 자가 물을 바라듯이 하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이조 가랑(假郞)이 명을 받들고 와서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人)에 대한 복작(復爵)의 당부(當否)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았다. 여름 감기를 앓으니, 태의(太醫)를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와서 간병하게 하였다.
7월 상서하여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렸다.
답은 다음과 같다.
“경을 세워 정승으로 삼은 뒤로부터 조야(朝野)의 기대가 어떠하였으며, 내가 진정 어린 말로 부른 것이 모두 몇 번이었던가. 경의 상서에 이른바 나라를 평치(平治)하라는 것이 바로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이니, 산림에서 덕을 수양하여 일찍부터 중망을 지고 있는 경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지극히 중대한 이 책무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 경이 한번 나아오면 도움되는 바가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내가 정성과 예를 더욱 돈독히 하여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조금인들 긴요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있겠는가.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의 정지(情志)가 경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였으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큰 병을 앓은 끝이라서 아직 다 완쾌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내가 경에게 근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보면 결코 질병을 핑계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니, 경은 융숭한 성상의 권우를 몸받고 또 나의 기대와 국세의 위급함을 생각하여 빨리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려 조정으로 나아와서 나의 지극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고 크게 국가의 곤란함을 구제하라.”
9월 상서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상이 액정인을 보내어 음식물을 하사하니, 상소해 사양하였다.
12월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종전에 매월 늠속(廩粟)을 보낸 것은 실로 신하를 은혜로 기르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고사하고 받지 않으니 매우 서운하다. 또 이런 명을 내린 것은 바로 구제하는 뜻인데 변변찮은 물건을 다시 무엇 때문에 사양하는가. 소(疏)의 말미(末尾)에 사양한 바는 나의 마음이 미덥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겸양이 더욱 견고하였으니 부끄러운 마음 견딜 수 없다. 병을 앓고 있는 사이에서도, 너의 정성을 다해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라는 뜻으로 세자에게 누누이 말하였으니, 결코 동궁의 간절한 바람을 끝내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사양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영수(領受)하고서 생각을 고쳐먹고 조정으로 나와 나의 원량(元良 세자(世子))을 보좌(輔佐)하라.”
감기를 앓았다. 태의(太醫)를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와서 간병하게 하였다. 면재집변설(勉齋集辨說)을 지었다.
《면재문집(勉齋文集)》이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없었는데, 계공(季公 수암 아우 상유(尙游))이 부사(副使)로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비로소 이 책을 구해 가지고 왔다. 면의 재가 논한 오행(五行) 칠정(七情)과 《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의 설이 주자(朱子)의 설과 다른 것이 많아서 학자들의 안목이 흐려지기 쉬울 염려가 있기 때문에 선생이 그릇된 것이 매우 심한 곳만을 대략 들어 변론하였다. 칠정을 변론한 설은 다음과 같다.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은 정(情)이 마음[心]에서 발(發)하는 것이니, 형기(形氣)에서 생긴 것이거나 성명(性命)에서 근원한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희ㆍ노ㆍ애ㆍ락은 모두 칠정(七情)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면재는 희ㆍ노ㆍ애ㆍ락은 오로지 몸에서 발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理)에서 발하는 것은 칠정이라 이를 수 없으며 문왕(文王)의 노(怒)와 공자(孔子)ㆍ안자(顔子)의 낙(樂)이 이에서 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주 부자(朱夫子)께서 의론을 세워 후세에 전하신 것이 일성(日星)처럼 분명한데도 한번 전해진 뒤로 은미한 말씀과 대의(大義)가 어두워졌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그가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을 《주역》의 기(器)와 도(道)에 비긴 것도 매우 옳지 않다…….”
졸수재(拙修齋)의 이기설(理氣說)을 변론하였다.
졸수재 조공 성기(趙公聖期)가 이기설(理氣說)을 지었는데, 그가 논한 인심(人心)ㆍ도심(道心), 사단(四端)ㆍ칠정(七情)이 율곡 선생(栗谷先生)의 설과 달라, 도심ㆍ사단은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하고, 인심ㆍ칠정은 기(氣)를 주로 하여 말하였다. 학자들 사이에 이 설을 전하는 이가 더러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비로소 그 문집을 보았다. 그 설의 대요(大要)는, 이기(理氣)가 발하는 데는 이(理)가 기(氣)를 타고 발하는 것도 있고, 기가 이에 붙어 발하는 것도 있다 하여 도심(道心)과 사단(四端)은 이가 기를 타고 발하는 것이고, 인심(人心)과 칠정(七情)은 기가 이에 붙어 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가 기를 타고 발한다는 것은 이가 전적으로 주장(主張)하고 기는 실려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니 바로 이른바 이를 주로 하여 말했다는 것이고, 기가 이에 붙어 발한다는 것은 기가 전적으로 주장하고 이는 붙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니 바로 이른바 기를 주로 하여 말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퇴계(退溪)의 설은 명언(名言 칭설(稱說))에 잘못이 있다 하고 율곡(栗谷)의 설은 실견(實見 견해(見解))에 오류가 있다 하였는데, 선생은 이 설이 퇴계나 율곡의 설보다 뒤에 나온 데다가 또 자못 새롭고 공교로워서 후학(後學)들의 견해를 그르칠까 두렵다고 여겨 매양 학자들을 위하여 변론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도심(道心)과 맹자(孟子)가 말한 사단(四端)은 모두 순선(純善)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이것을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으나, 인심(人心)과 자사(子思)가 말한 칠정(七情)은 모두 선악을 겸하여 말한 것인데, 어찌 갑자기 기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라고 지목할 수 있겠는가. 도심과 사단의 선(善)은 이(理)가 주가 되어 발하는 것이고, 인심과 칠정의 선은 기가 주가 되어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와 기의 작용이 길을 나누어 각각 따로 나오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선 속에도 또 이에 근원하고 기에 근원하는 다름이 있어 선에 두 근본이 있는 것이 된다. 선에 과연 두 근본이 있던가…….”
라는 것이었다. 이어 글을 지어 변론하려 하였으나 질병으로 인하여 하지 못하였다.
경자년(1720) 선생의 나이 80세
1월 상서하여 사직하니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2월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리고 체직을 윤허하였다.
답은 다음과 같다.
“전후에 간곡히 권면한 것이 무릇 몇 차례였던가. 반드시 초치하여 함께 국사를 다스리고자 한 지 4년이 되었으나, 다만 나의 정성과 예가 얕고 박하여 멀리하려는 경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놀랍고 부끄러운 마음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경의 겸양이 끝내 이에 이르렀는데, 한결같이 재촉하는 것도 예우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지금 우선 본직(本職)의 사임 요청을 따라 주기는 하지만 매우 서운하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생각을 고치어 길을 떠나와서 목마른 자가 물을 바라듯이 하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판중추부사에 부직(付職)하니 상서하여 사직하였다.
3월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7일(계해) 상의 환후가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서 서울을 향해 출발하여 충주(忠州)에 도착하였다.
28일(갑자) 병으로 충주에 머물면서 상서해 대죄하였다.
5월 사관을 보내어 답을 내렸다.
6월 6일(신축) 상의 환후가 더욱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서 충주를 출발하여 가다가 누암서원(樓巖書院)에 머물렀다.
9일(갑진) 저녁에 서울에서 온 편지를 통하여 숙종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원외(院外)로 나아가 망곡(望哭)하였다.
중추부 사람이 계공(季公)의 편지를 받아 먼저 이르렀다.
10일(을사) 가던 길을 되돌아와 충주에 도착하여 예부(禮部)의 관문(關文)을 기다렸다.
11일(병오) 주정(州庭)에 들어가서 거애(擧哀)하고, 병으로 분곡(奔哭)할 수 없으므로 상서하여 대죄하였다.
16일(신해) 성복(成服)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이 조금 앞서 부음(訃音)을 들었으나 관문이 당도한 날을 부음을 들은 것으로 계산하여 성복하였다. 이는 대개 임금의 상의 부음을 듣는 것은 감히 사서(私書)로 근거를 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국휼(國恤)에 분곡(奔哭)의 당부(當否)를 논하여 문인 채지홍(蔡之洪)에게 답하였다.
23일(무오) 예랑(禮郞)이 명을 받들고 와서 상제 절목(喪制節目)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24일(기미) 사관(史官)을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여름 감기를 앓았다.
7월 의원을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와서 간병하게 하였다.
8월 예랑이 다시 와서 상제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10월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상복절목(喪服節目) 및 신민(臣民)들에게 허혼(許婚)하는 기한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명을 받고서 대행대왕(大行大王)의 만사(挽詞)를 지어 올렸다.
21일(갑인) 충주 관정(館庭)에 들어가서 하현궁 망곡례(下玄宮望哭禮)를 행하고서, 병으로 인산(因山)에 달려가지 못했으므로 상소해 대죄하였다.
12월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선대왕(先大王)의 어제시(御製詩)에 화답(和答)하였다.
정유년(1717)에 선왕(先王)이 선생을 불러 온양(溫陽) 행궁(行宮)에서 접견했었는데, 선생이 돌아온 뒤에 선왕은 선생을 못내 그리워하여 친히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
자나 깨나 현인 생각하여 교서 내린 지 몇 번이었던가 / 寤寐思賢幾降書
행궁에서 처음으로 덕용을 접견했네 / 行宮親接德容初
앓는 아들 보려고 서둘러 돌아가서 / 欲看病子歸忙遽
후거에 싣고 환도하지 못한 것 한스럽네 / 恨不還都載後車
대상(大喪)을 치른 뒤에 대비전(大妃殿)이 선왕의 시문(詩文)을 정원에 내렸는데, 이 시도 그 가운데 있었다. 선생이 시를 비로소 보고는 감모(感慕)의 눈물을 흘리며 드디어 화답하는 시를 지어 임금을 잃은 슬픈 뜻을 붙였다. 시가 문집에 보인다.
신축년(1721) 경종대왕(景宗大王) 원년 선생의 나이 81세
2월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초피(貂皮)를 하사하였다.
5월 액정인을 보내어 절선(節扇)을 하사하였다.
6월 5일(을미) 연신(筵臣)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추은 증작(推恩贈爵)을 명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이중협(李重協)이 아뢰기를,
“판부사 권모(權某)는 양조(兩朝 현종 숙종)가 예우한 신하로 지위가 삼사(三事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예(例)에 따라 추은(推恩)의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송(宋) 나라의 유신(儒臣) 정자(程子 정이(程頤))가 숭정전 설서(崇政殿說書)에 제수되었을 때 일찍이 아내를 위하여 봉전(封典)을 청하지 않자, 범순부(范淳夫)가 그 까닭을 물으니 ‘내가 초야에서 기용되었으니 어찌 아내를 위하여 봉전을 청할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순부가 또 부조(父祖)의 봉전을 진걸(陳乞)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묻자, 정자는 ‘그 설명이 매우 기니 후일을 기다려 말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이 일을 논하기를 ‘정자가 말하기 곤란해한 것은, 대개 과거법이 완전히 변한 데 따른 것이지만,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권모의 사정이 또한 이와 같으니 마땅히 조정에서 예에 따라 추은 증직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기에 진달(陳達)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고(考)는 영의정으로 조고(祖考)는 좌찬성으로 증조고(曾祖考)는 이조 판서로 증직되었으며, 비(妣)도 모두 관례에 따라 증직되었다.
8일(무술) 숙종대왕의 연일(練日)이기 때문에 부정(府庭)에 들어가서 망곡(望哭)하였다.
9일(기해) 병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므로 상소하여 대죄하고, 이어 추은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10일(경자) 사관을 보내어 특별 유지로 불렀다.
서계(書啓)가 문집에 보인다.
21일(신해)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어느덧 초기(初期)도 지나니 더욱더 망극하다. 지금 경의 소를 보니 마치 입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듯하여 지난날 선대왕께서 예우하던 일을 생각함에 더욱 애통하여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경은 나이가 이미 높은 데다가 시절마저 한창 더울 때이니 연제(練祭)에 진참(進參)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추은 증작은 구례(舊例)인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겸양하는가. 도리어 매우 부끄럽다. 경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고 서늘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생각을 바꾸어 길을 떠나와서 나의 부족한 바를 도우라.”
예랑이 명을 받들고 와서 국련(國練) 이후의 상포(喪布)와 교대(絞帶)에 연포(練布)의 사용 여부를 물으니 헌의하였다.
의논은 문집에 보인다.
더위로 인해 설사병을 앓았다.
선생이 국련 때 부정(府庭)으로 나아가서 망곡(望哭)하려 하자, 자제들이 길을 왕복하는 노고로 인해 선생의 기력에 손상이 올 것을 염려하여 가지 말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더위를 무릅쓰고 갔다가 돌아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설사의 증세가 있었다.
윤6월 5일(갑자) 개제주(改題主)하고 분황례(焚黃禮)를 행하였다. 의원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와서 간병하게 하였다.
7월 옥당의 관원을 보내어 진강할 책자를 물었다.
서계의 대략에,
“연전에 신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진강하라는 뜻으로 소의 말미에 진술하였습니다마는, 대개 이 책은 실로 성학(聖學 임금의 학문)의 지남(指南)이어서 전모(典謨) 아훈(雅訓 바른 훈계)이 책에 자세히 갖추어 있어 천덕(天德) 왕도(王道)가 이 책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진실로 긴절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아직 진강하지 않으셨다 하니, 지금 비록 다시 성상의 물으심을 받았으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제왕(帝王)의 절요(切要)한 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선생이 선현 중에 율곡 선생을 가장 사모하여 일찍이 칭송하기를,
“전체 대용(全體大用)의 학이 주자 이후 일인(一人)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학집요》는 《소학》과 《대학》에 비교할 만하니, 주자 이후에 책을 지은 이가 비록 많지만 이에 비길 만한 것은 없다. 《성학집요》가 비록 옛말을 편집한 것이지만, 그 말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참으로 그 이치를 안 분이 아니라면 어찌 그 채척(採摭)한 것이 정밀하여 물샐틈없이 될 수 있었겠는가. 또 그 규모는 크지만 문로(門路)가 분명하며 편질(編帙)은 적지만 사리(事理)가 갖추어졌으니, 정력이 이미 쇠한 학자나 기무(機務)가 매우 번거로운 임금으로서 독서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하고 절실함이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누차 진강할 책자에 대한 물음을 받고는 번번이 이 책으로써 대답하였다.
8월 19일(정축) 병이 위독하였다.
선생이 6월 그믐께부터 설사에 걸려 그쳤다 더했다 하다가 7월에 와서는 자못 안정이 되었었는데 이날 다시 발작하였다. 이때부터 원기(元氣)가 크게 빠져 말도 하지 못하였다.
29일(정해) 술시(戌時)에 한수재에서 고종명(考終命)하였다.
중간에 병이 조금 안정되어 모시고 병을 돌보던 문인들이 모두 흩어져 돌아갔고, 계공(季公)도 서울에서 와서 병을 보살피다가 막 돌아갔으므로 임종할 때에 참여한 사람이 없었다. 장암(丈巖) 정공(鄭公)과 충주 목사(忠州牧使) 송요경(宋堯卿)이 와서 치상(治喪)하고, 장손(長孫) 양성(養性)이 지중(持重)하여 궤전(饋奠)을 올렸다. 부음을 듣고 예(例)에 따라 철조시(撤朝市)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판부사 권모(權某)는 산림(山林)에서 덕을 길러 일찍부터 중한 인망을 지고 있었으니 나의 존경과 사림(士林)의 긍식(矜式 존경해 본받음)이 어떻다 하겠는가. 전후에 부른 것이 지극히 간절하고 더욱 정성스러웠으되 나의 정성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나, 그리워하는 마음 잠시도 늦추지 않았는데, 어찌 병이 낫지 않고 오래 끌다가 흉한 소식이 갑자기 이를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극히 놀랍고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해조(該曹)로 하여금 예장(禮葬) 등의 일을 서둘러 거행하여 제수를 넉넉히 주고 관재(棺材) 한 벌도 골라 보내게 하라. 그리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3년 동안 월름(月廩)을 종전대로 지급하여 나의 뜻을 표시하게 하라.”
하였다. 월름을 종전대로 지급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본가(本家)가 선생의 유지를 따르고자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므로 본도가 끝내 거행한 일이 없었다.
승지를 보내어 조상하고, 장사에 미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관학 유생들이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거애(擧哀)하였다.
장사에 미쳐 제문을 지어 가지고 와서 제사를 올렸다. 각도의 서원에서도 모두 제사를 올렸다.
10월 15일(임신) 발인하였다.
상구(喪柩)를 모시고 한수재 앞 강(江)에서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조돈(早遯)에 이르러 육지로 올라와서 상구를 운반하여 저녁에 산지(山地)에 도착하였다.
16일(계유) 묘시(卯時)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과 같은 묘역이다. 회장(會葬)한 자가 무릇 4백여 명이었고 가마(加麻)한 자도 수백 명이었다.
계묘년(1723)
12월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때 군흉(群凶)이 조정을 어지럽혀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을 물리치고 주륙하였으며,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출향(黜享)되는 화가 우암 선생에게까지 미쳤다. 적신(賊臣) 신치운(申致雲)은 면(冕)의 증손으로 대대로 악(惡)을 행하여 산인(山人 은거하는 학자)을 미워함이 가장 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 선생을 무함하여 추탈할 것을 발론(發論)하니 요의(僚議)가 모두 피하였으나, 치운이 홀로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유생 홍우저(洪禹著) 등이 상소하여 변무(辨誣)하자, 지평 조진희(趙鎭禧)가 아뢰어 먼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문인 이시성(李蓍聖) 등 40여 인이 상소하고서 복궐(伏闕)하였으나 정원이 끝내 봉입(捧入)하지 않았다.
을사년(1725) 영조대왕(英祖大王) 원년
1월 관작의 회복을 명하고 문순공(文純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시장(諡狀)을 올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시호를 내렸다.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이[道德博聞] 문(文)이고, 중정하고 온화 순수한 것이[中正和粹] 순(純)이다.
충청도 유생 곽수걸(郭守杰) 등이 상소하여 서원 건립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원근의 선비들이 한수재 옆에 사당(祠堂)을 세웠는데, 황강서원(黃江書院)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뒤에 또 충주(忠州) 누암서원(樓巖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병진년(1736)
1월 행장이 완성되었다.
문인 한원진(韓元震)이 지었다.
무오년(1738)
7월 묘지(墓誌)가 완성되었다.
문인 윤봉구(尹鳳九)가 지었다. 28조각으로 구워서 광중 서쪽에 묻었다.
경신년(1740)
4월 1일(신미) 황강(黃江)에서 연시례(延諡禮)를 행하였다.
이조 좌랑 홍계유(洪啓裕)가 와서 전하였다.
계해년(1743)
10월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완성되었다.
영부사(領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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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십니까!
저의 요새 최대의 관심사는 첨정부군과 풍옥헌 선생의 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분의 우정을 최초로 소개하여 주신 분이 바로 한수재 권상하 선생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수재 선생의 조모님의 조부님이 바로 첨정부군이 되시는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한수재 선생은 첨정부군의 진외증손이 되시는 것입니다.
제가 무엇보다도 한수재 선생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첨정부군의 행장을
통하여 두분의 우정을 최초로 알려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한수재 선생의 연보를 공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2021년 6월 1일(화) 첨정부군 외14대손 문암 박관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