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사랑]禪位騷動(선위소동)
조선 국왕의 선위(禪位) 선언은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거나 정치적 난국 타개를 위한 깜짝쇼였다.
태종은 재위 6년(1406) 8월 하늘의 재변이 잇따르자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며 세자 이제(李제·양녕대군)에게 양위(讓位)하겠다고 선언했다.
태종 못잖은 정치 고수인 신하들이 이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화(李和)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성석린(成石璘)이 원로들과 백관(百官)을 이끌고 여러 날 동안 명(命)의 환수를 요청하자 태종은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소동은 끝났다.
그러나 1년 후 태종의 처남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이 선위 소동 때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다[喜形于色]”는 등의 이유로 이화(李和) 등 백관과 대간(臺諫)들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은 끝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태종 10년(1410) 3월 유배지에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양위 소동의 행간(行間)을 읽는 정치 식견이 부족했던 탓이다.
난국 타개의 수단으로 선위 소동을 벌였던 임금은 선조다.
임진왜란 와중인 선조 29년(1596) 명나라 찬획주사(贊획主事) 정응태(丁應泰)는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배신할 것이라고 명나라 신종(神宗)에게 모함했다.
함께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주도권 다툼 때문에 선조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이는 그렇잖아도 전란 대처에 무능해 수세에 몰렸던 선조의 처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선조는 동궁(東宮·광해군)에게 모든 정사(政事)의 결재를 받으라며 국왕 직 파업(罷業)을 선언했다.
이때의 대리청정 소동은 왕권의 동요가 전란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국왕 직 복귀를 거듭 주청해서 겨우 가라앉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하야(下野)’시사 발언으로 정가가 소란스럽다.
이렇게 지내온 세월이 이미 3년9개월. 환골탈태(換骨奪胎)해서 국정을 챙겨도 지난 실정을 만회하기에 남은 1년 3개월은 길지 않다.
탄핵 때 읽었다는 이순신의 좌우명, ‘생즉사(生則死)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민생에 주력해 임기 뒷부분만이라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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