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이발사가 본 박정희 趙甲濟 “(제가) 비천(卑賤)한 집안이라 주변을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고 제 출신이 비천한 것은 제 잘못이 아니니 저를 탓하지 말아달라”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발언을 두고 5일 여야가 공방했다. 국민의힘이 “비루한 감성팔이이자 국민 비하”라고 하자, 민주당이 “윤석열 선대위는 검찰공화국 선대위라 공감을 못 하냐”고 했다. 이양수 국민의힘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민비하로 이어진 이재명 후보의 비루한 감성팔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딱한 가족사에 대해 국민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누구도 비난한 적 없다”라며 “그런데 스스로 ‘출신이 비천하다’고 말하며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진 일들 모두가 그 ‘비천한 출신 탓’이라고 돌려세웠다”라고 했다. 이 수석대변인은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이재명 후보가 언급한 ‘청소부’, ‘야쿠르트 배달부’, ‘미싱사’, ‘건설노동자’ 중 어떠한 직업도 비천하지 않다”라며 “지나친 자기비하로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자신의 허물을 덮고 위기를 극복해보겠다는 얄팍한 수에 국민은 ‘정권교체’로 화답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후보의 자기비하가 도를 넘어 국민비하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땀 흘리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국민을 비하한 발언에 대해 머리 숙여 사죄하라”고 했다. 신현영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은 ‘서민의 애환에 대한 공감 능력을 찾을 수 없는 윤석열 선대위’라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윤 후보 대변인이 이 후보의 불우한 가족사를 범죄자의 변명이라 맹비난 했다. 아무리 윤 후보 선대위가 모든 것을 범죄 유무로만 보는 검사 출신들이 장악한 검찰 공화국이라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망언”이라고 했다. 신 대변인은 “이 후보의 진솔한 고백을 악의로 되받아치는 국민의힘의 행태에 참담함을 느낀다”라며 “이 후보의 어려웠던 시절은 우리네 서민들의 애환”이라고 했다. 이어 “국민의 힘에 위로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정치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달라는 당부를 드린다”라고 했다. 가정환경이 이재명보다 더 비천하면 비천했지 더 나을 것 없었던 박정희는 이재명처럼 형수에게 욕한 적이 없고 무고나 특수공무집행 같은 깽판을 친 적도 없다. 특히 박정희는 아래 사람, 가난한 사람, 그리고 여공들에게 따뜻했다. 朴正熙의 대구사범 동기인 김병희 교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 만난 친구 朴正熙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최고회의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野戰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 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朴正熙가 남긴 벽돌 한 장, 해어진 혁대, 파리채 1979년 10·26 사건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死後 집무실을 조사하던 청와대 직원들은 집무실 화장실 물통에서 벽돌 한 장, 2층 침실 화장실 물통에서 벽돌 한 장을 발견하였다. 물을 아끼려고 그렇게 넣어놓은 것이었다. 1층 집무실에는 부채와 파리채도 있었다. 여름에도 청와대는 기름을 아낀다고 냉방을 하지 않아 대통령은 문을 열어놓고 더위를 식혔다. 창문을 통하여 파리가 들어오면 파리채를 휘두르고 가끔 부채를 흔들었다. 청와대 이발사 朴秀雄씨가 본 인간 朴正熙(월간조선에서 발췌) ―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해.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원래 나이가 들면 방귀나 트림이 본인도 모르게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朴대통령을 모시면서 그분이 방귀나 트림을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朴씨는 얘기를 하던 도중 한가지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소개해주었다. 신축한 비서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1966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라 고 했다. 이때는 전용 이발 공간이 갖추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머리 감을 때 사용하는 샤워 시설이 돼 있지 않아 더운물은 다른 곳에서 가져다 사용했 다고 한다. 이날도 陸여사가 더운물과 찬물을 양동이에 받아와 세면대에 담 아 놓았는데 머리를 감던 중 朴대통령이 비눗물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허 리를 다쳐 몇 달을 고생한 적이 있다는 것.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 타일이 부착돼 있지 않은데다 세면대도 낮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는 것. 朴씨는 당시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이처럼 낡은 시설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1953년 6월에 통역장교로 임관한 한병기(韓丙起.캐나다 대사 역임)은 제 5사단에 배속되었다가 사단장으로 부임한 「미래의 장인」을 만나게 되었다. 사단장 전속부관이 본부사령으로 옮겨가자 朴사단장은 韓중위를 면담한 뒤 전속부관으로 임명했다. 韓丙起는 사단장이 워낙 엄격해 처음엔 이런 분 밑에서 부관 일을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韓丙起중위는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늦잠을 자는 편이라 누가 깨워주지 않으면 지각을 하곤 했어요. 사단장 관사에서 저는 연락병과 함께 잤는데 꼭 연락병이 흔들어 깨워야 일어나곤 했어요. 어느 날 연락병이 깨우는데, 사단장이 기다리고 계시다고 해요. 후다닥 일어나 군화 끈도 안 매고 마후라는 손에 들고 뛰어나가니 사단장께서 지프차에 오르시지도 않고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디다. 저의 자리가 뒷자리이기 때문에 제가 안 타면 사단장이 바깥에서 기다려야 해요. 허겁지겁 지프차에 타긴 했는데 송구스러워 죽을 지경이에요. 뭐라고 나무라시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겠는데 그분은 한 마디도 안 하셔요. 그런데 며칠 뒤 꼭 같은 실수를 제가 했습니다. 허겁지겁 지프차에 타니까 朴장군께서는 딱 한 마디를 하십디다. 임마, 누가 부관이야!』 *박정희는 포병학교에서 그 뒤 25년간 동반자가 될 당번병 朴煥榮(박환영) 일병과 운전병 李他官(이타관) 상병을 만났다. 박 일병을 뽑아 올린 것은 행정처 李洛善(이낙선·국세청장, 상공부 장관 역임·작고) 소령이었다. 박환영은 ‘말을 건네기가 힘들 정도로 무섭게 보이던’ 박정희가 알고 보니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는 처음 두 달가량은 “박 병사”라고 부르더니 그 뒤로는 “환영아!”라고 했다. 박정희가 고향을 물어 “옥천입니다”라고 했더니 “옥천이면 내 장인 알겠네”라고 했다. 박정희는 “잘 만났다”면서 퇴근길에 박환영 일병을 데리고 관사로 갔다. 관사는 넓고 낡은 일본식 木造(목조) 건물이었다. 응접실과 욕실까지 있으니 서울 고사북동 시절보다는 한결 좋아진 셈이었다. 육영수와 근혜는 당번병 박환영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뜰에는 서너 그루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엔 탁구대가 있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일요일엔 탁구를 즐겼다. 박정희는 당번병을 결코 下人(하인)처럼 대하지 않고 식구처럼 대했다. 최근까지도 신당동의 박정희 私邸(사저) 관리인이었던 박환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아무리 잘못해도 처음 한두 번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쯤 실수하면 그때는 납득할 만큼 따끔하게 나무라시지요. 저에게는 평생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때 ‘공작’담배를 즐겨 피웠고 커피를 좋아했다. 그리고 항상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박환영에 이어 운전병으로 뽑혀 왔다가 10·26 사건 때까지 박정희를 모신 이타관 상병(작고)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인간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술을 마시러 갈 때도 무작정 기다리게 하지 않고 ‘몇 시까지 다시 오라’고 배려해 주었다. 이타관, 박환영 두 사람은 관사의 한 방에서 같이 기거하며 육영수가 해주는 식사를 했다. ///////////////////////////////////////////////// 박정희 포병학교장 시절 교육처장이던 오정석 중령(육군 준장 예편)이 지금도 기억하는 교장 훈시가 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尉官(위관)장교는 발로, 영관은 머리로, 장군은 배짱으로 일하는 겁니다. 위관은 항상 사병들과 더불어 먹고 자고 발로 뛰면서 일해야 합니다. 영관장교는 머리를 짜서 자기 분야에 전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상관에게 A안, B안을 제시한 다음 각각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저는 이런 이유에서 어느 안을 추천합니다’라고 건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관장교는 전문가적 식견을 갖추어 참모로서 지휘관을 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장군은 참모로부터 추천받은 안을 선택하는 결심을 한 다음 배짱으로 밀고나가는 겁니다. 장군은 관리자이지 기능인이 아닙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엔 교장실에서 참모 브리핑 시간이 있었다. 한 달쯤 지나면서부터 참모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시간이 되었다. 박정희는 큰소리나 욕설 없이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컨대 油類(유류) 현황을 참모가 보고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 지난 주엔 232드럼 남았다고 했는데 오늘까지 추가 소모가 없었는데 왜 잔고가 212드럼이 됐어? 20드럼은 어떻게 된 거야?”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좋은 박정희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갈 수 없었다. 현황파악이 不實(부실)했다고 自認(자인)하든지 박정희의 머리를 뛰어넘는 거짓말을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되니 한 달 후부터는 모든 참모들이 차트를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확인을 하고 기록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참모들이 한 번씩 수모를 당했지만 수모를 준 교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나중에 조국 근대화 작업의 행동 철학이 되는 박정희式(식) 일처리의 핵심은 업무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포병학교는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 훈련을 받은 신병들을 포병단 자원으로 받아 4주간의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운전 교육을 반드시 履修(이수)해야 했다. 운전 교육용 닛산 트럭 15대가 있었다. 어느 날 박 교장은 오정석 교육처장에게 물었다. “신병들이 여기서 교육받아 나가면 전방에 배치되자마자 砲車(포차)를 끌어야 하는데 실제로 신병들이 운전 교육 때 핸들을 잡는 시간은 얼마나 되오?” “알아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민간 교육장에서는 운전대 잡아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오?” 오 중령은 ‘알 필요 없는 것까지 묻는다’고 생각했는데 곧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질문임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신병들이 운전대를 잡아보는 시간은 한 시간도 안 되는데 민간인은 면허를 받을 때까지 대강 15시간가량 운전 실습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교장은 다시 지시했다. “그러면 민간 차원으로 교육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추가로 필요한 교육 기간, 차량, 유류 소모량, 그리고 예산이 얼마인지 산출해서 보고하시오.” 오정석 중령은 추가 소요를 작성하여 학교장에게 올렸고 박정희는 육군본부 회의에 참석하여 이를 건의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광주포병학교장 박정희 준장은 1955년 4월 24일에는 학생대대 중대장 崔忠烈(최충렬) 대위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학생대장 洪鍾哲(홍종철·청와대 경호실장, 문공부 장관 역임) 중령이 박 교장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주례사에서 “이북 출신인 최 대위가 가정을 가짐으로써 외로움을 덜게 된 것을 축하하며 동료들은 이 가정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최충렬 대위에 따르면 박정희 교장은 미군으로부터 받아오는 비상식량 시레이션으로 아침식사를 양식으로 만들어 장교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포병학교도 厚生(후생) 사업을 하고 있었다. 부대의 트럭들을 화순의 벌목업자에게 빌려 주어 수입을 올렸다. 이 수입을 박정희 교장은 공개적으로 아주 공정하게 나누었다고 한다.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는 금액을 봉투에 집어넣어 참모들에게 직접 돌렸다고 한다. 트럭 임대료를 장작으로 받기도 했다. 박 교장은 이 장작을 연병장에 쌓아 놓고는 배분비율을 정해 주고 장교들이 越冬用(월동용)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박정희는 포병학교에서 그 뒤 25년간 동반자가 될 당번병 朴煥榮(박환영) 일병과 운전병 李他官(이타관) 상병을 만났다. 박 일병을 뽑아 올린 것은 행정처 李洛善(이낙선·국세청장, 상공부 장관 역임·작고) 소령이었다. 박환영은 ‘말을 건네기가 힘들 정도로 무섭게 보이던’ 박정희가 알고 보니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는 처음 두 달가량은 “박 병사”라고 부르더니 그 뒤로는 “환영아!”라고 했다. 박정희가 고향을 물어 “옥천입니다”라고 했더니 “옥천이면 내 장인 알겠네”라고 했다. 박정희는 “잘 만났다”면서 퇴근길에 박환영 일병을 데리고 관사로 갔다. 관사는 넓고 낡은 일본식 木造(목조) 건물이었다. 응접실과 욕실까지 있으니 서울 고사북동 시절보다는 한결 좋아진 셈이었다. 육영수와 근혜는 당번병 박환영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뜰에는 서너 그루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엔 탁구대가 있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일요일엔 탁구를 즐겼다. 박정희는 당번병을 결코 下人(하인)처럼 대하지 않고 식구처럼 대했다. 최근까지도 신당동의 박정희 私邸(사저) 관리인이었던 박환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아무리 잘못해도 처음 한두 번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쯤 실수하면 그때는 납득할 만큼 따끔하게 나무라시지요. 저에게는 평생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때 ‘공작’담배를 즐겨 피웠고 커피를 좋아했다. 그리고 항상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박환영에 이어 운전병으로 뽑혀 왔다가 10·26 사건 때까지 박정희를 모신 이타관 상병(작고)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인간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술을 마시러 갈 때도 무작정 기다리게 하지 않고 ‘몇 시까지 다시 오라’고 배려해 주었다. 이타관, 박환영 두 사람은 관사의 한 방에서 같이 기거하며 육영수가 해주는 식사를 했다. ///////////////////////////////////////////////////////////// 청와대 이발사 朴秀雄씨가 본 「인간 朴正熙」(월간조선) 『그분은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자상하셨고 情도 많으셨습니다. 특히 절약 하는 데는 아마 그분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늘 윗옷을 벗고 러닝 셔츠 차림으로 이발관에 오셨는데, 해진 러닝 셔츠를 입고 계신 적이 많았습니다. 허리띠도 얼마나 사용하셨던지 허리띠 구멍이 사람의 새 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크게 나 있었습니다. 절대권력자가 이처럼 검소 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머리를 15년간 만져 온 朴대통령의 전용 이발사 朴秀雄(박수웅ㆍ64)씨는 朴대통령을 모셔온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서 두 눈 에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北韓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文世光(문세광)의 총 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 1974년 8월15일 아침 그는 朴대통령의 머리를 빗 겨드렸으며, 朴대통령이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 재규)의 총에 맞은 그 날 아침에도 朴대통령의 머리를 만져 드렸다고 한다 . 朴대통령이 유달리 사랑한 외아들 志晩(지만)씨가 유치원을 다닐 때에는 陸英修 여사의 안내로 志晩씨의 이발을 해주었고, 陸여사의 장례일에는 朴 대통령의 뜻에 따라 喪主(상주)인 志晩씨의 머리를 눈물로 만져 주었다는 것. 최고 권력자 4명의 이발을 한 진짜 권력자 朴正熙 대통령의 전용 이발사 朴秀雄씨는 朴대통령 이외에도 崔圭夏(최규하 )ㆍ全斗煥(전두환)ㆍ盧泰愚(노태우) 前 대통령의 이발도 잠시나마 맡아 해 전직 대통령 4명의 머리를 이리저리 주물러 온 별난 履歷(이력)을 가지게 됐다. 권력자로부터 無限(무한) 신임을 받았던 그 어느 누구도 朴씨만큼 권력자를 마음대로 움직여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발을 하기 위해서는 천 하없는 사람도 이발사가 의도하는 대로 머리를 이리저리 따라 움직일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朴씨는 대한민국의 권력자 중 최고 의 권력(?)을 누렸었다고 할 수도 있다. 朴씨는 2001년 9월27일 오후 3시부터 세 시간여 동안 조선일보사 미술관 뒤 편 벤치에 앉아 기자와 얘기를 나눴다. 朴씨는 인터뷰 도중 世波(세파)를 대변하듯 투박하고 두툼한 손등을 눈으로 자주 가져가 좌우로 훔치곤 했다 . 그는 朴대통령이 돌아가신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朴대통령 묘소를 찾아 막걸리 한 잔을 올린 뒤 자신의 身邊( 신변)에 관한 보고를 드려 왔다고 한다. 朴씨가 대통령 전용 이발사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 출신인 朴씨는 한림면 가산초등학교와 부산 금성고등학 교를 졸업한 뒤 부산과 제주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21세 때인 1958년 서 울로 와 효자이발관에 취직했다. 당시 효자이발관은 청와대에서 볼 때 정문 大路 오른쪽 모퉁이에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최고급 수준이었다고 한다. 효자이발관에서 항상 청와대를 바라보며 근무하던 朴씨는 자신의 손으로 반 드시 이 나라 최고 어른인 대통령의 머리를 한 번만이라도 깎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1963년 12월17일 오후 2시 중앙청 앞 광장에서 제 5代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오던 날 그는 자신의 후배 이발사와 면도사 13명에게 흰 가운을 입힌 채로 이발관 앞 도로변에 일렬로 도열시켜 朴대통령 부부에게 박수를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朴씨는 이 일이 있은 직후 효자이발관 바로 옆에 다른 이발관을 내 독립했 고 이때 예쁘장하게 생긴 유치원생 남자 어린이의 이발을 하게 된다. 이 남 자 유치원생이 朴대통령의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은 두 달여쯤 지난 뒤에야 알았다고 한다. 당시 경복초등학교 부설 유치원생이던 志晩 어린이는 이발 도중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바람에 여간 애를 먹 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을 부탁한 陸여사 朴씨는 보름 간격으로 이발소를 찾는 志晩 어린이의 이발을 별 탈 없이 하 기 위해 동화책을 읽었고, 이 동화를 志晩 어린이에게 들려 주었다. 어린 손님은 이발사 아저씨가 들려 주는 동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가만히 앉아 있 었고 이때를 틈타 이발사 아저씨는 귀한 어린 손님의 이발을 순식간에 마무 리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발사 아저씨가 어린 손님에게 주로 들려 준 이야 기는 「여우가 사람 잡아 먹는다」는 것 등이었다. 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한 것이 1964년 5월10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날 오전 9시쯤 갑자기 검은 양복을 잘 차려입은 건장한 사람이 이발관으로 찾아와 『급히 이발을 해야 할 사람이 있다』 며 같이 가줄 것을 요청해 밖으로 나가 보니 잉크색 지프차가 이발소 앞에 대기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지프차에 오르자 지프차가 청 와대 정문을 거쳐 한 건물 앞에 멈췄고 자신은 건장한 사람을 따라 건물(부속실)로 올라갔다. 떨려서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 『朴군, 왜 내가 싫은가?』 朴씨는 부속실로 들어가면서 평소 아침마다 자신의 이발관에 와 머리를 손 질하던 李東元(이동원) 비서실장이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 李실 장이 1963년 12월 비서실장직을 그만두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안을 둘러보니 3평 남짓한 방안 의 벽에는 조그마한 거울이 걸려 있고 한 가운데에는 낡은 의자가 놓여 있 는 것을 보고는 이곳이 이발을 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 ―그때 朴대통령을 처음 대면하게 되었는데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대통령의 머리를 제 손으로 한 번만이라도 만져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 이 이제야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조그마한 실수라도 할 경우 제 발로 걸어서 나가지 못하겠구나 하 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지요. 방안에서 한 5분쯤 기다리고 있으니까 자그마한 사람이 하얀 러닝 셔츠 차 림으로 혼자서 들어왔습니다. 직감적으로 이분이 朴대통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찌나 당 황했던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인사말은 건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분 이 저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자네 이름이 뭔가」고 물어 오셨습 니다. 저는 제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 「이발사입니다」고 말씀드렸지요 . 조금 있으니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陸英修 여사께서 방안으로 들어오시면 서 저를 보고 「朴선생이시죠. 이발을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지만이에게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들려 주신다면서요. 이 어르신을 잘 부탁드립니다」고 인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朴씨는 이렇게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처음 하게 되었고, 가슴이 떨려 어 떻게 이발을 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을 가누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에 陸여사가 밖으로 나가 두 개의 양동이에 뜨거운 물과 찬물을 담아와 그 물로 朴대통령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는 것. 陸여사가 손수 물을 떠오는 바람에 더욱 황송했었다고 한다. 朴씨는 자신이 朴대통령의 전용 이발사가 된 배경에는 陸英修 여사의 지원 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당시 朴대통령의 이발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이발사가 여성이어서 陸여사는 여성 이발사를 남자로 교체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志晩 어린이 의 이발을 정성스럽게 해주는 朴씨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陸 여사는 朴대통령의 女이발사를 교체하기 위해 이날 이 女이발사를 집에서 쉬게 하고 대신 朴씨를 급하게 불러올렸다. 물론 朴대통령에게는 女이발사 가 몸이 아파 이발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둘러댔다는 것. 朴씨는 이후 청와대 內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지어 준공한 1969년 이전까지는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관에서 일을 하면서 대통령이 찾을 때마다 청와대로 가 이발을 했다. 『朴군, 왜 내가 싫은가?』 ―정식 직원으로 청와대에 상주하면서 이발을 하기 시작한 것은 朴正熙 대 통령의 권유 때문이었습니까? 『1969년 청와대 內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도 마련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발을 하기 위한 전용 공간 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간이 이발관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15평 규모 의 전용 이발관이 마련된 직후 하루는 대통령께서 이발을 하시기 위해 저를 찾는다는 전갈이 부속실에서 왔습니다.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청 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날 朴대통령께서는 이발을 하시기 위해 이발관으로 들어오셔서는 저를 보 고 「朴군, 이제 이발 시설도 갖추고 했으니 왔다갔다 하지 말고 이곳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어떤가?」고 물어 오셨습니다. 제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대통령께서 재차 「왜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싫은가?」고 하 시더군요. 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지시를 받들겠 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죠. 朴대통령께서는 제가 머뭇거리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朴군, 왜 내가 싫은가?」고 다시 말씀이 계시길래 제가 「그런 것이 아니고 어르신을 모 시려면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제가 청와대 앞에서 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발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안이 언뜻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린 것이지 결코 어르신을 모시는 것이 싫어서가 아닙니다』고 말씀 을 드렸습니다. 제 말을 들으신 뒤 朴대통령께서 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시더니 「걱정 했잖아, 자네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줄 알고. 내일 당장 짐 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해」라고 하시면서 의자에 앉으시더군요. 이발을 마 치자 「내일 보세」라고 짧은 한 말씀을 남기시고는 집무실로 돌아가셨습니 다』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운영하던 이발소 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는 그날로 이발관 문을 닫아 버 렸다고 한다. 朴씨는 이날부터 19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에 맞아 他界하는 날까지 항상 朴대통령 곁에서 생활했었다. 『朴대통령은 싸구려 스킨 로션을 좋아했다』 ―朴대통령은 주로 언제 이발을 했습니까? 『이발을 하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이발은 주로 일주일에 한 번, 드라이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하셨는데, 아침 식사를 하시 기 전에 하셨고 소요시간은 30분 정도였습니다. 물론 國事(국사)로 바쁘실 때에는 한 달 가까이 이발을 하지 않으신 적도 있습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히 머리 감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뜨거 운 물에 담가 그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른 다음 스킨을 머리에 바르는 것으 로 이발을 끝냅니다. 대통령께서는 스킨 로션도 비싼 외제 같은 것은 싫어 하시고 그 당시 국산 중에서도 가장 값이 싼 특정회사의 제품을 좋아하셨습 니다. 향기가 마음에 드신다나요. 비서실 내에 전용 이발 공간이 마련되면서 직원도 저를 포함해 남자 이발사 3명, 여자 면도사 2명 등 5명으로 늘렸습니다. 비서실 간부들의 이발을 맡 았습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제가 朴대통령의 이발도 하고 면도도 했지만 면도 를 하는 것이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1968년 초에 대통령께 「어르신, 저는 면도는 못 하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직접 면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 그래 알았네」 하시면서 면도칼을 손에 들고 거울을 보시면서 직접 면도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면도를 못 하겠다고 한 것은 실수가 두려워서입니다. 만약 면도를 하 다 朴대통령의 얼굴에 상처라도 냈다고 가정해 보세요. 반창고를 붙인 朴대 통령의 얼굴이 텔레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어르신의 수염이 일반인들처럼 한쪽 방향으로 자라 는 것이 아니라 엇갈리게 나 있어 때문에 면도하기가 그만큼 어렵기도 했습 니다』 朴씨는 인터뷰를 하면서 朴正熙 대통령을 「각하」라고 하지 않고 꼭 「어 르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朴대통령이 평소에 가까이서 도와 주는 사람들이 「각하」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해 「어르신 」이라고 부른 것이 입에 익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朴正熙 대통령께 좋아하신 머리 스타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제가 朴대통령을 모시면서 대통령께서 저에게 머리 스타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시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제가 하는 대 로 맡겨 놓으셨습니다. 다만 머릿기름을 바르는 것과 중간 가르마를 타는 것은 싫어하셨습니다』 ―이발을 하는 도중 朴대통령은 어떤 말씀을 주로 하셨습니까? 『평소에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朴대통령께서 이발관으로 가셨다는 연락이 부속실에서 오면 저희들은 서둘러 이발관을 깨끗이 정돈한 뒤 출입구 안쪽 에 도열해서 기다리다 대통령께서 이발관으로 들어오시면 허리를 굽혀 인사 를 드립니다. 그러면 朴대통령은 「어 그래, 잘들 있었나」 이 한 마디만 하신 뒤 곧 바로 의자에 앉으십니다. 朴대통령은 의자에 앉을 때 허리를 직 각으로 곧추세우신 채로 이발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으셨죠』 ―朴대통령이 이발을 할 때 陸英修 여사도 자주 이발관에 오시곤했다는 얘 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랬습니다. 陸여사께서 자주 이발관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朴대통령 머 리 만져드릴 수건을 적당한 온도의 물에 적셔 저에게 주시곤 하셨습니다. 여름에도 절전운동 때문에 이발관에 에어컨을 잘 가동하지 않았는데, 陸여 사께서 선풍기를 들고 오셔서 朴대통령에게 틀어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朴대통령은 곱슬머리』/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陸英修 여사께서 이발관에 오시면 朴대통령은 陸여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朴대통령께서는 참 무뚝뚝한 분입니다. 陸여사께서 선풍기도 틀어 주시고 하면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는 하셔도 흉이 안 되는데 그런 말씀도 없으십니다. 그냥 묵묵히 앉아 이발만 하시죠. 한 번은 제가 陸여사께「어르신의 머리가 곱슬이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스타일을 내기가 어렵습니다」고 말씀을 건넸더니 陸여사께서「결혼할 때 는 곱슬머리가 아니었는데 나이를 드시면서 곱슬머리로 변하더군요. 참 이 상도 하지요」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계시던 朴대통령께서「곱슬 머리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그게 뭐 그리 이상하다고」하시며 웃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곱슬머리 얘기가 나오니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곱슬머리는 보통 머리보다 이발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꾀를 내 대통령의 머리를 야금야금 조금씩 짧게 잘랐습니다. 제가 이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朴군, 너무 짧게 자르지는 마래이」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씀하신 기억도 있습니다』 朴씨는 얘기를 하던 도중 한가지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소개해주었다. 신축한 비서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1966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라 고 했다. 이때는 전용 이발 공간이 갖추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머리 감을 때 사용하는 샤워 시설이 돼 있지 않아 더운물은 다른 곳에서 가져다 사용했 다고 한다. 이날도 陸여사가 더운물과 찬물을 양동이에 받아와 세면대에 담 아 놓았는데 머리를 감던 중 朴대통령이 비눗물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허 리를 다쳐 몇 달을 고생한 적이 있다는 것.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 타일이 부착돼 있지 않은데다 세면대도 낮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는 것. 朴씨는 당시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이처럼 낡은 시설에서 이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머리 생김새가 이상한 곳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朴대통령의 머리는 정확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고 이마도 그렇게 잘생기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朴대통령의 귀가 특히 잘 생기셨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뒤 에서 보면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양쪽 귀의 모양이 똑같 았죠. 보통사람들은 양쪽 귀의 모양이 똑같은 경우가 드물죠. 그리고 귀 윗부분의 머리를 자를 때에도 가위가 귀에 닿지 않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난 부분과 귀의 구분이 뚜렷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 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 해.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 잃지 않아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원래 나이가 들면 방귀나 트림이 본인도 모르게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朴대통령을 모시면서 그분이 방귀나 트림을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의 이발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었습니까? 『京釜고속도로가 개통된 직후인 1970년 7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이발관에 카세트를 한 대 구입했었습니다. 평소 朴대통령은 가수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씨 등의 노래를 즐겨 들으셨습니다. 그날 대통령께서 이발관에 오셨을 때 제가 남인수의 노래를 틀었습니다. 이발을 하던 중 남인수가 부른 「경부선 열차」라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이 노래 가사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기 위해서는 삼랑진과 대구, 대전 등을 거쳐야 하는데 이러다 보니 며칠이 걸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이 노래를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만 저에게 「朴군, 이제 고속버스 타면 다섯 시간이면 부산에서 서울로 오고 하루에도 서울과 부산을 왔다가 갈 수 있는데 이 노래를 들으니 한 달도 더 걸리겠네」라고 농담을 하시며 웃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당시 또 朴대통령께서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하루는 제가 이 노래의 가사를 적어서 대통령께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가사를 보시더니 「朴군, 황성옛터의 「황」자가 틀렸네. 이 때는 임금 皇(황)이 아니라 황폐하다는 荒(황)을 써야 맞지. 말이 나왔으니 자네가 한 번 불러 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저는 노래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청을 받들지는 못했습니다』 朴씨는 이 말을 하면서 두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감 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朴正熙 대통령의 전용 이발 사는 계속 朴대통령과의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1973년 겨울 어느날 오전으로 기억됩니다. 부속실에서 朴대통령께서 본관에서 이발을 하시면 좋겠다고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 가끔 이발관이 아닌 본관 집무실 옆방에서 드라이 등 간단한 머리 손질은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여직원과 함께 가운을 입고 본관으로 올라갔죠. 朴대통령께서 저희들을 보시자 「朴군,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꼭 얇은 가운을 입어야 하나? 격식 따지지 말고 얼른 가서 두툼한 스웨터 같은 옷을 입고 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가운만을 입고 여직원에게는 가운 위에 겨울 스웨터를 입게 하고는 다시 본관으로 올라갔죠. 대통령께서 겨울 스웨터를 차려입은 여직원을 보시더니만 「그래, 이렇게 입으니 얼마나 좋아. 이제 안 춥재」하시며 여직원의 어깨를 두드리시고 이 직원의 어깨에 묻어 있던 머리카락을 털어내 주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朴대통령을 보면 찬바람이 분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朴대통령만큼 인정이 넘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朴씨는 1973년 4월 朴대통령을 모시고 청와대 全직원들이 안양 근처로 모내 기 지원을 나갔을 때의 기억도 소개해 주었다. 『술은 역시 막걸리가 최고야!』/『이 애가 맏상주인데 이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날 朴대통령은 오전에 모내기를 한 뒤 점심시간에 막걸리를 여러잔 마시시고는 직원들보다 먼저 청와대로 돌아가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서둘러 청와대로 돌아온 자신을 보고 朴대통령은 『朴군, 막걸리 한 잔 했나? 술 이 참 맛있지. 역시 논바닥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먹는 막걸리가 최고야』라 고 하더라는 것. 朴씨는 朴正熙 대통령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한 분인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한 가지 얘기를 더 들려 주었다. 면도사로 근무하던 박순옥씨에 관한 얘기였다. 1974년 봄 면도사로 근무하던 박순옥 씨가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이 보고를 들은 朴대통령이 어느 날 본관으로 자신과 박순옥씨를 부르더라는 것. 둘이서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올라가자 朴대통령이 『朴군, 순옥이가 곧 시집을 간다고 하니 우리 오늘 사진이나 같이 찍자』고 하더라는 것. 朴대통령이 그러면서 사진기를 서랍에서 끄집어 내 이를 朴씨에게 주고 박순옥씨의 어깨를 감싼 채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가 포즈를 취했다. 朴대통령도 사진기를 달라고 해 朴씨와 박순옥씨에게 『창가로 다시 가 포즈를 취해. 이번에는 내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줄게』라고 하시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고 한다. 집무실에서 사진을 찍으니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사진이 흐리게 나올 것을 염려한 朴대통령은 『이왕이면 앞마당 잔디밭에서 정식으로 사진을 찍자』며 두 사람을 잔디밭으로 데려 갔고 서로 두 명씩 짝을 이뤄 사진을 찍었다 . 朴대통령은 세 명이서 같이 사진을 찍자며 부속실 직원을 앞마당으로 나 오게 해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는 것. 며칠 후 朴대통령이 불러 박순옥씨와 함께 본관 집무실로 가니 대통령이 창틀에 사진을 펴놓고 『이리 와 봐. 지난번 사진이 아주 잘 나왔어. 순옥아, 네가 시집을 가는데 내가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사진이라도 추억으로 가지고 가라』며 사진을 순옥씨에게 건네 주었다고 한다. 朴씨에게도 물론 사진을 건네 주었지만 자신은 그후 이사를 다니면서 이 사진을 잃어버렸다고 애통해 했다. 이때 朴대통령은 『사진은 너거들에게 주지만 필름은 내가 갖는대이』 하시면서 웃더라는 것이다. 필름은 아마 보안상 외부에 유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게 朴씨의 설명이다. 『이 애가 맏상주인데 이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陸英修 여사가 1974년 8월15일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날도 朴正熙 대 통령이 이발을 했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날 朴대통령의 머리를 만져 드리는 도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대통령의 머리를 빗겨 드릴 빗이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제가 사용하던 빗은 평소 바닥에 떨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괜한 말씀을 드려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냥 부러진 빗을 발로 의자 밑으로 밀어넣고 계속 머리를 만져 드렸습니다. 그날도 머리를 자르지는 않고 다만 물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빗으로 가지런히 정리만 해드렸습니다. 陸여사께서 文世光의 총탄에 맞으신 그날 저녁 저는 사건현장인 국립극장으로 가 평소 알고 지내던 이 극장 공연계장 이재문씨를 만났습니다. 李계장의 안내로 극장 안에 들어가 보니 방청석 앞쪽에 앉아 있다가 경호원의 응사에 맞아 숨진 학생이 흘린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李계장이 저에게 묘한 꿈 얘기를 하더군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꿈을 꾸었는데 陸여사께서 괴한의 총에 맞는 꿈이었다는 것입니다』 李계장은 자신의 꿈이 이렇게 정확하게 들어맞을 줄 알았으면 국립극장 간 부들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했을 것이라며 몹시 안타까워하더라는 것이다. ―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직후 朴正熙 대통령은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朴대통령께서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志晩군과 槿惠(근혜)ㆍ槿英(근영)씨 등 자녀들을 데리고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던 것은 국민장으로 치러진 陸여사의 장례식 당일(1974년 8월19일) 아침 朴대통령의 머리를 만져 드리는데 눈물을 참지 못해 펑펑 울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 앞에 있는 거울을 보니까 朴대통령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朴대통령께서 志晩군을 부르시더군요. 당시 중학생이던 志晩군이 올라오니까 대통령께서 저를 보고 「임자, 오늘이 이 애 애미의 출상이 아닌가? 이 애가 맏상주인데 이발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잘 좀 해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시더니 朴대통령께서 志晩군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어릴 때는 예쁘기만 하더니 크고 나니 (대하기가) 어렵구나」라고 하시면서 이발관을 나서셨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朴씨는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을 애써 참으려는 듯 청 와대가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통령 그만 두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뒤 朴正熙 대통령은 외로움을 느끼시지는 않았습 니까? 『평소에도 말씀이 없으셨지만 陸여사께서 돌아가신 뒤 더욱 말씀이 없으시고 갑자기 많이 늙으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朴대통령께서는 1976년부터 청와대 본관 앞 구석진 잔디밭에 펜스를 만들어 깃털이 금빛색을 띠는 닭의 일종인 金鷄(금계)를 키우셨습니다. 아마 외로운 마음에 금계를 키우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루는 이발이 끝나자 대통령께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무시고는 잔디밭 쪽을 바라보시다 참새 수십 마리가 날아와 펜스 주위를 맴돌다 이 중 몇 마리가 펜스 안에 넣어둔 먹이를 먹기 위해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자 「朴군, 저거 보래이. 역시 용기 있는 놈이 맛있는 먹이를 먹는구먼」 하시며 너털웃음을 지으시던 일이 생각납니다. 1977년 여름에는 朴대통령께서 이발을 마치신 뒤 돌아가신 陸여사가 생각나셨는지 먼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나도 이제 대통령 그만두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집을 처음 살 때 내자(陸여사)와 아이들이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집안 살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많이 마련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라고.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하나하나 키워 나가는 것이 삶의 재미지. 朴군, 자네도 욕심내지 말고 차근차근 살아」 하시면서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朴正熙 대통령께서 金載圭의 총탄에 맞아 돌아가신 날에도 이발을 하셨습 니까? 『물론입니다. 그날 오전 9시쯤 이발을 하셨습니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않았고 물수건으로 머리를 닦아낸 뒤 스킨을 바르고는 빗질만 해드렸습니다. 제가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래, 갔다와서 보자구」하시더군요. 이 한 마디가 제가 이승에서 朴대통령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이발관 직원들에게 용돈도 자주 주시곤 하셨는지요. 『朴대통령께서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저희 직원들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보통 20만 원 정도였습니다. 10만 원권 수표를 두 장 주실 경우도 있고 현금으로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이 돈은 직원들에게 똑 같이 나눠 주고 朴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면 「그래, 잘했다」고 말씀하셨죠』 全斗煥 추억 朴씨는 崔圭夏ㆍ全斗煥ㆍ盧泰愚 등 전직 대통령의 이발도 했다고 한다. 崔 前 대통령은 청와대 특보시절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을 때 몇 번 이 발을 했다는 것. 崔 前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발관을 찾았으며 평 소에는 자신이 직접 머리를 감고 빗질을 했다고 한다. 全 前 대통령과 盧 前 대통령도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시절 가끔 이발을 하기 위해 이발관을 찾았었다고 한다. 全차장보는 이발관을 찾을 때마다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술이나 한 잔씩 해라』며 10만 원 정도씩 용돈을 주었다. 朴씨는 1980년 9월 全斗煥 장군이 제 11代 대통령에 취임해 청와대로 들어오기 전날 짐을 챙겨 청와대를 나왔다. 朴씨는 이때 청와대를 나온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청와대 근처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朴正 熙 대통령이 없는 청와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朴씨는 인터뷰가 끝날 때쯤 朴正熙 대통령의 왼쪽 손바닥에 임금 「王」 字의 손금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흔히 「임금은 하늘이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손바닥의 손금만을 볼 때 朴正熙 대통령은 분명 하늘이 이 나라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 낙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권력자로 변한 박정희는 소박한 인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육사 생도들을 혁명 지지 시위에 동원하는 데 일역을 맡았다가 박정희의 경호원이 된 육사 11기 이상훈(전 국방장관) 대위는 광주에서 열린 혁명 지지 대회에 참석한 박 의장을 수행하여 작은 호텔에 들었다. 한밤중에 호텔 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화장실을 겸한 세면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대위가 가보니 박정희가 양말을 빨아 줄에 널고 있었다. 양말이 신고 온 한 켤레밖에 없어 밤에 몰래 나와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위에게 들킨 박정희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박정희의 양말과 관계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5·16 당시 국무원 사무처 보도과장은 국방부 보도과장 출신 李容相(이용상)이었다. 혁명 정부하에서는 공보부의 보도처 보도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9사단 참모장일 때 그 밑에서 정훈부장으로 근무했던 이용상 시인은 계급을 떠나서 박정희 집안과 인간적으로 친밀했다.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용상에게 박정희 의장과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달라고 졸랐다. 이용상은 장충동의 의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육영수가 받았다. 박 의장이 언제 돌아온다는 것만 확인했다. 이용상은 중앙청 출입기자들을 데리고 무턱대고 장충동으로 갔다. 박정희는 외출에서 돌아오더니 발을 씻고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회견 장소에 나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낙선 소령이 호주머니 속에 양말을 넣고 와서 박 의장에게 귀엣말로 “사진기자들도 왔으니 양말을 신으시지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큰 소리로 “발은 찍지 말라고 해!”라고 하면서 끝까지 맨발로 기자회견을 했다. 한국일보 尹宗鉉(윤종현) 기자가 “박 의장님은 주량이 어느 정도입니까” 하고 물었다. “내 주량은 여기 있는 이용상 동지에게 물어 보시오.” 윤 기자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이용상 과장의 주량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의장님의 주량입니다.” “아마, 이용상 동지 주량은 여러분들도 잘 모르실 겁니다. 이분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 데 일주일이 걸리는 사람이에요. 중간, 중간에 있는 술집을 다 들러야 하거든요.” 5·16 혁명 직후 박정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는 洪得萬(홍득만) 중사가 있다. 그는 5·16이 났을 때 육군 참모차장실 선임 하사관이었다. 그는 1952년 박정희가 대구에서 육본 작전국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 밑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어느 날 일직사령 박정희 대령이 사병들을 집합시켰다. 홍 중사가 “집합 완료”를 보고하자 박정희는 “전원 모자 벗어!”라고 명령했다. 사병들의 두발 상태가 불량함을 확인한 박 대령은 “가서 가위 가져와”라고 했다. 박정희는 두발 상태가 가장 단정한 홍 중사의 머리칼을 싹둑 자른 뒤 “해산시켜”라고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가 버렸다. 홍 중사는 박 대령에게 찾아가서 “명색이 제가 하사관인데 이렇게 하시면 부하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하고 하소연을 했다. 박정희는 웃으면서 “그럴 거야. 지금 사병들이 뭘 하고 있는지 한번 보고 와”라고 했다. 홍 중사가 막사로 내려가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사병들이 모두 이발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하사관이 억울하게 혼이 나는 것을 본 사병들이 알아서 한 것이었다. 홍 중사가 “이것도 지휘통솔법입니까”라고 하니 박정희는 “바로 그거야”라면서 씩 웃었다. 5·16이 터지자 홍 중사는 바로 곁에서 박정희를 시중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최고회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잠을 언제 자는가 싶을 정도로 항상 깨어 있고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야전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 신문부터 꼼꼼히 읽었다. 그 다음엔 중앙정보부, 육해공군 정보부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들을 뜯어 밑줄을 쳐가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진정서와 건의서들을 읽었다. 보고서를 읽느라고 아침을 생략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육영수가 신당동 근무 중인 박환영 중사를 시켜 꿀 한 병과 잣 한 봉지, 그리고 양주 한 병을 보냈다. 박정희는 홍 중사가 있을 때만 잣 몇 알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양주 한 잔을 얼른 마시곤 했다. 꿀은 가끔 한 숟갈씩 퍼먹었다. 혁명의 성공으로 박정희의 신당동 생활은 곧 끝나게 되고 육영수의 생활도 많이 바뀐다. 육영수의 사촌동생인 宋在寬(송재관·전 어린이회관 관장)은 그때 <평화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군부 쿠데타 소식을 듣고 이종 사촌자형이 앞장을 섰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육영수가 송재관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 회사 끝나고 우리 집에 들러 줄 테야?”라고 했다. “무슨 일이죠?” “나, 지난번에 돈 탄 것 가지고 집수리했어.” 그날 퇴근길에 신당동에 들렀더니 육영수는 처마 끝에 플라스틱 차양을 덧대어 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곗돈을 타서 마음먹고 만든 것이었다. 그런 평범한 주부이던 육영수에게 송재관은 5월17일 전화를 걸었다. “아니, 자형은 왜 앞장서서 그런 일을 했어요?” 송재관은 이종 사촌누님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란 말을 기대하면서 위로의 말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육영수는 정치나 시국 같은 데에는 무관심하던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육영수는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동생 무슨 소리야?” “아니, 자형이 위험한 일에 가담하셨기에….” 송재관은 순간적으로 ‘내가 말을 잘못 했나’라고 생각했다. 육영수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이 온통 부정부패로 물들고 혼란에 빠진 채로 국민들이 어떻게 살겠어? 그냥 그대로 간다면 나라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송재관은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이상하다. 저 누님이 언제 저렇게 변했나”라고 중얼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