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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7년(2013년) 12월 19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10)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12월 19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661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661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열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에는 보리연꽃 법우와 저 관문, 이렇게 단 2명이 참석했습니다. 다른 법우들은 아마도 연말을 맞아 여러 가지 행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Two The Noble Eightfold Path: Chapter Fourteen Right Diligence와 Chapter Fifteen Right Concentration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99페이지 처음부터 107페이지 밑에서 12째 줄까지입니다.
오늘로써 2013년 불서 읽기 모임을 마감했고, 내년 2014년 1월 9일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불서읽기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그 사이에 참석하시는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WO The Noble Eightfold Path
제2부 팔정도(八正道)
CHAPTER FOURTEEN Right Diligence
14장 정정진(正精進)
Right Diligence (samyak pradhana), or Right Effort, is the kind of energy that helps us realize the Noble Eightfold Path. If we are diligent for possessions, sex, or food, that is wrong diligence. If we work round-the-clock for profit or fame or to run away from our suffering, that is wrong diligence also. From outside, it may appear that we are diligent, but it is not Right Diligence. The same can be true of our meditation practice. We may appear diligent in our practice, but if it takes us farther from reality or from those we love, it is wrong diligence. When we practice sitting and walking meditation in ways that cause our body and mind to suffer, our effort is not Right Diligence and is not based on Right View. Our practice should be intelligent, based on Right Understanding of the teaching. It is not because we practice hard that we can say that we are practicing Right Diligence.
정정진(正精進) 또는 올바른 노력은 팔정도를 성취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재물과 섹스 또는 음식을 구하려고 정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정진이다. 이익이나 명성을 위해 혹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24 시간을 연속해서 일한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정진이다. 바깥에서 볼 때는 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노력이 아니다. 명상 수행 역시 마찬가지다.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가 실재(實在)에서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정진이다.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 방식으로 좌선이나 걷기 명상을 한다면 그때의 노력은 올바른 노력도 아니고 정견(正見)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의 수행은 정견(正見)에 기초를 둔 지적(知的)인 것이어야 한다. 그저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서 정정진(正精進)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There was a monk in Tang Dynasty China who was practicing sitting meditation very hard, day and night. He thought he was practicing harder than anyone else, and he was very proud of this. He sat like a rock day and night, but his suffering was not transformed. One day a teacher1 asked him, "Why are you sitting so hard?" and the monk replied, "To become a Buddha!" The teacher picked up a tile and began polishing it, and the monk asked, "Teacher, what are you doing?" His master replied, "I am making a mirror." The monk asked, "How can you make a tile into a mirror?" and his teacher replied, "How can you become a Buddha by sitting?"
중국 당(唐)나라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좌선 수행하는 한 승려가 있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바위처럼 앉아있었지만, 그의 고통은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 날 스승이 그에게 물었다.(주1) “왜 그렇게 열심히 앉아 있는 게냐?” 그 승려가 대답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에 스승은 기와 한 장을 주워들더니 갈기 시작했다. 그 승려가 물었다. “스승님,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거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 승려가 물었다. “어떻게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가?”
1 Master Huariang (667-744).
주1) 회양(懷讓) 선사 (667-744)
The four practices usually associated with Right Diligence are: (1) preventing unwholesome seeds in our store consciousness that have not yet arisen from arising, (2) helping the unwholesome seeds that have already arisen to return to our store consciousness, (3) finding ways to water the wholesome seeds in our store consciousness that have not yet arisen and asking our friends to do the same, and (4) nourishing the wholesome seeds that have already arisen so that they will stay present in our mind consciousness and grow stronger. This is called the Fourfold Right Diligence.
다음 네 가지 수행법은 정정진(正精進)과 연관되어 있다. (1)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불건전한 씨앗이 나타나는 것을 막는 것[율의단(律儀斷)], (2) 이미 나타난 불건전한 씨앗을 장식(藏識; 아뢰야식)으로 돌려보내는 것[단단(斷斷)], (3)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전한 씨앗에 물을 주는 방법을 찾고 친구들에게 똑같이 하기를 권하는 것[수호단(隨護斷)], (4) 이미 나타난 건전한 씨앗에 자양분을 공급해서 의식(意識)에 머물게 하고 강하게 하는 것[수단(修斷)]. 이것을 일러 사정근(四正勤) 또는 사의단(四意斷)이라고 한다.
"Unwholesome" means not conducive to liberation or the Path. In our store consciousness there are many seeds that are not beneficial for our transformation, and if those seeds are watered, they will grow stronger. When greed, hatred, ignorance, and wrong views arise, if we embrace them with Right Mindfulness, sooner or later they will lose their strength and return to our store consciousness.
‘불건전한’이라는 말은 ‘해탈이나 도(道)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는 우리의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이롭지 못한 씨앗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에 물을 주면, 그것들은 더 강해질 것이다. 탐욕, 증오, 무지와 잘못된 견해가 일어날 때, 정념(正念)으로 그것들을 감싸 안는다면 그것들은 조만간 힘을 잃고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When wholesome seeds have not yet arisen, we can water them and help them come into our conscious mind. These seeds of happiness, love, loyalty, and reconciliation need watering every day. If we water them, we will feel joyful, and this will encourage them to stay longer. Keeping wholesome mental formations in our mind consciousness is the fourth practice of Right Diligence.
건전한 씨앗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그것에 물을 줘서 의식(意識)에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행복, 사랑, 성실과 화해의 씨앗에는 매일 물을 주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에 물을 준다면 우리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더 오래 머물 것이다. 의식(意識)에 건전한 심행(心行)을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네 번째 정정진(正精進) 수행법이다.
The Fourfold Right Diligence is nourished by joy and interest. If your practice does not bring you joy, you are not practicing correctly. The Buddha asked the monk Sona, "Is it true that before you became a monk you were a musician?" Sona replied that it was so. The Buddha asked, "What happens if the string of your instrument is too loose?"
"When you pluck it, there will be no sound," Sona replied.
"What happens when the string is too taut?"
"It will break."
"The practice of the Way is the same," the Buddha said. "Maintain your health. Be joyful. Do not force yourself to do things you cannot do."2 We need to know our physical and psychological limits. We shouldn't force ourselves to do ascetic practices or lose ourselves in sensual pleasures. Right Diligence lies in the Middle Way, between the extremes of austerity and sensual indulgence.
사정근(四正勤)은 기쁨과 흥미에 의해 늘어난다. 수행에서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니다. 부처님은 제자인 소나(Sona)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출가하기 전에 악기를 연주했다는 것이 사실이냐?” 소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이 물으셨다. “악기의 줄이 너무 느슨하면 어떻더냐?”
소나가 대답했다. “줄을 잡아당겨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줄이 너무 팽팽할 때는 어떻더냐?”
“끊어지고 맙니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수행의 방법 역시 마찬가지이다. 건강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육체적 심리적 한계를 알아야 한다. 억지로 고행을 하거나 감각적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정정진(正精進)은 중도(中道), 즉 고행과 감각적 탐닉의 양극단 사이에 있다.
2 Vinaya Mahavagga Khuddaka Nikaya 5.
The teachings of the Seven Factors of Awakening3 are also part of the practice of Right Diligence. Joy is a factor of awakening, and it is at the heart of Right Diligence. Ease, another Factor of Awakening, is also essential for Right Diligence. In fact, not only Right Diligence but also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need joy and ease. Right Diligence does not mean to force ourselves. If we have joy, ease, and interest, our effort will come naturally. When we hear the bell inviting us for walking or sitting meditation, we will have the energy to participate if we find meditation joyful and interesting. If we do not have the energy to practice sitting or walking meditation, it is because these practices do not bring us joy or transform us, or we do not yet see their benefit.
칠각지(七覺支)는 정정진(正精進) 수행의 일부이기도 하다.(주3) 기쁨[희(喜)]은 깨달음의 한 요소이자 정정진(正精進)의 핵심이다. 깨달음의 또 다른 요소인 편안함[경안(輕安)] 역시 정정진(正精進)에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 정정진(正精進) 뿐만 아니라 정념(正念)과 정정(正定)도 기쁨과 편안함을 필요로 한다. 정정진(正精進)은 억지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기쁨과 편안함과 흥미가 있으면 노력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참선이 즐겁고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되면 행선이나 좌선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 어서 하고 싶은 생각에 기운이 날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을 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수행을 통해 기쁨이나 고통의 전환을 얻지 못하거나 아직 그 이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The Seven Factors of Awakening — mindfulness, investigating phenomena, diligence, joy, ease, concentration, and letting go. See chap. 26.
주3) 칠각지(七覺支) - 염(念), 택법(擇法), 정진(精進), 희(喜), 경안(輕安), 정(定), 사(捨). 26장을 보라.
When I wanted to become a novice monk, my family thought that a monk's life would be too difficult for me. But I knew it was theonly way I could be happy, and I persisted. Once I became a novice, I felt as happy and free as a bird in the sky. When it came time for chanting sutras, I felt as though I had been invited to a concert. Sometimes on moonlit nights, when the monks were chanting the sutras standing by the crescent pond, I thought I was in paradise listening to angels. When I could not attend morning chanting because I had another task, just hearing the words of the Shurangama Sutra coming from the Buddha Hall brought me happiness. Everyone at Tu Hieu Pagoda practiced with interest, joy, and diligence. There was no forced effort, just the love and support of our teacher and brothers in the practice.
내가 사미승[예비 승려]이 되고자 했을 때, 가족들은 승려 생활이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집을 부렸다. 일단 사미승이 되자 나는 하늘의 새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독경하는 시간이 되면, 나는 마치 음악회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따금 달 밝은 밤에 여러 스님들과 함께 초승달 모양의 연못가에 서서 독경을 할 때면 나는 천국에서 천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이 있어서 아침 예불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수릉엄경(首楞嚴經)을 읽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뚜 히에우(Tu Hieu) 사원의 모든 이들은 흥미를 가지고 즐거워하면서 열심히 수행에 임했다. 수행을 할 때면 노력을 강요당하는 일은 전혀 없었고, 스승님과 사형제들의 사랑과 지원을 받을 따름이었다.
At Plum Village, children participate in sitting and walking meditation and silent meals. At first, they do it just to be with their friends who are already practicing, but after they taste the peace and joy of meditation, they continue on their own because they want to. Sometimes it takes adults four or five years of practicing the outer form before they taste the true joy of practice. Master Guishan said, "Time flies like an arrow. If we do not live deeply, we waste our life."4 Someone who can devote her life to the practice, who has a chance to be near her teacher and friends inthe practice, has a wonderful opportunity that can bring her great happiness. If we lack Right Diligence, it is because we have not found a way to practice that is true for us, or have not felt deeply the need to practice. A mindful life can be wonderful.
플럼 빌리지에서는 어린이들도 좌선과 걷기 명상 그리고 묵언을 지키는 공양에 참가한다. 처음에는 아이들은 이미 수행을 하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자 그렇게 하지만, 명상이 가지고 있는 평화와 기쁨의 맛을 보고 난 뒤에는 하고 싶어서 스스로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 어른들은 형식적인 수행을 사 오 년쯤 하고 나서야 비로소 수행의 참 기쁨을 맛보는 경우가 많다. 위산(潙山)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세월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철저하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주4) 평생을 수행에 몰두할 수 있는 이, 다시 말해 스승과 도반들과 함께 어울려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이는 커다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멋진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정진(正精進)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자신에게 알맞은 수행법을 찾지 못했거나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차리면서 사는 삶은 멋진 것이다.
4 From "Encouraging Words," in Thich Nhat Hanh, Stepping into Freedom: An Introduction to Buddhist Monastic Training (Berkeley: Parallax Press, 1997), pp. 89-97. Guishan (771-853) was one of the great Tang Dynasty meditation masters.
주4) Thich Nhat Hanh, Stepping into Freedom: An Introduction to Buddhist Monastic Training (Berkeley: Parallax Press, 1997)에 들어있는 "Encouraging Words"에 나옴. 위산(771-853)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사이다.
Waking up this morning, I smile.
Twenty-four brand new hours are before me.
I vow to live fully in each moment
and to look at all beings with eyes of compassion!5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짓는다.
새로운 스물 네 시간이 내 앞에 있구나.
매 순간을 철저하게 살기로
모든 존재를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서원하네.
5 Thich Nhat Hanh, Present Moment Wonderful Moment, p. 3.
Reciting this gatha can give us energy to live the day well. Twenty-four hours are a treasure-chest of jewels. If we waste these hours, we waste our life. The practice is to smile as soon as we wake up, recognizing this day as an opportunity for practicing. It is up to us not to waste it. When we look atall beings with eyes of love and compassion, we feel wonderful. With the energy of mindfulness, washing the dishes, sweeping the floor, or practicing sitting or walking meditation are all the more precious.
이 게송을 읊으면 그 날을 잘 지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스물 네 시간은 보물 창고와도 같다. 그 시간을 낭비한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을 수행의 기회로 여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미소를 짓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오늘을 낭비하고 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모든 존재를 사랑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주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알아차림의 힘을 통하면, 설거지와 청소 그리고 좌선이나 걷기 명상이 모두 더욱 더 값진 일이 된다.
Suffering can propel us to practice. When we are anxious or sad and see that these practices bring us relief, we will want to continue. It takes energy to look into suffering and to see what has brought about that suffering. But this insight will lead us to see how to end our suffering, and the path needed to do so. When we embrace our suffering, we see its origins, and we see that it can end because there is a path. Our suffering is at the center. When we look into the compost, we see the flowers. When we look into the sea of fire, we see a lotus. The path that does not run away from but embraces our suffering is the path that will lead us to liberation.
고통 때문에 수행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걱정스럽거나 슬플 때 수행이 안도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수행을 계속할 마음이 생긴다. 고통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무엇 때문에 고통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힘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력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끝내는 법과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길을 알게 될 것이다. 고통을 감싸 안을 때 고통의 기원을 알게 되고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통은 한 가운데 있다. 거름을 들여다보면, 꽃이 보인다. 불바다를 들여다보면 연꽃이 보인다. 고통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 안는 길이 바로 해탈로 통하는 길이다.
It is not always necessary for us to deal directly with our suffering. Sometimes we can just allow it to lie dormant in our store consciousness, and we use the opportunity to touch the refreshing and healing elements within us and around us with our mindfulness. They will take care of our pain, like antibodies taking care of the foreign bodies that have entered our bloodstream. When unwholesome seeds have arisen, we have to take care of them. When unwholesome seeds are dormant, our job is to help them sleep peacefully and be transformed at the base.
그렇다고 반드시 늘 고통을 직접적으로 처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이 장식(藏識; 아뢰야식) 속에서 잠자코 있도록 그저 내버려두고는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 안과 주변에 있는 활력을 주고 치유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을 접하는 기회를 이용해 볼 수도 있다. 그 요소들은 마치 항체가 혈류(血流) 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처리하듯이 고통을 처리해 줄 것이다. 불건전한 씨앗들이 나타나면 그것들을 처리해야만 한다. 불건전한 씨앗들이 잠자코 있는 상태라면 그것들이 평화롭게 잘 수 있도록 돕거나 근본적으로 변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With Right View, we see the way we need to go, and our seeing gives us faith and energy. If we feel better after practicing walking meditation for an hour, we will have the determination to continue the practice. When we see how walking meditation brings peace to others, we will have even more faith in practice. With patience, we can discover the joys of life that are all around us, and we will have more energy, interest, and diligence.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으면 가야할 길을 알게 되고 그 앎을 통해서 믿음과 힘을 얻게 된다. 한 시간 동안 걷기 명상을 하고나서 더 좋아진 느낌이 들면 수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게 될 것이다. 걷기 명상이 어떤 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지를 알게 되면, 수행에 더 많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면 우리 주위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삶의 여러 가지 기쁨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힘과 흥미를 얻게 되고 더 많이 노력하게 될 것이다.
The practice of mindful living should be joyful and pleasant. If you breathe in and out and feel joy and peace, that is Right Diligence. If you suppress yourself, if you suffer during your practice, it probably is not Right Diligence. Examine your practice. See what brings you joy and happiness of a sustained kind. Try to spend time with a Sangha, brothers and sisters who are creating a field of mindful energy that can make your practice easy. Work together with a teacher and with a friend to transform your suffering into compassion, peace, and understanding, and do it with joy and ease. That is Right Diligence.
알아차리며 사는 삶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한다. 숨을 쉬면서 기쁨과 평화를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정정진(正精進)이다. 스스로를 억압한다면, 즉 수행 중에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정진(正精進)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수행을 검토해 보자. 무엇이 지속적인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 편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알아차림의 힘이 가득한 마당을 만들어내고 있는 형제자매들, 즉 승가와 함께 지내보도록 하라. 스승과 도반과 함께 자신의 고통을 자비, 평화와 이해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되 그것은 즐겁고 편안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정진(正精進)이다.
CHAPTER FIFTEEN Right Concentration
15장 정정(正定)
The practice of Right Concentration (samyak samadhi) is to cultivate a mind that is one-pointed. The Chinese character for concentration means, literally, "maintaining evenness," neither too high nor too low, neither too excited nor too dull. Another Chinese term sometimes used for concentration means "the abode of true mind."
정정(正定) 또는 올바른 집중 혹은 올바른 선정(禪定)의 수행은 한 가지 대상을 향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집중에 해당하는 한자(漢字) 정(定)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균형을 유지함’으로 너무 높거나 너무 낮지도 않고 너무 흥분하거나 너무 둔감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집중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한자 용어 정심행처(正心行處)는 ‘참 마음의 거처(居處)’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There are two kinds of concentration, active and selective. In active concentration, the mind dwells on whatever is happening in the present moment, even as it changes. This poem by a Buddhist monk1 describes active concentration:
집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활동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선택적인 것이다. 활동적인 집중에 임할 때 마음은 변화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숙고(熟考)의 대상으로 한다. 어느 승려의 시는 활동적인 집중의 특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주1)
1 Poem by Vietnamese Dhyana Master Huong Hai (Ocean of Fragrance),
주1) 베트남의 향해(香海) 선사
The wind whistles in the bamboo
and the bamboo dances.
When the wind stops,
the bamboo grows still.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부니
대나무가 춤을 추네.
바람이 멈추니
대나무는 잠자코 있네.
The wind comes and the bamboo welcomes it. The wind goes, and the bamboo lets it go. The poem continues:
바람이 불면 대나무는 기꺼이 맞아들인다. 바람이 지나가도 대나무는 붙잡지 않는다. 시는 이렇게 계속된다.
A silver bird
flies over the autumn lake.
When it has passed,
the lake's surface does not try
to hold on to the image of the bird.
은백색의 새 한 마리
가을 호수 위로 날아가네.
새가 지나가도
새 그림자를 붙들어 두고자
호수의 표면은 애쓰지 않네.
As the bird flies over the lake, its reflection is lucid. After it is gone,the lake reflects the clouds and the sky just as clearly. When we practice active concentration, we welcome whatever comes along. We don't think about or long for anything else. We just dwell in the present moment with all our being. Whatever comes, comes. When the object of our concentration has passed, our mind remains clear, like a calm lake.
새가 호수 위를 날아가면 그 그림자가 똑똑히 비친다. 새가 지나가고 나면 호수에는 구름과 하늘이 똑똑히 비친다. 활동적인 집중을 수행할 때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밖의 것을 생각하거나 동경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몸과 마음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타나게 내버려둔다. 집중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여전히 맑다.
When we practice "selective concentration," we choose one object and hold onto it. During sitting and walking meditation, whether alone or with others, we practice. We know that the sky and the birds are there, but our attention is focused on our object. If the object of our concentration is a math problem, we don't watch TV or talk on the phone. We abandon everything else and focus on the object. When we are driving, the lives of the passengers in our car depend on our concentration.
‘선택적인 집중’을 수행하려면 하나의 대상을 골라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 혼자 하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든지 간에 좌선이나 걷기 명상을 할 때 그 수행을 해볼 수 있다. 이때 하늘과 새가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해도 이미 고른 하나의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집중의 대상이 수학 문제라면 TV를 보거나 전화 통화를 해서는 안 된다. 나머지 모두 제쳐두고 그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운전을 할 때 그 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목숨은 운전자의 집중에 달려있다.
We don't use concentration to run away from our suffering. We concentrate to make ourselves deeply present. When we walk, stand, or sit in concentration, people can see our stability and stillness. Living each moment deeply, sustained concentration comes naturally, and that, in turn, gives rise to insight.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집중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집중을 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재에 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집중하면서 앉고 서고 걷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에 안정되고 침착하게 보일 것이다. 매 순간을 철저하게 살아가면 집중은 자연히 지속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통찰력을 얻게 된다.
Right Concentration leads to happiness, and it also leads to Right Action. The higher our degree of concentration, the greater the quality of our life. Vietnamese girls are often told by their mothers that if they concentrate, they will be more beautiful. This is the kind of beauty that comes from dwelling deeply in the present moment. When a young lady moves inattentively, she does not look as fresh or at ease. Her mother may not use these words, but she is encouraging her daughter to practice Right Concentration. It is a pity she does not encourage her son to do the same. Everyone needs concentration.
정정(正定)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자 정업(正業)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집중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삶의 질이 높아진다. 베트남의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집중을 하면 더 예뻐질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아름다움은 철저하게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젊은 아가씨가 경망스럽게 행동하면 참신해 보이지도 편안하게 보이지도 않는 법이다. 베트남의 어머니들은 정정(正定)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사실은 딸들에게 정정(正定)을 수행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베트남의 어머니들이 아들들에게는 똑같은 권유를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모든 이가 집중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There are nine levels of meditative concentration. The first four are the Four Dhyanas. These are concentrations on the form realm. The next five levels belong to the formless realm. When practicing the first dhyana, you still think. At the other eight levels, thinking gives way to other energies. Formless concentrations are also practiced in other traditions, but when they are practiced outside of Buddhism, it is generally to escape from suffering rather than to realize the liberation that comes with insight into our suffering. When you use concentration to run away from yourself or your situation, it is wrong concentration. Sometimes we need to escape our problems for relief, but at some time we have to return to face them. Worldly concentration seeks to escape. Supra-mundane concentration aims at complete liberation.
선정(禪定)에는 아홉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네 가지를 사선(四禪)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색계(色界)에 대한 집중이다. 나머지 다섯 가지 단계는 무색계(無色界)에 속한다. 초선(初禪)을 수행할 때면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다. 나머지 여덟 가지 단계에서 생각은 다른 힘에 자리를 넘겨준다. 다른 전통에서도 무색정(無色定)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외도(外道)들의 그것은 대개 고통을 통찰함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을 성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고통을 회피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도망치고자 집중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집중이다. 한숨 돌리기 위해 고통을 회피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 고통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세속적인 집중은 회피를 추구한다. 이에 비해 초세속적인 집중은 완전한 해탈을 목표로 삼는다.
To practice samadhi is to live deeply each moment that is given us to live. Samadhi means concentration. In order to be concentrated, we should be mindful, fully present and aware of what is going on. Mindfulness brings about concentration. When you are deeply concentrated, you are absorbed in the moment. You become the moment. That is why samadhi is sometimes translated as "absorption."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lift us above the realms of sensual pleasures and craving, and we find ourselves lighter and happier. Our world is no longer gross and heavy, the realm of desires (karma dhatu). It is the realm of fine materiality, the realm of form (rupa dhatu).
삼매(三昧)를 수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철저하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삼매는 집중을 뜻한다. 집중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 다시 말해서 철저하게 현재에 임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만 한다. 알아차림은 집중을 낳는다. 깊은 집중에 이르게 되면 순간적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 때 자기가 곧 순간이 된다. 삼매를 종종 ‘흡수(absorption)’라고 옮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을 통해서 감각적 쾌락과 욕구의 영역 위로 올라가게 되면 마음이 더욱 가뿐해지고 행복하게 된다. 그때 만나게 되는 세계는 더 이상 저속하고 괴로운 곳, 즉 욕계(欲界)가 아니다. 그곳은 미세한 물질의 영역, 즉 색계(色界)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