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방문객님 질문드립니다.
이번에도 글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
질문의 핵심은 몸의 가상 채널을 통해 근접삼매를 실현시키는 기법(쿤달리니, 툼모 등)이 비교적 수월하게 수의적으로 근접삼매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가수행자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각 기법들이 교학적, 종교적 의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체험한 바를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 툼모: 단전에 열감을 만들고 척추 앞의 가상의 중맥을 통해 열기를 상승시키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육체적 쾌감과 지복감이 드러났으며, 중맥을 따라 다양한 근접삼매 상태를 비교적 쉽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 쿤달리니: 마찬가지로 단전의 열을 만들고 척추채널을 통해 열과 전자기적인 에너지를 상승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툼모와 유사하지만, 좀 더 초월적인 체험이 나타났고, 컨트롤이 어렵고 개인차가 컸습니다.
- 기타 기법: 태양에너지를 특정 채널로 유입시키는 대원만법 계열이나, 성적 결합을 통한 성에너지를 유입시키는 방식도 경험했지만, 이는 다루기 어렵고 재가수행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질문에서 배제하겠습니다.
제가 체험한 바로는 두 기법(툼모와 쿤달리니)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 툼모는 안전하고 비교적 쉽게 근접삼매를 컨트롤할 수 있었으나, 일부 수행자에게는 단순한 열감 상승만 나타나는듯 보입니다. 이는 생기차제(기초 수행)를 통해 내면의 암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신경 채널이 반응하지 않은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쿤달리니는 더 강렬하고 초월적인 체험이 가능했지만, 근접삼매를 수의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이 툼모보다 어려웠고, 주변 수행자들의 경험을 보니 개인별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은, 이러한 근접삼매 채널을 형성하는 기법이 일반적인 집중 명상을 통한 근접삼매 실현보다 재가수행자에게 더 유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매는 큰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근접삼매는 산 중턱까지 가는 것이라면, 툼모나 쿤달리니 같은 기법은 중턱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케이블카"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일반적인 집중 명상을 통해 근접삼매를 실현하는 것은 마치 산 중턱까지 몇 번 올라봤더라도 여전히 힘들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반면, 툼모나 쿤달리니 채널을 통해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수의적으로 다양한 근접삼매와 몸을 취한 즐거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상 채널을 꾸준히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재가수행자에게 권장할만한 수행법인지에 대해 방문객님의 견해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부터...저도...ㅠㅠ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생리적 매커니즘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습관이 생겨서 수행법의 기법적인 측면에서 권장할 만한지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각 스쿨들의 비의로 전승되거나 신비주의적인 접근으로만 공개되던 것들이..
최근에는 아주 구체적인 기법으로 대중에 공개되던데 행하는 사람은 많이 안보이네요.)
첫댓글 앉아서 뭐라도 해볼려면, 편안한 육체, 고르고 안정된 호흡 등 <기본 조건>이 우호적인 것이 유리하다는 측면에서..
쿤달리니, 졸화 등 성취의 과보가 몸과 마음의 경안, 지복(몸을 취한 즐거움 등), 근접삼매를 향한 집중상태 등이라면, 나름의 유익함이 있을듯 합니다.
부작용은..굳이 말하자면..그러한 과보가 조건지어진 것음을 망각하는 것? ㅡ..ㅡ;; 적을 게 없어서 아무말이나 해봐씀미다 ㅎ
동의합니다.
선결 조건을 모두 나열하려면 끝이 없겠지만, 무엇보다 기법으로 실현되는 상태나 삼매, 인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습관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체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인데요.
그래서인지 체험에 따른 확증도 적었습니다. 웬만한 건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대원만법 계열의 태양 수행을 할 때는 눈을 뜬 채로 모든 것이 빛의 만다라처럼 보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법 자체가 그것을 의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것이 '세상이 만다라로 구성되어 있다'거나 '인드라망을 보았다'는 확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졸화나 쿤달리니 경험도 마찬가지였구요.
@아사하2 그런데 보면 별 체험이 아닌데도 깊은 의미를 두고, 여러 해설과 함께 소중한 무언가처럼 여기는 경우를 무쟈게 많이 봤습니다.
옛날에 방문객님이 담백하고 솔직하게 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이런 행법을 행할 때는 일상에서 드러나는 의식에 비해서는 체험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자세가 권장되는 것 같습니다.
@아사하2 그외에 기법이 잘 붙도록 하는 측면에서의 선결 조건을 좀 생각해보면...
저의 경우는
1.제게 드러난 것들에 특별한 가중치를 부여하지 않는 내적인 정직성을 가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이게 기법이 드러낸 바를 해석하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지만 드러내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집착하지 않아야 다음 단계로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거든요.
2. 일상에서 거친 사념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개인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몇 년 걸린 것 같습니다.
3. 호흡을 통한 몸을 취한 즐거움에 이를 정도의 집중력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조건이 형성되면 나머지는 기법에 따라하면 대략적인 것들은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기법을 전승받으려면 인연이 있어야 하겠지만, 요즘은 검증된 기법들이 많이 공개되어 있어서, 특별히 큰 뜻을 품은 수행자가 아닌 재가 수행자라면 굳이 밀교행법을 배우기 위해 떠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개된 기법만으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툼모등은 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글을 읽어보니, 어떤 열기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할 것 같습니다.
쿤달리니 쪽 특히 그쪽 요가계열에서는 쿤달리니를 도구라고 칭하면 난리가 나기는 하지만, 그거는 그쪽 유파로 들어갈 때나 그런 것이구요. 본글은 좀 더 경제적으로, 쉽게 집중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는가로 보이니까요.
본글에서 언급된 기법들 세가지 모두, 불교에서는 밀교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중은 자신에게 잘 붙는 것을 대상으로 해야 보다 쉬운데요. 생각해 보면요. 빛과 열기는 그나마 범용적인 거 같습니다. "잘 붙는다"는게 각자의 성향에 영향을 받는 건데요. 우리들이 흔히 가지는 고정관념등에 비춰볼 때, 빛과 열기는 끌리는 사람이 좀 많을 거 같습니다.
물론 쿤달리니는 유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주 고통스러울 정도로 뜨겁게 느껴지는 기법도 있는데요. 그 고통이라는게 마음을 확 잡아끄는 측면이 있거든요. 그 고통만큼, 상대적으로 집중하기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어차피 고정관념등에 따른 선호야, "어떻게 가르치느냐, 세뇌시키느냐" 에 따라 조정이 가능한 영역이니까요.
또 쿤달리니등을 포함해 강한 열기일 수록, 미세한 조정은 어렵습니다.
격류는 조정이 어렵지만, 잔잔한 흐름은 조정이 상대적으로 쉽잖아요. 즉 열기든 아니든, 강한 자극일 수록 미세조정은 어렵습니다. 강한 자극에는 마음이 강렬하게 반응하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강렬하게 반응했기에 강한 자극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어떻든 그렇거든요.
빠른 시간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면 강한 자극, 미세한 조정을 하고 싶다 그러면 좀 약한 자극인 것이 좋습니다.
강한 자극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조건지어져 있거나 충분한 힘을 모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강한 자극을 형성하는 것이라면, 그 처음에 그 형성에 좀 더 시간이 걸립니다. 약한 자극은 그 형성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적게 걸리죠.
그리고 강약은 상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급류에 익숙해지면 급류타기도 할 수 있듯, 강한 자극도 익숙해지면 점차 미세조정이 가능해집니다.
좀 미안한 결론이기는 한데요. 정답이라는 것은 없구요. 그냥 자신에게 적합한 것이 있는 거겠죠.
재가수행자...저도 재가수행자인데요. 아무래도 처음에 좀 쉬운 거, 그러면서 달달한 거...그런 쪽이 더 범용적일 거 같네요. 너무 밋밋하면 집중을 형성해 나가기 어려우니까요, 마음을 좀 끌어당길 수 있는 자극으로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반복적으로 유사한 수준의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측면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걸까요?
저 같은 경우, 호흡을 통해 근접 삼매를 실현하는 것은 다시 시도해도 쉽지 않습니다.
반면, 이미 형성된 열감에 집중하고 상승과 하강을 통해 여러 상태를 실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좀 여담이기는 한데, 이제 딱 좋은 계절이 오고 있어서요. 본글이 언급하기도 하구요. 태양을 심상화시키는 작업의 경우, 가을 조금 서늘할 때 정말 무난합니다.
심상화시킨다는게, 마음에 태양을 만드는 건데요. 그럴려면 태양을 잘 알아야 하니까, 자외선 걱정을 안한다면 태양을 경험하면서 태양의 요소를 하나 하나 배워야 하거든요.
특정 유파를 알려는게 아니고 그냥 어느 수준의 집중력을 배양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신에게 알려지는 태양의 매력을 하나 하나 챙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좋은 점을 생각하기도 하고, 경험적으로 태양의 좋은 요소를 체험해서, 마음에 태양을 구체화시켜 만드는 겁니다.
아사하님에게 더 재미 있어 그런 거 아닐까요?
솔직히 제 입장에서도요. 열감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거에 비해, 호흡은 밋밋하고 정적이라서 재미가 없습니다.
같은 값이면, 재미 있는 거를 두고 재미 없는 거를 하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근접삼매라는 점은 같은데, 굳이 재미 없는 거를 억지로? 이러면 당연히 잘 안되는 거죠. 수행은 의도인데, 의욕이 없는 거니까요. 물론 특별한 목적등이 있으면, 마구 불태우겠지만요.
자신을 특정 기법이 인도하는 세계에 편입시킬 의향이 없이, 그냥 집중력을 기르고 그러한 마음 상태들을 알려고 하는 거라면요. 굳이 끌리지 않는 다른 방식을 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특정 기법이 인도하는 세계에 편입시킬 의향이 없다"는 점이 전제인데요. 그런 의향이 있으면 해당 기법의 전문가에게 아주 자세히 배워서 의미에 젖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거는 우선 자신이 행하는 바를 잘 아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요. 자신이 행하는 것과 관련해 자신을 잘 살펴서요. 열감에 끌리는 거, 자극이 있는 거를 좋아하나? 열감의 형성에 요구된 집중 강도, 그리고 열감의 조작은 어떤 역할이고 집중의 강도에 어떤 역할인가?
열감 조작에서 파생되는 느낌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더 강한 집중으로 열감을 형성하면 어떻게 전개되는가? 등등... 최대한 선명하게 행해서, 최대한 세밀하게 기억하고, 최대한 이치를 적용시켜, 스스로 행하고 행한 바를 알려고 하는 거요.
불교에서의 집중력은, 집중력 자체가 유용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앎이 발생하고 그 앎이 일상등 영역으로 확장 적용되면서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요. 그게 수행입니다. 불교 수행요. 보통 요가 수행은 그런 거 필요 없잖아요.
뭐...여러가지 파생 요소, 행복감 등등... 그런 거는 보너스?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최대한 선명하게 행해서, 최대한 세밀하게 기억하고, 최대한 이치를 적용시켜, 스스로 행하고 행한 바를 알려고 하는 거요."
감사합니다.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저는 20대~30대 초반까지는 "대단한 도인이 되겠어!" 라는 욕망에 불타올라 나름대로 이것저것 열씨미 해씀미다. 전형적인 (못배운)체험파라서..잡탕을 굴렀지만 어찌됐든..소박한 살림살이는 장만했죠.
그리고.. 그 뒤로는 지적 호기심을 채우며 이책 저책 읽으면서 머리만 키우고 이씀미다(이마저도 이제 끝물인듯..)
"이제 대강 살만하다(마음이든 현실이든 별 문제 없고, 간혹 난관이 다가오면 넘어가거나 뚜드려맞고 존버하거나 하면 되지. 시간이 다 해결해 줌)"는 지점에 도달한 뒤로.. 선정이든, 위대한 깨달음이든.. 뭔가를 향할 동력이 사라져씀다..
뭔가 심오한..그런 게 아니라..
ㅡ지금도 좋은데(그닥 부족함이 없는데)
ㅡ노오력~을 갈아넣어서 멋진 과보를 성취하라고?
ㅡ그냥 주면 땡큐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마음은
없는뎅.. 귀찮아..힘들잖아..
요런 느낌입니다.
축생 카르마인가.. 싶기도 합니다. ㅠ ㅠ
오온관찰이든 선정연습이든 밀교 테크닉이든..꾸준히 정신적 능력 등을 배양하는 분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제력과 집중력을 계발하고, 다양한 선법을 익히고 닦는 것은 여러모로 스스로에 유익한 행위니깐요.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대도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적당히 내적인 갈애가 해소되어서 추동력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별 다른 취미도 없겠다.
이미 시작한 거 그나마 과정이 재미있는 걸 찾아서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어떤 과보를 목표로 정진한다는 건 상당한 내적 추동력이 있어야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어마무시한 서원을 세우는 것일지도..
내적 갈애의 해소가 그간의 수행방편에 의한 것이라면
아사하2님 과 황벽님 모두 수행으로는 대성공이라 생각되는데...
그게 아니었고
갈애의 해소가 다른 요인에 의했던 것 같아요
수행의 과보로 갈애가 해소되었다면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조금씩 하고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을텐데요.
그나저나
붓다께서는 선정에 들어계시는 상태를 굉장히 즐기셨던 것으로 알아요.
그 상태가 최상의 행복이라면
특별히 거대한 서원을 세우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추동력이 있었을 텐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눈꽃님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 무엇에 의해 갈애가 소멸되었는가를 선명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여기저기 쏘다니며 열정이 많이 소모된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그런 부분도 있고, 삶이 순해야 하는데 자꾸 지치는 것도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게 바로 '갈애의 해소'라는 이름의 실체인 것 같네요.
굳이 수행에서 얻은 바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앉아서 하는 수행보다는 일상에서 탐구와 묵상을 통해 얻은 앎이 삶에 적용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정 근처에도 간 적이 없어서.. 선정에 정진하는 추동력이 뭔지 알 길이 없슴다 ㅠ ㅠ
수행에 매진해오신 황벽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즉금의 불교계 혹은 명상계에서 초선이라도 얻어보신 분이 얼마나 희귀할지 짐작이 갑니다.
저도 집중명상이 한창일 때..
일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지극한 고요함, 지극한 그윽함'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해보긴 했는데 현실의 상황상 더 밀어붙이지를 못해서 거기서 멈췄습니다.
선정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 '지극함'은 말로 표현키 어려운 특별한 느낌이었지요.
황벽님께서도 선정까지는 얻지 못하셨더라도 다양한 심적 경험들은 있으셨겠죠.
관심세계가 그 세계이고 행위가 늘 그 세계를 염원하셨을텐데 왜 아니겠어요
너무 겸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