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출신의 10대 무용수에게 마음을 빼앗겨
처는 히스테리 증상, 장남 김정남은 친구도 없어

고영희로 여겨지는 무용수의 사진 모습
권력을 원하는 대로 수중에 넣으면서 김정일은 가정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다. 본처 김영숙(金英淑)과 결혼식을 올린 1973년 말경부터 원래 영화배우 출신의 내처(內妻) 성혜림(成恵琳)은 정신불안증과 우울증 상태에 빠져 본처에게 딸이 태어난 후인 1975년 무려부터 증상이 악화된다. 1976년 5월부터는 장기 치료를 위해서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성혜림이 낳은 장남 김정남은 당시 5세였다.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성혜림의 모친 김원주(金源珠)와 언니 성혜랑(成恵琅) 일가가 대신해서 김정남을 돌보아주었지만, 김정일은 장남의 존재를 비밀로 숨기고 그 행동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모친이없는 집에 틀어박혀 있던 김정남을 불쌍하게 생각한 김원주는 김정일의 허가 아래에서 평양 교외로 데려왔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김정남은 바깥 세계를 이상하게 두려워하고 같은 세대의 아이들과 함께 사귀기 위해 건네는 말초자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성혜랑의 수기(手記)에 의하면 "모친은 김정남을 데리고 교외로 가서 소와 산양(山羊)을 보여주고 뛰어노는 아이들 가까이에 가자고 재촉해도 멀리서 아이들을, 소와 산양을 보는 듯이 관망할 뿐으로 (김정남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고지도자는 첫 손녀딸 '김설송'을 애지중지해>
본처 김영숙은 1974년 12월에 장녀 김설송(金雪松)을 낳는다. 김정남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던 김일성이 김설송을 '첫 손녀'이라는 것만으로도 각별한 애정을 쏟아부었던 것이 김정일을 곤혹스럽게 했다. 김일성이 편애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성혜림이 앓고 있는 병의 증세는 악화되어갔다.
김일성은 자신의 부친 김형직(金亨稷)이 지은 시로부터 '설송'이라는 글자를 떼어와서 손녀딸의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귀여워했다.
"남산의 저 푸른 소나무가 눈에 뒤덮여서 ....."고 시작되는 시는 북한에서는 부친이 아들에게 눈 속의 소나무와 같이 강하게 자라는 것을 바란다고 하는 '혁명 전통'을 부탁한 시가로서 알려져 있다. 최고지도자가 그 '전통'을 첫 손녀딸에게 부탁했던 것으로 인해 성혜림의 마음이 불안했던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김정일도 딸을 귀여워 하기는 했지만 장남 김정남과도 식사나 식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권력과 술, 여자에게 빠지고, 바깥에서 밤을 세우는 일도 많고, 화난 표정의 모습도 많았다고 한다.
"두꺼운 유리창이 진동할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1970년대 말부터 현저하게 악하된 그의 이러한 간적(癇癪)은 바깥에서 행사되는 권력 역학의 반영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속되게 말하자면 그 무렵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 것 같다"라고 성혜랑은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 '새로운 여자'가 후계자 김정은을 나중에 낳게 되는 재일교포 출신의 무용수 고영희(高英姫)였다.
김정일은 성혜림을 모스크바에 보내기 약간 전부터 고영희와도 반(半)동거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6년 무렵에는 3명의 처와 3개의 살림을 동시에 지녔던 것이 된다.
<'희훈', '영자', '영희': 세 가지의 이름>
김정일이 고영희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은 1971년 무렵으로 보인다. 북한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가극단 '만수대 예술단'이 같은 해 제작한 가무극 '조국의 진달래'의 주연에 펴양ㅇ음악무용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당시 아직 10대였던 고영희가 발탁되었다.
재일교포 출신자가 만수대 예술단에 입단할 수 있었고 또한 주역을 맡았던 것은 이례적인 일로서 예술 부문을 총괄하는 김정일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정일이 만수대에 숙박하면서 연기를 지도할 정도로 가극에 정열을 불태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고영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은 확실한 듯 하다. 김정일과 예술에 관해서 저작한 북한의 서적에 의하면 김정일은 "무용수는 인물이 섹시하고 키고 크고 머리가 길고 허리가 가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논했다고 한다.
이 조건에 고영희는 딱 맞아 떨어졌다. 북한이 일본을 향해서 발간하는 <조선 화보>의 1973년 4월호에 게재된 고영희로 보이는 인물의 치마 저고리 모습에서 주목되는 여성을 보면 코가 곧고 머리가 길고 가는 체형이 눈길을 끈다.
고영희는 1952년 6월 26일 일본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 부근에서 출생했다. 북한 정보를 전하는 <데일리 NK 재팬> 편집장으로 고영희의 경력을 추적했던 고영기(高英起)에 의하면 출생했을 때의 이름은 '희훈'(姫勲)이었고, 뒤에 '영자'(英子)로 바꾸었다가 1973년의 일본 공연을 전후로 해서 '영희'(英姫)로 개명했다.
그의 부친 고경택(高京澤)은 1929년에 한국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서 군복 등을 제봉하는 오사카시의 공장에서 일했다. 일가가 북한에 건너갔던 것은 1962년으로 고영희가 10세의 때이다. 일가는 북동 지역의 함경북도의 공업지역인 명간군(明澗郡)에서 거주하기 시작한다.
평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살고 있던 고영희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하고 또한 만수대 예술단에 채용된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은 행운이었다. 예술단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예술단 출신자로 탈북한 신영희(申英姫)의 수기 <나는 김정일의 '무용수'였다>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예술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을 때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믿을 수 없었다. 무용가의 최고 꿈인 만수대에 가게 되었다! 날개가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지금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태어나서 자란 일본의 무대에서 '센터'에 서다>
만수대 예술단은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의 과장 직책에 있었던 1969년 '평양 가무단'을 해체 및 강화하여 발족시켰다. 김정일이 영화와 대형 가극을 제작하며 원로들의 환심을 얻고자 필사적이었던 시기와 겹친다.
'1호 행사'라고 불리는 김일성과 관련된 공연을 담당하는 전문 예술단체를 조직한다고 칭하며, 김정일이 기존의 각 단체로부터 최고의 무용가 및 연주자, 가수, 작가 총 100명 정도를 모았다.
거의 대부분이 '인민 배우'나 '공훈 배우'의 칭호가 수여된 북한이 자랑하는 예술가들이었다. 거기에 신인인 고영희가 가입하여 주역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고영희는 1973년 7월, 예술단의 일본 공연을 위해 태어나서 자랐던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일본으로 가는 단원들을 앞에 두고 김정일은 이렇게 훈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들 적지(일본)에 가기 때문에 경계심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 시대를 살았던 예술인 답게 생활은 간소하게 하고 몸 단장이나 화장도 소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1세가 되었을 뿐이었던 '비밀 병기' 고영희를 해외에 보내는 미묘함 심경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9월까지 계속된 일본 공연에서 고영희는 '조국의 진달래'와 '부채춤', '목동과 처녀'에 주연하고 큰 역할을 도맡았다. '류일숙(柳日淑)'이라는 무대에서의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피날레에서 기념 촬영할 때에는 무대의 센터(중앙)에 섰다.
버스로 이동 중에는 솔선해서 김정일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목격되어, 시종 주목을 받았는데, 미디어의 인터뷰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집필자: 일본 龍谷大教授 李相哲
*일본 <산케이신문>(2015.9.22.)의 기사 전문을 옮긴 것이다.
[관련 참고사항]
일반적으로 '고영희'로 알려져 있는 김정은 친모의 본명이 '고용희'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진 바 있다. 고용희의 이름이 수시로 바뀌고 모호해져 있는 이유는 이른바 항일투쟁의 백두혈통을 자랑해온 북한 김씨 왕조의 관점에서 김정은의 친모가 정작 대한민국 제주도 출신의 아버지를 두고 있는 일본 오사카 출생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일환으로 여겨진다.
또한 성혜랑(제162광수)은 현재 유럽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기사에 분석되고 있는 바와 같이 김정남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현재 프랑스 거주)을 돌보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5.18 여적재판 시에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성혜랑을 포착하여 범죄인 인도를 해당 유럽 정부 혹은 유럽연합사법재판소에 청구하여 심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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