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6일 용인 에버랜드 앞에 있는 오래된 빌라 한채를
감정가 대비 50% 가격에 낙찰 받았다.
말소기준권리인 근저당보다 전입이 이틀 빠르고 확정은 조금 늦는지라
임차인은 배당요구를 하였지만 5천만원중 1천만원밖에 배당을 못받을 처지다.
낙찰자는 4천만원을 고스란히 인수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밑줄 친 점유기간을 주목해 보라.
절묘하게 근저당 바로 다음날부터 점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항력의 요건은 세가지다.
1. 계약 2. 전입 3. 인도
위 세가지 요건을 다 갖춘 익일에 임차인의 대항력이 발생한다.
대부분의 경매인들은 말소기준권리보다 전입이 빠르면 무조건 대항력을 갖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인도' 부분을 매우 중시한다.
전입이 늦고 빠른 것이야 누구든지 알 수 있지만
'인도'가 늦고 빠른 것은 여간해서는 알아내기 힘든, 일종의 틈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정보지에 게시된 것처럼 문서상의 점유개시일이 말소기준권리보다 늦었다고 해서
무조건 대항력이 없다고 판단하면 절대 안된다. (조심 또 조심할 부분)
매각물건명세서에 기재된 점유기간은 임차인이 제출한 임대차계약서를 보고
경매계장이 그대로 옮겨쓴 것일 뿐이다.
계약서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일찍 점유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정확한 현장조사를 통해 확실한 점유개시일을 파악해야만 하고
향후 소송을 대비해 증거자료를 충분히 확보해야만 한다.
사실 위 물건은 애초에 위장임차인으로 파악하고 현장조사를 했던 사건이다.
입찰시점 까지는 위장임차인인지 진짜 임차인인지까지는 가려내지 못했지만
주택의 인도가 근저당 익일에 이뤄졌음을 여러 경로를 통해 사전에 확인할 수 있었기에
입찰을 했고 단독으로 낙찰을 받았다.
(원장님께도 검토를 의뢰하고 진행한 물건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낙찰 받고 다음날 낮에 찾아갔더니
반갑게 문을 열어주는 맑은 노모가 나타난다. 임차인의 모친이다.
첫마디가 5천만원이 전재산이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땅의 전형적인 서민 가족이다.
자식들인 40대 초반의 젊은 부부는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다.
전화기 너머로 전해져 오는 임차인의 목소리에서는
착한 아빠, 착한 남편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거실에는 10살짜리 예쁜 딸아이 사진도 걸려 있다.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가족은
전세보증금 5천만원은 무조건 보장받는 것으로 철썩같이 믿고 있다.
법무사에서도 그렇게 알려줬고
심지어는 경매계에서도 전입이 빠르니 안심하고 있으라고 알려줬단다...
일단 철수했다가 임차인이 퇴근한 저녁에 다시 찾아가 만났다.
내 방문의 목적은 두말할 것 없이 인도가 늦었음을 확인사살하기 위함이다.
접근은... 물건을 잘못 낙찰받은 것 같으니 도와주십시오... 컨셉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긴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남자는 사람이 너무 좋다.
영업 관련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일을 썩 잘하지는 못해도 남을 속이거나 남을 밟고 일어설 사람은 절대 아니다.
'인도'가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임차인은
본인 스스로 대항력을 상실하는 증거들을 마구 찾아와 보여준다.
그러더니 생전 처음 보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
잘못 낙찰받았으니 이제 어떡하시냐고...
게다가 늦었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해서 매우 진하게 감동을 먹고 있는데
10살짜리 딸아이가 방에서 나와 천진난만하게 인사까지 한다.
미치겠다.
점입가경으로 할머니마저 한마디 거든다.
"이 집 경매 들어간다 할 때 조 어린 것이 영문도 모르고 월매나 울었는지 몰라요..."
임차인 가족은 그때까지도 본인들에게 대항력이 있다고 철썩같이 믿으며
낙찰을 잘못 받은 것 같은 나를 너무나 끔찍하게 위로해 준다.
혹시 모르니 자기네가 의뢰한 법무사에 한번 가보겠느냐고까지 한다.
......
임차인의 집을 나오면서 올려다 본 밤하늘에 달이 참 맑았다.
차라리 위장임차인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내가 모진 맘 먹고 진행을 한다면
예상수익이 세후 3천만원이다.
그것을 포기해야 하나?
왠지 그래야 하겠지?
다음날 법원을 찾아가 문건열람을 한다.
이 물건은 원래 무잉여의 위험이 있는 물건이었는데
다행히도 경매신청권자의 채권은 일반채권으로 근저당이나 임차인보다 후순위다.
즉 무잉여가 확실해 보인다.
됐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긴다. 경매계장의 이야기인 즉슨,
본인도 무잉여 문제로 입찰일 전에 채권자와 통화를 했는데
채권자는 경매비용이라도 돌려받고 싶으니
무잉여가 되어도 좋으니 끝까지 진행시켜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하... 이거 뭐 좋은 일 한번 하고 싶어도 안되는 건가? ...
집에 돌아와 집사람에게 사정을 풀어 놓았다.
상황이 이러이러해서 취하도 안될 것 같고
그 사람들 살려주기 위해서는 보증금 5백만원을 날려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진행해야 되겠지? 남들 살리려고 우리 돈 5백만원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집사람은 약 5초 정도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한다.
여보,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당신이 그사람들한테 큰 선물을 하나 해줘.
대신 우리 돈도 잃지 말고.
난 자세한 방법은 잘 모르지만 당신은 할 수 있으리라 믿어...
흐흐흐...
다음날부터 수능 수험생의 자세로 집중해서 불허가신청서를 작성했다.
내 보증금을 잃어서도 안되고 임차인도 보호(?)해야 하기에
불허가에 목숨을 건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고...
무잉여에 의한 경매중단과
보호받아야 할 임차인에 대해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할 수준으로
하루종일 틀어박혀 불허가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신청서를 읽고 난 경매계장은 의아해 한다.
무슨 낙찰자가 임차인을 위해서 불허가 신청을 하느냐고.
그게 사실인데 잘 안 믿는 눈치다. 쩝...
결국 불허가 결정이 났고
일주일간 숨죽여 지켜봤지만 다행히 채권자의 태클도 없었는지라
오늘 법원에 가서 입찰보증금을 찾아 오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방금 전 임차인 집에 케익 하나를 사들고 찾아갔다 오는 길이다.
모든 정황을 이야기해 주었고
앞으로 다시 진행될 경매과정에서 대항력을 확실하게 갖출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시켜 주었음은 물론이다.
돌아오는 길, 많은 상념이 교차한다.
올 한해 이렇게 취하하고 저렇게 양보한 물건만 다섯 건 가량...
수익으로 치면 거의 1억에 육박하는 수익이 날아간 셈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 저녁 누구보다 행복하다.
빨리 집에 가서 가족들과 파티해야쥐~~~
이 땅의 모든 가족들에게
Merry Christmas~~~~~ ^^
이곳 글들 보면서 여러번 울컥 하내요...좋은일만 생기기실 바랍니다
정의는 살아 있네요! 따뜻한 경매인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현모양처를 얻으셨군요?
복 많이 받으십시오!
존경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배워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