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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위기 / 사랑은 가꾸어 가는 것
아 5:2-8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 5:2-8 / [밤을 그리며] (신부) 잠자리에 누워도 잠못 이루는 이 몸. 아, 문 두드리는 저 소리 임께서 문밖에 와 서 계시는구나. (신랑) 내 사랑 문열어 주어요, 문열어 주어요. 내 사랑, 나의 비둘기 흠잡을 데 없는 나의 누이야. 내 머리는 이슬에 젖어 있다오. 내 머리칼은 밤이슬에 흠뻑 젖어 있다오. 3) (신부) 나 이미 옷을 모두 벗었는데 어찌 다시 옷을 입을까? 나 이미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흙을 묻힐까마는 4) 나의 임 창문 틈으로 손을 내밀어 문을 잡고 계시니 내 가슴이 마구 콩콩거리네. 나의 임께서 저리도 가까이 계시니 5) 팔짝 일어나 내 임 나의 임 들어오시라 문열어 드리려 문고리 잡는 순간 아, 내 손엔 몰약 향기 가득하고 손가락엔 몰약이 방울방울 맺혔네. 6) 얼른 내 임 들어오시라고 얼른 문을 열어젖혔지만 아, 나의 임은 자취도 없어. 나 얼마나 임의 목소리 듣고 싶어했던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불러도 불러 보아도 대답 없는 그 이름, 나의 임이여. 7) 성안을 돌던 순찰병들이 나를 보자 사정없이 쥐어박았네. 성벽을 지키던 파수꾼들도 내가 걸친 겉옷조차 빼앗아 가 버렸다네. 8) [나를 도와 찾아주오] (신부) 예루살렘 아가씨들아 나 그대들에게 부탁한다오. 부디 내 사랑을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 주오. 나 내 임 그리다 못해 병이 들었다고 그래요, 이렇게 상사병이 들었다고 꼭 전해들 주오.
왕은 술람미 여인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로 인해 때늦은 후회를 하고 맙니다.
어찌 다시(2-5) 술람미 여인이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깨어있습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절반은 깨어있습니다. 그 때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가 문을 두드리며 말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는 애타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잠자리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머뭇거립니다.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발을 씻는 것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랑하는 남자는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문틈으로 손을 들이밉니다. 그때서야 여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사랑하는 남자를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엽니다. 이는 마치 우리들을 향한 예수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이지만, 우리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분을 향해 문 열어주는 것을 번거롭게 여깁니다. 주저하고 머뭇거립니다.
문을 열었으나(6-8)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마음을 열고 문을 열었습니다. 여인이 잡은 문고리에는 손가락 사이로 몰약 즙이 문고리에 흘러내립니다. 아가서 5장 1절을 보면 사랑하는 남자는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었습니다. 여인을 맞이하기 위해 남자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 남자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남자가 잡았던 문고리에는 몰약 즙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여인은 급하게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가 성 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 맞게 됩니다. 겉옷도 빼앗겼습니다. 아마도 여인이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옷을 챙겨입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야경꾼들은 그 여자를 가볍게 보고 함부로 대했던 것입니다. 가까스로 집에 돌아온 여인은 후회합니다. 그리고 남자를 향한 사랑 때문에 병이 납니다. 이처럼 예수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잃고 방황하다가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적용: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의 모습을 뵙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봅시다.
마르틴 루터는 “성욕은 다른 본능적 욕구와 어떻게 다른가?” 라는 질문에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어쩌지 못하지만 정수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에 대한 유혹은 결혼 전이나 후나 끊임없이 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욕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유혹이 있을 때 둥지는 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생각이 들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했다면 유혹적인 그 사람을 만날 생각으로 거울을 보는 것부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설 교 >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아가서 5:2 / 이상호 목사
날로 재밋어지는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크게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장 1절부터 3장 5절까지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 결혼 전 연인 관계로, 열렬한 밀회, 혹은 보고픔, 그리움, 사랑을 기록하고 있고, 2부에는 3장 6절부터 5장 1절까지 장엄하고도 화려한 혼인 예식의 광경이 기록되어, 예식을 마치고 첫날밤을 맞게 된 두 사람의 기쁨과 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3부에는 5장 2절부터 8장 14절까지 갓 결혼한 신혼 초의 약간의 갈등문제, 그러나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가 된다는 내용, 두 사람의 사랑이 두 사람의 사랑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 주변으로까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을 해놓고 있습니다.
“내가 잘지 라도 마음은 깨었는데"(5:2)
술람미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깨어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었지만 마음은 깨어 있었기에, 사랑하는 자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사랑하는 자가 가까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부르고 있습니다. ‘문을 좀 열어 달라,’지금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얼마나 애타게 부르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나의 누이야 나의 누이야, 문을 좀 열어다오’,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사랑아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비둘기야 문을 좀 열어 다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좀 열어다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 부르면서 애절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화가 치밀어 그냥 도망치듯 자리를 벌써 떴겠지만 솔로몬왕은 인내로 문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머리에 밤이슬이 가득하구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날을 세우며 문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측은할 정도입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밤이슬에 젖도록 밖에서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왕입니다. 얼마든지 자기의 힘을 과시해서 닫쳐진 문을 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를 향해서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종속물처럼 여겼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아니하고, 남자의 부속물 정도로 보았던 그런 고대사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열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시되던 그런 때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거기에 편승하고, 그런 문화, 그런 전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아내에 대해서 극진한 사랑을 베풀며,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낮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듦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존중하며 상호 인정하면서 사랑과 존경으로 살도록 부부질서를 세웠습니다. 솔로몬은 고대사회의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살았지만, 사회적 문화를 따르지 아니하고 사랑의 법을 따랐습니다.
여자가 계속해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이렇게 깊은 잠이 들었을까? 지금은 늦은 시간이니 깨워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솔로몬 왕의 모습입니다.
솔로몬 왕은 상대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화난 목소리를 내지 아니하고 아주 부드럽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아내를 깨우고 있는 것을 보면 참 큰사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떨까? 아마 “문 열어! 문 안 열어!!”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다음 “벌써 자빠져 자는 거야! 하늘같은 남편이 왔는데 일어나지 않고 뭐하는 거야” 하고 더 격하게 화를 버럭 내겠지요. 그래도 문을 안 열어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발로 문을 막 걷어차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감정풀이를 하지 아니하고 나긋나긋하게 계속해서 아내를 부르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매너와,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깊은 사랑을 배워야겠습니다.
솔로몬 왕은 남편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아내를 자신의 삶의 전부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 아내란 남편에게 ‘돕는 배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돕는 배필’이란 하나의 동업자 혹은 협력자,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는 사람, 연약한 부분을 대신 채워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억압하고 비하시키고 무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솔로몬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돕는 배필’,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돕는 배필’이 되려면, 남편보다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돕는 배필’ 노릇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 하면 그 영어를 알아야 가르칠 수 있고, 수학을 가르친다면 수학을 알아야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돕는 배필’이 되려면,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남편에게 아내를 ‘돕는 배필’로 주신 것은 단순히 주종 관계가 아니며 밥이나 해주는 식모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꼭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아가서 5장 2절을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이 잔다고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두 눈 똑똑히 뜨고 신랑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늘 좋고, 날마다 좋고, 항상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혼 초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했던 것이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그것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 좋을 때는 다툴 일도 아닌데, 기분 나쁘면 크게 다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함께 10년 20년 살다보면 권태를 느끼며 서로 갈등관계가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사랑의 야릇한 감정이 살다보면 무디어가고 잊혀져갑니다.
우리는 솔로몬 왕처럼 변함없는 사랑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신부에게 계속 사랑의 주파를 보내는 솔로몬 왕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한없이 넓은 가슴, 깊은 이해심을 봅니다. 간혹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옹졸한 사람이 있고,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일도 소화하지 못하고 다툼의 불씨를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 말씀에 대하여 영적인 의미를 찾아봅시다.
‘내가 잘지라도’ 성도들 중에는 그렇게 뜨겁고, 믿음이 좋고, 신앙 경력이 십 수 년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항상 독수리처럼 올라가지 못합니다. 어느 때는 신앙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이나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을 받은 사람도 때때로 신앙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했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잡니다. 치욕스러운 잠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일 가 친척 아비 집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을 따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내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속여 애급 왕의 침실에 들도록 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인들이 최고로 존경하는 왕입니다. 전무후무한 왕으로 찬사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다윗도 한 때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계획적으로 죽게 만들어 결국은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을 봅니다. 엘리야는 불의 사자입니다. 능력의 사자입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집니다. 까마귀가 먹을 것도 날라다 줍니다. 기도하기만하면 응답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6개월 먼저 와서 예수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증거자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 앞에서 그는 겸손했습니다.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마 3:11)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망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감옥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됩니다. “오실 자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흔들리고 있는 허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한 예수님 제자들을 보면 아주 중요한 순간, 중요한 자리에서 기도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졸음 때문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펄펄 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때는 곤두박질 할 때가 있고, 그렇게 뜨겁고,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냉기가 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이요, 신앙의 잠을 누구든 잘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리 잔다 할지라도 마음은 깨어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깨었는데’ 라고 했습니다. 잠을 자는 것은 육신이 피곤하기 때문에 잘 수가 있고,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침체의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어떤 시험 때문에 실족할 수 있고, 어떤 문제 때문에 시험 들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깨어있어야 됩니다. 비록 육신의 잠은 들었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감탄 하듯이 “사랑하는 주님의 소리가 들리는구나!”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믿음 있는 성도는 실족하여 넘어졌다 하더라도, 혹 시험에 들었다 하더라도 아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넘어졌다 할지라도 넘어진 자리에서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들도 죄 가운데 빠졌던 것처럼 우리 믿는 성도들도 죄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어 있는 성도는 비록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빨리 돌아서야 될 텐데’, ‘내가 이 진흙탕 속에서 빨리 벗어나야 될 텐데’, 이런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벗어나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침륜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매를 맞고 깨닫는 경우, 혹은 어떤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자리에서 벗어나 옛날의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깨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주 타락하지 않습니다. 완전 타락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약해서 타락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오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나의 사랑하는 주님은 내게 가까이 오셔서 나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참 사랑입니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데, 주님은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내 곁에 계시어 나를 지켜 주십니다.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내가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 속에 있을 때, 내가 죄악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주님은 찾아 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합니다. 목사야, 다시 부릅니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합니다. 사랑하는 자야, 그래도 대답을 안 합니다. 구원받은 자야, 그래도 대답을 안 합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아들아, 계속 이름을 바꿔가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토록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은 지칠 줄 모르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머리가 밤이슬로 다 젖도록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나를 부르고 있음을 봅니다.
이 은혜의 사랑,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을 열어 달라, 문 좀 열어 다오’ 하고 애원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마음 문을 열어야 되는데, 굳게 걸어 잠그고 문을 열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마음을 오픈하면 좋겠는데, 한 번 닫혀 지면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고집을 세웁니다. 문을 열지 아니하니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이미 잠겨진 문 때문에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합니다.
이제는 문을 열고 주님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 가운데 빠졌을 때에, 마음을 다 열어놓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그 죄를 기억도 안 하십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그 죄를 다 치운다고 주께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 속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물욕과 정욕, 사욕으로 닫혀진 문을 열기를 바랍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문을 열면 주님께서 들어오시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애타는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그걸 절절히 느끼지 않습니까? 밤이슬을 다 맞아가면서 내 사랑하는 자야, 나의 누이야, 내 비둘기야, 나의 완전한 자야, 이렇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러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한두 번 부르다가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면 오해를 잔뜩 하고 그냥 가 버릴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신랑 되시는 주님은 항상 내 곁에 와 계십니다. 이 큰 은혜의 깊은 사랑 늘 간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당회나 제직회나 신도회에서 내가 주장하던 안이 결정되지 않고 다른 안이 결정 되었다 해도 일단 결정된 것에 대하여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협조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행위며 교회를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계속 불만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위해, 교회 화평을 위해 마음 문을 활짝 엽시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십시다. 주님께서 밤이슬을 맞고 새벽이슬을 맞고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문을 두드리는 은혜
아 5:2-8 / 이삼규 목사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다고 훌륭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 때문에 여기에 모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잘못 오신 것입니다. 잘못된 장소에 오신 것입니다. 날을 잘못 잡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찾아 이곳에 오셨다면 뜨거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성령님은 교회의 문 앞에서 서서 다윗과 같이 성령의 강한 임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배자들이 손을 높이 들고 천국 문을 열기를 소망하는 장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임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언제나 주님을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분으로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다.
아 5: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 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 구나
잠겨 진 문
어찌하여 집에 문이 잠겨 져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열쇠를 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의 임재에 대한 열쇠가 우리 손에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문을 열고 지옥문을 닫을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열쇠는 우리 손에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신부는 빨리 문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신랑을 문밖에 세워 놓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을 봅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1) ‘문을 두드리며’(2절) ― 애정의 간절한 표현입니다.
2) ‘나의 누이, 사랑, 비둘기, 완전한 자야’(2절) ―"누이"는 이성과 지위에 있어서 자기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함이고(막3:35), "사랑"은 '친구'를 의미하나니, 친밀히 교제할 수 있는 상대자임을 말하고(요15:4-5), "비둘기"는 순결한 자를 말함이고, "완전한 자"는 변심하거나 불순한 일이 없는 완전무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3) ‘머리에 밤이슬이 가득하다고’(2절) ― 지금 신랑이 문밖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슬이 밤에 많이 내려 야간 여행자에게는 의복을 다 적시게 된다고 합니다.
삿 6: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삼하 17:12 우리가 그 만날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두지 아니할 것이요.
신랑은 신부를 애모하여 찾아가느라고 머리털에 밤이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신부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이 여인은 반쯤 잠들어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음성도 알고 그가 두드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그 마음속에는 그 문을 열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벗은 옷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런 옷을 다시 입는다는 것이 번거롭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이라고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우리와는 기후가 다릅니다. 항상 덥기 때문에 흔히 맨발로 다니다가 집에 들어갈 때와 특히 침소에 나아갈 때는 발을 씻는 풍습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나 열대 지방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거의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발을 씻은 것 보니 모든 일을 끝내고 쉬러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신부였던 술람미 여인의 태도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직분과 책임과 예의’ 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좀 편안히 쉬고자 하다가 주님을 만나야 할 때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 주님의 사업에 더 헌신할 마음은 없고 밤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평안히 지내겠다는 무사안일주의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문을 열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인 우리 교회가 너무나 안일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그토록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며 노크를 하건만 교회가 귀찮기 때문에 문 열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혹시 냉랭하여 주님께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영적인 모습니다. 마치 다윗의 아내 미갈 처럼 열매를 맺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슬픈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까? 문제는 미갈의 마음이 다윗을 향하여 닫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밀함도 기쁨도 열매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왜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만남을 위한 예배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왕궁에서 왕을 모시지 않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노크를 하셔도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하며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아니요,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편안히 누워있는 거 모르시겠습니까? 좀 기다리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머리도 아프고 너무나 피곤합니다. 이미 신발도 벗었고 발도 씻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지금 꼭 문을 열어야 합니까?”
노크소리가 멈출 때
아 5: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우리가 놀라는 때는 하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가 아니라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멈출 때입니다. 솔로몬의 게으른 신부는 마지못해서 일어나 문을 엽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던 신랑은 종적을 감추고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향기를 맡을 뿐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노크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노크 소리가 멈추는 즉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안하고 게으른 삶의 방식에 대해서 후회하고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른 신부는 신랑이 다녀가 흔적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계셨던 자리의 향기뿐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이 노크하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십니다. 두려운 것은 우리가 문을 열지 않을 때, 통회하는 예배를 통해서 천국의 창들을 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 마음이 없다면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계셨던 자리와 향기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향기만 맡고서도 만족하시겠습니까? 마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떠나간 후에 베개를 끓어 안고 그 사람의 채취를 맡으면 흐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그분의 향기를 맡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분의 능력과 생명과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내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소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안락의 상아 침상에서 기쁘게 일어나 주님의 부드러운 노크 소리에 즉시 반응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노크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어느 순간에 그 노크 소리가 멈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찬양했습니다.
눅 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눅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로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이 더 이상 노크하지 않으시는 때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내가 너를 방문한 때를/NKJV)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연인의 상처와 아픔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그 문을 두드리는 은혜가 항상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 은혜가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는 부자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몇 겹의 문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잣집 대문 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서울에도 세검정이나 효창동 같은 부자들이 사는 집에는 아무도 얼씬 할 수 없습니다. 육중한 철문이 가로 막혀 있고 담장은 철조망에 뾰족한 쇠창살로 막혀 있고, 집에는 무서운 개들이 여기 저기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은 CCTV로 안에서 누가 왔는지 확인하고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부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함께 교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정신
우리 모두는 소경 바디메오의 정신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자비를 구할 때 무리들의 비난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맹목적으로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도 솔직히 모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곁에 있는 사람이 제게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알려주면 주님이 그냥 지나가도록 잠잠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바디메오는 비록 앞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사람들이 메시아가 지나가신다는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소리쳤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절박한 심령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잠잠 하라”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8)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체면이나 영적인 품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더욱 심히 소리 질렀기 때문에 주님의 발걸음이 멈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메오의 정신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사람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인이었지만 그는 주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병도 낫고 구원도 받았습니다.
주님이 지상 생애 가운데 수없이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방문(visitation)을 성령님의 거주(habitation)로 바꾸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을 지나고 계십니다.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기도하오니 바디메오의 마음이 우리 안에 충만케 하옵소서. 오만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소경됨을 고백하며 목소리 높여 주님을 부르게 하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가 통회함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경배하며 통회하며 부르짖나이다.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
여러분 배고픈 아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목사님이 설교하고 계시니까 내가 참아야지 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게 뭐라도 주니 않으면 난 죽고 말 것입니다. 젖 주세요.” 이렇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우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소리 질렀다고 했는데 이 말은 얌전하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비명을 지르다, 큰 소리로 외치다, 날카롭게 소리치다, 고함치다, 간절히 탄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디메오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배고픈 젖먹이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나아갑니다. 저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기다립니다.”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바디메오는 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자신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라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절박한 믿음을 가졌고 주님은 그 믿음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그런 절박함과 갈급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은혜스럽게도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아름다운 교제에 들어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을 세우는 건축가
아가 5:2-8 / 강준민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을 알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 니라" (요한복음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 땅하니라" (요한일서 3:16)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8)
1. 사랑의 건축가는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청종합니다.
1)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에베소서 5:22)
2)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3)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십시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에베소서 5:25)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사야 55:2-3)
2. 사랑의 건축가는 겸손하게 문을 열어 주는 사람입니다.
1) 겸손은 방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2) 겸손은 나태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언 24:33-34)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태복음 25:26)
3) 겸손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4-5)
4) 겸손은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고린도전서 7:3)
나가는 말: 주님의 사랑은 거듭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문을 열어라!
아가서 5:3-8 / 이상호 목사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3)
2절에서 이미 사랑하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어 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밤이슬이 가득할 정도로 떠나지 아니하고 계속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른바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향해서, 늦은 밤에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는 말에 “내가 지금 옷을 벗었는데 어찌 다시 입겠으며, 또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랴” 고 대답을 합니다. 술람미 여자는 옷을 다 벗고 잠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옷을 입고 나갈 수가 있겠느냐?’ 한 마디로 귀찮다는 듯 말하고 있습니다. 또 발까지 다 씻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서 먼지를 묻혀 다시 발을 씻을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왔는데, 늦은 밤에 찾아와 밤이슬을 가득 머리에 안고 사랑하므로 만나겠다고 애원을 하는데, 귀찮아서 다시 옷을 입을 수 없다고 핑계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문밖에 있는데 다시 옷 입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고 어렵습니까? 또 발 한 번 다시 씻는 것이 뭐 그렇게 힘들겠습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열렬하고, 뜨겁고, 하루라도 못 보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뜨거웠던 심장이 멎고 불처럼 타오르던 사랑이 온데간데 없이 식어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누가복음 9장을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용모가 변화 되고 옷에서 광채가 나는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는 그런 광경이 나옵니다. 이것을 목격했던 베드로는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신비하고 아름답고, 찬란함에 도취하여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예수님,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와 같이 여기서 오래오래, 혹은 영원토록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가자며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주님이 없는 산 아래는 가관입니다. 귀신 들린 어떤 사람이 경련을 일으키고 거품을 흘리고, 자기 몸을 자기가 상하게 하나 누구하나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오시어 귀신을 쫓아내니, 그 사람은 비로소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한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겠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라고 하십니다. 즉 나는 여우만도 못하고, 새만도 못한 인생이다. 여우는 그래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나는 그것마저 없다. 가난뱅이 예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래도 네가 나를 쫓겠느냐? "나를 쫓으라." (59)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호강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생이 훤하게 보이니 사람들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것을 봅니다.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내 부친을 장사하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부친이 지금 60세인데, 그 부친을 모시다가 세상 떠나시면 그 때 내가 주님을 쫓겠습니다” 하고 변명을 합니다.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말합니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내가 주님을 쫓기는 쫓겠는데, 먼저 내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고 와서 주님을 쫓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따르지 않고 피해보려고 잔꾀를 부리는 것을 봅니다.
변화산의 그 놀라운 광경,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 엄청난 능력, 이런 것을 보았을 때는 주님을 따라다니면 수가 생기겠다, 주님 곁에 있으면 아무 걱정도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여우만도 못하고 새만도 못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네가 나를 쫓겠느냐 하니 "아이고, 주님을 따르면 가난뱅이가 되겠구나, 주님을 따라서는 아무 것도 손에 쥐는 것이 없겠구나!' 하고 피해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겁니다. 이 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느니라."(눅 9:62)
이미 우리는 손에 쟁기를 잡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에게서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 다시 아가서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왔다면, 버선발로 쫓아 나와 대문을 활짝 열어줘도 부족할 텐데, 내가 옷을 벗었는데 어찌 다시 입겠소. 내가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일어나 먼지를 묻히겠소.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한 주님을 바라보며 재림을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데, 신앙의 옷을 벗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번 옷을 벗으면 다시 옷 입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의 백성들은 입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흰 옷을 입으라, 혹은 빛의 옷을 입으라, 세마포 옷을 입으라, 구원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옷들은 결코 벗어놓아서는 안 되는 옷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옷을 벗어놓았던 것처럼, 잠 잘 때 옷을 벗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벗어서는 안 될 구원의 옷, 벗어서는 안 될 흰 옷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항시 의의 옷을 입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벗어놓아선 안 될 것이 또 있습니다. 에베소 6장에서 "전신갑주를 취하라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투구,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해서 살아야 악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해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신갑주는 틈이 없도록 온 몸에 무장을 한 것입니다. 누구든 마귀에게 빈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을 하며 내 머리가 지금 밤이슬에 다 젖어있다고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옷을 벗었는데 어찌 다시 입겠으며,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먼지를 묻히겠으며, 이런 식으로 문을 열어줄 생각을 안하니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계속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자아가 강해진 것입니다. 전에 같으면 한 마디 말에 그냥 쏜살같이 달려올 여자였는데, 이제 결혼생활 얼마동안 했다고 자아가 강해졌습니다. 고집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내가 죽어야 영혼이 살고,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 자아가 죽는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고백하면서 겸손의 허리띠를 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포악하고 잔악하기로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그렇게도 모질게 핍박했던 사람이고, 사람을 죽이는데 가담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를 만난 다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생활에 힘썼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부부지간에도 자존심 대결입니다. 상대가 전적으로 굽혀주기 만을 바랍니다. 한번 싸우게 되면 말을 통 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 말을 안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어떤 사람은 일주일동안 말을 안하기도하고 길게는 한 달 동안 말을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지는 척 먼저 말을 붙이면 금방 풀어지는데,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말을 걸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주일 혹은 한 달씩 냉전 상태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양말 좀 줘” 그 말도 먼저 하기 싫어 양말을 찾아 신는답시고 옷이란 옷은 죄다 흩어놓은 채로 그냥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종의 화풀이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자존심이 강합니다.
술람미 여자도 일부러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듯 합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는 모르나 문을 두드려도 못들은 척하는 것 같습니다.
급기야 솔로몬 왕이 문틈으로 손을 내민 것입니다. 화해를 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누가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에 누가 찾아왔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부족해서, 이 세상의 죄악을 보고, 차마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무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 왕이 그 문틈으로 자기의 손을 내밀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찾아왔다” 이렇게 무언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아느냐,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손을 내밀었을 때 붙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마저 붙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술람미 여자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도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을 때, 그 바다까지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하시며 바람을 꾸짖어 풍랑을 잠잠케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주님의 그 사랑에 감동을 해야 합니다.
술람미 여자도 감동을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 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움직여서, 그 신랑이 자기를 사랑함이 너무도 애틋하고, 너무도 크기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고도 감동이 없다면 냉혈인간이죠. 주님의 이 엄청난 사랑, 강권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 주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감격의 눈물도 흘려보고, 감격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찬송도 불러보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주님을 향해서 내 이 한 목숨 바쳐 충성하리라는 결심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동안 회생적인 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순교의 제물이 된 사람들은 그렇게 결심을 한 사람들입니다.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견딜 수 없어서, 그 뜨거움에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고국의 안락하고 편안한 문화생활을 접고 아직 문명의 혜택을 크게 보지 못하고 있는 열악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오직 주님을 위해서 회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열애(본문을 묵상하며 쓴 전갑재 목사의 시)
그대 보고 싶어
긴긴밤 뒤척이다 순간에 달려 왔네
내 머리는 밤이슬에 젖었고
내 옷은 별빛에 바래었다.
불 꺼진 창가 달빛은 유난한데
내 발자국 소리
내 숨소리
안 들리는가?
미칠 듯 님 보고 싶어
문가에 매달려 흔들어 보네
바람소리
님의 소리인가 싶어
숨을 멈춘다
흐르는 적막뿐이다
이대로는 갈 수 없어
창틈에 손을 넣어 빗장을 벗겨본다
꽁꽁 잠겨 진 문
님의 순결이리라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공간이여
님의 얼굴 여기 놓고 간다
그대의 냉담을 사랑하며
당신의 눈에 멀리 선다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5)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이제 술람미 여자가 일어나서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으니까 자기 몸에 얼마나 몰약 향수를 발랐던지 그 향수가 문고리에 묻어난다는 말입니다. 그 시절엔 향수 구경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 이었을 것입니다. 향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향수 냄새가 어떤지도 모르고 살 때입니다. 향수는 특수계층만 사용하던 때임으로 향수의 가치는 대단했습니다. 희귀성에 부르는 게 값이었을 것입니다. 세상말로 술람미 여자는 팔자 고친 여자입니다. 솔로몬 왕이 어쩌자고 거무튀튀한 이방 여자한테 마음이 홀딱 빠져서 세상에 없는 사랑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결국은 결혼까지 하고 그 많은 여자들 가운데서 유독 술람미 여자가 특별한 사랑을 받으니 이 여자는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비싼 향수도 분에 넘치게 소유할 수 있게 되니 술람미 여인은 옷을 다 벗어 놓고 머리끝서 발끝까지 향수에 목욕을 하고 잔겁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다 열어주지 아니하니 문 속으로 팔을 넣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일어나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으니 문고리에 철철 향수가 묻어나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위해서 아낌없이 물질을 쓰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인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질주의에 빠지고 안일주의에 빠지고 쾌락주의에 빠지면 주님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난할 때에 하나님! 하나님! 부르며 밤을 지새워 부르짖어 기도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을 얻고, 부자가 되고, 문제가 해결 되고 보니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곤경과 고난의 깊은 수렁에 빠져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그 사람이 이제는 편안해졌다고 주님을 져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다보면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론 쾌락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이 빠져서 주님까지 모른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분명한 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됩니다.
결혼 서약할 때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사랑하겠노라고 서약을 하고 난 다음에 성혼 공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약할 때 누구든지 “네”, “네”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남편이나 아내를 죽이는 무서운 세상을 봅니다. 돈 몇 푼에 함께 살았던 정도 끊고 돈을 생명과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그런 계산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주신 것은 주님이 어떤 계산을 가지고 당신의 몸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자식과 부모 지간에 계산이 없듯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계산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이것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오늘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져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주님의 그 크고 깊은 사랑 안에 감동하고, 감격하고, 감사해서 그 주님의 사랑에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이러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문 밖에 서 계십니다.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총과 물러가심
아 5:2-8
이 사랑과 기쁨의 노래에서 우리는 매우 우울한 장면에 접하게 된다. 이 여인이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직접 말하는게 아니라(이전같이 그에게 직접 말하지 않음은그가 물러갔기 때문이다) 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여인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행에 대해서 언급하는 슬픈 이야기이다. 그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릇되이 행동했던 자신의 비행을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받아야 마땅할 책망을 스스로 되뇌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말씀은 하나님을 배반한 솔로몬 자신의 행적과 그 배반 후의 슬픈 결과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기 동산에 들어오셔서 그가 건축한 성전을 소유하셨으며 그는 희생 제물을 놓고 하나님과 함께 잔치를 하였었는데(1절), 그 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교회나 개개 신자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은 부주의나 태만심으로 그리스도를 노엽게 만들어 자기들에게서 물러나시게 하는 수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이 신부가 느끼고 있던 언짢음과 그녀를 사로잡은 불안감(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다."
1. 그 행동에는 타락한 면이 나타난다. "나는 잔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선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침상 위에서 자고 있다. 영적 질환은 처음에 맞부닥쳐 싸우지 않으면 갈수록 심해져서 지반을 구축하기 쉽다. 이 여인이 "잠을 잤다"는 것은 그녀의 경건한 애정은 냉각되었고 그녀가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였고 그것에 태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자신의 안일에 탐닉하게 되었고 그것을 든든하게 생각하여 경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일도 그것이 정도 이상으로 커지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풍부한 여러 계시를 얻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만심에 차서 "영혼아, 네 평안을 누리라"고 말하려는 위험에 처하여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잠자지 못하도록 할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동산 곧 고뇌의 동산에 들어 가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잠을 이기지 못하여 그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언제나 그 신앙 생활이 생기가 있고 활력이 넘치는 것은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그 속에 남아 있다. "내 마음은 깨어 있다. 나 자신의 양심은 자고 있는 나를 꾸짖으며 나태 속에 있는 나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웁니다. 마음으로는 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을 따라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있으며 내 마음으로 그것을 섬기고 있나이다. 현재로는 내가 유혹에 압도되고는 있습니다만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외길만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잠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에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잠도 아닙니다. 나는 이런 언짢은 기분으로는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동산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셨을 때 우리가 잠자고 있었던 사실을 슬픔과 수치로써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 자신의 영적 졸음이나 심신의 불안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것을 슬퍼할 때에라도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는 선한 것,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선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내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있다. 그는 내게 있어서 내 자신의 심장처럼 소중하신 분이시며 내 생명이시다. 내가 잘 때에 그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Ⅱ. 신부가 이런 언짢음 가운데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 여자를 부르시는 소리.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 여인은 그것이 그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또 곧 알아 채렸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이 깨어있었다는 증거였다. 이 여인은 소년 사무엘처럼 처음 부를 때에 들었으나 사무엘처럼 사랑을 오인하지는 않았다. 이 여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 자기를 들이라고 문을 두드리신다. 그는 말씀과 성령으로써 두드리기도 하시고 환란 고통을 통해 두드리기도 하시며 우리 양심에 의해 두드리기도 하신다. 이것은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언급되는 것 같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 그는 죄인들에게는 자기와 계약을 맺으러 오라고 부르시며 성도들에게는 자기와 교제를 갖자고 부르신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부주의 속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을 깨우시고 책망 하시며 또 억제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때에도 그는 우리를 생각하시며 우리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와 주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돌아보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제 정신이 돌아오도록 해 주셨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아! 내게 문열어다오"라는 부르심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살펴보자.
1. 그는 문을 열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는 쉽게 문을 부술 수 있지만 두드리고 서 계신다.
2. 그는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친절한 칭호와 사랑스러운 호칭을 이 여인에게 사용하고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그는 자기를 위해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쾌한 호칭을 붙이거나 그녀의 몰인정을 탓하지 않고, 도리어 어떻게 하면 이 여인에게 대한 자기의 인자한 애정을 변함없이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다. "그는 자기의 인자를 완전히 거두어 가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써 자기와 혼인한 자들을 자기의 누이로, 사랑으로, 비둘기로, 모든 친근한 자로 간주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의로움으로 옷입혀졌으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이 여인(교회)으로 하여금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자기 부인한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을 그에게로 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게 문열어 다오." 우리는 그런 친구를, 그런 손님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고 지낼 만한 무한한 가치가 있는 분이며, 그와의 교제로 득볼 수 있는 자는 우리 뿐인데도 그는 풍부한 사랑으로 우리와 어울리기를 매우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자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사귀어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는 자신의 고난을 호소하며 sub forma panperis, 즉 하룻밤 유숙을 원하는 "불쌍한 여행객의 모습"으로서 받아들여 자기를 청하고 있다. "내 머리에는 이슬이, 찬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너와의 해후를 위해 내가 겪어온 난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라. 따라서 나는 실로 네게서 이와 같은 조그만 친절을 받을 만하다." 그리스도께서 가시관을 쓰셨을 때 가시는 틀림 없이 그의 복되신 머리에서 피를 흘리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 때 그의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에 아내가 자애로운 남편을 문 밖에 세워두웠을 때 그 남편이 당하는 슬픔처럼, 이렇게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 나의 슬픔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갚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부주의한 영혼은 예수 스리스도를 냉대한다. 그런 냉대는 그에게 있어서 "무척 비 많이 오는 날에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
Ⅲ. 이런 부르심에 응하기를 주저하며 말하는 이 여인의 핑계(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느냐?" 이 여인은 반쯤 잠들어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자의 음성도 알고 그가 두드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으나 그 마음 속에는 그에게 문열어 주고자 하는 생각이 생기지 않았다. 이 여인은 옷을 벗고 있었으며 다시 옷을 입는 수고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 여인은 "자기 발을 씻었던" 후라 다시 발씻을 번거로움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딴 사람을 보내 문을 열게 할 수 없었다(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행동과 행위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손수 가기를 싫어하였다. 이 여인은 "내가 문을 열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내가 어찌 할까?"하고 말한다.
경박한 구실은 신앙 생활에 태만한 자가 곧잘 쓰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문열어 달라고 부르시나 우리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거나 그렇게 할 만한 힘이나 시간이 없다고 가장한다. 그리고서는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추위 때문에 밭을 갈지 않는 게으름뱅이"와 같다. "허리에 띠를 매고" "주님의 오심을 주시"해야만 할 자들이 만약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고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전 결심을 회복하거나 옷을 다시 입은 작업이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샐틈 없이 방비하고 있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구실을 대는 것(눅 14:18)은 그리스도를 경시하는 것(마 22:5)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찬바람을 맞거나따뜻한 침상에서 뛰쳐나오려고 생각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Ⅳ.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신의 은총. 이로 인해 그녀는 기꺼이 일어나 그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게 되었다. 그는 설득으로 이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기다리기에 지친 자로서 문빗장을 따기 위해 "문틈으로 손을 들이 밀었다"(4절). 이것은 그녀의 영혼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암시한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 여인의 마지못해 하던 마음이 즐거이 하려는마음으로 변화된 것이다(시 110:3). 루디아의 개종은 "마음을 여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행 16:1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고 나타나 있다(눅 24:45). "인간 안에 사람의 영을 만드신" 이는 그 심령에 접근하는 모든 수단을 알고 계시며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 어느 것인지 아신다. 그는 편견을 타파하고 자기의 교훈과 율법을 도입시키기 위해 자기 손을 들이밀 수 있는 "문틈"을 능히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다윗의 열쇠"(계 3:7)를 가지고 계셔서 그것으로써 심령의 문을 여신다. 그가 마음의 문을 여시는 때에는 열쇠가 자물쇠의 흠에 딱 맞듯이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시며, 마음의 본래적인 성질에 무리한 힘을 가하시는게 아니라 비뚤어진 성품에만 힘을 주어 여시는 것이다.
Ⅴ. 이러한 신의 은총의 방법에 드디어 이 여인의 순응함. "내 마음이 그에게 동하였다." 선한 역사가 그 애정에 작용하여 그러한 마음(意志)을 얻어냈다.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속에서 뜨겁게" 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오장육부가 그에게 동하는구나" 이 여인은 그의 "머리가 이슬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부드러운 심령과 인정어린 마음으로 인해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접을 위해 준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극히 감동스러운 모양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연민 가운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우리도 연민으로 그를 받아 들이자. 또 그의 소유가 되는 자들이 언제라도 곤경에 처해 있을 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도 불쌍히 여기고 영접하자. 이 선한 역사가 그녀의 애정에작용하여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둔함과 게으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내가 일어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었다." 5절), 그의 은혜가 그녀로 하여금 그 일을 행하고 싶게 만들고 불신앙의 방해를 억눌러 버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그가 이 여인 안에서 역사하셔서 이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그녀의 "손에서 몰약이 문빗장에 듣는구나."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할 것이다.
1. 이 여인은 문빗장을 벗기기 위하여 빗장에 자기 손을 대었고 그 때에 이 여인은 그 몰약을 발견하였다(본문 말씀은 "문 빗장 위의 몰약이 내 손에 듣는구나"라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주). "문틈으로 자기 손을 들이민" 그가 거기 있었다는 표적으로 이 몰약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에 대해 강력히 작용하실 때는 그 안에 복된 단맛을 남기시는데 그것은 영혼에게는 매우 즐거운 것이 된다. 이 몰약으로 그는 빗장이 잘 열리도록 기름칠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 믿음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의무에 열중할 때는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신의 은총이 한층 더 신속히 그리고 감미롭게 진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문 열어드리기 위해 일어나기만 해도 우리가 염려하던 어려움들이 이상하게 극복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다니엘처럼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 내 주여, 이제 말씀하시옵소서"(단 10:19)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2. 이 여인이 몰약을 그리로 가져왔다. 춥고 습한데 그토록 오래 서 있던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마음이 동하여" 이 여인은 문을 열어주려고 했을 때 그의 머리에 발라서 힘을 돋우고 그를 위로하며 아마도 그가 감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몰약을 예비해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맞기에 너무나 다급하여 일상적인 준비를 할 만큼 지체하려 하지 않고 그녀의 기름이 든 옥합에 손을 담그기만 하였으니 이는 그가 맨 처음 들어올 때 재빨리 그의 머리를 기름으로 적셔 주기 위해서였다. 자기 마음의 문 즉 그 "영원한 문"을 열어드리는 자들은 믿음과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그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며 이들로써 그에게 기름을 부어 드려야 한다.
Ⅵ. 이 여인이 가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당하게 되는 슬픈 실망. 이 기사 중 가장 우울한 부분이 여기에 나오는 것이다. "내가 의도하던 대로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 내가 사랑하는 자는 벌써 물러나가 버렸네, 내 사랑하는 자는 가고 없네, 가고 없네."
1. 이 여인은 맨 처음 그가 두드릴 때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 후에 이 여인이 "이 축복을 상속받고자" 하여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그리스도는 찾을 만한 때에만 찾아질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시간을 놓치면 배편도 놓치게 될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체를 그의 거절로써 마땅히 책망하시며 의무 수행에 태만하고 조는 자들에게는 위로의 교류를 유예하신다.
(2)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떠남이란 크게 비탄하고 애통해야 할 일이다. 제왕 시편 기자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일"이나 "자신을 일축"하시거나 "버리시는 일"에 대해 호소할 때보다 더 슬퍼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 신부는 여기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옷을 찢으며 자기 손을 비비꼬면서 "그는 가고 없네, 그는 가고 없네"라고 목놓아 울려는 찰라에 있다. 더욱이나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은 이것이 그녀 자신의 탓이란 사실이다. 그녀는 그를 노엽게 하여 물러가게 했던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면 그것은 무언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시는 까닭이다.
2. 이 경우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며 그녀에게 발생하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이 여인은 여전히 그를 자기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아무리 날이 흐리고 어둡더라도 그와의 관계와 그분 안에서 얻는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다. 우리들 자신의 실패나 하나님의 철수를 염려하는 때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거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버리신다고 해서 모두가 절망할 일은 아니다. "주여! 나의 불신앙을 도와 주소서" 하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라도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가 나를 떠나더라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것인 것이다.
(2) 이 여인은 그가 자기를 부르시면서 한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이 자기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지 회상하고서, 자기가 그 때에 즉각 자기의 확신을 따라 행동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자책하고 있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그가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다고 말했을 때 그의 말은 내 마음을 움직였었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누워서 구실만 만들고 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몹쓸 인간이었다." 우리의 확신을 질식시키고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게 되고 그로써 매우 쓰라림을 느끼는 일이다. 때때로 말씀은 마음에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다시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감동케 한다. 그가 이전에 했던 "그 말씀 때문에" 이제 "내 혼이 녹는구나."
(3) 이 여인은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찾으러 나섰다. "나는 그를 찾았다. 나는 그를 불렀다." 이 여인이 그가 처음 부를 때 분기(奮起)했더라면 이런 수고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의 활용에 대한 우리 자신의 나태와 부주의로 인하여 많은 일들을 놓치고 아주 많은 곤란을 자초하게 된다. 이 여인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물러갔는데도 계속하여 그를 찾은 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의 물러감으로 인해 그에게 대한 이 여인의 사모는 더욱 강하게 되고 그를 찾으려는 탐문은 더욱 열렬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기도로써 그를 부르며 뒤따라 가면서 부르고 그에게 돌아오라고 간구한다. 그녀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늘 하던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전에 자기가 그를 찾곤 하던, 길에서 그를 찾아 다닌다.
(4) 그러나 이 여인은 여전히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내게 아무런 응답도 주지 않았다." 이 여인은 그의 은총의 증거도, 눈에 보이는 위로도 갖지 못 하였으며 전혀 캄캄한 중에 있었고 자기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리스도께 대해 참사랑을 품고 있으면서도 저희 기도에 대한 즉각적 응답으로서 그의 미소를 받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저희 영혼을 강건하고 강건하게 하여 자기를 계속 찾도록 힘을 주신다면 그는 저들에게 그것에 상당하는 응답을 주시는 셈이다(시 138:3).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할 수는 없었으나 그에 대해 충분한 은혜로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
(5) 이 여인은 행순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다"(7절). 그들은 이 여인을 윤락녀로 오인하였고(그들이 자기들의 순번을 도는 그러한 밤중에 그녀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으므로)따라서 그녀를 때렸던 것이다. 위로받지 못하여 마음둘 곳 없는 성도들은 죄인으로 오해받고 그런 무리로서 비난을 당하며 욕을 본다. 이와 같이 한나가 "그 마음의 괴로워서" 기도하고 있을 때도 우두머리 행순군 중 하나인 엘리가 한나를 무뢰한 벨리알의 한 딸로 생각하고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고 말하며 그녀를 상하게 하고 쳤던 것이다(삼상 1:14, 15). 시온 왕의 충성스럽고도 사랑하는 신하들인 자들이 시온의 파수군들에 의해 시온왕국의 원수나 치욕거리로 그릇되게 묘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저희에게 누명을 씌우는 방법 이외에는 저희를 학대하거나 박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말씀을 목회자에게 적용하여 생각한다. 직분으로서는 행순군이면서도 소생한 양심의 소유자들에게 말씀을 오용함며 서툴러서 그렇든, 타인의 슬품을 도외시해서 그렇든지 간에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더하고 "하나님께서도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며"(겔 13:22), 용기를 북돋아줘야만 할 자들에게서 용기를 꺾고, "하나님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시 69:26)을 말하여 그들에게 근심이 되도록 하는 목회자들은 이런 부류에 든다. 그 행순군들은 아주 악한 자들이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찾아 나선 이 여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주지도 않으려는 자들이었다(3:3). 더구나 그들이 이 여인에게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훼방을 놓고 "그녀를 쳐서 상하게 한 것"은 한층 더 악한 짓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를 파수하는 자들"이면서 마치 그것을 파괴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였다. 그들은 이 여인의 너울(우리 성경에는 웃옷)이 다만 정절에 대한 가식에 불과하고 그 정반대의 것에 대한 은폐물이기도 한 듯 그녀로부터 "그 너울(혹은 웃옷)을" 거칠고 야만스럽게 "벗겨 취하였다." 외모가 모두 훌륭한 데도 불구하고 불공평하게 정죄당하며 위선자로 욕을 먹는 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신부처럼 "저희의 웃옷을 벗겨 취해간다"고 호소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6) 자기의 탐문을 수행하려는 이 여인에게 파수군들은 학대를 가하였고 이로 인해 그녀는 무력하게 되자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의 탐색 작업에 조력해 줄 것을 당부한다(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나의 모든 친구들과 친지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는 나보다 먼저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 만약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면 너희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할 건가?" (이렇게 해석하는 이도 있다.)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 다오. 그에게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여인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이 여인은 그의 부재로 병이 날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만약 그가 계시지 않는다면 지독히 병을 앓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 해산하는 여인과 같은 아픔으로 그의 돌아옴을 기다렸다. 이 여인은 아합이 그가 몹시 탐내는 나봇의 포도원 때문에 병이 나듯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의 병 앓이는 영혼의 건전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 병의 경과는 틀림 없이 양호할 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삶에 이르는 병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편안한 것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병나는 것이 더욱 낫다.
2) 이런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 그녀는 절망에 빠져 들거나 이 병으로 자기는 죽고 말 것이라고 체념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찾으러 사람들을 보냈다. 그녀는 자기 이웃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였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들이 자기를 위해 그와 중재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비록 부주의하였고 어리석었으며 게을러서, 벌떡 일어나 마땅히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노라고 그에게 말해 주오. 그는 만사를 다 알고 계시니 그는 내가 사랑하는 줄을 아십니다. 비록 내가 의무의 길에서 모자라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나를 그에게 진실한 자로 나타내 주오. 뿐만 아니라, 그가 내게 동정심을 품고 나를 도와 줄 수 있도록 나를 그에게 연민의 대상으로 표현해 주오." 이 여인은 야경군들이 어떻게 학대하였는지를 그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행순군들이 그 일로 아무리 불의했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런 고난도 끈기있게 참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대한 사랑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말해 주오." 은혜로운 영혼은 다른 어떤 괴로움보다 그리스도의 물러 가심으로 인한 고통에 한층 더 민감할 것이다. Langnet amans, non langnet amor─"연인은 초췌해지거나 그의 사랑은 초췌해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신랑을 찾는 노래
아 5:2-6:3 / 김근중 목사
실제적이냐 꿈 가운데서 되어진 일이냐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되나 이는 꿈 가운데였다. 그 이유는 7절 등은 실제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교제 단절의 고민 (아5:2-8)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나의 사랑,나의 비둘기,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 빗장에 듣는구나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본문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교통이 재차 단절된 사실과 회복을 위하여 노려했으나 부득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4장 끝에 신부의 초청에 의하여 신랑은 동산에 들어가서 향연과 희락의 절정에 달하였으나 5장 초에 이유미상의 재 단교(斷交)케 되었다. 신부의 태만인가 생각된다. 저는 문을 닫고 자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은혜 받은 후에 자족과 태만에 빠져 받은 은혜를 잃기 쉽다. 저는 몸은 자 나 마음은 깨였다. 그리고 신랑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배울 것은 일시태만으로 심령의 수면상태에 빠졌을지라도 깨나는 일이 있어야 하겠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을 배울 수 있다. 신 부를 찾아온 신랑을 위하여 문을 즉시 열지 못하고 핑계만 하다가 강권에 못이겨서 문을 열 때는 벌써 기회는 지나가서 신랑은 물러가고 말았다. 그는 신랑을 찾으려고 성중으로 나가서 순행군(巡行軍)에게 봉욕(逢辱)까지 당해가면서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생심병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은혜의 기회가 있다. 한번 기회를 놓치면 은혜는 회복하기가 이같이 곤란하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 릴 때에 즉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드려야 하겠다.
1. 단절의 원인
1) 졸다가(2) ― 잘지라도 마음은 깨였다고 하니 완전히 자는 것은 아니고 조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 경에 졸다가 실패한자 많다. 마25;5에 다섯 처녀, 마26:41에 제자들, 행20:9에 유두고 등이 있다.
영해는, 심신이 잠자다가 주님을 잊어버림을 의미한다.
2) 소리를 듣고 곧 문을 안 열어서(2,6) ― 술람미는 솔로몬의 말에 무성의하여 밖에 세워두고 맞아드 리지 아니했다.
영해는,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또한 듣지도 않는다. 이 렇게 무성의하게 취급하므로 주를 잊어버린다.
3) 벗은 옷 다시 입기 싫어서(3) ― 술람미는 방심하고 지냈던 모양이다. 신랑이 야밤 어느 때에 올는 지 기다리고 있었다면 옷을 입고 기다렸을 것이다.
영해는, 성도는 직분과 책임과 예의 예식의 옷을 벗어버리고 좀 편안히 쉬고자 하다가 주님을 만날 때 못 맞이한다(계16:15).
4) 씻은 발 다시 더럽힐까봐(3) ― 이는 팔레스타인 기후가 항상 더운 고로 흔히 맨발로 다니다가 집 에 들어갈 때와 특히 침소에 나아갈 때는 발을 씻는 풍습이 있다. 발을 씻은 것 보니 그 날의 더 할 일 을 생각지 않고 아주 안심하고 있던 모양이다.
영해는, 세상에서 주님의 사업에 더 헌신할 마음 없고 밤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평안히 지내겠다는 무사안일주의를 가리킨다.
2. 신랑의 부르는 말
1) 문을 두드리며(2) ― 애정의 간청의 표현이다.
영해는, 예수님도 지금 우리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계3:20).
2) 나의 누이, 사랑, 비둘기, 완전한 자야 문을 열라고(2) ―"누이"는 이성과 지위에 있어서 자기와 동 일하다는 것을 인정함이고(막3:35), "사랑"은 '친구'를 의미하나니, 친밀히 교제할 수 있는 상대자임을 말하고(요15:4-5), "비둘기"는 순결한 자를 말함이고, "완전한 자"는 변심하거나 불순한 일이 없는 완전 무흠의 사랑을 의미한다.
3) 머리에 밤이슬이 가득하다고(2) ― 팔레스타인에는 이슬이 밤에 많이 내려 야간 여행자에게는 의복 을 다 적시게 된다(삿6:38, 시110:3, 삼하17:12). 신랑은 신부를 애모하여 찾아가느라고 이슬에 다 젖었다.
영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시어서 고난의 생애를 의미하고(눅9:58), 특히 동산의 기도 생활을 의미 하나니 예수를 맞아 드릴 자 누구였던가.
3. 찾게 된 동기
1)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어 마음을 동하게 해서(4) ― 유대인의 문은 한국과 비슷하여 밖에 손잡이 있 는 위에 창구멍을 두었으니(9:9), 이는 밖에 나와서도 안으로 걸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고로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여 밖에서 손으로 안에 걸은 것을 열려고 하므로 술람미는 자기의 평안을 뉘우치고 일 어났다.
영해는, 예수님도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다가 열지 않으면 손을 들여 밀어 여신다. 베드로의 회개(눅 22:11)와 사울의 회개(행9:3)가 그 실례이다.
2) 몰약의 즙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들어서(5) ― 유대국에서는 안일한 생활을 하는 여자들을 밤에 잘 때에 흔히 몰약을 침상에 뿌리고(잠7:17) 또는 몸에 바르고 잔다. 신부도 이와 같이 하여 손에서 몰 약이 떨어져 문빗장에까지 묻게 되었다. 그러나 신랑은 몸에서 찬이슬이 떨어졌다.
영해는,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생각할 대 제자는 영광의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눅22:24). 예수는 고난, 성도는 영광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벧전2:24).
4. 단절의 고민
1) 벌써 물러가서(6) ― 신랑은 밤에 문밖에 와서 여러 모양으로 문을 열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신부 는 방심지연 하다가 신랑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신부는 일어나 문을 열어 보았으나 신랑은 이 미 돌아갔다. 기회는 지나갔다(호5:6, 잠1:18).
영해는, 예수께서는 참으시고 오래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마음을 열어 영접하자.
2) 그가 말할 때에 혼이 나갔다고(6) ― 신란의 말을 무성의하게 들음을 한탄함이다.
영해는, 금세와 내세에 예수님의 말씀 듣지 않은 후회가 우리에게 있다.
3) 찾아도 못 만남(6) ― 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3:1, 사55:6). 그 때를 놓치면 다시 그때가 오기란 쉽 지 않다.
영해는, 성도는 기회를 잘 알아서 예수님을 영접하자(엡5:16).
4) 불러도 응답이 없음(6) ― 술람미 곁에서 부르던 솔로몬이 벌써 멀리 떠나갔다. 애써 불러도 그의 자취는 없어졌다.
영해는, 예수가 가까이 계실 때 등한히 하여 기회를 잃은 자, 애써 찾아도 찾지 못할 때가 온다(눅 2:43-45). 타락자가 단단히 경책 당한 것을 의미한다(사62:6).
5) 사랑하므로 병이 남(8) ― 술람미는 솔로몬을 찾다가 병이 났다. 즉 병이 나기까지 찾았으나 못 찾 았다.
영해는, 모신 예수 잃지 말라. 잃은 뒤에는 병나기까지 고통을 당해도 못 찾는다.
5. 단절후의 상태
1) 행순자들이 쳐서 상하게 함(7) ― 술람미가 성중에 가서 당한 일이다.
영해는, 타락된 신자는 반드시 복음의 파수꾼들에게 경책을 당한다.
2) 파수군들이 웃옷을 벗겨 취함(7) ― "웃옷"은 여자들의 외출 시에 착용하는 겉옷을 가리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고 하셨다. 한번 기회를 놓치면 은혜는 회복하기가 어려우니,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에 즉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해드려야 하겠다.
기도
찬이슬 맞으며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돌려보내고 환난을 당한 뒤에야 찾습 니다. 문틈으로 손을 넣어 문고리를 여시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열어서 예수님과 사랑으 로 교제하는 지혜로운 신부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영혼의 빨간불
아 5:2-8 / 허태성 목사
세간에 부부관계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인터넷 유머가 있다. 남성노숙자 100인에게 물었단다 "왜? 집에서 쫓겨나서 노숙자로 살고 있나?" 나이별로 분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답이 나왔다고 한다. 30대 : 아내가 드라마 보는데 밥 달라 했다가~ 40대 : 밥 먹고 나서 간식 달라 했다가 쫓겨나고. 50대 : 아내가 외출했는데 어디 가느냐고 물어봤다가 쫓겨났다. 60대 : 아내가 외출하는데 따라가면 안 되느냐고 물어봤다가 쫓겨나고. 70대 :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가 쫓겨났다고. 이 유머를 들으면 나는 우습지가 않다. 내가 꼭 남자라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어쩌다가 사랑으로 만난 부부가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1.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아가서는 매우 독특한 성경책이다. 얼핏 보면 단지 남녀 간의 농도 짙은 사랑이야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잘못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지라도 우선 한 커플의 관계로 읽어보면 잘 나가다가 오늘 본문에는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신랑이 밤중에 찾아 왔는데 신부가 즉시 문을 열어 주지 않고 있다(2-3). 뒤늦게 뉘우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만 신랑은 이미 떠나고 말았다(4-6). 결국 신부는 성중을 헤매다가 행순하는 자들과 성벽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곤욕을 당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함으로 병이 나서 알아 눕고 말게 된다(7-8).
2. 식어지기 쉬운 사랑
한 때는 불같은 사랑을 나누던 부부나 연인 사이에 권태기가 찾아온다. 항상 최고조의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식어진 사랑을 그대로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사랑이 식어지면 싫증이 난다. 싫증이 생기면 상대방과 멀어지게 되고 급기야는 '님'이 '남'이 될 수도 있다. 싫증이 날 때 그것이 부부관계의 빨간 불이라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리고 적극 대처해야 한다. 싫증이 나면 머리의 생각과 몸의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다. 나중에 후회를 하지만 기회를 놓치면 회복하기까지 힘이 더 든다.
3. 신자의 영혼에 나타나는 빨간불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1)하나님의 은혜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2)기도하는 것을 점점 멀리하게 된다. 3)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는 입맛이 사라지고 있다. 4)은혜의 능력이 사라져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5)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보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있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은 둘 사이를 더욱 가까워지게 하며 하나로 연합되게 한다.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세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가는 것이다. 주님께 다시 진심으로 고백하자. 사랑합니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