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을사년 1월 1일 새벽 갑자기 호군을 지내신 11대조
박춘학 선조가 영감에 떠오르면서 족보를 보게 되었으며,
묘소가 '금송곡(金松谷)'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금송곡(金松谷)'에 대한 여정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다각도로 추적하면서 나름대로 성과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영감이 떠올라 잊기전에 서술하려고
한다.
본 칼럼의 포인트는 '금송(金松 )'이 조선시대에 존재하였는지
여부이다.
일단 '금송(金松 )'은 본래 원산지가 중국인데, 어느 시점에 다시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금송(金松)'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발견된 것은
현재 족보가 유일하다.
11대조가 임진왜란 때인 1592년생이신데, 고조부가 되는 15대조의
묘소를 최초로 '금송곡(金松谷)'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가
명확치는 않지만 조선시대 초기로 본다.
지역과 관련해 처음에는 '서흥'으로 알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단흥'으로
생각했으나 '단흥'을 소개한 자료가 도출되지 않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볼 때 '단흥'보다는 '서흥'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렇다고 해서 '서흥'에 '금송곡(金松谷)'이 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은
아니다.
9대조까지 '금송곡(金松谷)'에 묘소를 쓰다가 어떠한 연유인지는 모르나
8대조부터 '봉산'에 묘소를 썼다는 것인데, 확인한 것만 해도 선조들의
묘소가 직계와 방계를 포함해 10여기 이상의 묘소가 '봉산'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6대조부터 역시 어떤 연유인지 모르나 강원도 철원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덧붙이면 6대조가 1766년에 탄생하여 1855년에 별세하신 것으로
족보는 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연세로 90세라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장수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까지 조선시대에 '금송(金松)'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은 족보에 유일하게
'서흥'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금송(金松)'의 골짜기로 해석되는
'금송곡(金松谷)'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송곡(金松谷)'이 묘소의 지명인 것으로 볼 때 그 근처에 '금송(金松 )'이
분포되어 있는 골짜기가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그 '금송(金松) '이 중국이
원산지인 그 '금송(金松 )'과 일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으니 필자가 얼마전에 발견한 영상에 족보에서
발견한 '금송곡(金松谷)'과 똑같은 한자를 가진 지명이 중국에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과연 '서흥'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송곡(金松谷)'의 실체는 무엇일까?
2025년 1월 26일(일)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