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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한 조사에 의하면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노령화가 가속화될수록 덩달아 인기를 구가하는 시장이 있는데, 바로 애완동물 시장이랍니다. 요즘은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보다는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많은 가정에서 애완견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라 가족의 한 구성원처럼 여깁니다. 애완견의 인격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견공들도 그런 융숭한 대접에 맛이 들어 스스로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녀석들도 많다는군요.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한 신자분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느냐?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냐? 여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 애완견이 별세하셔서 막 장례예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강아지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한번은 마당에서 키우던 잡견 강아지가 병에 걸려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급성 장염이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동물병원에 데려가 엑스레이 사진도 찍어보고, 주사도 맞춰보고 그랬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과 생명이 끊어진 것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모습, 그렇게 생기 있고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죽고 나니 그런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온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바라보기도 싫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더군요. 생명이 붙어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지속되어야 사랑스럽습니다. 숨을 쉬고 있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위에 스스로 두 발로 서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최초에 심어진 그 씨앗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사랑이 하느님 사랑과 부모의 사랑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이 무럭무럭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 밖으로 성장해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충만하게 실현시킬 때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다 똑같은 수준의 생명이 아니더군요.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생명, 자기만 알고 자기만 챙기는 이기적 생명은 차원이 아주 낮은 생명입니다. 그에 반해 참된 생명은 육적인 생명에 영적인 생명이 추가되는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통합되고 완성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 안에 구체화시키는 인생이야말로 참 생명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순간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을 위해 무상으로 건네지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정성껏 받아 모시는 노력을 통해 매일의 삶 안에서 파스카의 신비가 지속되는 삶이 필요합니다. 매일 아침 어제의 나와 결별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참 생명의 삶을 살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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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로마8,18-25 루카1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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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표지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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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희망’에 대한 묵상입니다.
희망해서 사람입니다.
사람이니까 희망합니다.
‘희망하는 인간’ 이 또한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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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이 혹자를 가리켜 괴물이라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듣고 보니 모습만 사람이지 이기적인 모습이 흡사 괴물 같이 생각됐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거칠고 사나워져 누구나의 가능성이 괴물입니다.
희망을 지녀야 존엄한 품위의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이웃에게,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희망입니다.
삶 자체가 희망의 표지가 될 때 이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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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2월7일.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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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2월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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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을 쓰던 중 이면지 뒷면에서 읽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짧은 일기였습니다.
두 분 부부가 사이좋게 사셨던 모습이나,
선종 후 추기경의 맑은 얼굴 모습 또한 희망의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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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울려 퍼지는 수도원이나
수도원 성전에서 매일 거행되는 미사 역시 희망의 표지입니다.
희망이신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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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성무일도 중 마음에 와 닿은 희망에 관계되는 말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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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3,4).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하느님께 바라라.
나는 다시 그님을 찬미하게 되리라. 내 낯을 살려주시는 분 내 하느님을.’
‘구원의 하느님, 당신은 정의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응하시나이다.
온 땅의 끝이며 머나 먼 바다들의 희망이시여.’
‘주여, 이 소리 들으소서.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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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희망을 북돋아주는 성무일도의 은총입니다.
우리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입니다.
세상 것들에 희망을 둘 때 결과는 환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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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용했던 구절도 생각납니다.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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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신 하느님만이 있을 뿐이다’로 바꿔 말해도 무방합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는 미래도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의 출구, 희망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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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출구가 막힌, 희망의 빛이 꺼진 절망의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하느님만이 희망의 출구요 희망의 빛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이나 독서의 바오로는 진정 희망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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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그대로 희망에 대한 비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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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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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희망은 바로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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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희망의 표지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는 모습은 내적성장의 희망 나무를,
밀가루를 부풀리는 누룩은 희망 효소를 상징합니다.
이런 희망 나무 같은 내적성장의 삶이나 희망 효소와 같은 삶으로
이웃을 희망으로 부풀리는 삶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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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예수님과 바오로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가 겪는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장차 계시될 영광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허무의 지배아래 있는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누리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오로의 희망의 지평은 고통으로 신음 중인 피조물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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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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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오늘날 하느님을 바라며 고통으로 탄식하는 피조물들과
사람들 마음을 대변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고통 중에도 희망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바오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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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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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때 매 순간 희망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미 지금 여기서 희망으로 충만한 구원의 삶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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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당신 희망으로 충만케 하시어
살아있는 희망의 표지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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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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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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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로마 8,18-25
복음 루카 13,18-21
새벽 카페 공지사항에 있는 저의 일정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오늘부터 주말까지 휴가를 다녀올 생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래전부터 신부님들과 계획했던 휴가였기 때문에 기대가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휴가를 가서 쉬는 것보다 기도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6개월 정도 계획했던 일이기에 갈지 말지를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모를 후회를 만들까봐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지요.
결정하지 못했을 때에는 너무나도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을 해버려서 모든 것을 취소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어쩌면 이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갈등 속에 있을 때에는 어떠한 선택도 못하면서도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방향을 잡고 선택을 하면, 그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도 시작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어떻게 하십니까? 혹시 모르겠다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또 남들에게 책임전가를 시키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자그마한 선택도 후회하지 않을 시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별 것 아니라는 안일한 마음보다는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일로서 행동한다면 분명히 옳은 선택,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또 자그마한 누룩이 빵을 크게 부풀리듯이 우리의 작은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 희생, 나눔, 봉사 등등은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일들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하루 동안에도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선택을 세상의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선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언젠가 갈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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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화요일>(2013. 10. 29. 화)(루카 13,18-21)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9)."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0-21)."
겨자씨의 '작은 크기'와 누룩의 '적은 양'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힘'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큰 나무'와 '온통 부풀어 오른 밀가루 반죽'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놀라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모를 때가 많습니다(마르 4,27).
최고의회가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가말리엘'의 말은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5-6)."
예수님과 사도들의 일이 그냥 사람의 일이었다면
박해를 받지 않았어도 저절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로마제국은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보다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면 가말리엘과 최고의회 의원들은, 또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교회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교회가 받은 박해의 역사를 보면,
일부 믿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끝끝내 거부했습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안 믿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만 믿습니다.)
그런데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항상 그런 식으로만 일을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방식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아주 작은 씨를 심으실 수도 있고, 아주 큰 씨를 심으실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부터 그냥 바로 나무를 심으실 수도 있습니다.
또 누룩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사용하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의 권능으로 곧바로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는 일이 초라하게 보인다고 해서 위축되지 마라.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위대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니."
사도들이 한 일은 씨를 심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협력자들과 후계자들은 물을 주고 가꾸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6-7)."
씨가 크든 작든,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 해서 하면 됩니다.
결과는 하느님께서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심은 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었고, 희망했습니다.
그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우리는 사도들의 믿음과 희망을 본받아서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서 씨와 누룩을 심는 일꾼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각자 하나의 씨와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너희는 모두 하나의 겨자씨가 되어야 하고, 누룩이 되어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지금 실천하고 있는 우리의 기도와 선행과 사랑이 보잘것없게 느껴져도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자라듯 자라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누룩이 밀가루를 변화시키듯 이 세상을 꾸준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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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툇마루 >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 여자 후배가 저의 팔짱을 끼며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오빠는 틈이 없어. 들어갈 틈을 좀 줘요.”
그 때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괜히 가까워져서 힘들어질까봐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내 마음에도 문이 있어서 내가 열고 닫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음의 문’. 문이 있다면 집을 가정한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은 ‘집’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어떤 집은 크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집이 있는가하면, 어떤 집은 웅장하면서도 왠지 휑한 느낌이 들어 불편한 집도 있습니다. 어떤 집은 아예 문을 열어주지도 않는 집도 있습니다. 말도 못 붙이게 냉랭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아무 거나요.”
“...”
“요즘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닌가요?”
“네가 술이라도 사줬냐?”
“...”
우리는 이렇게 누구에게 다가가려 하다가도 그 사람 앞에 커다란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만 거기서 멈추고 돌아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집이 나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의 ‘내 마음의 툇마루’란 강의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한 프랑스 건축가로부터 건축 철학에 대해 들었다고 합니다. 그 건축가가 회장님이 원하는 건축을 해 주기 위해 회장실에 들어가면 그 방의 구조와 가구 등을 보며 회장님이 원하는 건축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건축은 문을 크고 높게 하거나 의자와 같은 가구를 높은 것들을 가져다놓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회장실은 매우 넓은데도 회장님 의자만 달랑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발 할 이야기만 하고 빨리 나가달라는 무언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과연 내가 하나의 집이라면 나는 어떤 모양의 집이고 가구배치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묵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비유말씀으로 설명하시는데 겨자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겨자나무가 되는데 새들이 그 가지들에 깃들인다고 합니다. 하느님나라를 내 안에 실현시킨 사람은 다른 이들이 모여와 쉴 수 있는 공간은 제공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지도 않고 여유도 없는 사람은, 실상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사람이 들어오려고 하면 거부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 귀찮아지고 힘들어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안에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는 과연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내 안으로 초대할 공간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건축에는 ‘툇마루’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을 벗지 않고 앉아 이야기 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입니다. 만약 마음이 잘 맞으면 안방으로도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 방은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온돌방입니다. 어떤 회장실처럼 의자를 준비해놓지 않아 앉을 곳이 없어 할 말만 하고 바로 나와야 하는 그런 삭막한 방과는 다릅니다. 온돌방은 누워서 뒹굴어도 됩니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어쩌면 하느님나라의 편안함을 아시는 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집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나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히 쉴 수 있고 자신도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그것을 위한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자신이 지은 집을 눈으로 보고는 깜짝 놀랄 날이 올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나 사람이 깃들 수 없는 집이 있고, 또 소박하지만 편안하게 사람이 쉴 수 있는 집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앉아서 쉴 수 있는 툇마루가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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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이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순간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에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 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누룩이 반죽된 밀가루덩이를 통째로 발효시키듯,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과 인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익을 찾는 이는 사랑을 갈망하고, 사리사욕을 찾는 마음은 희생봉사로, 교만은 겸손으로 바뀔 것이고 어둠은 밝음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리 없는 변화의 도구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 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유대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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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미국 배우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찰리 채플린은 젊은 시절 철공소에서 일했습니다. 어느 날 사장은 그에게 빵을 사다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잠시 뒤 빵을 사 온 채플린은 사장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 안에는 빵과 함께 포도주 한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보게, 이게 웬 건가?” 하고 사장이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사장님께서 일이 끝난 다음에 언제나 포도주를 드시면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뒤 사장은 채플린의 월급을 올려 주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태도로 그를 대했습니다. 채플린은 남들이 무심코 지나친 것을 세심히 살피고 필요한 것을 채우는 데 성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작은 일에도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평화, 환경, 평등, 자유 등 인류의 구원과 관련된 문제는 무척 거창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창한 일은 작은 일의 실천에서 비롯됩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곧 소화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희생을 바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기서는 웃음을 주고 저기서는 친절한 말을 하십시오. 오로지 사랑을 위하여 실천하십시오.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것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께서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그러한 일을 통하여 큰일을 해내십니다. 겨자씨에서 큰 나무를 이루는 지혜롭고 성실한 농부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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