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선가(禪家)에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자성(自性)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는 의미다.
굳이 한 생각을 일으켜서 곁성과 성불의 순서를 정한다면 견성이 먼저다.
견성(見性)하여 깨달은 후 이미 익은 술을 더욱더 숙성시키듯, 되찾은 자성
(自性)을 잘 보호하여 지키는 보임(保任)을 거쳐 성불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잇다
그렇다고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맞고 돈오돈수(頓悟頓修)가
틀리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가 있다는 생각을 텅 비워버린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증득케하기
위한 방편으로 견성과 성불을 세웠다면, 그 순서 또한 얼마든지 정할 수 있다.
견성을 성불의 필요조건으로 보아도 되고,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견성이라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견성과 성불을 필요충분조건으로 보아도 된다는 말이다.
말이 견성성불일 뿐, 이미 성불해 있는 존재인 까닭에 자성을 보는 일이
가능하다며 성불이 먼저고 견성이 나중이라고 해도 문제될 게 없다.
자전거를 막 배운 사람이나 배운지 오래된 사람이나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탄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그러나 자전거에 쌀을 한 가마니
싣고서 논두렁길을 달린다면 분명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같은 실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전거를 탄다는 체(体)와
쌀을 한 가마니 싣고서 잘 탈 수 있느냐의 용(用)을 구분할 수도 있다.
즉 체(体)의 측면에서 돈오(頓悟)를, 용(用)의 측면에서
점수(漸修) 강조하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알음알이를 통해 돈오(頓悟)했다는 견해를 고집하거나,
해오(解悟)의 귀신굴 살림을 차린 채 끝없는 업식놀음을 일삼는 병에
즉한 약으로써 돈오돈수를 강조할 수도 있다.
엄엄(嚴嚴)하고 치열한 수행가풍을 세우기 위해 단박에 깨쳐서 더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돈오돈수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병에 즉한 약으로써 더이상 닦을 것이 있다면 돈오가 아니라는 주장은
탁견(卓見)이다. 적확(的確)한 진단인 동시에 정확(正確)한 처방이며 주약이다.
그러나 돈오점수가 되었건, 돈오돈수가 되었건 간에 수행의 방편일 뿐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각각 별개의 것으로 실재하며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는 견해를 짓는 것은 양변으로 곤두박질치는 어리석은 짓에 다름 아니다.
돈오(頓悟)하지 못한 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스펙을 쌓기 위해
벌이는 생각놀음 속의 학술세미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돈오하지 못한 학자들이 돈오 이후 점수와 돈수에 대해 입을 대는 것은 3층 건물
을 짓는데 1층은 올리지도 않고 3층을 지으려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말과 글을 통한 알음알이가 아니라 실참실오(實參實悟)를 통한 아공(我空)
법공(法空) 돈오(頓悟)라면 돈수니 점수니 하는 말이 붙을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돈오(頓悟)라는 말조차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구즉착(開口卽錯) 즉, 입만 열어도 어긋나다는 말인가?
진리는, 부처님 정법은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도(道)를 도(道)라고 하면 이미 도(道)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돈오(敦悟)한 후에 말길이 끊어지고, 말길이 끊어지면 입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어난다. 어떠한 말을 해도 어긋나지 않는 정언(正言)일 뿐이다.
사구백비(四句百非)로 벌어져도 사구백비(四句百非)가 아니다.
천만 마디의 말로도 결코 넘치는 법이 없다. 견성이니 성불이니, 돈오점수니
돈오돈수니 하는 온갖 악지악각(惡知惡覺)이 타파(打波)된 돈오(頓悟)라면,
견문각지(見聞覺知)가 그대로 정견(正見)이고 정각(正覺)이다.
이같은 까닭에 그때그때 필요에 따른 방편으로 돈오점수를 주장할 수도 있고
돈도돈수를 주장할 수도 있다. 붉은 화로에 떨어진 한 송이 눈처럼 '내가 있다'는
주견이 흔적도 없이 녹아서 사라진 아공(娥空) 법공(法空)의 돈오(頓悟)라면
능히 죽이고 살리고 죽고 빼았는 살활종탈(殺活縱奪)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귀로보고 눈으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