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식(knowledge)을 반대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지식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중립적이다. 지식은 하나의 도구(tool)이다 지식은 돈을 주고 사는 물건이다. 하지만 지성이 없는 지식은 혐오스럽다.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소위 앵무새와 같은 사람들이다.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지성(intelligence)이 없이 지식(knowledge)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석두(stonehead)이다. 엄청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하더라도 이들은 돌 대가리들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내용에 대한 기억과 암기뿐이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떠들어댄다. 많은 학자, 종교인들이 여기에 속한다.그들은 항상 양적인 것에 집착한다. 그리고 정확한 기억, 거창한 학위에 매달리며 지식을 파는 창녀와 같은 이들이다.
그들은 이해(comprehension)가 없다. 이 Comprehension이 단어는 understand가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해란 뜻 말고도 포함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지성(intelligence)이란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인 것이다.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이해가 있는 마음, 뛰어난 통찰력이 있는 마음, 이것이 지성적인 마음이다.
빌 게이츠는 한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버드의 천재가 아니었지만 지금 세계 유명 대학의 최고 수재들은 내 밑에서 일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성이 있는 지식(knowledge)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탁월한 지성(intelligence)이 있다, 그리고 방대한 양의 지식도 있다. 스펀지 처럼 지식을 빨아 들이면서 지성이 빛을 발한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라즈니쉬,가 여기에 속한다. 멀리는 비트켄켄쉬타인, 아인쉬타인, 니이체이다.
니이체나 아인쉬타인이 붓다와 같은 이를 만나면 깨달았을 거라고 한다. 이들은 지식에 대한 양적인 수집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지식이란 돈만 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문제의 해결" "의문의 해결"이 관심이다. 니이체는 사유의 극치를 보여주며 극한까지 사유를 하며 "진리"와 "신"에 대해서 파헤치다, 결국 자살을 하고 아이쉬타인은 죽을 때까지 우주의 원리를 보여주는 "통일장' 연구에 매달렸다. 비트켄쉬타인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말해선 안된다"로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오쇼나 크리슈나무르티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고 깨달은 자가 된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지식은 거의 없지만 에베레스만큼이나 찬란한 지성(intelligence)을 가진 사람들이다. 너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추고 있어서 이들이 바로 진짜 "황금의 사람들"이라고 해야한다.
선의 5조 홍인선사의 제자 6조 혜능은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그는 일자 무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무짐을 지고 가다가 어느 집에서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읽고 단박에 이해했다. 그것도 단 몇 줄의 소리를 듣고 이해했다.
이것이 에베레스트처럼 빛나는 지성(intelligence)이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아침저녁으로 암송하고 줄줄 외우고 있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앵무새처럼 읖조리는 것이다.
보리 달마,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잘라 달마에게 던진 혜가, 문둥이 병을 앓아 육체적 고퉁을 겪은 승찬, 도신, 홍인, 선의 모든 스승들, 라마나 마하리쉬, 라마 크리슈나, 묵타난다. 전부 다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방대한 양의 서적이 필요없다, 단 몇권의 책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단 한권의 책이나 몇 줄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밖의 지식을 긁어 모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일까?"
지성(intelligence))이 표현되는 것,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 행위로 보여지는 것, 이 지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지혜로운 자라고 부른다. 지혜(wisdom)는 결국 지성(intelligence)의 표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노자, 장자, 열자인 것이다.
그들은 지혜로운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깨달은 자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군중 속에서 사는 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