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진가(美人圖)의 대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01

▲부인상학십체(婦人相學十體),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년∼1806년)의 우키요에(浮世畵) 작품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으로 손꼽히는 것은 여성의 미를 대담한 구도로 포착해 표현한 비진가(美人圖)에 있다. 우타마로는 여성 얼굴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그리고 거기에서 풍겨 나오는 여성미 그 자체를 표현하려 애썼다. 선묘를 단순화하고 색채 사용을 억제하는 것을 통해 그는 자신 만의 독자적인 예술적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그의 작품이 유럽에 소개된 것은 19세기 중엽으로 특히 프랑스에서 갈채를 받으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작품에 강조되는 인물의 부분적 배치 구도로 인한 화면 여백 처리와 명암의 강조 등은 당시 유럽의 인상파 작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럽 인상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이른바 ‘일본 영향(Japanese Influence) 또는 자포니즘(Japonism)’의 대표적 작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우타마로는 에도, 교토나 오사카 아니면 다른 어느 시골에서 찻집(茶屋)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한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에도의 홍등가 요시와라(吉原)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태생에 대한 명확한 증거들은 없다.

▲ 마츠바야의 화장하는 여인(松葉屋内粧ひ)
그의 스승 세키엔(石燕)은 그를 아들과 같이 여기며 1788년 죽을 때 까지 그의 집에서 우타마로(川歌麿)를 키워 주었다. 스승 세키엔은 우타마로를 처음부터 귀족풍의 정통 카노파(狩野派)의 화풍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그는 중년이 되자 당시 유행하던 우끼요에 방식의 그림으로 바뀌게 되며 많은 문하생들을 거느리게 된다. 도리이 기요나가에 의해 고전적인 완성미를 이루게 된 여인상의 아름다움은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예술에서 새로운 해석을 보게 되었다. 당시 유곽거리인 요시와라(吉原)의 찻집 주인이던 쓰타야 주사브로(葛屋重三郞)는 1773년 불과 25세의 나이로 출판업게에 데뷔를 하고 청년 출판업자로의 뛰어난 기획력을 보이며 급성장하고 있었다. 숨어있는 인재 발굴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던 주사부로는 키타오 마사노부, 토슈사이 사라쿠, 지츠벤샤 이쿠 등의 우키요에 후기 작가와 문인들을 발굴, 육성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찍이 우타마로를 주목하고 그의 재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후원을 하고 그에게 자신의 출판사의 운명을 건다. 아울러 주사부로는 우타마로를 기요나가의 적수로 부상시켰다.

▲ 목에 분을 바르는 여자
그 대표 작업이 1786년에서 1790년 사이에 매해 출판되었던,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에도 문학의 한 장르인 화려한 그림이 들어간 통속적인 시화집 교카에혼(狂歌絵本)이었다. 이 시기에 에도 서민문화는 세련미의 극치에 이르고 통속시 ‘교카(狂歌)’의 전성시대에 이른다. 재치넘치는 시인들은 인간 정서에 미묘한 감성이나 세태 풍자의 내용으로 시를 써내려가고, 이러한 통속시에 사람들은 열광하였다. 직접 교카를 짓기도 했던 주사부로는 우타마로와 함께 화려한 색채의 교카에혼을 차례로 출판하게 되는데, 이렇게 출간된 화본(畵本)이 10권도 넘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곤충집, 에혼무시에라미(畵本虫撰, 1788년)와 “바닷물의 선물”이란 뜻의 시오히노 츠토(汐干のつと), 그리고 “온갖 새”라는 뜻의 모모치도리(百千鳥)의 3부작은 우키요에 에혼무시에라미 작품 가운데 최고 걸작들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기요나가(淸長)가 열어놓은 길을 따르는 양식적 답습의 작품들을 보여주나, 약 1790년 경에는 오쿠비에(大首畵)라 불리우는 얼굴과 가슴까지를 가까이 잡은 구도로 그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이루었다.

▲ 간세이 세 미인(寛政三美人) 중 오키타(難波屋おきた)
얼굴의 표정과 가슴부분에 촛점을 맞춘 이 구도상의 변혁(變革)은 그의 성공을 불러왔다. 여인들의 매력을 해석하는데 지칠 줄 몰랐던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콩쿠르 상을 제정케 한 장본인인,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Concourt)가 ‘온실’ 이라고 부른 이 젊은 여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연령층과 사회계층의 여인들 중에서 폭 넓게 그의 모델들을 선택하였다. 스즈끼 하루노부 시대에 이미 다색 목판술 니시키에(錦絵) 기법은 여러 차례 계속해서 다른 색을 찍어내는 기법을 견뎌낼 만큼 질이 좋은 종이를 요했다. 두껍고 눈부시게 하얀 호쇼반(奉畵紙)이 요구 조건을 해결했으며 이 종이의 부드럽고 탄력있는 질감은 목판화의 새로운 미적 요소를 가미시켰다. 홑이불이나 눈 같은 흰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색채를 가하지 않은 채 윤곽선만 찍는 가라오시(空押)-고플라쥬(Gauffrage), 무색 엠보싱으로 충분했다. 우타마로는 종이의 질감에서 오는 촉감의 표현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모색하였다. 그는 때때로 일본의 선묘 전통에 반기를 들어 우선 얼굴, 그 다음으로 몸의 윤곽선까지도 생략해버리고 색채만으로 형태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우타마로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의 눈부신 판화 양식은 하루노부의 경우처럼 그 당시의 다른 판화가들의 작품을 완전히 제압해 버리지는 못했다.

▲ 간세이 세 미인(寛政三美人) 중 다카시마 오히사(高島おひさ)
우타마로가 22살이던 1775년 가부끼 공연 대본 표지에 처음으로 그의 토요아키라는 아호와 함께 작품이 실리게 된다. 그리고 연극 프로그램에 따라 많은 배우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1781년 봄부터는 그의 아호를 우타마로(歌麿)로 바꾸고 비진가(美人圖)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결혼과 자녀에 대한 기록들도 없지만 결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동일한 여인과 아이들이 친숙한 풍경 속에 자주 등장하며 또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18세기 우끼요에 작가 토리야마 세키엔(鳥山 石)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아직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1780년대 중반인, 1783년 경 당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예 인쇄업자 쓰타야 쥬사브로(葛屋重三郞)와 같이 지내려고 찾아간다. 그리고 약 5년간의 세월을 같이 지낸다. 이 기간에 쓰타야 스타일의 작가가 되었던 같다.

▲ 간세이 세 미인(寛政三美人) 중 富本豊ひな
1791년 경부터 가부끼 책자에 삽화용 판화제작을 중단하고 오쿠비에(大首畵)라 부르는 여인의 반신상 그림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하는데, 다른 우키요에 화가들이 흔히 여인 군상 판화를 선호한 데 비해 그는 여인의 반신상 오쿠비에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러한 새로운 그의 시도는 다른 우끼요에 작가들에게 주목을 받게 된다. 1793년에 비로서 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인쇄업자 쓰타야 쥬사브로와 작품의 한정독점판매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에도의 홍등가 요시와라(吉原) 여인들의 반신상을 그린 일련의 오쿠비에 비진가 시리즈들을 만들어낸다. 1797년 인쇄업자 쓰타야 쥬사브로가 갑자기 죽자 우타마로는 오랜 시간 그를 후원해주었던 동료이자, 친구를 잃은 슬픔에 빠진다. 명성이 최고조에 이 르던 1804년에는 역사소설 금지령에 관련된 내용으로 소송을 당하게 되는데, 그가 발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인과 첩들을 묘사한 “히테요시와 5명의 첩들”이 히데 요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피소를 당해 15일간 구금된다.

▲ 萧萧晚境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작가적 명성과 화가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806년 9월 20일 우타마로는 53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한다. 그는 생전에 다수의 회화작품, 인쇄물, 그리고 그림책, 30권이 넘는 슌가집(春畵), 그리고 출판물들을 통해 약 3,000 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 중 유명한 작품들이 부인상학십체(婦人相學十體), 풍류칠소정(風流七小町), 에혼무시에라미(畵本虫撰), 우타마쿠라(歌枕), 바느질(針仕事), 토지 젠사이 비진-조오리(當時全盛美人揃,Toji)이다. 그는 생전 우끼요에 작가들 중 독보적인 국가적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비진가(美人圖)는 우끼요에 작품들 중 가장 많은 찬사와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 윗층 방의 연인들,1788, The British Museum
작가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또 하나의 대표작이기도 한 위층 방의 연인들은 슌가(春畵)라 하기에는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예술성과 회화성으로 인해 혁신적인 현대 회화로 부르는것이 나을 것 같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우선 구도적에서 두 인물의 뒷 모습과 얼굴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다는 점, 아니 남자의 오른 쪽 눈만이 조금 보인다는 점, 에서 서양 인상파, 입체파,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파격을 가져왔다. 난간의 평행된 배경 구도와 배치된 인물의 기묘한 자세가 가져다 주는 강한 에로티시즘과 천박하다기보다 차라리 우아한 자세의 구도적 안정감과 물결치는 흘러내리는 의상의 기묘한 구도적 배치 등이 현대회화 양식의 새로운 등장을 요구하던 당시의 작가들을 열광시킬 새로운 회화적 충격이었다. 당시의 대개의 우끼요에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수많은 슌가(春畵)도 남긴다. 작가의 슌가도 단순한 에로티시즘에서 벗어나 작품을 향한 끊임없는 연구의 자세, 그리고 뛰어난 기량과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우타마로의 슌가는 높은 수준의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 화집 “벌레의 선택 2권(Ehon mushi erabi)”

▲ 온갖 새라는 뜻의 모모치도리(百千鳥), 에흔(畵本)


▲ 모모치도리(百千鳥)

▲“썰물의 선물”이란 뜻의 에혼 시오히노 츠토(汐干つと)

땀을 닦고있는 여인, 1798년

▲ 연애시 시리즈인 가센 고이노부(歌撰恋之部, Kasen Koi no bu, Anthology of poems, The love section), 밤마다 만나는 사랑(夜毎に逢恋), 연애시 시리즈인 가센 고이노부에서는 고전 시집에서 오랫동안 존중해온 우울, 비공개, 공개 등의 분류법에 의해 변하는 사랑의 분위기를 해석했으며 이들 젋은 부인들의 얼굴에는 감정의 미세한 변화까지 그대로 반영되었다.

가센 고이노부(歌撰恋之部) 중 침울한 사랑(物思恋)은 모노오모고이(物思恋)에서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여인의 옆 모습이 등잔 불빛을 상징하는 노란색 배경 속에서 돋보인다. 회색, 엷은 자주색, 밝은 노랑 등의 부드러운 채색들은 달콤한 생각의 비밀스런 매력을 환기시키며, 반면에 입술과 소매의 붉은 붓 자국들은 반쯤 감은 눈을 통해 내다보이는 숨은 열정의 원통함을 암시한다. 아무런 문학적 비유나 서정적인 배경없이도 연애의 모든 심리가 순수한 회화 요소로 전달되었다.

▲ 깊이 감춰진 사랑(深く忍恋)

▲ 가센고이노부(歌撰恋之部)

▲ 가센고이노부(歌撰恋之部)

▲ 어린 아이와 두 여인

▲ 아이를 목욕시키는 여인

▲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

▲ 간세이의 세 미인(宽政三美人)

▲ 게이샤 여인(青楼仁和嘉 女芸者之部)

바람둥이 여인들의 관상을 그린 부인상학십체(婦人相學十體) 연작 중 바람둥이 상(浮気の相), 39.5 x 26 cm, 부녀인상십품 연작에서는 직접 관찰한 각계각층의 여인들의 성격의 차이를 특징 있는 생활 장면들 속에서 다양한 포즈와 동작, 그리고 표정들을 표현함으로써 여성 심리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