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27 관동 팔경 고성 삼일포 3
네 신선이 노닐던 삼일포
이중환의 삼일포에 관한 기록을 보자.
고성의 삼일포는 지극히 맑고 묘하면서도 화려하고 그윽하며 고요한 중에 명랑하다. 마치 숙녀가 아름답게 화장한 것 같아서 사랑스러우면서 공경할 만하다. 강릉의 경포대는 한나라 고조의 기상 같아 활발한 중에 웅장하고 아늑한 중에 조용하여 그 형상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흡곡의 시중대는 맑은 가운데도 엄숙하고 까다롭지 않으면서 깊숙하다. 마치 유명한 정승이 관청에 좌정한 것 같아 가까이할 수는 있어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이 세 곳의 호수가 산으로서는 으뜸가는 경치다. 다음 간성의 화담(花覃)은 달이 맑은 샘에 빠진 것 같고, 영랑호는 구슬을 큰 못에 감추어둔 것과 같으며, 양양의 청초호는 경대와 거울을 펼쳐놓은 것 같다. 이 세 호수의 기묘하고 빼어난 경치는 앞에 말한 세 호수의 다음이다.
우리나라 팔도에 다 호수가 있는 것은 아니나, 오직 영동에 있는 이 여섯 호수는 거의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듯싶다. 한편 삼일포의 호수 복판에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는데, 곧 신라 때 영랑ㆍ술랑ㆍ남석랑ㆍ안상랑이 놀던 곳이다. 네 사람은 벗이 되어 벼슬도 하지 않고 산수를 벗하며 놀았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도를 깨우쳐 신선이 되었다고 하였다. 호수 남쪽 석벽에 있는 붉은 글씨는 곧 네 선인이 이름을 적은 것인데, 붉은 흔적이 벽에 스며서 1000년이 넘었으나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읍 객관 동쪽에는 해산정(海山亭)이 있다. 서쪽으로 돌아보면 금강산이 첩첩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창해가 만 리에 펼쳐진다. 남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넓고 웅장하여 크고 작은, 아늑하고 훤한 경치를 보여준다. 남강 상류에는 발연사가 있고, 그 곁에 감호가 있다.
옛날에 봉래 양사언이 호숫가에 정자를 짓고 비래정(飛來亭)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었다. 하루는 걸어둔 ‘비(飛)’ 자가 갑자기 바람에 휘말려서 하늘로 날아갔는데, 그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날아간 그날 그 시각을 알아보니, 곧 양사언이 세상을 떠난 그날 그 시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양봉래의 한평생 정력이 이 비 자에 있었는데, 봉래의 정력이 흩어지니 비 자도 함께 흩어졌다’며 실로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삼일포는 고성군 삼일포리 남강 하류에 있는 석호로 금강산 근처에 있는 여러 호수 중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남강이 하류로 운반한 토사가 해안 작용에 의해 만 입구를 가로막아 형성된 자연호인 이 호수는 금강산 관광지 초입에 자리한 온정리에서 1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백두산 자락의 삼지연, 통천의 시중호와 함께 북한의 3대 관광 호수이고 명승지 제218호로 지정된 삼일포는 둘레가 5.8킬로미터, 길이가 1.8킬로미터, 너비가 0.6킬로미터쯤 된다. 2004년 여름 금강산 답사 중 삼일포에 간 일이 있는데, 삼일포는 무성한 송림과 푸른 물결로 금방 화장을 끝낸 해맑은 조선 처녀 같은 모양새였다. 고려 말의 문신인 정공권은 삼일포를 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한 호수의 좋은 경치 하늘이 만든 것이
서른여섯 봉우리 가을에 다시 맑구나
중류에서 배 띄워 가지 않으면
남석(南石)의 분명한 글자 볼 수 있으리
정자 앞에 비가 지나니 우는 모래 메아리치고
포구에 가을이 깊으니 낙엽 소리 들리네
안상(신선의 이름)의 그날 일 자세히 물으니
신선이 역시 풍정이 많았네
또한 홍귀달은 “옛날에 삼일포가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사선정에 올라왔네. 물은 흰 소반을 치고, 산은 푸른 옥 병풍을 둘렀네. 하늘이 비었으니 채색 구름 일어나고, 돌이 늙었으니 가을빛 맑구나. 신선은 간 지 벌써 오랜데, 옛 정자엔 지금 기둥도 없구나. 그 당시 유희하던 곳, 구름 밖에서 풍악 소리요, 천년 지난 우리들에게도 여섯 글자는 보기에 분명하네. 바람은 영랑호에 불고 달은 안상정에 떴네. 외로운 술항아리로 배를 매단 곳 여기가 원래 봉래의 영주라 한다네”라고 읊었다.
한편 채련은 “사선정 아래 물도 맑은데, 한 조각 작은 배가 늦은 바람을 희롱하네. 서른여섯 봉우리 여인의 쪽 찐 머리인 양 아름답기도 하니 반드시 미인을 배에 실어야 풍류더냐”라고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