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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을 사모하는 신부의 노래
아 5:9-6:3
9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11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13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15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3: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 5:9-6:3 / (아가씨들) 그대, 어여쁘고 어여쁜 아가씨야 우리에게 설명해 보아요. 그대가 찾는 그이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이가 다른 남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대가 그렇게도 우리에게 부탁을 하니 한번 설명해 보아요. 10) (신부) 내 사랑은 멋지고 늠름하다오. 만 사람 가운데에서 으뜸이라오. 11) 내 임의 얼굴은 구릿빛. 구릿빛에 미끈하게 생겼다오. 머리칼은 곱슬곱슬 까마귀처럼 검다오. 12) 내 임의 두 눈은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있는 비둘기 젖으로 씻고 시냇가에 앉아 있는 비둘기 같다오. 13) 내 임의 두 볼은 약초와 항료 풀로 가득한 동산처럼 그리도 사랑스럽다오. 입술은 나리꽃 뚝뚝 떨어지는 몰약에 촉촉히 젖은 나리꽃 같다오. 14) 손은 어찌 그리도 잘생겼는지 보석 박힌 황금반지 끼고 있다오. 그 몸은 상아로 잘 다듬은 조각품 청옥이 골고루 박힌 조각품이라오. 15) 두 다리는 희고 매끄러운 두 기둥 황금 받침대 위에 든든히 세운 기둥과 같다오. 그 모습 그렇게도 우람할 수야! 우뚝 솟은 송백 무성한 레바논 산악처럼 그리도 늠름할 수 있으랴! 16) 임께서 내게 입 맞추실 땐 그 입술 그리도 달콤할 수야! 임의 모든 것 아, 마냥 갖고 싶어라. 보라, 예루살렘 아가씨들아 내 임이, 내 사랑이 이렇게 생겠다오. 6:1) (아가씨들) 이리도 아리따운 아가씨야 그대 임은 어디로 갔느냐? 그이가 어디로 갔느냐? 우리도 알아야 그대와 함께 찾아보지 않겠느냐? 2) (신부) 향나무 자라나는 그이의 동산으로 내 임은 가셨다오. 그이의 동산에서 나리꽃 꺾어 모으며 그이 양 떼를 치고 있다오. 3) 내 사랑은 나의 것 나는 그의 것. 나리꽃 만발한 동산에서 양 떼를 치고 있다오.
술람미 여인의 친구들은 술람미 여인의 남자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함께 찾기로 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다시 한 번 그들 앞에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9-16) 여인의 친구들이 묻습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술람미 여인의 친구들이 이렇게 묻는 이유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하는 남자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금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듯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두루뭉술하게 압니다. 이런 물음에 대해 술람미 여인이 고백합니다. 피부와 머리, 눈과 뺨 그리고 입술과 손, 몸과 다리까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말합니다(10下).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라고 말합니다(13). 몰약을 언급하는 이유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표현입니다(5). 술람미 여인의 이런 고백을 볼 때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완전히 빠져야 합니다. 술람미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와 함께 찾으리라(1-3) 술람미 여인의 확실하고 분명한 고백을 듣고 친구들이 반응합니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친구들도 술람미 여인과 함께 사랑하는 남자를 찾겠다고 합니다(1). 같이 찾아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면 상대방도 궁금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갈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백합화를 꺾으며 양 떼를 치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다시 한 번 그 남자를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즉 ‘하나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하나가 됩니다. 교회도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교회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나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다른 사람 앞에서 고백해 보신 적 있나요? 그 분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남몰래 굉장한 일을 하는 사람에 걸맞은 사명 선언이 있습니다. ‘멋진 사람이 되자’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는 우리가 후드티의 뒷면이 아니라 속에 받쳐 입은 티셔츠, 즉 보이지 않는 곳에 ‘멋진 사람이 되자’라고 쓰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굉장한 일을 하면 예수가 우리를 더 좋아하실 것이라는 인식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그는 그러잖아도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래 전부터 우리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 설 교 >
사랑하는 분을 닮게 하는 사람
아가 5:9-16 / 강준민 목사
들어가는 말: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1. 사랑을 주고받으면 감정의 그릇이 넘치게 됩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11:16-1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누가복음 7:37-38)
2.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닮게 만듭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같구나" (아가서 2:2)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립보서 2:9-10)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계시록 1:13-15)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누가복음 4:22)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3)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 6: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 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6:43-44)
1) 깊은 사랑을 위해서는 관찰을 잘해야 합니다.
2) 깊은 사랑을 위해서는 표현을 잘해야 합니다.
3) 깊은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를 익혀야 합니다.
4) 깊은 사랑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깊은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로마서 5:5)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가장 행복한 사람
아 5:9-16 / 손상률 목사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라고 불리는 아가는 솔로몬 왕과 그의 애인 술람미 여인과의 주고받는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본문말씀에는 예루살렘 여인들로부터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술람미가 대답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고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칭송하고 자랑합니다. 술람미처럼 사랑을 알고 이것으로 즐기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1.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행복을 즐깁니다. 이 성경의 저자 솔로몬은 사랑을 죽음보다 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아 8:6).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 4:8). 바울은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3:8).
오늘날 그리스도인 중에 성경적인 지식과 믿음의 신비를 경험하고도 그의 삶속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순수한 사랑은 그자체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령 이성간의 애정(eros)이나 친구간의 우정(philia)또는 부모자식간의 혈연적인 사랑(stolge) 등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런 유의 사랑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도 있고 또 그자체가 지니는 불완전성 때문에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사랑(agape)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2. 사랑의 본질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본문 성경에 나오는 술람미는 사랑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솔로몬과 깊은 사랑에 빠져보았으며 왕의 가마를 타고 왕궁에까지 들어가서 신방을 차리기도 하였습니다(아 2:6-7).
지금은 잠시 사이가 멀어지고 자기혼자 솔로몬을 그리워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는 왕관보다 더 화려하고 행복하게 하는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고 한 말은 지금 그토록 연모하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는 말입니다.
여기 대하여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에게 “여자들 중에 지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9절). 술람미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게 뛰어난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이어서 머리부터 얼굴과 팔, 다리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느 것 하나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고 하거나 ‘제정신이 아니다’고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미쳤다고 할 만큼 그 사람에 매혹되고 거기에 온전히 빠져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술람미가 자기의 사랑을 가리켜 “희고도 붉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성결의 주님을 뜻합니다.
희다는 것은 흠이 없고 깨끗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의 무죄 성결하심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7:26에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사죄 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희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계시록 19:8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하였습니다.
2) 정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붉은 색깔은 매우 뜨겁고 정열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 술람미의 경우 그가 솔로몬 왕으로 부터 받은 사랑의 강도는 매우 파격적이고 열정적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으로서 지존다운 권위나 체면 같은 것은 무시하고 밤이슬을 맞으며 산촌 유벽한곳까지 술람미를 찾아서 나왔다거나, 또는 그의 문밖에 서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며, 그리고 술람미와 함께 누워 왼손으로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끌어안았다는 등 그의 사랑이 뜨거운 행동으로 이지고 있었습니다.
3)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붉은 색깔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나라에서 최고의 권세를 가진 왕이 이름 없는 평민의 한 여자를 위해 평복을 입고 왕궁을 벗어나 산길을 걸어 여인의 집에까지 찾아 나선 것을, 말할 수 없는 자기 비하(卑下)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부터 속량해주신 대속의 사랑이야 말로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최상의 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이는 그 어떤 대상으로 부터 받는 사랑과도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 요한1서4;9-10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죄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술람미의 경우 그가 황공할 만큼 솔로몬왕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면서 황홀한 감격에 젖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그가 있는 곳까지 친히 찾아와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가 2:8에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찾아온 왕은 그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아가 4:1에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라고 하며 최상급의 표현으로 그를 아름답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은 그가 잠시 그 행복을 망각하고 솔로몬을 놓쳐버렸을 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가 5:8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고 하였습니다.
4.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행복은 받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행복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크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관계에 있어서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평생 동안 주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모의 마음속에 그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기만 한다고 불행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줄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낙심하고 슬퍼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상대가 자기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자기가 사랑을 줄 수 없을 때 불행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의 행복은 주면서 느끼는 것이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과 사랑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의 지수도 병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1서 4:11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사랑의 행복이 완성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한 행복! 이것은 점차 가정에서 가족 간에 누리는 행복이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공유하는 행복인 것이며 나아가 삭막한 세상에서 이웃과 사회로 번져나가는 행복의 풍요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예찬
- 입이 달콤하니 전체가 달콤하다 -
아가서 5:10-16 / 이상호 목사
네 사랑하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롱기 섞인 말에 대하여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특징을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론은 내가 사랑하는 이는 이런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의 머리부터 아래 방향으로 일일이 묘사하는 시를 ‘와쯔프’ 라고 합니다. 이런 남자를 찾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10절)
우선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전체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라고 하여 희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피부색이 백인종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어에는 ‘자흐’sah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밝다, 빛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밝은 남자이고 어느 곳에 있든지 돋보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수천 명 중에서도 돋보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건강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회고도 붉다는 의미는 건강하다는 뜻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붉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희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결’입니다. 붉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 보혈의 피’입니다. 성막의 색깔은 흰 색과 붉은 색입니다. 보혈 즉 ‘구속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가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삼상 16:12)
사무엘에서는 골리앗을 이길 때에 다윗의 싱싱한 모습이 붉은 색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아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삼상 17:42)
따라서 붉다는 말은 정말 붉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이 무쇠 같다는 말은 쇠 같다는 말이 아니라 건강하다는 의미인 것과 같습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는 그래서 뛰어난 남자입니다. 눈에 띄는 남자입니다. 뛰어나다는 말은 다굴(dagul)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깃발’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깃발은 될 수 있는 대로 튀어나와야 합니다. 잘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여행할 때 가이드는 깃발을 들고 앞서갑니다. 여행자는 깃발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는 이렇게 건강하고 남들보다 튀는 남자라고 자랑하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11절)
머리가 순금 같다는 것은 위의 뛰어나다는 말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머리가 순금이기에 누구보다 돋보이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도 머리는 금이었습니다.
정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낮아지셨다가 왕이 되신 분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머리털이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활력이 넘치고 생명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예수님은 앞장서서 가시며 생명력이 넘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 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12절)
남자의 눈은 비둘기 같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시냇가의 비둘기 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막 지대입니다. 항상 물이 있는 곳이 강이고, 비가 올 때에만 물이 흐르는 곳이 시내입니다. 시냇가에 비둘기가 있습니다. 물이 있을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평안할 때입니다. 경치가 좋을 때입니다. 생명이 살아날 때입니다. 물이 풍부하며 행복할 때 비둘기 모습입니다.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우유로 씻은 듯한 눈입니다. 우유는 1년 12달 아무 때에나 있지 않습니다. 양들이 풍요로운 풀을 뜯어먹을 때에 우유가 생산됩니다. 우유 목욕을 한다는 것은 좋은 계절이고 행복스러운 환경입니다.
머리는 순금입니다. 눈은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풍족함을 느끼게 하는 느긋함이 있습니다. 시냇가에서 목욕한 눈처럼 맑고, 우유로 목욕을 한 것처럼 청초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 말을 한없이 온유하시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안심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아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 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13절)
이제 남자의 뺨과 입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후각적 이미지입니다. 뺨은 꽃 같지 않고 꽃밭 같습니다. 풀 같지 않고 풀언덕 같습니다. 입술에서는 몰약 향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향기를 품고 있는 후각적 이미지입니다. 몰약은 먹는 향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각적 이미지까지 첨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뺨도, 입술도 모두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모습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꽃밭 같고, 풀 언덕 같다는 말은 원수들에게 채찍으로 맞고 침 뱉음을 당한 고통스러운 얼굴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술은 백합꽃 같습니다. 백합꽃은 나팔같이 생겼습니다. 그 입술에서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진리의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떨어진다는 말은 ‘나타프’인데 이 말은 말한다, 예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몰약은 십자가 고난을 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14절)
남자의 손은 황옥을 박아서 만든 노리개 같습니다. 머리가 순금인데 팔은 황옥 박힌 황금입니다. 황옥은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투명한 것도 있고 반투명한 것도 있습니다. 제사장의 흉패에 달았습니다(출 28:17). 두로왕의 치장품이었습니다(겔 28:13). 천국을 장식하는 데에도 사용하였습니다(계 21:20).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몸은 상아 같습니다. 상아는 비싼 것이기도 하지만 단단합니다. 상아만큼 단단한 뼈도 없을 것입니다.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근육이 단단합니다. 청옥같이 보기 좋고 단단한 근육입니다. 여자는 지금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최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눈으로 범죄하고, 여자는 접촉으로 범죄하기 쉽다고 탈무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눈으로 보기에도 좋게 치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상하고 아름다운 손길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의 권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막지 못하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강한 힘으로 머리털까지 세시는 세밀함도 가지고 계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신다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하구나”
상아는 가장 강한 뼈입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죽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강하신 분인데 죽어서 진실로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상아 같은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상아 같은 예수님만 구하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15절)
사랑하는 남자의 다리를 표현하는 것도 특이합니다. 순금 받침 위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습니다. 화반석은 대리석입니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이 대리석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같습니다. 백향목은 균형이 잘 잡힌 나무입니다. 게다가 향기까지 뿜어내고 있습니다. 머리부터 팔, 몸 그리고 다리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남자입니다. 예수님의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습니다. 순금은 왕권입니다. 예수님의 기본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왕이십니다. 화반석은 아름다운 대리석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버티고 계시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기둥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온 세계의 희망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의 기둥이십니다. 그분 외에는 어느 곳에도 진실함이 없습니다.
다리는 행함의 상징입니다. 행동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의 다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절대 순종하는 예수님의 다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다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우리는 주님만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은 레바논 같습니다. 레바논이란 ‘하얀 산’이라는 뜻입니다. 레바논산은 2,000미터가 넘는 산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산중의 산입니다. 정상에는 눈이 덮여 있습니다. 보기 좋은 산입니다. 예수님은 산중의 산으로 항상 우뚝 솟아 계신 분이십니다.
독수리는 작은 새들이 덤비면 같이 싸우지 않는 새입니다. 높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다른 새들은 따라 오를 수가 없습니다. 차원 높게 사는 새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싸우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조금 떨어지시면 됩니다.
사탄이 덤벼도 차원을 달리하시면 더 이상은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사탄의 공격은 한계가 있습니다. 레바논 산은 다른 산과 달리 우뚝 솟아 있는 산입니다. 예수님은 백향목처럼 보기 좋은 분이십니다.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예수님의 사진을 보면 얼굴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진을 보아도 누구도 모두 예수님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백향목 나무는 시원스럽습니다. 균형이 잘 잡힌 나무 중의 나무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백향목이십니다.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16절)
여인은 남자에 대한 높임을 입에서 전체를 종합함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입은 달콤하고 전체는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남자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친근함을 돋보이게 하는 표현입니다. 친구란 구김살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입은 달콤합니다. 조금 달콤한 것이 아니라 심히 달콤합니다. 마이크도 없던 시절에 벳새다 광야에서 아침부터 5천 명에게 말씀을 전하시는데, 밤중까지 아무도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말하기 불편하고 듣기에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도 기적이지만 현장의 상황도 기적입니다. 어떤 학자는 갈릴리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지역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팔복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여덟 가지 축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태 5:1-2)
그리고 주옥같은 말씀이 그 입에 풀려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말씀이 나오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입을 열어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 왕이 최고였습니다. 어디를 보나 자기 신랑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겁니다. 내 신랑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별스럽지 않게 보아도 내가 볼 때 이상적인 남자로 보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흠도 많고 탈도 많지만 내가 볼 때는 그것이 다 매력으로 보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상적 부부입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라는 고백으로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부지간에도 이와 같고 주님에 대해서도 그래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과도 행복하고 부부와도 행복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 예수
아 5:9-16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더욱이 아가서에는 하나님이란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경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정경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솔로몬의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가서에서 주님을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데, 오늘의 본문은 이 부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열기가 점차 식어지면서, 신랑 솔로몬을 가다리는 간절함도 소원해진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 밤이슬을 맞으며 찾아온 애인을 돌려보냈고, 그후 후회를 하면서 그를 찾으려고 거리로 좇아갔으나 행순하는 자에게 봉변을 당하고 허탈하게 돌아오면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자신의 애인을 만나면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는 말씀까지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이 질문
예루살렘 여인들은 술람미 여인의 부탁을 받고, 너의 애인이 다른 사람의 애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가고 묻습니다.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아 5:9).
그러자 술람미 여인은 그의 애인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는데, 오늘은 그가 소개한 솔로몬 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우선 예루살렘 여인들의 질문에서 영적인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도 솔로몬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이 느끼고 체험한 솔로몬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느낀 솔로몬 왕이지만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을 몸소 모시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면서 느끼고 체험한 솔로몬 왕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과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은혜를 받지 못하였을 때는 예수님에 대하여 막연하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다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달라졌습니다. 더욱이 그의 말씀을 상고하면 할수록, 기도를 하면 할수록 느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에 대하여 예루살렘 여인들이 가지는 관점이 있고, 술람미 여인이 가지는 인식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이 가지는 인식이 있고, 그리스도인 가지는 인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 여하에 따라 영생과 죽음이 엇갈리게 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인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다운 예수님 관(觀)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을 그대로를 가지고 있습니까?
희고 붉다
이제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대답한 것을 중심으로 주님의 모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언급하고(아 5:10), 다음으로 10가지 특징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아 5:11-15).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아 5:16). 오늘은 그가 지적한 10가지를 모두 설명할 수 없고, 그 중 몇 가지만을 설명하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아 5:10).
그는 솔로몬이 희고도 붉다고 하였습니다. 이 희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흰색이란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마 17:2) 그 옷의 광채가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다"(막 9:3)고 하였는데, 그렇게 흰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의 얼굴이 희다는 것은 왕자로서의 존귀한 용모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눈이 부시도록 희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색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최후의 대심판을 진행하시는 보좌를 "크고 흰 보좌라"(계 20:11)고 하였고, 천상의 "24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보좌를 둘러앉았다"(계 4:4)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입은 흰 세마포는 속죄를 받은 것을 의미하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고 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흰색은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성결, 그리고 그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희기도 하려니와 붉기도 합니다. "붉다"는 히브리 원어는 아름 ( )이란 말인데, 붉은 피란 말에서 유래 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보통 혈색이 좋다는 뜻으로, 건강미가 넘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이 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는 그의 인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까지도 지극히 사랑하는 뜨거운 심정을 가진 분으로써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려주신 사랑의 주님이심을 가르치는 낱말입니다. 과연 주님의 인애하심은 만인 위에 초출(超出)하십니다. 그와 견줄 아무도 없을 만큼 유일무이한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정리를 하겠습니다. 솔로몬이 희고도 붉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로써 예수님은 흰색의 신성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붉은 피의 색으로 상징되는 인성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정금같은 머리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아 5:11).
정금이란 히브리 단어는 케뎀, 파즈 ( )란 복합 명사입니다. 케뎀이란 간직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금은 보통 은밀한 곳에 저장하여 두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요즘 말로는 장롱 속에 감추어진 금괴란 뜻입니다.
파즈는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였다는 뜻으로써 100% 순금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솔로몬의 머리는 정금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미국의 유명한 영화 배우 율 부른너와 같이 머리카락이 전혀 없는 머리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솔로몬은 금으로 만든 왕관을 머리에 썼고, 얼굴은 불그스레하여 건강미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의미는 솔로몬 왕이 금 면류관을 쓰고 전국을 통치한 것처럼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 천하를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으로써 그의 머리는 정금과 같은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과거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할 때, 그를 정금 머리에 비유한 것처럼 만대에 빛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정금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애모하면서도 그를 단순한 애인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일국을 다스리는 영광스런 왕으로 생각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인이며 왕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며 충성하며 그에게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반석 다리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아 5:15).
솔로몬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같다고 하였는데, 첫째로 정금 받침이란 그의 신발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이집트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옛날 왕들이 신었던 신발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 신발이 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부귀와 영화가 최고로 달하였던 솔로몬이 순금 신발을 신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둘째로 그의 다리가 화반석 기둥같다는 것은 순백색의 대리석과 같이 희고도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건강한 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건강한 다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 오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고 빌라도에게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고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합니다(요 19:31).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행악자들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아니하고 아리마데 요셉에게 시체를 인계해 주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요 19:36)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다리는 왜 꺾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왜 꺾지를 못하게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그의 다리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두 다리는 그의 신실한 성도의 구원을 보장하는 굳건한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옛 뱀의 후손인 빌라도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고 예수님의 발에 못을 박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대리석 기둥 같은 강건한 다리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죄의 권세를 도말하셨으며, 마귀의 세력을 무찌르셨습니다.
그러나 화반석과 같이 굳건한 다리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리석은 변질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향한 주님의 구원의 언약도 변함이 없는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는 성정을 버티고 서있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야긴이고 또 하나의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야긴이란 영원 불변이란 뜻이고, 보아스란 능력이란 뜻입니다.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이 성전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건강한 다리는 영원 불변하시는 구원의 약속과 그의 능력으로 사랑하는 백성들을 지키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영원하심을 믿으십니까? 세상은 바뀌고 인심은 변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과 섭리와 사랑과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레바논 산과 백향목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아 5:15)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인격의 장엄 수려함이 레바논 산과 같고, 고상함과 출중함이 백향목과 같다는 것입니다. 백향목은 장생하고 장청하는 나무로써 사시사철 울울창창할 뿐 아니라 거센 바람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굽히지 않는 곧고 굳게 서있는 나무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성품과 유사한데 주님은 백향목처럼 아름다우며 사시사철 푸르러 공중의 새 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짐승들이 언제라도 그 밑에서 쉼을 얻는 것처럼, 만인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은택을 입고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달콤한 입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아 5:16).
이 말씀은 여러분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고 결론을 맺기로 하겠습니다. 뽀테헤르(Botteher)라는 학자는 약간 속된 생각을 가지고 이 말씀을 해석하였는데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라고 하신 말씀을 남녀가 Kiss를 할 때 느끼는 감미로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상스럽지 못한 마음과 생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고 위험한 일입니다.
"입이 심히 달다"는 말의 입이란 입술이 아니라 음성을 내는 성대를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애인의 언사가 감미롭다는 뜻입니다. 애인의 말속에 사랑이 깃 들어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감미롭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바 여왕도 "복 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 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왕상 10:8)고 한 것입니다.
과연 사랑의 언사는 듣는 자의 마음에 안위와 감화를 주고, 삶의 기쁨과 보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범죄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요 8:11)고 하심으로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는 여인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고 물으심으로 위축되었던 그의 가슴을 활짝 열어주시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자애로운 음성이 나오고, 사랑으로 위로하는 말씀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의 입술이 달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도 속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진정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서로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힘을 돋구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감미로움이 주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감미로움이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아 5:16). 솔로몬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고백한 말은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라 하여도 나와 관계가 없으면 별로 귀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에 대하여 미사여구의 말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모두 빈말에 불과하고, 남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아니라면 그의 풍성한 사랑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고, 은혜와 인애하심이 넘친다 하여도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이 나의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가 귀하고 그의 사랑이 내 것이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되어야 그의 크신 은혜와 넓으신 사랑이 나의 것이 되고, 그가 베푸시는 축복과 구원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고 영접하셨습니까? 아멘
그의 충만한 은혜가 모두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자
아가서 5:9~16 / 이장우 목사
지난주에 술람미가 잠결에 찾아온 신랑을 놓쳤습니다. 잠시 지체하다가 문을 열었는데 그는 벌써 물러갔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나를 찾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는데 내가 혼이 나갔다고 하면서 찾아 나섭니다.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안을 두루 찾는데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술람미를 쳐서 상하게 하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겉옷을 벗겨 가져가 버렸습니다. 술람미의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를 만나야 하겠기에 예루살렘 딸들에게 부탁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 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를 여자들 가운데 어여쁜 자라고 부릅니다.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으니 이렇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성안에서 맞았고 겉옷도 빼앗겨 버렸기에 조롱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같은 여자가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만약 술람미가 세상의 영광스러운 모습이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상처를 받았고 겉옷을 빼앗긴 초라할 몰골인데 내가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그런 꼴을 하고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느냐고 힐난 할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세상에서 멋있고 잘 되어야 내가 믿는 예수님의 영광도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시편 42:1~3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1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3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술람미를 향하여 하는 말이 조롱의 말이라면 시편 42편의 이 내용도 사람들이 비웃으며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오늘 본문 10~16절 새 번역입니다. “10 나의 임은 깨끗한 살결에 혈색 좋은 미남이다. 만인 가운데 으뜸이다. 11 머리는 정금이고, 곱슬거리는 머리채는 까마귀같이 검다. 12 그의 두 눈은 흐르는 물가에 앉은 비둘기. 젖으로 씻은 듯, 넘실거리는 못 가에 앉은 모습이다. 13 그의 두 볼은 향기 가득한 꽃밭, 향내음 풍기는 풀언덕이요, 그의 입술은 몰약의 즙이 뚝뚝 듣는 나리꽃이다. 14 그의 손은 가지런하고, 보석 박은 반지를 끼었다. 그의 허리는 청옥 입힌 상아처럼 미끈하다. 15 그의 두 다리는 순금 받침대 위에 선 대리석 기둥이다. 그는 레바논처럼 늠름하고, 백향목처럼 훤칠하다. 16 그의 입 속은 달콤하고, 그에게 있는 것은 모두 사랑스럽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임, 나의 친구이다.”
희고도 붉다는 단어로 예수님의 완전함과 피 흘리심을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 교부들이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머리가 순금이라고 하니 성경에서 금의 의미를 찾아서 설명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몇 단어 외에는 그렇게 찾지 않고 신랑의 완벽한 아름다움으로만 봅니다. 머리, 머리털, 눈, 뺨, 입술, 손, 몸, 다리를 가장 좋은 것으로 비유하면서 아름답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런 아름다운을 갖춘 자가 다윗의 아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4:25~26절입니다.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라고 합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솔로몬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압살롬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어머니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입니다(삼하3:3). 그러나 이런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왕을 반역하다가 쫓깁니다. 쫓기는 중의 그의 머리털이 나뭇가지에 걸리자 노새는 빠져 나가고 나무에 달린 겁니다(삼하18:9). 결국 요압의 창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삼하18:14).
그런데 솔로몬은 어떤 어머니였습니까? 밧세바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임신하자 그 남편을 살해합니다. 그런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자가 솔로몬입니다. 외모로도 출신으로도 솔로몬은 압살롬의 상대가 못 됩니다. 그런데 왜 솔로몬이 다윗을 이은 왕이 됩니까? 인간의 죄가 무언지 하나님의 용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솔로몬에게 주신 이름이 여디디야입니다. 여호와께 사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삼하12:25).
이런 솔로몬이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를 사랑한 것도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거나 겉모습만 보면 안 됩니다. 겉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는 압살롬이지만 왕을 반역하고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새 언약으로 봐야 합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율법 조문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합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고 영은 살립니다(고후3:6). 영이 살린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완성의 빛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가서 5:5절입니다.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는데 신랑은 없고 몰약의 즙만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집니다. 이제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는데 그 흔적이 몰약입니다. 이 몰약이 대하여 오늘 본문 13절에도 나옵니다.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입술을 백합화 같은데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몰약의 흔적을 따라 신랑을 찾아 나섰는데 그 신랑의 입에서 몰약의 즙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찬송가 297장 4절입니다. “산길에 흘린 피 흔적 그 누가 흘렸나 길 잃은 양을 찾느라 저 목자 흘렸네 손발은 어찌 상했나 가시에 찔리셨도다 가시에 찔리셨도다” 양 아흔 아홉 마리가 울안에 있지만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내용을 찬송한 내용입니다. 술람미가 손가락에 묻은 몰약의 향을 흔적으로 찾아 나섭니다. 자신의 모습이 상처를 입고 겉옷을 빼앗겼지만 그 신랑만 만나면 그 신랑이 자신의 모든 수치를 가려주는 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피 흔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그 입이 심히 달콤하다고 합니다.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합니다(잠16:24).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 내 입에 꿀보다 더 달다고 합니다(시119:103).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달콤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느라 분주하였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불평하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지만 마리아는 빼앗기지 아니할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눅10:40~42).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빼앗기지 아니할 일입니다.
본문 16절을 한 번 더 봅니다. 술람미가 내 사랑하는 자를 친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13~15절입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며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와 자신을 그리고 아버지와의 연합을 이루어내십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자기 백성들에게 이루어내시는 일이 그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내용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의 영광을 본다고 합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합니다. 이런 증언을 할 수 있는 것은 요한의 혈과 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혈과 육은 십자가 앞에서 도망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요한이 이 증언을 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시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뜯을 다 드러내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벌거벗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어지는 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술람미처럼 상처입고 겉옷이 벗겨져도 그 사랑하는 분을 찾아가면 됩니다. 우리를 가리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았지만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아름답습니다.
요한일서 3:1~5절입니다.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습니까? 상처 입고 겉옷을 빼앗긴 모습으로 내 사랑하는 이를 찾는다고 하는 모습이 이 역사 속 성도의 모습니다. 신부와 친구와 자녀로 불러지지만 세상이 볼 때에는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장래에 어떻게 될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가 그와 같이 됩니다. 그의 참모습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죄를 불법인데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시기에 점도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하게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덧입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14~18절입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자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역사 속 성도입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완성된 묵시의 세계에서는 완벽한 아름다운 분을 덧입는 흔적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13~16절입니다.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사랑하는 자의 완벽한 아름다움의 완성된 모습이 이렇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묵시 속에서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 영광 앞에 요한도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요한에게 손을 얹으시며 두려워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살아있는 자라고 하시면서 전에는 죽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성령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내 사랑하는 자’를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뛰어나심과 그에 대한 교회의 탐구
아 5:9-16
Ⅰ. 이 여인의 부탁에 답하여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 대해 묻는다(9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그들이 이 신부에게 부치는 경애스런 칭호. "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신부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살렘의 모든 딸들의 눈에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자가 되게 하신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회이고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한 교제이며 지성소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인 미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가장 훌륭한 백성이다. 거룩함은 영혼의 조화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와의 일치이다. 그것은 그것을 적절히 판단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의 눈에든지 돋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잘 모르는 자들조차 그의 형상을 띄는 자들이 가지는 사랑스런 아름다움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비록 상이한 의복을 걸치고 있더라도 우리가 어디서 보게 되든지 간에 그의 형상을 사랑해야 한다.
2. 그녀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그들의 물음.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네가 우리로 하여금 너를 위해서 그를 찾게 하려거든 우리가 그를 보더라도 그인줄 알 수 있도록 그의 특징을 말해다오."
(1)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토록 야단법석을 떠는 이 여인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한다. "어째서 너는 딴 사람들이 자기 사랑을 찾아 다니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토록 네 사랑하는 자를 찾으려 하느냐? 왜 너는 딴 사람들이 그에게 대해 친절심을 품고 있는 것보다 더 그에게 집착하려는가?" 신앙 생활에 열성적인 자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자들에게 의혹을 품게 한다. 그리고 많은 부주의한 자들이 열심이고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가 딴 사람들보다 그토록 더 매력적인 점은 무엇이냐? 그가 가고 없다면 너는 여자들 중 극히 어여쁜 자이니까 쉽사리 딴 사람을 마찬가지의 정열로 소유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이와 같이 육욕에 찬 마음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훌륭함도 비상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품성이나 직분, 그의 교훈이나 은총 안에서도 계속적인 마음으로는 훌륭하고비상한 아름다움을 도무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아는 지식이나 세상과의 교제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그와의 교제가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2) 그러나 딴 사람들은 이것을 오히려 진지한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이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의 의도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한다.
1) 신부를 위안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여인이 자기의 신랑에 대해 잠깐 얘기만 하더라도 새로운 심령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운 점들을 묘사하는 즐거운 작업보다 이 여인을 더 기쁘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녀의 슬픔을 이보다 강력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2) 그들 스스로가 정보를 얻기 위하여. 그들은 그가 훌륭하며 영화로운 분이라는 것을 대체로 알았지만 한층 상세하게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무엇이 이 신부로 하여금 그토록 대단한 격정과 관심을 가지고 자기 사랑에 대해서 자기들에게 부탁하도록 감동시켰을까 궁금히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게는 딴 사랑스러운 자들과 다른 어떤 점이 틀림 없이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점을 확실히 알고 싶어하였다.
그리스도와 그의 초월적인 완전함에 대해 사람들이 탐문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들에게는 모종의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이 이방인의 믿음으로 유대인을 격동시켜 거룩한 경쟁을 붙였듯이(롬 11:14) 때로는 그리스도를 찾는 자의 비상한 열심은 많은 사람을 분기시키는 수단이 된다(고후 9:2; 요 4:10 참조).
Ⅱ. 신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교훈을 베풀고 도와 줄 태세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경험이 풍부한 크리스챤은 딴 사람들도 그분을 숙지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이 여인은 전반적으로 그가 비할 데 없이 완전한 분이시며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분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준다(10절).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알지 못하는가? 예루살렘의 딸들이 예루살렘의 면류관이시고 그 면류관을 쓰신 머리가 되시는 그분을 모를 수 있단 말이냐? 만약 모른다면 내가 말해 주마."
(1) 그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자기 안에 지니고 계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다." 이러한 색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이루는 색이다. 이것은 그가 성육하셨을 때 그의 몸이 비상히 아름답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아기 예수께 대해서는 아기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가 "매우 아름다왔다"고 한 그런 표현이 없다. 행 7:20 아니, "그는 모양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었다." 사 53:2) 그의 신적 영광을 가리키며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연합됨을 시사한다. 이것은 신적 조명을 받아 영적 사물을 식별하게 되는 자들의 눈에는 참으로 그가 사랑스러운 자로 보이도록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거룩한 아기 예수였다. 그것이 그의 아름다움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계시되신 대로 그의 "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성별되심"과 "구원하심"을 바라 본다면 그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우신 자로 나타나신다.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자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티하나 없는 순결하신 삶으로는 "희고" 죽기까지 당하신 피흘림의 고초로는 "붉으며"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광으로는 "희고"(그가 변형되셨을 때는 "그의 의복이 빛과 같이 희었다") "아담"(붉은 흙이란 뜻)의 성질 곧 인성(人性)을 취하셨다는 점으로서는 "붉다." 또한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의 따사로우신 온정으로는 "희고" 그와 자기 백성의 대적들에게 대한 그의 두려우신 모습으로는 붉다. 그의 외양은 매우 행복하면서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2) 그는 다른 어떤 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갖고 계신다. 그는 "만 사람에게 뛰어난다." 그는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시며 "인간의 자손들보다 더 어여쁘고" 그 어떤 사람보다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와 같은 자는 없으며 그에게 비교될 자도 없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와 비교하면 잃어버려도 좋은 것이요 오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빌 3:8). "그는 세상 열왕들보다 더 높으시며"(시 89:27) 상계나 하계의 어떤 주권자나 권세자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빌 2:9; 히 1:4). 그는 "만 사람 중 기수"이다(뛰어난다는 단어는 깃대를 드는 자란 의미도 지닌다). 기는 으레 부대원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운 자가 들게 마련이다. 그는 친히 "기호로 섰으며"(사 11:10) 우리는 그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하며 언제든지 그 기호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그는 "일만인 중 가장 아름답고" 이만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분이시다. 왜 그가 우리의 영혼 속에서 가장 내면 깊숙히 그리고 가장 윗자리를 점유해야 하는 지의 모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2. 이 여인은 그의 재예(才藝)에 관한 개개의 명세서를 제시하며 그의 능력이나 팔등신 같은 균형미를 숨기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사랑스럽다. 여기에서 이 여인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제시해 주는 사례는 열 가지로서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없다. 이것을 억지로 비틀어 해석하려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흘리게 만드는 일이며 말씀을 왜곡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열 가지 비유의 목적은 그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자기의 사업에 적합한 자격을 구비하고 계시며, 우리의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될 만한 모든 점을 다 자기 안에 갖추고 계신 분임을 나타내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일(계 1:13 이하)은 본문의 신부가 그에게 대해 묘사하는 표현에 비할 수 있으며 이 양자의 의도는 그를 초월적 영광의 소유자로 나타내는 데에 있다. 즉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신 그분이 신도들의 눈에 사랑스런자로 보이게 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그의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두 표현의 의도인 것이다.
(1) "그의 머리는 정금 같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 이시고"(고전 11:3) 성도들에게는 "전능자가 저희의 금," 곧 저희의 방어자, 저희의 보물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 주셨다(욥 22:25). 하물며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하심이 육체로거하시는"(골 2:9) 그리스도께는 한층 더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머리는 만물에 대한 그의 지고하신 통치권과 자기 교회와 그 모든 구성원에 대한 그의 생생한 영향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금"과 같고 또한 "금"이기도 하다. 앞에 나오는 금이란 단어는 원래 의미대로 금의 번쩍거림을 뜻하고 뒤에 나오는 금이란 말은 금의 강함과 굳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느부갓네살의 군주 정치는 여타의 모든 왕권을 능가하였기 때문에 "금 머리"(단 2:38)에 비유되는데 그리스도의 다스리심도 그와 같은 것이다.
(2) "그의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검구나." 그러나 그의 두 발은 "게달의 장막처럼 검은" 것이아니다. 게달의 장막에게는 검은 것이 보기에 흉한 것이었고 따라서 교회는 스스로 그것을 피했었다(1:5). 반면에 그의 머리털은 "까마귀처럼 검다." 까마귀에게는 검다는 것이 곧 그의 아름다움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모발은 "희다"고 표현(계 1:14)되는데, 이는 그의 영원성 곧 그는 "옛적부터 계신 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검고 고불고불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언제나 젊고 그에게는 쇠함이 없으며 늙게 하는 것이 없음을 상징한다. 신자들의 눈에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나 사랑스럽게 보이는 까닭에 그의 머리털조차도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한 그의 "머리털"이 그가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동안 "밤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에 이슬"이 가득하였다고 하는 것은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2절).
(3) "그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이" 아름답고 맑으며 정결하고 인자하구나. 비둘기들은 시냇물을 좋아하며 거울처럼 그 물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눈은 깨끗하게 하기 위해 씻겨졌고 희게 하기 위해 젖으로 씻겨졌으며 "아름답게 박혀서" 튀어나오지도 움푹하게 들어가지도 않았구나. 그리스도께서는 "눈이 너무나도 정결하여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합 1:13) 이는 그 눈이 비둘기 눈인 까닭이다. 여기에서 신부가 "그의 눈"에 대해 말하듯이 모든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해 즐거움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눈이 비록 자기 대적들에게는 "불꽃"같아서 공포를 안겨 주지만(계 1:14)그의 친구들에게는 "비둘기 눈"처럼 다정스럽고 위안을 주는 눈이니, 이는 그의 눈이 그들의 성실함에 대한 증인이 되는 까닭이다.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늘 그리스도의 시선 하에 있는 것처럼 행하는 자들은 복되고 거룩하다.
(4) "그의 뺨"(얼굴의 돌출부)은 정원에서 재배되는 "향기로운 꽃밭 같다." 꽃밭은 정원의 아름다움이며 그 재산이 된다. 또 그의 뺨은 "향기로운 풀 언덕"이나 달콤함의 망대와도 같다. 그리스도의 용안에서 모든 성도들의 눈에 사랑스럽게 비치는 곳은 바로 이 뺨이다. 극히 짧은 시간에 흘낏 쳐다봐서도 사랑스러운 것은 이 뺨이 그의 얼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영혼에게 대해 잠깐만 살펴보시더라도 그것은 그 영혼을 소생시키며 원기를 북돋아 주고 가장 현란한 꽃이나 짙은 향기보다 더욱 향기롭게 된다.
(5) "그의 입술은 백합화 같다." 그러나 백합처럼 흰 게 아니라 백합과도 같이 향기롭고 즐거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도 성별된 모든 자에게 "꿀이나 꿀송이(벌집)보다 더 달다." "그 입술의 입맞춤" 즉 그의 모든 은혜로운 교제도 향기롭고 즐거운 것이다. "그의 입술에는 은혜가 담겨져 있어서" 그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 "그의 입술"은 "백합화"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자연 속의 그 어떤 백합화에서도 몰약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며 자연 속에 있는 어떤 사물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빼어나심을 완전히 그려 낼 수는 없다. 그러나 비유로써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혼합으로 그 영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6) "그의 손은" 유명한 보석. 즉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14절). 위인들은 손가락에 다이야몬드가 기타 보석을 박은 금반지를 끼고 손장식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그의 손" 자체가 "금반지처럼" 보였다. 그의 권력에 의한 모든일기, 그의 손이 하시는 일, 그리고 그의 섭리와 은총이 수행해 내시는 모든 것은 전부가 다 황금처럼 부요하며 "보배로운 줄마노(onyx)와 청옥(sapphire)처럼" 귀중하고, "금반지"가 손가락에 꼭 맞듯이 모두가 다 그 의도대로 목적에 부합하며 "황옥을 물린 반지처럼" 전부가 다 아름답고 매우 어울린다. 자기 백성을 영접하거나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펼치신 그의 손은 이렇게 부요하고 아름답다.
(7) "그의 몸은 아로새긴 상아같다." "그의 심금(원래의 뜻은 내장)은 찬란한 상아 같구나." 원문에서는 그의 배(腹部)라고 되어 있으나 그 보다는 그의 마음이라도 번역하는 게 옳을 듯하다. 4절의 "마음"이란 말에 사용한 단어도 이 단어와 동일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사 63:15; 렘 31:20)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의 배우자에게 자애로운 동정심과 애정을 의미하며 황량하고 버림받은 상태에 처한 그녀에게 대해 그가 품고 있는 사랑을 뜻한다. 그가 품는 이 사랑은 훌륭하게 손질해 놓고 "청옥으로" 화려하게 "입혀 놓은, 아로 새긴 상아" 같다. 그 사람 자체만 해도 강열하고 견고하지만 그 사랑의 사례와 상황은 휘황 찬란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가치에더 더 많은 것을보낸다."
(8) "그의 다리는 화반석 기둥 같아서" 매우 강인하고 당당하며 아무런 흠이 없어서 그 다리가 놓이는 "정금 받침에" 조금도 치욕이 되지 않는다(15절). 이 표현은 그의 안정성과 견실함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자기 발을 놓는 곳이면 그 곳에서 발을 고정시키고 계실 것이다. 그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인 통치의 모든 무게를 감당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의 다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 우리 왕이 그의 성소에서 행차" 하실 때의 위풍당당하심과 장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며(시 68:24) 자기 백성에게 대한 그의 모든 섭리가 시종일관하고 공평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길은 공평하며" 그 모두가 "자비요 진리"이다. 이들은 하늘이 기둥보다 더욱 오래가는 "화반석 기둥"이다.
(9) "그의 형상"(그의 외양과 풍채)은 저 웅자(雄姿)를 드러낸 레바논 같구나. 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은 저 즐거운 숲이나 공원의 경치 같으며, 높이나 강도에 있어 딴 나무를 능가하며 훌륭하게 쓰이는 "백향목처럼 훌륭하구나." 그리스도는 좋은 분이시다. 우리가 그를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에게서 더욱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 "그의 입을 심히 달다." 그의 입은 감미로움 그 자체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미로움"이다(이 단어는 추상 명사임에도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입은 단 것의 순수한 정수(精髓)이다. 아니 그것은 모든 즐거움의 진수(眞髓)이다(16절). 그 입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는 매우 달아서 어린 아이들에게 주는 젖과 같이 달고(어린 아이에게는 젖이 기분 좋은 음식이다) 다 자란 이들에게 주는(성인들에게 꿀은 맛이 나는 음식이다) 꿀과 같이 달다(시 119:103). 그 입의 입맞춤은 그의 사랑에 대한 모든 표시로서 그 입맞춤 자체에 초월적 감미로움을 포함하고 있기에 자기들의 "영적 감각을 활동"시키고 있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믿는 너희들에게는 그가 보배로우신 분이다."
3. 이 여인은 믿음과 소망에 대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며 따라서 자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있다.
(1) 여기에는 주 예수의 완전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확신이 나온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전체가 아무런 흠하나 없는데 어찌하여 내가 구석구석 세부적으로 언급해야 하나?" 이 여인은 자기가 그에게 대한 세부적 묘사를 함으로써 그를 잘못 대우한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자기의 묘사가 그 대상의 위엄이나 장점에는 미쳐 불급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전체적인 찬사로써 돌연 끝을 맺는다. "그는"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전체적으로 사랑스럽다. 그에게는 사랑스런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에게 있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스럽지 않다. "그는 온갖 사모와 소원의 대상이다." 그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모든 소원은 그를 향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토록 주의를 기울여 그를 찾고 그가 없이는 만족히 쉴 수도 없는 것이다. 그토록 사랑스런 그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여기에는 그에게서 얻은 이익에 대한 이 여인의 전적인 소망의 확신이 나온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자요 나의 친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토록 그를 그리워한다고 하여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이 여인이 얼마나 거룩하고 담대하게 그와의 관계를 주장하며 얼마나 거룩하고도 의기양양하게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훌륭함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를 보되 그를 우리의 것으로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라기 보다 오히려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를 보며 동시에 그가 우리의 소유임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민족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참된 신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1) 그리스도께 전적인 동의를 보내는 자. "그는 내것이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시다. 복음의 언약이 갖는 취지에 따라 그는 내것이며 나에게 부여된 모든 관계에서 내 것이고, 내게 모든 것이 되어 주셔서 나의 불쌍한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2)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만족을 얻는 자. 이것은 여기에 뽐내는 듯한 태도로 서술되고 있다. "이분은 내가 택한 자요, 나 자신을 들어바친 분이시다." 나는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이외에는 나 자신을 죄다 들어 바친 분은 없노라. 그는 내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분이시니 그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신뢰하는 분이시며 모든 선을 기대하는 자이시니 "그는 나의 친구인 까닭이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삼는 자들은 그를 자기들의 친구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특별한 친구가 되시니 이것은 과거에도 그러하셨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를 친구로 삼고 있는 자들은 그를 자랑하고 그에 관해 기쁨으로 말할 만한 이유를 가진다. "딴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 의해 지배받고 세상과의 교제나 세상의 호의 속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구하지만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 타인들은 자기들 좋은 대로 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영혼이 택한 분은 이분이시다. 그는 내 영혼의 안식이요, 내 생명이며, 나의 기쁨이고, 나의 전부다. 그는 내가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싶어하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