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도 더 전에 나는 그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대학생 애인을 허름한 술집에서 때려 누이고 난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
첫사랑 치고는 되먹지 않는, 순진한 사춘기 소년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랑을 했다.
그녀 역시 그랬을 거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술집에서 색시들의 몸파는 장면을 수도 없이 봐왔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그녀의 대학생 애인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당연히 멋있는 일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그녀와의 기억은 별로 없다.
별 다른 대화와 추억은 마치 그녀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창녀촌의 아가씨가 선원들에게 했던 것처럼 닮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내가 어머니의 강권으로 묵호를 떠나 서울 종로 2가 학원으로 쫒겨 갔을 때, 그녀에게 온 편지를 보고서야 난 그녀를 겨우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나의 첫사랑은 또 있었던 것 같다. 두 개의 첫사랑이었다.
그녀와의 첫사랑 이전에 난 이미 순결을 잃은 몸이었다.
강릉에서 전학을 와서, 굴복을 강요 하던 묵호 깡패 새끼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선물로 받은 묵호 창녀촌에서의 섹스였다.
그 경험은 섹스 보다도 나의 순결을 바쳤던 그녀의 말 한 마디가 모든 것이었다.
“남동생 대학 보내려고요”
그 단 한마디가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강릉에서 명문고를 다니다가 자율학습이라는 거짓말에 반발하여 다시는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묵호에 왔다가, 내가 왜 몸을 파느냐고 물었던 그녀의 대답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겨우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몇년 후, 우연히 버스에서 선데이 서울을 보다가 첫사랑 그녀가 선데이 서울 표지 모델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후, 창녀촌 그녀를 찾아 갔지만 그녀는 가고 없었다.
나의 두 개의 첫사랑은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