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랭크셔와 요크셔의 철도 회사가 뉴튼 히스 랭크셔 & 요크셔 크리켓과 축구 클럽을 창단한다. 그들은 1886년과 1892년 맨체스터 컵에서 우승하며 뉴튼 히스 팀으로서 디비전1로 승격된다. 그들은 클레이튼에 위치한 뱅크 스트리트의 그라운드에서 뛰었지만 한동안 힘든 싸움을 벌였고 특히 1984년에는 강등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2년까지 관중은 500명 수준이었으며 빚은 2000 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아드윅이 1894년 맨체스터 시티로 재창단했고, 뉴튼 히스 또한 1902년에 파산을 맞이하며 존 데이비스라는 부호에 의해 구제된다. 그는 히슨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변경했다. 의욕 넘치던 데이비스는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위험을 감수한다. 클레이튼에 있는 올드 트래포드 크리켓 경기장 근처의 5마일 정도의 땅을 산 것이다. 올드 트래포드 구장은 1910년 2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리버풀이 첫 상대팀이었고 센스 없게도 4-3으로 승리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8만명을 수용 가능한 경기장의 잠재력은 "돈가방 유나이티드"라는 시기를 살만한 것이었고 맨유는 빠르게 명문 구단으로 성장해간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 이후 유나이티드의 부는 감소했다. 그들은 1931년 강등당했으며 2부 리그 개막전에는 3500명의 관중들만이 입장했다. 1931년 크리스마스쯤에 은행은 유나이티드의 파산을 선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또 다른 재력가인 제임스 깁슨에 의해 파산은 면할 수 있었다. 그는 3만 파운드에 달하는 유나이티드의 빚을 청산했지만 팀은 1934년에 가까스로 3부 리그로의 강등을 피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36년에 클럽은 1부 리그로 돌아오지만 더 큰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경기장이 트래포드 파크의 항구와 가까이에 있어 독일 공군의 주요 타겟이 되고 만 것이다. 1941년 3월 메인 스탠드와 드레싱 룸, 사무실과 함께 유나이티드 로드의 테라스와 표면이 파괴되었다. 맨체스터시에서는 메인 로드를 함께 사용하자고 유나이티드에 제의해왔고 클럽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후 8년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올드 트래포드 구장을 떠나있어야 했다. 홈 구장도 잃고 빚더미에 앉은 상태에서 전쟁은 끝이 났고, 이번에 유나이티드는 축구에서의 연이은 성공으로 생명을 구하게 된다. 이전 시티의 선수였던 맷 버스비가 이제는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된 것이었다. 맨유는 1949년 8월에 올드 트래포드 구장으로 돌아간다. 버스비 감독 부임 중 맨유는 1948년 FA컵, 1952년 리그를 우승하고 5시즌 중 4시즌을 리그 2위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선수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팀이 깨지자, 버스비 감독은 유스로 눈을 돌려 또 다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버스비 베이비'로 불리던 유스 세대들은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 팀을 형성했다.
그들은 1956년과 1957년에 연달아 리그를 우승했고 (FA컵은 아쉽게 결승에서 패했다) 1956-57 시즌부터 영국은 유로피안 컵에 참가하게 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첫 유럽 대회 출전에서 4강까지 오르고 다음 시즌에도 역시 4강까지 올라 레드 스타 벨그라데와 3-3의 무승부를 거둔다. 비극이 일어난 것은 1958년 2월 6일의 일이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싣고 돌아오던 비행기가 연료 보급을 위해 뮌헨에 내리려 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기상 조건으로 인해 기장은 하루밤을 뮌헨에 묵는 대신 바로 비행기를 맨체스터로 돌리려고 했다. 세번정도 얼음 길에 불시착 할 뻔한 후, 비행기는 불행히도 주택가를 들이받았고 32명의 승객이 사망했으며 그 안에는 '버스비 베이비'라 불리던 8명의 선수들인 로저 빈, 던컨 에드워즈, 마크 존스, 에디 콜먼, 빌리 휠런, 토미 테일러, 데이빗 페그, 조프 벤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버스비 감독 자신은 중상을 입었으며
조니 베리와 재키 블랜치플라워는 다시 경기를 뛸 수 없었다. 네 명의 생존자인 보비 찰튼, 빌 포크스, 해리 그레그와 데니스 바이올렛은 3개월 후 FA컵 결승에 출장했지만 볼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임시 스쿼드가 웸블리 구장에 도착하여 국가적인 동정을 받으며 치른 시합이었다. 버스비 감독은 그 후 또 다른 강팀을 만들어낸다. 1960년대 중반까지 그는 성공을 거두었다. 찰튼과 포크스는 그가 길러낸 선수들이었고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 팻 크레란트, 노비 스타일즈, 토니 던, 섀이 브레넌 등의 스타 선수들을 추가한 유나이티드는 1968년, 뮌헨 참사 이후 10년만에 웸블리 구장에서 벤피카를 연장전 끝에 4-1로 물리치고 우승하며 버스비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 그것이 버스비 감독의 정점이었다.
맨유는 이후 1970년대초까지 서서히 하락세를 그렸고, 버스비가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그의 대체자를 찾지 못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1973-74 시즌에 벌어졌다. 유나이티드가 강등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미 도허티 감독의 지도 아래 한 시즌만에 그들은 1부 리그로 복귀한다. 도허티의 팀은 FA컵 결승에 연속적으로 진출하며 두번째 시즌에는 우승컵을 따냈지만 그는 축구와는 관련없는 사유로 경질된다. 라이벌인 리버풀이 잉글랜드 축구를 지배하는 가운데, 유나이티드는 좌절스러운 1980년대를 견뎌야 했다.
리그는 우승할 수 없었지만 그 보상으로 FA컵은 우승할 수 있었다. 1986년 11월, 론 앳킨슨 감독의 후미으로 알렉스 퍼거슨이 임명되었다. 그 또한 처음에는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1990년 FA컵에서의 성공 이후 1991년 유로피안 컵 위너스 컵 우승, 1992년 준우승 이후 프리미어 리그 출범 시즌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는 잉글랜드 축구를 유나이티드의 헤게모니로 지배하려는 시작이었고, 1990년에는 맨유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다. 퍼거슨의 팀은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마크 휴즈, 폴 잉스, 데니스 어윈, 스티브 브루스, 개리 팔리스터, 로이 킨, 라이언 긱스, 데이빗 베컴, 폴 스콜스, 로이 킨, 니키 버트, 개리 네빌, 루드 반 니스텔루이, 올레 군나 솔샤르 등의 스타들을 끝없이 배출해내며 12번의 시즌 중 8번의 리그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들은 1999년에 국내 대회 더블을 기록했고 1999년에는 전례없는 프리미어쉽, FA컵, 유로피언 컵을 우승하는 트레블을 달성했다. 1997년 이후 아스날이 유나이티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며 네 시즌간 리그 타이틀을 양분했다. 그러나 유나이티드는 2003-04 시즌에는 그다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FA컵에서는 우승을 거두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리그의 우승 후보로 남을 것임을 증명했다. 그들은 실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며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인수하기 전까지 유나이티드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클럽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세계 각지에서 마케팅에 성공하며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첫댓글 ㄷㄷ ㅋㅋㅋ
엔터...
다읽었다
너무길다... ㅠㅠ
1999년에 국내 대회 더블을 기록했고 1999년에는 전례없는 프리미어쉽, FA컵, 유로피언 컵을 우승하는 트레블을 달성했다. 오탄가요?
아니요 ㅋㅋ
맞는거 같은데요 국내대회더블은 리그랑 FA컵머근거고 전체로친다면 챔피언스리그까지 합쳐 트레블 이말같은데요
ㄳㅇ
버스비 700원
길구나...오래됐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