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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쏟아지는 신혼 1년, 방송 활동 재개 선언한 탤런트 유퉁 |
"어머, 유퉁 아저씨 아니라예~?" 마흔 한 살 유퉁의 눈에 띈 스물 셋 대구 아가씨 또르르 구르는 목소리와 눈웃음이 매력적인 대구 아가씨 전은식(1975년생, 26세)씨는 97년 여름 창원 시내 한 복판에서 유퉁(1957년생, 45세)을 만났다. 퉁퉁한 몸매, 거침없는 경상도 사투리로 안방에 웃음을 주던 탤런트 유퉁을 직접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창원 언니 집에 머물며 농산물 홍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대구 아가씨와 유퉁은 그렇게 만났다. 이미 열 아홉에 결혼한 애들 친 엄마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스무 살 넘은 두 아들을 둔 유퉁의 눈에 들어온 아가씨는, 언젠가 꿈에 본 노란 우산 쓴 여자처럼 선명한 노란 리본을 매고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애들 엄마 이후에도 제자와의 결혼 생활, 또 장안의 화제를 뿌리던 혜선 스님과의 만남 등 꽤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눈앞에 있는 은식씨가 '운명의 여자'처럼 느껴졌다. 10대처럼 가슴 설레는 40대 중년의 남자 유퉁은 '생각하면 곧 행동한다'는 생활 신조처럼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쳤다.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은식씨를 만나 다소곳이 눈을 내려 깔고 앉아 있는 대구 아가씨에게 자신의 지나온 삶을 송두리째 펼쳐 보였다. 초등학교에 돌아가신 아버지, 식당을 운영하며 4남매를 키운 어머니, 지금 하고 있는 유퉁 국밥집 등…. 듣고만 있는 그녀에게 쉴 새없이 떠들어댔다. 그리고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해버렸다. "아저씨, 벌써 결혼하셨잖아요?" 이미 결혼을 했던 일도,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혜선스님과의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던 은식씨는 처음 본 유퉁의 고백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유퉁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 본 여자한테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게 이해할 수 없고, 당황스러웠어요. 하지만 싫지는 않았어요. 진실해 보였기 때문이죠. 다방에서 4시간 동안 제가 올 동안 기다리며 빈 종이에 빽빽이 그린 얼굴 표정 가득한 낙서를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나겠지요."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도, 과거가 있는 것도 신경 쓰이지 않고, 그저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란다. 대구에서 헤어졌지만 하루에도 수 차례 안부 전화를 주고받았다. 이 날의 인연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아니었다. "누부야, 우리 함께 살자" 큰아들 호걸에게 받은 프로포즈 혜선과 헤어지고 처음 맞는 생일날 큰아들 호걸과 단 둘이 부엌에서 물 한 잔을 마셨다(살림하는 사람이 없으니 먹을 게 당연히 없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자 외로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유퉁을 짓눌렀다. 어렸을 때부터 외로움을 못 견뎌해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한 밤중에도 형님들이나 친구들이 전화하면 뛰쳐나가는 의리파였고 한 군데 머무르지 못하는 '바람 같은 성격'은 혼자 지내는 시간이 견딜 수 없었다. 맘을 잡지 못하고 술로 지내던 유퉁은 아들에게 말했다. "호걸아, 아무래도 아빠가 니 새엄마를 빨리 찾아야겠다."스물 한 살이었던 호걸이는 1백Kg을 넘는 덩치만큼이나 이해심이 넓었다. 외로움 잘 타고, 의리파인 아빠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터라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은식이 누나'를 향한 아빠를 남자로서 충분히 이해했다. "누부야. 우리 같이 살자. 와서 국밥 장사도 하고, 우리 좀 도와 도~"큰 아들 호걸은 은식이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점점 유퉁이란 '사람'에게 호감과 의지를 하게 된 대구 아가씨는 이 부탁을 거절 못했다. 문제는 부모님과 형제들이었다. "처음엔 국밥집 일을 배우러 간다고 했지요.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유퉁 역시 속마음을 감추고, 일을 도와달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은식씨는 송촌리 집으로 왔다. 살림을 돕고, 국밥집 일을 도왔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이미 한 가족이 마찬가지가 되고 나니 결혼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그만큼 유퉁네 가족은 은식씨를 어서 공식적인 식구로 맞이하고 싶어 결혼식을 서둘렀다. "친정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을 했는데, 아버지와 큰언니가 반대를 심하게 했어요. 저 때문에 엄마랑 큰언니가 말도 안하고 지낼 땐 정말 속상했어요. 저보다 엄마가 얼마나 속상할까 생각을 하니…. 나이도 많고 결혼도 했던 아빠(지금도 은식씨는 유퉁을 그렇게 부른다)가 못마땅하신 거였죠."사실 여섯 살 차이나는 사위를 흔쾌히 맞을 장인은 그리 흔치 않을 테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결국 결혼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새옹지마라고 어렵게 잡은 결혼식을 앞두고 사고가 터졌다. 한때 대마초에 손을 댔던 유퉁의 후배가 잡히며, 대마 스승으로 유퉁을 지목하는 바람에 구치소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손뗐다고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벌은 받아야 했다. 미뤄진 결혼보다도, '저 안에서 추운데,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은식씨는 양수리에서 안양까지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매일 면회를 다녔다. 16일 동안의 유치장 생활을 마치고 나온 유퉁과 결국 결혼식을 올렸다. 친지들만 모여 치른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신혼여행은 뉴질랜드로 떠났다. 이때 역시 '유퉁이 젊은 여자랑 바람이 났다'는 루머가 돌았다. 5년 동안 실 가는데 바늘 가는 것처럼 붙어 다니다 보니, 주변의 시선은 늘 곱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야속하긴 해도 은식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시선을 못 견딜 거였으면 결혼은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잘 한다고 칭찬하면 더 신이 난다네예~" 그림 그리고 도자기 굽는 남편 유퉁 요즘 은식씨는 송송리 집에서 남편 유퉁과 단 둘이 지낸다. 거실 소파에 앉아 무릎 베개를 하고 누운 남편의 귓밥을 파주며 저 멀리 북한강물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며 '행복하다'고 느낀다. 전망 좋은 6백 평이 넘는 대지에 다섯 채의 집이 있고, 개 두 마리, 토끼 등의 크다면 큰살림은 혼자 척척 해낸다. 2층 살림집 청소만 해도 한 나절이 걸리지만, 걸레질 할 때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림 그리고 토우를 만드는 남편의 곁을 지키며 밤늦게 앉아 있어도 행복하기만 하다. 사실 송송리 집 1층은 유퉁의 작품 전시장이다. 어려서부터 사생대회 나가 상을 타오던 재주는, 부산에서 연극을 하다 '공포의 외인구단' 영화 출연을 계기와 공중파 방송과 인연을 맺던 87년부터 대본의 빈칸에 그리던 낙서 솜씨로 이어진다. 큐 사인이 날 때까지 기다리던 엑스트라 시절부터 취미였고, 이젠 한시라도 흙을 만지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가 되었다.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배운 적은 없지만, 이젠 빈 종이만 봐도 뭘 그릴지 저절로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산수화와, 수안 스님의 그림, 가우디의 건축과 피카소의 말년 그림을 좋아한다는 그는 혼자 있을 때보다 누가 옆에 있을 때 작품이 더 잘 된다고 한다. 특히 아내 은식씨가 옆에 앉아 '아빠, 멋지네예~'하고 한 마디만 해도 신이 나서 작품이 잘 된다고 한다. 때론 수묵화처럼, 때론 민속화처럼 시시각각 느낌을 표현하는 유퉁의 솜씨는 '유퉁네 국밥집' 8곳의 가족 직영과 12곳 동업 점에서 만날 수 있다. 처음 국밥집을 차리던 97년부터 유퉁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메뉴 개발부터 인테리어까지 직접 다 해낸다. 분점을 새로 낼 때마다 집터를 고르는 것부터 인테리어, 홍보 전략까지 모두 '유퉁식'으로 한다. 간판을 달고 직접 그린 깃발을 올리고 큼지막한 항아리에 그림을 그려 솟대처럼 올리고, 장승을 만들어 식당 앞마당에 세운다. 큰누나, 처남, 처형 등 친척이 운영하는 8개의 직영점은 특히 유퉁식으로 꾸며진다. 직영점은 메뉴나 인테리어를 제 뜻대로 하지만, 동업점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유퉁 국밥이 맛있다, 없다 말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항아리는 전통적으로 맛의 근원지입니다. 개인적으로 1천2백 여 개를 모아 일일이 그림을 그려 식당 앞마당에 내놓습니다. 우리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꾸 보여주고 싶어 유퉁 국밥집이 있는 곳엔 항아리 솟대, 장승, 토우는 물론 제 그림들을 걸 겁니다."유퉁의 그림들은 돈 받고 팔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전시회를 한 적도 있고, 친분이 있는 연극배우 장두이 씨가 뉴욕 진출을 권하기도 하지만 '돈'으로 인정받고 싶지는 않다. 전시장을 마련해 자신의 작품을 다 모아 전시하도록 하자고 아들 호걸과 약속까지 했다. 호주, 뉴질랜드, 보라카이 등 관광지를 여행하며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관광 상품과 관광 문화를 마련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이 토우나 그림도 그런 관광 상품의 한 아이템이 되기를 바란다. 그 중 강촌본점은 골다공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김남순씨(74세)와 호걸, 호진 형제 그리고 유퉁의 3대가 운영한다. 한번 이름이 난 음식점도 늘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주인이 직접 솥을 걸어 불을 때는 등 '맛을 지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퉁씨는 요즘도 일요일엔 가게를 지킨다. PR(피터지게 알리자)을 위해 깃발을 들고 길거리에서 흔드는 건 물론이고, 맛있게 먹고 가는 손님들에게 자신이 작사, 작곡한 테이프도 기념품으로 준다. 강촌 본점의 노하우를 거울삼아 전국에 '유퉁 국밥집'의 깃발을 날리고 싶은 것이 남은 바람이다. □ 글/김현숙 기자 □ 사진/김현희 |
첫댓글 이미 열 아홉에 결혼한 애들 친 엄마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스무 살 넘은 두 아들을 둔 유퉁의 눈에 들어온 아가씨는, 언젠가 꿈에 본 노란 우산 쓴 여자처럼 선명한 노란 리본을 매고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애들 엄마 이후에도 제자와의 결혼 생활, 또 장안의 화제를 뿌리던 혜선 스님과의 만남 등 꽤 여러
참 실타... 아무리 사는모양이 가지각색이라지만,,,
그러게요..어쩔수 없는 이혼이라고 하지만.. 헉.. 그래도 결혼 상대자는 자기와 함께 사는 반려자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