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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성시대 이소영 마누라 / 나무위키
0. 선수와 구단, 불만의 시작
여성시대/불펌하면 3대가 망함 나무위키에서 최대한 사족 빼고 정리해 옴
나랑 쟤랑 비슷하게 잘하는데 왜 나는 이정도만 주는 거야...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연봉 산정 기준 역시 구단마다 편차가 크고 세련되지 못했다. 때문에 비슷한 실력의 선수라 하더라도 연봉은 들쭉날쭉이었다. 게다가 구단 형편과 방침에 따라 연봉 격차도 상당했다. 선수들은 자기랑 비슷한 선수는 이만큼 받는데 왜 나는 이것밖에 못받느냐는 불만도 컸다. 선수들은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니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주길 원했지만 구단에서는 갖은 핑계를 대며 최대한 연봉을 안 올려주려 하고, 선수들은 그에 반발해 연봉조정 신청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그제야 구단에서 마지 못해 겨우 재계약하는 일이 매해 겨울마다 벌어졌다. 그렇게 구단에 대한 선수들의 불만이 조금씩 쌓여갔다.
1. 언론에 밝힌 선수협 결성 이유:
고 김대현 선수의 사망사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젊은 선수들의 소식은 늘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긴다. 해태의 기둥투수로 주목 받았던 김대현은 고작 26세였던 1988년 승용차로 광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다가 변을 당했다. 천안휴게소에 들어서는 순간 화물트럭을 들이받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조수석에 있던 동료 이순철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안전벨트를 맨 상태라 화를 면했다.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54772)
그러나 소속 선수가 불의 사고를 당했음에도 해태 구단은 김대현의 유가족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를 참다 못한 주요 선수들이 선수들의 처우개선을 목표로 삼아 선수협 결성을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후술된 바와 같이 김대현 사건 이전에 이미 창단 준비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으며, 때마침 김대현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이 사건을 선수협 결성의 이유라고 갖다 붙이게 된 것이다. 김대현의 사망이 8월 27일에 발생했고 이후 장례식 등 사후 절차가 진행되는데 며칠이 더 걸렸는데, 그후 2주도 안되는 짧은 기간안에 협회를 조직하고 회칙을 완성하여 창단총회(9월 13일)를 연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2. 창단 과정
최동원은 이미 1988년 연초부터 언론에 공개적으로 선수협회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1988년 구단과 오랜 진통 끝에 6월 29일에야 가까스로 연봉협상을 마친 최동원과 그의 부친 최윤식은 연봉 협상이 타결된 직후부터 곧바로 선수협 결성 작업에 들어갔다. 최동원과 최윤식은 친척인 이택규 변호사에게 법률적인 자문을 구하며 선수회 결성을 준비했다. 이어 최동원 부자는 각 팀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선수회 결성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몇몇 선수들이 뜻을 함께 하여 기꺼이 간부 자리를 맡아주자 자신감을 받은 최동원은 8월초에 창단 움직임을 본격화하였고, 8월 10일 선수회 조직이 비밀리에 구성되었다. 또 최동원은 평소 선수회 결성을 주장해오던 야구해설가 이호헌, 그리고 친분이 있던 주간야구 김창웅 사장 등에게 자문을 얻었다. 최동원은 8월 중순부터 체육부와 노동부 등에 선수회 결성의 적법성 여부와 활동범위 등 법률 및 절차적 문제들을 여러차례 문의했다.
현재 상황으로는 노조 설립이 힘들기 때문에 당시의 노조 설립 붐이 꺼져갈 무렵 각 기업에 모두 노조가 생긴 시점에 즈음까지 기다렸다가 이제 선수들도 노조가 필요하다는 여론전을 펼쳐 관계 법령의 개정한 후 노조 설립을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사실 변호사들이 제안한 이 방식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고, 훗날 실제로 설립된 선수협도 이러한 방식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평생 타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던 외골수였던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은 일단 선수친목단체로 위장하여 출범부터 시켜 놓고 실질적으로 노조활동을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향후 법률이 개정되는 등 기회가 오면 정식 노조로 전환시키면 된다고 말하면서 선수회를 밀어붙였다.
결국 이러한 선택은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마는데, 노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KBO 각 구단들이 노동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손쉽게 협회를 와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참여했던 선수들 또한 최동원 부자가 말했던 것과 달리 자신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전혀 못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각 구단들에게 바로 백기 투항하게 되었다.
창립총회가 개최된지 8일만인 9월 21일 최동원은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주간야구의 김창웅 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선수회 결성에 대한 소견을 말했다. 김창웅은 선수회 결성에 대해 최동원에게 자문해 주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주간야구와의 인터뷰에서 최동원 회장은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라고 말했다. 최동원은 "당분간 회비를 모아 회원들의 경조사 및 선수기금 모으기에 전념할 것이나, 결국 하다 보면 미국의 선수협회처럼 회원권익옹호에도 앞장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수회의 미래에 대해 언급했다.
3. 구단의 대응
갑작스런 선수회 창단 소식을 접한 구단들은 당황했으나 올림픽 열기에 휩싸여 있던 처음 며칠간은 매스컴과 여론의 반응을 보며 조용히 관망했다. 아직 노조라는 개념 자체가 익숙치 않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꿈꾸기도 힘든 고액연봉자들이 즐비한 프로야구 선수들이 노조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 여론의 흐름을 파악한 각 구단 고위층은 선수회 창립총회가 열린지 일주일 후인 9월 20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긴급 KBO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구단은 30일로 예정된 대의원총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구단직원들을 총동원하여 나섰다. 대의원총회를 앞두고 해태, 삼성, 태평양은 자팀 선수단 참여를 원천 봉쇄했다. 해태는 직원들을 선수들 자택에 보내 선수들이 못나가도록 일일이 감시했다. 삼성은 그룹 본사에서 사장단 회의를 가진 후 윤경헌 이사를 대구로 파견하여 대의원으로 선출된 박승호, 장효조, 김시진, 이만수, 오대석에게 그룹 사장단 회의 결정 사장을 통보했다. 또 삼성은 선수 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삼성 선수들이 대의원총회에 불참한 것은 부인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태평양은 대의원으로 뽑힌 소속 선수들에게 각서를 받았다. 그밖의 다른 구단들도 선수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대의원총회에 참여한 것은 롯데, MBC, OB 소속 선수 20명 뿐이었다. 롯데 최동원, 김용철, 유두열,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 MBC 이광은, 신언호, 김상훈, 유종겸, 오영일, 김용수, 박흥식, OB 김광수, 김경문, 박종훈, 김진욱, 신경식[8]이 그들이다. 빙그레 소속 대의원 선수들은 대의원총회 장소까지 갔었으나 “거기 가서 삼성 선수들이 있으면 참석하고 아니면 그냥가자”고 사전약속했었기 때문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결국 44명의 대의원 중 20명의 참가에 그쳐 정족수 미달로 대의원총회는 열리지 못했고 술이나 마시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일부 선수들은 구단의 방해가 심하게 나올 수록 뭉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일부는 구단들이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KBO와 구단들은 여론의 추이를 살펴보며 계속 잠행하고 있다가 대중들이 고액 연봉을 받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많다는 사실을 감지하자 10월 6일 "선수협의회 관련 선수 20명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후 10월 12일 KBO 사장단 회의에서 이같은 사항이 재확인되었다. 동시에 구단들은 적자투성이의 야구단을 운영하기 벅차다는 식의 앓는 소리를 하며 여론을 돌리기 위한 언플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의원총회에 참석한 20명의 선수들은 대부분 구단에 백기 투항했다.
4. 난처해진 롯데 구단, 대규모 트레이드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려던 시점에서 한 신문 기사에 '회비를 낸 선수들과는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KBO 방침에도 불구하고 롯데 소속 선수들만 이를 거역하고 거의 전원이 보란듯이 회비를 완납했다는 사실이 실렸다. 게다가 언론에 최동원과 그의 아버지 최윤식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며 선수회 결성의 내막이 대중들에게도 어렴풋이 알려지게 되었다.
구단들은 롯데가 선수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지경까지 오게 됐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렸다. 롯데 선수들만 회비를 다 냈는데 롯데 선수들에게만큼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압박도 있었다. 혼자서 선수회를 다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최동원 만큼은 KBO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의사를 표출하는 구단도 있었다. 이에 롯데 구단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그해 11월말 롯데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과 삼성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 그리고 다음달 김용철-장효조의 5대4 대규모 트레이드가 추진되었다.
(삼성 김시진, 장효조의 경우 선수회와 관련한 보복 트레이드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반적으로 선수회보다는 한국시리즈에서의 부진을 주원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둘 다 선수회 대의원이긴 했으나 선수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두 선수는 9월 30일 1차 대의원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KBO 징계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선수회보다는 한국시리즈에서 이 두 선수가 부진했던 것이 트레이드의 주원인으로 보고 있다. 김시진의 경우 한국시리즈 통산 무승 7패로 매우 부진했으며, 장효조는 84년, 87년 한국시리즈 등에서 몇 차례의 에러를 범해 우승 실패의 주범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88년도 선수협 창단은 실패하게 됨
하지만 또 한번 선수협 창단을 하기 위해 드릉드릉하는데...
글 끝났어 가!
첫댓글 와 자택까지 직원보내서 못나오게 감시까지 했다니 저시대니까 저랬지 지금이면 상상도 못하겠다
여샤 긴 글 잘 읽었어! 진짜 어렵고 힘들게 만든 선수협인데..
여샤 글 고마워! 이렇게 자세한 내용은 처음 알았네ㅠㅠ 고 최동원 선수 진짜 대단한 분이셨구나.,
글 잘 읽었어ㅠㅠ 그래서 30년동안 롯팬이었던 울 아빠가 롯데는 최동원 그런식으로 대우해서 보냈으면 안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구나... 근데 롯데만의 결단이 아니라 압력이 있었던ㄱㅓ네 ㅠ 어쨌든 최동원 선수 넘 대단하고 그릇이 큰 사람이다
동원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최근에 야구팬이 돼서 이런 이야기까지는 몰랐는데 ㅠㅠ 고 최동원 선수 진짜 대단하신 분이네...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