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의 사마타 위빠사나를 대승불교의 지관 수행에 대응시키곤 하는데, 티벳불교의 관 수행이 테라와다의 위빠사나와 다른 점은 논리적 지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 같습니다.
다음은 <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양승규- >의 내용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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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말라쉴라는 스승 샨따락시따(Śāntarakṣita)를 대신해서 ‘쌈예의 종론’에 참가하여 중국의 선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 선사와 대론을 벌여 승리한 인물이다. 까말라쉴라는 유가행(瑜伽行) 중관학파에 속하기 때문에 이 학파의 교학적인 배경을 근거로 유심지-무이지-불현지로 완성한다는 차제를 세웠다.
1. 유심지는 유심에 의거하여 외경(外境)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유심에 의거하여 외경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유가행파에서 설명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법이란 요약하면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이다. 여기서 온, 처, 계, 유색(有色)의 모두는 진실로 마음의 상(相)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극미(極微)로 분해되고, 극미도 부분의 본성을 관찰할 경우 본성을 절대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시이래로 색(色) 등 진실하지 않은 법을 집착해 왔기 때문에 꿈에 본 색 등이 현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에게 마음은 색 등이 바깥에 단절된 것으로 현현하지만, 진실로는 ‘이것에 색 등은 마음의 상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라고 분석해야 한다."
인식대상을 잘 살펴보면 인식의 본질이 그 인식대상에 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오온 중에서 색은 지수화풍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지를 나누면 미진, 미진을 나누면 극미로 분해된다. 따라서 색은 ‘색’이 아니라 미진과 극미의 결합에 불과하다. 색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색이 아니라 미진과 극미의 조합인 셈이다. 따라서 색을 색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식, 즉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지 색 자체가 아니다
2. 무이지로 관찰하는 것은 외경뿐만 아니라 유심의 마음까지도 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진실로는 마음도 진실할 수 없다. 허망한 본성인 색(色) 등의 형상을 파악하는 마음이 여러 가지 형상으로 현현할 때 그것이 어떻게 진실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색 등이 허망한 것처럼 마음도 색 등을 떠나 별도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허망하다. 이와 같이 색 등은 여러 가지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와 다수의 자성이 아닌 것처럼, 마음 또한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하나와 여럿의 본성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지 환술 등의 성품일 따름이다. 마음이 그와 같은 것처럼 일체법도 환술의 본성과 같다’고 분석한다"
3. 궁극적인 관찰은 불현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유식을 벗어나서 둘로 현현하는 것이 없는 인식에서도 벗어난다. 자타(他)에서 사물이 발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능취와 소취는 허망할 따름이다. 이것을 떠나서도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분별한다. 둘이 없는 인식을 실사라고 집착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둘이 없는 지혜가 현현하는 것 없는 지혜에만 머물러야 한다’라고 확정한다."
무이지를 뛰어넘는 불현지는 능취와 소취의 긍정에도, 부정에도 머물지 않는다. 능취와 소취는 궁극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둘을 떠나 실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승의와 세속의 측면에서 능취와 소취는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불현지로 보고 머물러야 한다. 이 불현지에 머무는 것이 무분별정이다.
불현지에 머무는 것에서 지혜와 방편의 합일이 가능해진다. 초편에서도 까말라쉴라는 “일체의 법은 진실로 본성이 없지만, 세속에서 유가사의 인식 또는 범부의 인식은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범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일체법의 존재성을 믿고 집착한다. 승의에서 자성이 없다고 해서 세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방편으로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가사와 범부의 인식은 세속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유가사와 범부의 의식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유가사는 환술사와 같이 그 환술을 여실히 알아서 진짜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유가사’라고 부른다. 어린아이가 구경꾼
처럼 환술을 진짜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된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모순되지 않는다."
환술사가 구경꾼을 모아 놓고 환술을 부릴 때, 나무막대기와 작은 돌 등으로 코끼리와 말 등을 나타내 보일 때 환술사도 구경꾼도 모두 코끼리와 말을 본다. 보는 것은 동일하지만 환술사는 보이는 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구경꾼은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탄성을 지르고 환호한다. 유가사는 환술사와 같아서 일체법을 보는 것은 범부와 똑같지만, 범부는 일체법을 보고 진짜라고 생각하고 집착하지만, 유가사는 진짜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유가사가 일체법을 무자성으로 보는 것은 관을 실천하면서 보는 것이고, 관의 실천에서 일어나 세속으로 나올 때에는 일체법을 환술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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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 본글을 보니 생뚱맞게도 이런 생각이 납니다..어디서 주어 들은 말인데..
같은 술을 처먹어도 도인은 도인의 행이요
중생은 중생의 짓거리다..
그와 같이 여래가 일체 중생의 마음을 낱낱이 다 아는 것은 여래가 곧 중생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 뭔 용빼는 재주로 아는것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