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임찬경*
낙랑군 위치 문제에 대해, 필자는 “낙랑군은 서기전108년에 발해 연안에, 서기44년 이후 한반도의 평양 일대에 있었다.”는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임찬경, 「고려시대 한사군 인식에 대한 검토」『국학연구』제20집, 2016).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낙랑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 모두와 관련되며 여러 차례 기록되고 있다. 낙랑의 지리위치가 한반도 중부에 위치했음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 등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서기전108년 한(漢)의 무제가 설치했다는 초기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구려의 남쪽인 한반도 안에 낙랑국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에 의해 서기32년에 멸망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고구려는 고구려 강역의 서쪽에 위치했던 한(漢)의 낙랑군을 서기37년에 멸망시켰다고 서술했으며, 그 이후 서기44년에 후한(後漢, 東漢이라고도 한다)의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중부의 옛 낙랑국 지역을 점령하여 다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낙랑국 및 낙랑군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뚜렷이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낙랑군도 한(漢)의 무제가 서기전108년에 설치하였던 낙랑군과 그것이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현재의 평양 일대에 설치한 낙랑군 즉 2개의 낙랑군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서기32년 최리(崔理)의 낙랑국 멸망, 서기37년의 한(漢) 낙랑군 멸망, 서기44년 후한 광무제에 의한 현재 평양 일대의 낙랑군 설치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은 고구려와 후한의 국제적 역학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낙랑국 및 2개 낙랑군의 실체와 그 변화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의 고구려와 후한을 둘러싼 국내외적 정세를 바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낙랑국, 2개의 낙랑군 등의 변화와 관련한 고구려와 후한의 국제관계를 복잡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또한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들에 대해서도 복잡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런 설명과 관련 자료들은 필자의 2016년 논문인 「고려시대 한사군 인식에 대한 검토」(2016)를 참고할 수 있다.
우리가 『삼국사기』 등의 관련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낙랑국과 2개의 낙랑군 위치를 표시하는 다음의 [지도 1]을 작성할 수 있다.
[지도 1] 『삼국사기』에 의한 낙링국, 발해 연안의 낙랑군, 한반도의 낙랑군 변천 지도
서기14년 현토군(A) 중의 고구려현을 고구려가 빼앗음. 32년 고구려가 최리(崔理)의 낙랑국(B)을 멸망시킴. 37년 고구려가 서기전108년에 세워진 낙랑군(E)을 멸망시킴. 44년 후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옛 낙랑국(B) 지역을 빼앗아 낙랑군(G)을 세움,
위의 [지도 1]에서 보듯,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서기전108년에 처음 세워진 낙랑군(E)은 한반도가 아닌 발해 연안의 조백하(潮白河) 일대에 있었다(임찬경,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국학연구』제22집, 2018, 181쪽을 보라). 서기37년에 고구려는 이 낙랑군(E)을 멸망시켰다. 당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중원의 내전을 정리하느라 고구려의 낙랑 멸망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광무제는 중원의 내전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인 서기44년에, 비로소 고구려의 남쪽에 있는 옛 낙랑국의 지역(B) 일대를 점령하여 낙랑군(G)을 설치하였다.
광무제가 서기44년에 지금의 평양 일대를 점령하여 낙랑군(G)을 설치한 이유는, 현재의 북경 동남쪽 일대 등에 위치한 낙랑군(E)을 서기37년에 점령하여 더욱 세력을 서쪽으로 확장하려는 고구려와 정면에서 전면적인 군사대결을 피하면서, 배후의 약한 부분(G)을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적대적 관계인 고구려의 앞뒤 두 방향에서 고구려의 군사적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전략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서진(西進)에 집중하고 있고, 또한 그 군사적 위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광무제의 한반도 낙랑군 건설이라는 우회적인 방법이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서기32년에 점령했던 낙랑국 옛 터(B)를 비록 후한에게 서기44년에 빼앗겼지만, 현재의 북경 동남쪽 일대에 있던 예전의 낙랑군 지역(E)을 기반으로 더욱 서쪽으로 그 영역을 계속 확대하는 데에 집중했다. 당시 고구려가 진출하고자 하는 방향은 중원대륙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한반도 안의 남부지역으로 눈을 돌려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뒤의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년) 이후 시기이며, 그 이전 시기 고구려의 군사적 진출은 서쪽의 대륙으로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기37년 후한의 낙랑군 일대(E)를 점령한 것에 이어 고구려는 서기49년에 후한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일시 점령하기도 했던 것이다(『後漢書』, 『三國志』, 『三國史記』 기록 참조).
어쨌든 『삼국사기』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해석했을 때, 위의 [지도 1]과 같은 역사해석이 바로 대한민국의 올바른 고대사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위의 [지도 1]과 같은 그런 주장을 하면, 한국의 일부 역사연구자들이 “지금까지 북한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2600여 기의 낙랑고분이 확인됩니다.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합니다.”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필자가 낙랑군 위치에 대해 새롭게 제시한 관점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하는, 한국의 고대 사학자 일부’의 관점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완전히 다르다. 아직까지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 소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하는,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서기전108년에 낙랑군이 처음 설치된 그 위치가 바로 현재의 평양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것은 한국고대사 최고최대의 왜곡인 “위만조선은 서기전194년에 현재의 평양에서 건국되었다.”는 허구(虛構)를 사실로 믿은 데서 나온 오류이다. 사대사관의 계승이요, 식민사관을 의도적으로 계승하는 오류인 것이다.
‘사실(史實)’은 위만조선은 서기전194년에 한반도에서 건국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따라서 서기전108년의 낙랑군도 현재의 평양 일대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라고 비판받는 한국사학자들 일부가 지금까지 주장하는 소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인근으로 비정하는’ 관점이 과연 옳은지, 이제 우리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서서 검증해보아야 한다. 검증해보면, 곧 그 허구를 알게 될 것이다.
낙랑군과 한사군의 위치는 물론 고구려 첫 도읍인 졸본의 위치, 위만조선의 위치, 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의 올바른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할 수 있다.
임찬경, 『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 : 위만조선, 졸본, 평양의 위치 연구』, 한국학술정보, 2019.
*[작성자] 임찬경
: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국학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0년대에 중국에 유학하여 고구려 연구로 역사학석사 및 역사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구려는 물론 우리 민족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흉노⋅선비⋅오환⋅거란⋅발해⋅여진 등과 관련한 북방민족의 기원과 발전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들 지역에 대한 문헌수집과 현지답사로 연구활동을 진행해왔다. 최근 우리사회의 오래고 뿌리 깊은 역사왜곡 즉 ‘역적(역사적폐)’ 청산 작업을 준비 및 시도하고 있다.
주요한 연구논문으로는 「『단군교포명서』의 고구려 인식」(2009), 「중국 東北史의 肅愼 認識에 대한 비판적 검토」(2010), 「女神像을 통한 紅山文化 건설 主體 批正」(2011), 「延邊長城의 現況과 性格」(2012), 「대종교 성지 청파호 연구」(2013), 「이병도 한사군 인식의 형성과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2014), 「『고려도경』∙『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연대와 첫 도읍 졸본」(2015),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2016), 「고려시대 한사군 인식에 대한 검토」(2016), 「근대 독립운동과 역사연구 출발점으로서의 단군인식 검토」(2017), 「요양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관한 두 편의 논문」(2017), 「『수경주』를 통한 고구려 평양의 위치 검토」(2017), 「독립운동가의 고대사 인식 : 그 계승을 통한 한국 역사학계 적폐청산 과제와 방법」(2018), 「조선 즉 위만조선과 창해군의 위치에 관한 연구」(2018), 「영수사벽화묘의 고구려 관련성에 대한 하마다 고사쿠의 논문」(2019) 등이 있다.
저서로는 『중국 원주촌 연구』(2007, 공저), 『중국 원주촌 자료집』(2007, 공저),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2017, 공저), 『고구려와 위민조선의 경계』(2019), 『국학과 민족주의』(2019, 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건립1580주년기념 호태왕비연구』(2006, 공역), 『중국의 고구려 학자와 연구 종합서술』(2007, 공역), 『집안 고구려 고분』(2009) 등이 있다.
(연락처 : linbaisha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