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찬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환인천제 시대의 환국,환웅천황 시대의 배달
국,단군천왕 시대의 단군조선, 이렇게 삼성조
시대입니다.
초대 환인천제께서 혼례예식을 인류사회에
가르치겼습니다.
단군천왕 시대에 혼례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인데 진한단군 께서 진
왕으로서 마한단군[부왕]과 번한단군[부왕] 과
함께 분권 분치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제3왕조시대의 단군천왕께서 국
호를 "대부여"로 하였습니다.
제1왕조의 병권은 단군조선 삼한의 천왕인 진
한단군에게 있었고 제2왕조부터 삼한을 삼조
선, 진한조선 마한조선 번한조선 체재로 바꾸
어 각각 병권을 갖었습니다.
이는 제1왕조 단군조선은 연방국가 개념이였
는데 제2왕조부터는 삼한 연방국 체재를 삼조
선으로 분국하여 각각 병권을 갖고 결과적으
로 독립국이 되면서 단군조선은 해체의 수순
을 밟게 됩니다.
단군조선 제3왕조 대부여가 해체되어 단군조
선 시대가 끝나고 북부여 평양지역 최씨 낙랑
국 고구려 동예 옥저 남삼한의 열국시대가 전
개됩니다. 이를 북부여 남삼한 시대라고 합니
다. 단군조선시대는 웅족과 호족이 있고 북부
여 등 열국시대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산악
수렵생활을 위주로 한 맥족과 저습지 강의 수
로 어업생활을 위주로 한 예족으로 분류하는
학설이 있기는 하지만 북부여와 고구려가 건
국된 시기에는 예족과 맥족이 융합이 되어 예
맥족이다 합니다.
예맥족은 만주대륙과 한반도 북부지역 위주로 정착한 민족입니다.
빙하기 "마고지나"가 해빙기로 수몰되자 이들
마고족은 가까운 호남에 정착해 살다가, 인구증가와 기온상승으로 북상하여 집안지역에 피라
미드를 건축하고 세계 각지에 선진문명을 전파
합니다. 이들 마고족이 마한인으로 불려졌고
단군조선의 마한도 마고족인 마한인으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들 마한인들은 단군조선이 해체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주했던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중 하나인 마한의 토착세력이였습니다.
이러한 남삼한 마한왕은 후삼한의 진왕으로서 단군조선 유민등 이주민에게 국토를 양도하여 진한과 변한이 생겨났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의 사국시대 이전 초기의 진한과 변한은 마한관경 소국들이 있는 지역 명칭이였습니다.
현재 전라도와 호남 명칭의 의미를 모르고 쓰
고 있습니다.
호남은 금강 남쪽인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를
말하는 역사명칭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대전지역 신문기사는 대전을 호
남이라고 했습니다.
전라도는 아시다시피 고려 현종조에 시작된
행정명칭입니다.
"호남"명칭의 시작인 금강남쪽은 예전의 한반
도 후기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부여가 있던
지역입니다.
익산시는 역사명칭 호남의 시원을 후기 백제
중심이였던 금강남쪽에 두지않고 익산 근방
에 있언던 황등제에 두고있는데 이는 행정편
의에 의한 자의적인 역사왜곡입니다.
백제 왕권은 백제8대성 씨족들이 창출하며 익
산은 백제8대성의 유력 씨족인 사택씨가 기반
한 지역으로 백제 역사와 인연이 많은 익산시
는 호남의 시원을 금강 이남에서 찾아야 정당
합니다.
백제는 북부여계의 비류와 고구려계의 온조,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 등 전체적인 맥락이
복잡합니다.[후술합니다]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은 북부여 황실의 황녀가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부모께서 결혼을 반대하여 사로국으로 피신하였고 사로국 시조인 박혁거세를 출산하였습니다.
또한 사로국은 고조선 진한의 유민세력이 정착한 이유로 삼성조를 계승하였다는 "신라정통론"
학설과 아예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조선을
죽여야 그들이 대한민국의 패권을 계속해서 행사할 수 있다는 "신라사관"이 있습니다.
"신라사관"과 "노론사관"은 아주 궁합이 잘맞는
이란성 쌍둥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기득권 수구세력인 보
수세력입니다.
신라 법흥왕은 초대 신라 김씨왕조와 혈통이 다
른 연나라 모용씨인데 신라김씨로 바꿉니다.
이후의 신라김씨는 모용씨 신라김씨입니다.
이런 신라사관에서 삼성조의 건국이념을 사실
상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라의 역사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
다. 신라정통론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일부 세력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며 다른 세력
을 지배하면서 착취하는 세력을 패권세력, 패권
정치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신라사관과 노론사관을 반대하는 것
입니다. 이들이 사실상 사대식민주의,일제식민
사관의 중심세력 입니다.
마한백제는 우이 래이 등 새를 토템[도등]으로
하던 조족 태양족인 산동성 토착 씨족세력들
이 황하 이남의 연안에 방4천리 면적에 마한제국을 건국하고 이후에 북부여 황실 후손인 여구태를 추대하여 마한백제를 건국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징 문양이 봉황인데 이
는 산동성을 중심으로 중국 동부연안에서 토착
인으로 살았던 동이족인 조족 태양족이 연원입니다. [삼족오는 태양[봉황]의 전령사임]
중국 동부연안은 선사시대부터 동이족이 살던 지역이고 배달국의 중국 동부연안, 자오지 천
왕[치우천황]의 청구국이 있던 지역입니다.
진흙탕이던 황하 하류유역이 옥토로 변하자 치
우천황에게 황제가 반란를 일으킨 전쟁이 탁록
전쟁 등 치우와 황제의 전쟁이였습니다.
산동성 "래국"래이족이 영산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나주 반남에 월지국을 건국하여 남삼한의 종주(맹주)국인 진왕으로 진한과
변한을 통치하였고 나주
월지국 세력이 백제의 중심세력으로 백제가 멸망될
때까지 한몸인 공동운명체로 존속을 하지요.
그러므로 영산강 유역의 나주반남 월지마한이 백제에 흡수 병합되었다는건
심각한 역사왜곡이지요.
마한백제(고래로부터 중국 산동지역을 강태공의
"제"나라 이전부터 "제"라고 불렀고 현시대의 중국인중에서 산동지역 주민들만 유일하게 몽고반점이 나타나고 있음)는 온조 비류의 십제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실이고 십제는 마한백제의 부용국이지요.
이는 씨족이 이동해서 정착한 역사와 혈통DNA로
증명되고 있지요.
마한백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한것이 아니라 기존에
중국대륙에 있었던 마한백제가 한반도로 진출한것이
맞습니다.
기후변화의 불리한 여건으로 대륙백제의 중심세력이
한반도로 이동하였고 신라도 한반도로 이동하였지요
고대엔 해양을 통한 이동이 육로보다 쉬운 이동수단이였어요.
영산강은 내륙수로로 만경강 유역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었고 한반도에서
수산물과 농산물이 가장 풍부하여 살기좋은 환경으로 선사시대부터 인구밀집지역이고 문명발전을 하였던 곳이지요.
백제멸망후에 호남 마한의
역사기록이 사라졌어요.
신라중심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가야역사와 백제역사,고구려역사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축소한 단편적인 역사서이지요.
일연의 삼국유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헛점이 있기에 일제식민사관으로 마음것 조작할 수 있는것이죠.
신라는 민족역사의 국통계승에서 정통이 아닌 반통에 가까운 변통(임시변통) 인것이 맛습니다.
삼성조의 건국이념과 상반된 변통세력인 신라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없지요.
신라는 백제를 병탄한 후에 무진주(광주광역시)를
거점으로 전남 동부지역에
사민정책으로 신라인을 정착시켜 나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서부지역을 감시 견제하였지요.
이런 역사적인 악영향으로
나주 호족들도 처음엔 후백제를 지지했지만 후백제 견훤이 전남 동부지역의 호족들을 중용하자 후백제에 등을 돌리게되지요
나주지역은 백제의 정체성보다는 뿌리 문명인 마한의 정체성으로 같은 해양세력인 왕건세력과 합일하여 고려를 개창하지요.
신라가 망한 이유는 골품신분제의 모순으로 왕위쟁탈로 민생이 피폐해졌고
이에 각 지역에서 호족세력이 독립권력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왕건이 호족들과 혼인을 많이한것도 호족들을 통합하기위한 것이고 10만명 이상의 발해유민을 받아들여 현재 우리민족의 진정한 형성시기는 고려시대
이지요.
현재 우리민족은 부여족(북부여 예족)이 대다수로
구성되었고 마한백제와 가야지역에 기원하지요.
백제가 삼국통일 하였어도
고구려 못지않게 로마제국처럼 대제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려 왕건의 장남인 혜종(나주 장화황후)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서 고려황족의
중심세력이 되었다면 고려는 강력한 해양국가로 발전하여 막대한 재정지원으로 북진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도 경제력이 있어야
승전할 수 있지요.
왕건의 훈요십조 8항도
공주강 외곽부터 차현 남쪽을 말합니다.
이 지역은 고려왕건에게
반란을 자주 일으킨 홍성,
천안, 공주, 청주,안성지역으로 후고구려 궁예의 강력한 중심세력이였지요.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여 후고구려, 청주 호족세력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서
마진(마한 진국), 강원도
강릉까지 세력을 두었기에
태봉으로 국명을 바꾸었던
이유이지요.
차령산맥은 태백산맥에서
분기하여 원주,진천,안성,공주,천안,홍성,청양,서천
으로 연맥하고 고려시대에
민중봉기가 가장 많은 지역도 공주 홍성을 비롯한 충청지역이고 경주를 비롯한 영남지역으로 기록되지요.
고려 정종,광종은 충주가 외척으로 광종은 고려개창의 훈구근왕세력인 최지몽등 전남세력을 숙청하고
호남세력이 단일대오로 반격하지 못하도록 호남 제2세력 전주를 비롯한 후백제 세력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지요.
장흥 태생인 공예황후의 아들인 의종의 자손들이
고려가 망할때까지 왕위를
계속해서 이어왔지요.
고려가 망할때 고려의 제2의 종묘사직인 나주와 개성만이 통분하였지요.
고려망국으로 항거한 "두문동 72현"과 나주,제주,선산등으로 고려 유망인들이 은거하지요.
야은 길재의 후학인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도학파가
성종조부터 중앙 조정에 진출한 사림도학파의 시초이지요.
어계 조려선생과 점필재 김종직선생,담헌 김극검선생이 훈구 사장파와 구별되는 사림 도학파이고 세분을 "도학연원"이라고 합니다.
조려선생은 함안,김종직 선생은 밀양,김극검 선생은 김해로 모두 경남에서
출생한 도의형제이지요.
도학연원 담헌 김극검선생이 저의 선조 할아버지
이지요.
김건희 여사가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후손인데 밉기도 하지만 안타깝기도 합니다.
전라도가 민족 정통인것이
하나씩 밝혀질것입니다.
전라도 정통으로 민족사를
재정립할때까지 도민들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전라도 정통사를 국민들께 홍보하고 인식시켜야 합니다.
즐거운 저녁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