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마가 한바탕 지나간 후 처마 끝에 낙수물을 보면서
머지않아 이 여름도 가을로 가는 길목에 들어설 테지,
오는 것도 세월이고 가는 것도 세월이니 그 무상함이 말로
덧없으니 오늘 인생의 길목에서 낡은 세월에 걸 터 앉자
잠시 멍한 시간에 빠져 본다,
돌아 본다는 건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서도
아니면 아쉬움이 남아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돌아 보고 싶어서일까,
내 지난 시간은 손에 든 게 없었고 더는 간난했다,
막 다른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고
없는 길에서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다,
인생 절반은 지도에도 없는 길은 개척하며 걸어왔으리라,
그런 이유로 인생 칠 할은 늘 허기진 삶이었고
나머지 삼 할은 버텨 내야 하는 인내였으리라,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마른 땅을 찾아 걷는 건 사치였고
발 다 닦아 먼지 나도록 뛰어야 앞서간 사람의
꽁무니라도 겨우 따라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자투리 시간은 지친 육신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래도 자고 나면 거뜬할 수 있었던 건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힘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참고 견딜 수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 청승은 슬플 때는 마음껏 눈물에 빠져 보기도 했고
음악이 위로가 될 때 음악에 풍덩 빠져 보기도 했다,
그리움이 위로를 청하면
난 나 자신을 마음껏 그리워했고
침묵이 위로를 청하면
난 숨소리마저 죽인 체 며칠이고 고요했다,
인내에 허기질 때 난 고독에 위로받고 싶어
며칠이고 단내 나는 시간을 참아내며
내 안에 또 다른 이방인이 되어 밤늦은 낯선 거리를
헤매고 다녀는 지 모른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듯이
삶은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진수성찬 일지라도
빈곤의 밥상이었을 뿐 풍요롭지가 못했다,
비울 때 비로소 채워지는 충만의 밥상은 달고 달았다,
하지만 그런 밥상은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탐욕이 늘 가로막았다,
하지만 열 가지 잡다한 것보다 한 가지 확신이 나를
열정 하게 했고 몸에 맞지 않는 비단 옷보다
허름해도 입어서 편안한 옷이 난 더 좋았다,
가난했던 젊은 날에 내 청춘은 아팠고 상처투성이였다,
아프니까 청춘이 그건 한 날 젊은 날의 열병일 뿐
진짜는 아프니까 그게 인생이더라,
하지만 세월의 몰매에 지쳐가듯 게걸스럽게 나이를
주워 먹었고
나이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높아만 갔다,
그 와중에도 행여 나이를 벼슬로 행세나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그래서 더 겸손하자고 조심하자고
틈날 때마다 수도승처럼 나를 단련시켰다,
반듯하고 고상하게 늙어가자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게 성찰했다,
그리고 세월은 어느새 어느덧이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튀어나오고 그럴 때마다 가슴으로 인생을 느낀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늙어 가고 있구나,
계절이 때를 맞춰 자리바꿈을 하듯 인생도 그러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