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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회복과 재회의 기쁨을 노래
아 6:4-13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11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아 6:5-13 / 그대 눈길을 내게서 거두어요. 그대 눈길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오. 그대 머리칼은 길르앗 언덕을 마구 내닫는 염소 떼처럼 어깨 위에서 춤추는구나. 6) 그대 이는 막 목욕하고 나온 양 떼처럼 희기도 하여라. 하나도 어긋남 없이 쪽 고르게 나기도 하였구나. 7) 너울 속에 아련히 가리워 있는 발그스레한 그대 두 볼은 살짝 벌은 석류 열매 같아라. 8) 왕비를 예순 명이나 후궁을 여든 명이나 시녀 또한 무수히 거느리고 있다 한들 무얼 하리요. 9) 난 오직 한 여인만 사랑하고 있으니. 그리도 흠 없는 비둘기같이 그리도 사랑스러워. 그 어미에게는 외동딸 애지중지하는 딸. 여인들마다 그를 보고 부러워하고 왕비들도 후궁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네. 10) [여인네들] 새벽별처럼 반짝이는 이 아가씨는 누구인가? 이리도 아리따운 아가씨는 누구인가? 달처럼 눈부시기만 하구나. 해처럼 빛나는구나. 사막모래 위에 둥실 떠 있는 환영처럼 쳐다보기만 하여도 황홀하구나. 11) [그리움] (신랑) 나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가 보았네. 계곡에 대추야자나무가 자라났는지 포도나무에 새 잎이 돋아났는지 석류나무에 꽃이 피어났는지 한번 보려고 내려갔었네. 12) 나도 몰래 몸을 부르르 떨었네. 그대 나를 미치게 하누나. 사랑 그리워 미치게 하누나. 병거 끄는 기병이 미친 듯 전쟁을 그리워하듯 나 미치게 하누나. 13) [결혼식 춤을] (아가씨들과 여인네들) 돌아오라 돌아오라 술람미 아가씨야 이 혼인날 춤을 추자꾸나. 돌아오라 돌아오라, 춤을 추자꾸나. 보고 싶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수레에 타고 신부가 됩니다.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4-10) 남자가 고백합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자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구나”라고 고백했을 때, 그 최초의 고백 이후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고백은 결코 뒤지지 않는 고백입니다. 4절에서 ‘디르사 같이 어여쁘다’, ‘예루살렘 같이 곱다’는 표현을 합니다. 디르사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오므리 왕 때까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곳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자신의 여인을 향하여 가장 아름답고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고백합니다. 8절과 9절에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여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은 자신이 한 남자로부터 가장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솔로몬 주변에 실제로 술람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한 여자만을 가장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향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보다 더 잘나고 더 멋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나 한 사람을 특별하게 사랑해 주십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11-13) 술람미 여인이 다시 고백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호도 동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신랑이 보낸 백성들의 수레에 올라타게 됩니다. 왕의 수레에 탔다는 것은 왕의 신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사랑하는 여인, 솔로몬의 신부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술람미 여인처럼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하지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를 높여주십니다. 교회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수레에 타자, 합창이 울려 퍼집니다. 예루살렘의 수많은 여자들이 술람미 여인을 보고 싶어 합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이라는 표현도 주목해 봐야 합니다. 마하나임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났다가 천사의 무리를 만난 곳입니다. 그곳은 춤으로 유명했습니다. 솔로몬도 술람미 여인이 춤추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적용: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신부된 여러분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봅시다.
모성애는 하나님 사랑의 모형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무조건적 사랑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입니다. 때문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핑계댈 수 없습니다. 모성애는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랑하게 하는 초인적 힘이며 여자에서 엄마로 거듭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철없는 남자가 철들 때까지 버티게 해 주는 자원이요 가정을 지켜내는 에너지원입니다. 즉, 파괴된 가정, 망가진 영혼을 살려내는 마지막 희망입니다.
< 설 교 >
끊임없이 용납하는 사랑
아가서 6:1-14 / 강준민 목사
들어가는 말: 두 여인을 통해 인생을 배우십시오.
1. 사랑의 갈등을 성숙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1) 사랑은 의지적 결단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2) 사랑의 위기는 포기하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3) 사랑의 갈등은 내 마음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4) 사랑하는 자에게 소속감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5) 성실하신 신랑 예수님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2. 끊임없이 용납하는 사랑은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1)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됩니다.
2) 사랑의 아름다움은 지속적인 성장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 나니" (에베소서 5:29)
첫째, 환희의 단계 둘째, 갈등의 단계
셋째, 이해의 단계 넷째, 용서의 단계
3) 용서는 분노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에베소서 4:26-27)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 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22)
나가는 말
용서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
아가 6:2 / 김명혁 목사
아가서는 솔로몬과 슬람미의 사랑의 노래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아가서란 말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사실은 우리 주님과 우리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와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술람미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아가서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책입니다. 순서도 없고 논리도 없는, 사랑의 고백들을 그저 모아놓은,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구약을 전공한 성주진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가서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든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2월 사랑의 달을 맞아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새벽마다 여러분들과 함께 아가서를 읽고 묵상하고 설교하면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찬송가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부르면서 가슴에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워라.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길릴리 오신 이, 그 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네 죄를 인함이라 하실 때, 나의 죄 짐이 풀렸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 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와 같은 찬송 시들은 사실은 술람미의 사랑의 고백이고,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의 고백이고, 사도 요한의 사랑의 고백이고, 성 프랜시스의 사랑의 고백이고, 패니 크로스비의 사랑의 고백이고,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고백이고 송명의 시인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제 술람미와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솔로몬의 사랑의 이야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 특징 5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주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Initiat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얼굴이 거무스럽게 탄 시골 처녀를 왕궁에 데려온 후 술람미에게 이렇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8). “내 사랑아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10). 솔로몬은 그 후에도 술람미를 찾아옵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초청합니다. 술람미의 고백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13).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주도적인 initiative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4:10).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주님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로 오신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로, 솔로몬의 사랑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Unconditional한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가문도 보잘 것이 없었고 미모도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비록 검으나”(5). “게달의 장막같을지라도”(5). 게달은 아랍의 유목민을 가리키는데 보잘 것 없는 종족이었습니다. “내가 일광에 쬐여서 거무스름할찌라도”(6).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unconditional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사랑 받을만한 아름다운 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곱 가지 귀신들렸던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셋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Creat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가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술람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아1:15).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구나.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12).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구슬 꿰미 같구나. 네 배꼽은 둥근 잔 같고, 네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네 눈은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레바논 망대 같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나를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구나”(아7:1-8). 완전히 눈이 먼 사랑, 모든 것이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만 보이는 사랑, 그것이 창조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와 눈물과 입맞춤 등 모든 행위와 모든 움직임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으로만 보였습니다.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니라”(눅7:47). 그리고 마리아의 존재를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었고 주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넷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이었습니다. Exclu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 하나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아6:8-9).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오직 너를 쁄라라 하리라”(사62:4). 예수님은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를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주셨느니라”(엡5:25).
다섯째로, 솔로몬의 사랑은 요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Demanding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수람미를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하면서도 술람미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술람미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고 술람미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비들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아6:14). 하나님은 우리들을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하시면서도 우리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고 베드로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다음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술람미의 사랑의 이야기는 우리 성도들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술람미의 사랑의 특징 5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응답적인 사랑이었습니다. Respon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에 응답했습니다. “왕이 나는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아1:4).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를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그 소리에 응답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2:8,9).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적인 사랑입니다. 베드로도 막달라 마리아도 사울도 모두 저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적 사랑이었습니다.
둘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추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Eagerly yearning and seeking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서 솔로몬을 찾아 길 거리로 나갔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아3:1-2).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찾아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중세의 성도들은 주님을 찾아 들로 산으로 사막으로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일찍이 일어나 택시를 타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가슴에 병이 들도록 애타게 주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하는 것이 성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2:5).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5:8). 저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며 이성봉 목사님에게로 김치선 목사님에게로 김창인 목사님에게로 권연호 목사님에게도 김세진 목사님에게로 한경직 목사님에게로 새벽마다 또는 밤마다 달려가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모함이 별로 없는 오늘의 신자들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가슴에 슬픔과 탄식을 느끼곤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술람미는 병이 들 정도로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 성중으로 달려갔습니다.
셋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사랑이었습니다. Joyful and happy한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 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네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하라”(아2:3-7). 주님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부어주시는 달콤한 사랑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
넷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사랑이었습니다. Submis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2:16).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6: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7:10). 성도의 사랑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하는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사랑입니다.
다섯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함께 있고 함께 달려가는 사랑이었습니다. Togetherness의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7:10-12).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8:14). 아가서의 총 결론은 함께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세상에 그 어디에라도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세상에 그 어디에라도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솔로몬과 술람미의 간절하고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술람미처럼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아 누리면서, 사랑에 사로잡혀, 사랑에 병들어서,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시는 사랑의 존재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신부 예찬
아가서 6:4-7 / 이상호 목사
다시 남녀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둘은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와쯔프입니다. 4장, 5장 그리고 6장에 세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눈, 머리, 이, 뺨 순서로 여인의 몸에 대하여 나열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4절)
남자는 여자에게 먼저 디르사 같이 어여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디르사는 그 때 북왕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오므리왕이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길 때까지 반세기 동안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930- 885 B C). 디르사의 뜻은 ‘사랑스럽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디르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긴 후에도 계속 개발되었습니다. 북왕국의 두 번째 도시로 성장하여 아름다운 도시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디르사처럼 아름답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술람미는 다 내려놓고 신랑만을 사랑하였습니다.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그토록 사랑한 아내 술람미를 디르사같이 예쁘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을 자기가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남편만 사랑하면 남편은 아내를 극찬하게 됩니다. 신부 술람미는 아가서에서 세 번 칭찬을 받았습니다.
6장 4절에서는 왕이 칭찬하였습니다. 6:10에서는 백성들이 칭찬하였습니다. 7:1에서는 술람미의 경쟁자들인 궁중 여인들이 칭찬하였습니다. 이같이 왕만 사랑하는 자는 모두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다른 궁중 여인들은 고관 출신으로 사랑만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받기만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얼굴이 검게 될 정도로 오빠들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에서 아주 밑바닥 일꾼으로 일했습니다. 그렇기 다문에 받기보다 받드는 데 익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가서는 예수님의 책입니다.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만 사랑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디르사처럼 예쁘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5-7)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은 아내를 귀한 그릇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신랑되신 예수님이 신부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같이 곱고
그리고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잔양 받으시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시 48:1-2)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을 온전한 곳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시 50:2)
전설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법궤가 있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의 상징입니다. 삼하 6:12-19.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의 다른 이름입니다(시 48:8, 87:3).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입니다(마 4:5).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곳입니다(갈 4:25~26). 바울은 예루살렘을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술람미가 국보급 여자라는 얘깁니다.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깃발은 히브리어로 ‘아융마’ ayummah 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의미가 있습니다. 깃발을 세운 군대를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위엄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감히 범할 수 없는 공포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미모도 있지만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위엄이 있는 여자입니다. 당시 근동지방의 여신들은 미모와 위엄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여신을 생각할 때는 절세미인이고 공포감을 가질 정도로 무서운 여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가서 여인이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군대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디르사 같이, 그리고 예루살렘같이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귀여운 동네 여인이 아니라 위엄 있는 국가의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당당한 여인이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섭게 여기게 됩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모세를 바로가 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왕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였습니다.
승리의 깃발을 들고 행군할 때만큼 당당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기에 당당하게 깃발을 들고 행군하는 군대 같았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의지하면 사탄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아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가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걸레는 빨아도 걸레입니다. 보석은 흙이 묻어도 보석입니다. 왕은 거지 옷을 입어도 왕입니다. 거지는 왕복을 입어도 거지입니다. 까마귀는 흰 칠을 해도 까마귀입니다. 군인은 경찰복을 입어도 군인입니다. 간장 그릇은 아무리 애써도 김치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콩나물은 아무리 커도 콩나무가 아니라 콩나물입니다. 성도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가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애 2:15)
이같이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모두 높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850m 산 위에 있었습니다. 모두 수도이기에 성벽, 건물, 조경 모두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교하였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대같이 당당하다고 하였습니다.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름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5절)
첫 번 만나는 4:9에서 남자는 여자의 눈에 매력을 느꼈었습니다.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전보다 더 강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감히 눈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해졌습니다. 얼마나 눈이 아름다운지 놀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싫어서가 아닙니다. 기절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가 예쁘면 다 예뻐 보입니다.
아하수에로왕은 에스더의 미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래서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 후 에스더의 부탁은 다 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하고 솔로몬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에 황홀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한번 잘 보시면 어떤 기도도 들어 주시는 응답의 주님이십니다.
5절 후반부터는 여인의 몸의 한 부분 부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머리털부터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길르앗에서 내려온 염소 머리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4:1에서 말했던 대로입니다.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6절)
여인의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같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인상 깊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두 쌍태같이 가지런하다는 말입니다. 이가 들쑥날쑥하지 않고 쌍둥이같이 한결같습니다. 이는 오복 중의 하나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몸 하나하나에 빠짐없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좋게 보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고 하면 십자가를 보라.”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입니다.
“너울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7절)
이미 언급하였던 사실입니다. 너울 속으로 보이는 뺨이 석류같이 빨갛고 아름다웠습니다. 뺨은 감정을 기록하는 종이 같습니다. 뺨을 보면 그 사람의 감정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의 뺨이 석류 한 쪽 같습니다. 빨간 뺨입니다. 기쁨과 행복과 평안이 철철 흘러넘치는 뺨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예쁘게 보였습니다. 눈도 아름답고, 머리털도 최고이고, 이까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모든 것이 합당하게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당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예수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아내를 영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부인입니다. 당당할 수 있습니다. 전에 옥천에 가서 육영수 여사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육영수 여사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첩을 많이 두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지겨웠습니다. 어린 마음에 좋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장관의 아내들에게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육 여사가 그 장관을 불렀다고 합니다. 영부인이 오라고 하는데 안 올 장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혼내 주었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바람을 피우면 대통령에게 말해서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위 공직자들의 가정을 잘 다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부인은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랑이 예수님이기에 당당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사울왕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그 때 장수는 거인인 골리앗이었습니다. 누구도 덤비지 못하므로 이스라엘 군사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뱀 앞의 개구리처럼, 고래 앞의 새우처럼, 고양이 앞의 쥐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 17살밖에 되지 아니한 소년 다윗이 나가서 싸워 이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무시하여도 당당하게 나가 싸워 이기는 다윗의 용맹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할 수 있다’의 용기를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 사람들이 무시하는데도 당당히 대처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무시하여도, 형들이 왕 되는 자리에 젖혀 놓아도, 사울왕이 "너는 너무 어려서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무시하여도 당당하게 나갔습니다. 가장 무시한 사람은 골리앗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덤비는 다윗을 보고 골리앗이 업신여겼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삼상 17:42)
그리고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내게 나아왔느냐?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에게 주리라”(삼상 17:44)
모두가 다윗을 무시하였습니다. 단 한 명도 다윗을 믿어주고 인정하여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당당하게 나가서 싸웠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인정하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당당함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14권의 성경을 쓰면서 항상 서두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바 된 나 바울은”
이런 당당함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는데 누가 건드리겠느냐는 깃발을 들고 전진하였습니다. 이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바울을 쓰셨습니 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의 인정을 받은 술람미는 깃발을 들고 당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신부된 우리는 신랑을 믿고 당당하게 깃발을 들고나가야 합니다. 세상 모두가 몰라준다 하여도 우리 주님 한 분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다만 주님이면 족합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교회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아가서 6:11-13 / 이상호 목사
본문은 단순해 보이나 실은 성경의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아가서 강해설교를 신나게 해왔는데 복병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특히 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래서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여인이 남자의 극찬을 들은 후에 호도밭으로 직접 내려가서 남자를 만납니다. 이제 위기를 끝내고 하나가 된 관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11절)
앞에서 남자는 여자를 더할 수 없을 정도의 언어로 극구 찬양하였습니다. 이런 칭찬을 들은 여인은 호도 동산으로 갔습니다. 풀들이 피어났는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순이 돋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석류나무 꽃이 피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골짜기로 내려갔다고 하였는데 원어에는 건천, 시내로 되어 있습니다. 물이 매일 흐르는 곳이 강입니다. 비가 왔을 때에만 흐르는 곳이 건천이고 시내입니다. 비가 왔습니다. 흡족한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면 시내, 건천 주변은 생기를 되찾게 됩니다. 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납니다. 초목이 살아납니다. 순이 돋아납니다. 포도나무가 순을 냅니다. 석류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그 곳으로 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이 익어간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제 짙은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백성들의 사이로 수레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이제 술람미는 한 남자를 섬기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한 차원 승화된 모습니다. 백성들의 생활 상태를 살피러 간 것입니다. 포도나무 순이나 석류나무 꽃은 모두 봄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계절적인 봄이기도 하지만 백성들의 축복의 봄을 보러 나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백성들을 살피러 나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사명으로 일하고 있는 술람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산업입니다. 포도 농사가 백성들의 생계를 좌우하였습니다. 그들의 경제생활을 살피는 술람미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니까 사랑을 받게 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사랑하여야 합니다. 술람미가 나타나기만 하면 백성들은 환호하며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아내가 1,000명이었지만 다른 아내들은 이 정도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술람미뿐이었습니다. 술람미는 지극히 백성들을 살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역설의 사람’ 이었습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여자가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가장 낮은 계급의 여인이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가서는 모두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역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 큰 사전에서 역설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자체의 주장이나 이론을 스스로 거역하는 논설’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모순같이 보이나 사실은 모순이 아닌 이론,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역설가’입니다. 역설가란 역설적 이론을 많이 붙이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술람미는 역설의 여인입니다. 최하가 최고로 바뀐 여인입니다.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12
번역이 조금은 묘연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게 번역되었습니다. 다시 번역하면 이런 말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열정이 나를 존귀한 자와 함께 마차 위에 두었습니다.”
또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당황하였습니다. 당신은 나를 존귀한 자와 함께 수레에 두셨습니다.”
부지중에 라는 말은 자기도 모르게 존귀한 자와 함께 한 수레를 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존귀한 자는 남자입니다. 여인은 얼떨결에 그렇게 존귀한 남자와 한 수레를 타고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그리스도와 함께 존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술람미는 ‘내 귀한 백성의 수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레가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술람미를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술람미가 백성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역설입니다. 먼저 주어야 나중에 받을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 사이에 들어온 술람미 수레를 보고 술람미를 환영하였습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가 지니고 있습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13절
누가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외침이라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랑 솔로몬의 부름이라는 해석입니다. 둘 다일 수 있습니다. 이제 술람미는 모두에게 영웅이요,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겸손하고 충성된 사람은 꼭 좋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탈무드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진실과 기름은 뜬다”
남자는 여인을 술람미 여자라고 부르며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곳을 보지 말고 자기에게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랑하는 여인을 술람미 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따르고 있습니다.
우선 술람미는 지명이라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술람, 즉 수넴의 다른 말입니다. 수넴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술람미는 어원이 ‘쉘로모’ 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술람미는 온전히 솔로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술람미는 완벽함을 뜻하는 술램 sulam이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완벽한 여인이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을 완전한 여인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술람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
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나에게로 돌아오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예언을 들은 곳으로 돌아오라.”
너무나 보고 싶어 하는 신랑 솔로몬의 호소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13절
백성들이 모두 술람미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솔로몬이 하는 말입니다.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처럼 술랍미를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하나임은 야곱이 에서와 천사를 만났던 곳입니다. '마하나임 춤'은 춤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의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귀향 중 천사 무리를 만난 곳(창 32:1,2)이 마하나임입니다.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천사들이 절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백성들이 술람미 여자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간다는 행복한 고백입니다. 아가서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이 높여 주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이제 못할 것이 없는 이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하면 그렇게 신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헤어졌던 신랑과 신부가 재회하는 감격은 어떠할까요? 여기 재회의 감격에 담긴 사랑의 3 가지 감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사랑은 보고 싶은 감정입니다(11절).
골짜기 호도나무 숲에 나타난 보고 싶은 것들의 상징을 살펴보세요. 새로 돋아난 초목은 새로운 사랑(새 신자)을 꿈꾸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포도와 석류(4:3)는 사랑하는 사람(성도)을 나타내고 순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사랑의 열매(신앙의 성장)를 상징합니다.
사랑은 호두처럼 오묘합니다. 호두의 겉껍질만 안다면 호두는 그저 무덤덤한 식물의 열매에 불과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그 알맹이를 알 때 오묘합니다. 사람은 호두 속 그 알맹이를 알고 싶어 합니다. 사랑도 그와 유사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사랑이 깊어지기를 바라듯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영적 성장을 보고 싶어 합니다. 사랑은 서로 간 사랑의 성숙을 보고 싶어 하는 감정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성숙을 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 사랑은 그리워 돌아가고 싶은 감정입니다(12-13).
사랑은 그리운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술람미 여자에게 돌아오라고 간청합니다.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사랑, 고향을 그리는 마음, 부모가 자식을 그리는 마음, 천국을 그리는 마음은 모두 사랑입니다.
13절은 술람미 여인을 보고 싶어 돌아오라는 외침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싶어 합니다. 썩어질 세상이 아니라 참된 본향을 사모하는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3. 사랑은 자랑하고 싶은 감정입니다(13절).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춤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술람미의 마하나임 춤을 모두 보기를 기대합니다. 마하나임은 갓 지파 성읍으로 춤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춤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견디지를 못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마귀를 앞에 두고도 사랑스런 욥의 믿음을 자랑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성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 성도는 우리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의 자랑입니다. 할렐루야!!!
아가 6:1-13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여인들의 노래1-예루살렘 여인들과 신부(1-3절)
아가는 남녀(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가 서로 사랑의 과정을 거쳐서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통해서, 신랑 되시는 우리 주님과 신부인 교회(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장은 두 연인이 서로를 향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3장에서 결혼하고, 4장에서는 신혼의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남녀가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또 상대를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해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는 말의 양이 다르고, 동일한 말을 내뱉어도 그 의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혼 때에 의견차가 있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 내용이 5장입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갈등을 극복하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개역개정판 성경이 번역이 잘 되었지만,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산문과 운문을 구분이 되지 않도록 배열을 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를 ‘시가서’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운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시가서도 산문으로 된 성경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아가’는 한편의 ‘오페라’와 같습니다. 오페라 공연을 하면, 노래와 연기를 하는 성악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있어 성악가가 노래할 때에 연주를 합니다. 그래서 노래와 연주가 연합하여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고대 희랍비극이나 고전극에는 배우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이 극의 전반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표현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음악이나 조명 등이 담당합니다. 코러스가 연극의 전반을 설명하기도 했고, 극중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등 극의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습니다.
아가에도 주인공인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여인들’이라는 코러스가 등장합니다. 본문 1절은 예루살렘 여인들의 노래입니다.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술람미 여인을 가리켜, ‘여자들 가운데서 어여쁜 자’라고 말합니다. ‘여자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술람미 여인이 실제로 미스코리아로 선발될 정도로 아름답다는 의미가 아니라, 솔로몬왕의 눈에 그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에 빠지고 나면, 자기 연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예루살렘 여인의 질문에 대한 술람미 여인의 답변의 노래가 이러합니다.
(2-3)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술람미 여인은 남편 솔로몬왕이 ‘자기 동산’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산’을 4장에서는 ‘잠근 동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왕이었던 솔로몬에게는 여러 개의 동산(별장)이 있었었을 것입니다. 그곳을 ‘자기 동산, 잠근 동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곳, 자기만이 누리는 곳을 뜻합니다. 또한 이 동산은 술람미 여인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다는 것은 즉 신혼의 때의 티격태격함을 넘어서 사랑이 회복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했고, 내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속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대상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고 깊어집니다. 반면에 남녀의 에로스의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자기 배우자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또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나눕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해,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암 3:2)”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족속들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의 노래(4-9절)
4-9절은 앞의 신부의 노래(2-3절)에 화답하는 신랑의 노래입니다. 마치 오페라에서 소프라노와 테너가 서로 번갈아 사랑의 아리아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솔로몬왕은 술람미 여인을 3가지로 묘사합니다.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다고 합니다.
‘디르사(tirsah)’는 도시 이름인데, 솔로몬왕이 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뉠 때에, 남쪽의 수도는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이었지만, 북쪽의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사마리아가 아니었고, 처음부터 약 40여 년 동안에는 ‘디르사’가 수도이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며, 수도를 아무 곳에나 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이 적절한지를 고르고 골라서 선정합니다. 디르사에 솔로몬왕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정원만큼이나 신부 술람미 여인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는 하나님의 도시입니다. 솔로몬왕이 술람미 여인을 예루살렘에 비유한 것은, 예루살렘이 모든 도시들과 비교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아름답고, 성전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처럼, 그런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깃발을 세운 군대’는 ‘위엄 있음’을 뜻합니다. 술람미 여인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품위가 있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는 만나면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품위는 잘생긴 것이나 예쁘게 생긴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솔로몬왕은 신부, 술람미 여인이 아름다움과 품위를 함께 가진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솔로몬왕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5-7)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5-7절은 4:1-3절과 거의 흡사합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신랑에게 신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30대의 젊은 커플도 아름답지만, 4-50대의 중년 커플도 멋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6-70대의 노년 커플도 품격이 있습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남편의 의리, 아내의 의리를 잘 지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름다움이 깊어지고, 품격이 커집니다.
5절은 신부의 눈과 머리카락에 대한 예찬입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눈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몸이 1000냥이면 눈이 900냥이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또한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눈은 외형기관이지만, 그 눈을 통해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눈’이 인간의 전 인격을 다 표현하기도 합니다. ‘눈이 높다’는 것은 키가 크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보는 안목이 높거나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염소 떼와 같다는 것은 윤기가 흐르고, 매혹적인 흑발이라는 것입니다.
6절은 신부의 치아에 대한 예찬입니다. 평소에 양이 지저분할 지라도 목욕한 암양은 하얗습니다. 그리고 쌍태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부의 치아가 빠진 것이 없이 윗니와 아랫니가 가지런하게 나 있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7절은 신부의 뺨에 대한 예찬입니다. 뺨이 석류와 같다고 하는 것은 석류 속에는 붉은 색 알맹이가 많습니다. 그것은 신부의 건강하고도 풍성한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8-9)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솔로몬왕은 신부인 술람미 여인이 60명의 왕비와 80명의 후궁, 그리고 무수한 시녀들보다 아름답다고 고백합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왕에게 왕비가 700명이고, 첩(후궁)이 300명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왕은 이 아가서를 결혼초기에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솔로몬왕은 신부를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왕비와 후궁들도 칭찬을 한다고 합니다. 사실 술람미 여인은 시골 출신입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왕비들은 이웃나라의 공주 출신들입니다. 그럼에서도 다른 왕비와 후궁들이 술람미 여인을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솔로몬왕의 모든 마음이 그녀에게 가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왕실 내명부 여인들은 모두 그녀의 수하에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의 노래2-예루살렘 여인들과 신부(10-13절)
또 술람미 여인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0)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술람미 여인의 모습을 4가지로 노래합니다. ‘아침 빛’, ‘달’, ‘해’, ‘깃발을 세운 군대’입니다.
‘아침 빛’은 붉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황홀한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달’은 어둔 밤을 환하게 비추어 주듯이 탁월한 아름다움을 뜻하며, ‘해’는 우리가 쳐다볼 수 없는 없는 것처럼 눈부신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깃발을 세운 군대’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그만큼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은 남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술람미 여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11-12)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술람미 여인이 ‘호도 동산’으로 갔는데, 그 이유가 골짜기의 푸른 움이 돋았는지와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석류나무에 꽃이 피었는지는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솔로몬왕이 술람미여인에게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가보자고 했고, 그 동산에 있는 석류나무에는 열매가 가득하다고 노래했었습니다. 즉 술람미 여인이 이 동산으로 간 것은 꽃이나 열매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처음 교제했던 장소에 가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왕자들이 타는 병거에 탔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사람들이 술람미 여인에게 돌아오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 신랑을 만난 것을 춤을 추며 기뻐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술람미 여인은 백옥 같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핑크빛 뺨, 하얀 치아를 가진 기품 있는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세상에서 이 여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왕궁의 모든 여인들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1장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내가 비록 검지만 아름답고, 게달의 장막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여인은 평범한 시골 처녀이었습니다. 게달은 흑염소 털로 짠 장막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여인은 농사를 지어서 피부가 까맣게 탔던 것입니다. 자신은 자신의 외모에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왕이 자신을 선택해 주고, 사랑해 주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스스로를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은 보잘 것 없고, 게달의 장막에서 살아야 했던 그런 존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살려 주시기 위해서 피를 흘려주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구별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가 왕자의 선택을 받는 것은 일방적인 은총이지만, 신데렐라가 왕자비와 왕비다운 여인으로 지어져 가는 것은 자신의 의무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택해 주시고, 귀하게 여겨주시는 주님 안에서 성전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해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날이 되심으로, 하루만큼 더 성장하고, 성숙하며, 새로워지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실상을 잘 압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 믿음에 얼마나 부족함이 많은지, 얼마나 많이 오염이 되어 있는지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도 압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예쁘게 봐 주시는 주님 때문에 용기를 갖고 사는 날이 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세속적 가치관의 비늘을 버리고, 함께 지어져 감으로 어제보다 하루만큼 성장하고 성숙하여 새로워지는 한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솔로몬왕은 술람미 여인을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배우자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해 보십시오.
2. 당신이 스스로의 모습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기록해 보십시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3. 당신이 하나님께 가장 사랑을 받든다고 느꼈던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4.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마하나임의 춤마당
아가서 6:11~13 / 이장우 목사
지난주에 톡으로 문자가 왔습니다. 자신은 아가서의 술라미를 하늘의 지혜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 문자를 보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잠언 8~9장에서 보았듯이 지혜가 인격화 되어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창조주와 함께 천지를 창조한 지혜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집을 짓는데 일곱 기둥으로 다듬은 궁을 만들어 놓고 잔치를 열어놓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자를 보낸 분은 현직 변호사인데 가끔씩 연락이 옵니다. 몇 사람과 함께 열심히 성경을 보고 함께 나누기도 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보낸 관찰질문에 답을 주고받으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늘의 지혜가 솔로몬을 사랑하고 솔로몬이 하늘 지혜의 완벽함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늘의 지혜가 주도권이 있고 그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그 하늘 지혜와 상호 사귐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늘 지혜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게달의 장막과 같은 모습이기에,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냈더니 그분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잠언1장 20절 이하, 8장1절 이하, 9장 1절 이하를 보면 지혜 즉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라는 답이 왔습니다. 지혜가 술람미라는 여성으로 보든지 하늘의 지혜로 보든지 참 지혜이신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하는 말로 주고받았습니다.
아가서를 처음 시작할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지혜로 참된 지혜를 찾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온갖 지혜들을 다 찾아보았지만 참된 지혜는 여호와 경외임을 잠언과 전도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의 결론이 아가서에서 사랑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표현되든지, 지혜를 사랑하는 것으로 말하든지 간에 완성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표현으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남편 되심과 이스라엘의 아내 됨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셔서 자기 피로 값 주고 구속한 성도를 신부된 교회라고 함을 성경이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기에 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봅니다. “봉독” 4절부터 이어지는 내용을 남자의 노래로 보기에 11~12절도 남자의 노래로 보는 번역도 있지만 어떤 번역은 여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의 성과 수와 격에 따라 그렇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귀한 백성들이 타는 병거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가 암미나답의 병거로 되어 있기에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포도나무의 꽃을 보려고 호두나무 동산으로 내려갔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암미나답의 병거에 올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혼자 탄 것이 아니라 여기에 술람미도 함께 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표현이 부지중이라고 합니다. 솔로몬도 술람미도 부지중에 병거를 탔다면 이들을 태우게 한 근원이 솔로몬과 술람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끄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3절 상반절 표준 새 번역입니다. “술람미의 아가씨야,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눈부신 너의 모습을 우리가 좀 볼 수 있게,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술람미의 아가씨야.” 이 노래는 합창으로 봅니다. 여인들이 술람미를 보고 싶다고 돌아오라고 네 번이나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신랑이 병거를 타고 와서 신부를 태워가기에 그렇게 부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술람미를 지혜라고 본다면 지혜를 보고 싶어서 돌아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찾아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찾아 나서서 찾았다고 하는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찾아와서 알게 된 지혜여야 합니다. 이런 지혜는 사람이 결코 원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본문 13절 하반절 표준 새 번역입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마하나임 춤마당에서 춤추는 술람미의 아가씨를 보려 하는가?” 이 부분은 남자의 노래입니다. 솔로몬이 여인들의 합창을 듣고 답변하는 형식입니다. 그대들이 어찌하여 마하나임 춤마당에서 춤추는 술람미의 아가씨를 보려고 하는가라고 합니다. 지금 술람미는 이미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고 있는데 너희는 왜 그를 부르느냐고 합니다. 너희가 술람미를 부르는 이유가 마하나임의 춤을 보려고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이것을 다시 지혜로 보면 너희가 이미 지혜를 만난 자를 돌아오라고 해서 돌아오겠느냐는 말이기도 하고, 참 지혜를 찾는 길이 무언지 아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받아 왕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 고난이었습니다. 상처입고 겉옷을 빼앗긴 채로 그 사랑하는 임을 찾아 나선 것은 이미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마당으로 번역된 ‘마하나임’과 ‘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2:1~2절입니다.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마하나임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말이 ‘엘로힘 마하네’입니다. 야곱이 이곳을 ‘마하나임’이라고 합니다. 이곳이 지명이 되었기에 다른 곳의 마하나임은 다 지명입니다. 그런데 아가서의 마하나임은 정관사가 붙어 있어서 지명으로 볼 수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하나임은 그 사건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마하나임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내용의 배경을 봐야 합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후에 형에게 죽지 않으려고 외삼촌 집으로 피난을 갑니다. 피난을 가는 중에 밤에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늘과 연결된 사닥다리 사이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그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너에게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일어난 후에 돌베개를 세우고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그 서원은 자신을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셔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또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런 서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하심과 그 성취를 믿지 못하여 이렇게 서원한 것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그 약속을 야곱에게도 신실하게 이루어내십니다. 외삼촌 집에서 두 아내를 위하여 14년, 자신의 재산을 위하여 6년, 총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가산을 이루어냅니다. 이제 때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야반도주를 하고 라반은 추격합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라반과 야곱이 해어진 후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창세기 32:1~2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야곱이 길을 간다는 것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곳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를 만났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야곱을 돌보셔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자기 꾀를 써서 네 아내와 여러 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군대가 야곱 가족과 재산을 지켜주기 위하여 왔습니까? 야곱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전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의 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곧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온갖 꾀를 써서 강을 건넌 후에 혼자 있다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씨름하다 허벅지 관절이 위골됩니다. 이때부터 야곱은 이스라엘이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은 야곱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야곱의 뜻이 깨어지는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5:13~15절입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야곱이 만난 여호와의 군대와 여호수아가 만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야곱이나 여호수아의 개인적은 뜻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이 문장이 두 개로 나누어짐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여린들이 술람미 여인을 돌아오라고 네 번이나 말합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왕의 병거에 태워 가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말하기를 너희가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를 보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마하나임’은 ‘마하네’라는 진지의 복수 형태라서 두 무리의 춤추는 자들로도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보았듯이 여호와의 군대를 만나서 깨어짐을 당하는 그런 모습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어떤 인물의 성공한 점을 좋아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런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야기해도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았는가 하는 식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런 식의 설교를 들어왔고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부름을 받아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떠냐고 말하겠지만 요셉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엄청난 환난을 당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하나임의 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의 ‘춤’입니다.
출애굽기 15:19~21절입니다. “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21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가 먼저 찬양하고 화답으로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찬송하면서 소고 들고 춤을 춥니다. 야곱의 이야기, 여호수아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다 여호와의 군대와 여호와의 전쟁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으로 빼낸 자들이 춤을 추면서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이 춤을 추는 자는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6:15~16절입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정병 삼만 명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자신이 호위하여 가려고 하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갑니다. 다윗도 에봇을 입었습니다. 언약궤가 동행함을 인하여 다윗이 기뻐서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미갈이 업신여깁니다.
이어지는 20~23절입니다. “봉독”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 안의 여인들이 술람미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왕의 사랑을 입고 고난을 받은 술람미는 마하나임의 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를 만난 자들의 공통점이 자아의 깨어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예루살렘 성 안의 여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여인이 바로 미갈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의 언약궤가 자기와 함께 함을 인하여 기뻐 뛰며 춤을 추는 마하나임의 춤마당을 이해 못한 미갈은 다윗의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왕비가 왕자를 생산 못하면 그것이 저주입니다. 신부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자들인데 이들은 자기가 부인되고 그리스도로만 기뻐 춤추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3:14~16절입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 남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올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데려오시는데 성읍에서 하나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데리고 옵니다. 참으로 극소수입니다. 이들을 데려와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를 주신다고 합니다. 그 목자는 지식과 명철로 돌아온 자들을 양육하는데 그 때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메고 가면서 춤을 추었는데 이제는 그런 언약궤를 말하지 않고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의 때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새 언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자들은 춤추며 즐거워합니다(렘31:4) 이들은 다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다(31:8). 이들은 기뻐하며 춤을 춥니다(31:12~1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로 십자가로 인하여 기뻐하며 춤을 추는 자들이 마하나임의 춤을 추는 신부된 교회입니다.
누가복음 6:20~23절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 기뻐 뛰놀라고 합니다. 이런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복음 7:31~35절입니다.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2)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참된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낳은 자녀들은 세상의 가치를 따라 울고 웃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울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합니다.
당당한 여자
아가서 6:4-10 / 이장우 목사
지난주에는 신랑을 잠시 놓쳐버린 신부가 신랑을 다시 찾은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찾아 나섰는데 그 신랑이 자기 안에 있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눅17:21).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신 내용인데 왜 제자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 제자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 사람이라도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모이면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이라고 하고 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두 세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룹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하신 일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롬7:4). 주님의 떡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겁니다(고전10:16).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고전12:27). 이러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서로 봉사를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엡4: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은사로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은 자기 생리에 맞지 않기에 결국은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 하나 하나를 오늘 본문처럼 나의 완전한 자는 오직 너 하나뿐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개인주의적인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곳 그리스도의 하나 된 신부를 말합니다.
개인구원이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냐는 내용을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개인주의가 그것도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씨족공동체가 많았습니다. 씨족이 아니라도 마을 공동체로 살아왔습니다. 울력, 두레, 향약이라는 단어들은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도시화는 온갖 사회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조류는 이 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대안적인 취미 단체들이 등장합니다. 더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놀이단체는 온갖 악한 일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가 부인되고, 자아가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됨을 소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먼저 봅니다. “봉독”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하여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왕비가 예순 명이며 후궁이 여든 명이며 궁녀도 수 없이 많지만 나의 비둘기, 완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의 노년에는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고 합니다(왕상11:3). 우리는 이런 솔로몬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솔로몬을 통하여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까? 참된 사랑은 정략결혼으로도 나올 수가 없고,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여인에게서도 나올 수가 없고, 성 밖에서 버림 받아 마땅한 자에게 참된 사랑이 나타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솔로몬 곁에 일천 명의 여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다 성안에 들어올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시녀라도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 술람미 보다는 나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술람미가 상처 입고 겉옷을 빼앗긴 채로 자기가 사랑하는 임을 찾아 나섰다고 하니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이 네가 사랑하는 자가 남이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그때 술람미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말합니다. 점도 흠도 없이 완벽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이주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완벽한 신랑의 완벽한 사랑을 받은 자 역시 점이나 주름 잡힌 것이나 티가 없는 완벽한 신부입니다(엡5:27).
그런데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여인들은 자기들의 잘 남이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것을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왕궁의 시녀조차 무시할 그런 여인이 술람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을 향하여 왕인 솔로몬이 나의 완전한 자는 너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도 이 사랑을 받고 계신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비록 보잘 것 없는 남편이라도 아내가 나는 당신 밖에 없다고 한다면 남편은 당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정말 보잘 것 없어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자녀는 당당할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당당함이 있습니까? 윤리 도덕적인 자격으로 갖추든지, 율법의 의로 갖추든지,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자기의 행위로 당당하게 갖추어 입는 다고 하면 성경은 그런 옷을 더러운 옷이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처음 사람은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두렵고 부끄러워서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 옷을 입히려면 짐승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지 않고 자기 스스로 멋있는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하는 역사가 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역사입니다. 이런 바벨탑에서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흩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부릅니다.
문명의 발상지가 되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을 부르신 그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람과 바로 왕을 대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세상의 영광을 가진 자입니까? 아브람은 바로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의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썩지 않을 생명을 주시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위하여 출애굽 시키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들의 죄를 알고 대신 희생할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심인데 오히려 율법으로 치장을 합니다.
이사야 59:1~8절입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사야 64:6절입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입고 나가는 옷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지 못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두 곳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말씀은 이미 창세기 6장과 8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죄가 자기 죄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술람미를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의 왕은 이런 술람미를 향하여 너 만이 나의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ㄱ)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ㄴ)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ㄷ)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3)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ㄹ)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있었던 예루살렘을 아라비아아의 시내 산이라고 합니다. 즉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은 그 당시에도 땅에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감히 이방인인 주제에 할례도 받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율법주의에서 못 벗어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 하갈의 자녀 이스마엘이 자유 하는 자 사라의 아들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를 육체로 난 자가 박해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일이 술람미에게도 일어났고 예수님 당시에서 일어났고 바울당시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볼품이 없는 자, 교회당에서도 볼품이 없는 자,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으로 치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신랑이 주신 것으로만 단장을 합니다.
오늘 본문 4~6절입니다. “봉독” 5절과 6절은 앞에서도 나온 내용이라서 4절을 중심으로 봅니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디르사는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 유다의 왕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은 요새화 되어 있는 곳이라 안전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여건도 좋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읍처럼 아름답다고 하면서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견고하고 안전한 성읍과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신부의 아름다움을 유순한 초식동물이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로 비유하였는데 여기서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군대로 비유합니다.
창세기 22:17절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한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맞이하는 아내 리브가를 보내는 리브가의 친성 사람들도 이런 축복을 합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은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입니다. 이러한 전리품은 자신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승리하신 분이 자기희생으로 구하여 내셨습니다.
에베소서 4:4~10절입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1)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ㄱ)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도 하나라는 단어가 많습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하나입니다. 이 교회를 만드시는 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어내십니다. 성자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사로잡아 내셔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임을 설교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여호와의 전쟁으로 죄와 사망아래 갇혀 있다가 의와 생명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데 주님께서 아름답다고 봐 주시는 겁니다. 이 아름다움은 율법적인 자기 의가 결코 아닙니다. 의의 선물을 값없이 받았기에 받은 그 아름다움은 영원히 당당합니다. 이런 의를 루터는 수동적 의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롬10:3).
에베소서 3:9~13절입니다. “9 1)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것이 교회의 비밀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의 경륜을 교회에 알려주셨습니다. 환난 당하는 바울이 당당하게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 당당함이 있는 여자가 교회입니다.
요한일서 4:17~18절입니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일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화목제물 삼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담대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담대하고 심판 날에도 담대합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도 담대하게 기쁨으로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자는 온전히 그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은 신부들입니다. 이 당당함은 결코 자기의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분의 보혈의 능력만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보혈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가 당당한 신부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운 감정 3 가지
아 6:11-13 / 조덕형 목사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드디어 헤어졌던 신랑과 신부가 감격적으로 재회하는 방면이다. 본문은 단순해 보이나 실은 성경의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여기 재회의 감격에 담긴 사랑의 3 가지 감정을 살펴보자.
1. 사랑은 보고 싶은 감정이다(11절)
1) 골짜기 호도나무 숲에 나타난 보고 싶은 것들의 상징을 살펴보자. 새로 돋아난 초목은 새로운 사랑(새 신자)을 꿈꾸는 마음을 나타낸다. 포도와 석류(4:3)는 사랑하는 사람(성도)을 나타내고 순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은 사랑의 열매(신앙의 성장)를 상징한다.
2) 사랑은 호두처럼 오묘하다. 호두의 껍질 만 알면 호두는 그저 무덤덤한 식물의 열매일 뿐이다. 사랑과 신앙은 그 알맹이를 알 때 오묘하다. 사람은 호두 속 그 알맹이를 알고 싶어 한다. 사랑도 그와 유사한 것이다.
3) 신랑과 신부가 서로 사랑이 깊어지기를 바라듯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영적 성장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은 서로 간 사랑의 성숙을 보고 싶어 하는 감정이다. 부모는 자녀의 성숙을 보고 싶어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2. 사랑은 그리워 돌아가고 싶은 감정이다(12-13)
1) 사랑은 그리운 마음이다.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백성에게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사랑(12절)을 보라! "내 귀한 백성의 수레"는 솔로몬 왕이 보낸 신하들의 수레를 말한다. 솔로몬은 이 수레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갑자기 사랑이 그리워 내 백성 가운데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부모가 자식을 그리는 마음, 천국을 그리는 마음은 모두 사랑이다.
2) 술람미 여인을 보고 싶어 돌아오라는 외침(13절)을 보라.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보고 싶어 한다. 이게 사랑이다. 사람들은 늘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싶어 한다. 썩어질 세상이 아니라 참된 본향을 아는 신앙이 참 신앙이다.
3. 사랑은 자랑하고 싶은 감정이다(13절)
1)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춤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술람미의 마하나임 춤을 모두 보기를 기대한다. '마하나임 춤'은 춤 이름이었다. 마하나임은 "두 군데", "두 무리의 천사"의 의미이다. 야곱이 밧단아람의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귀향 중 천사 무리를 만난 곳(창 32:1,2)이 마하나임이었다. 이곳은 갓 지파 성읍으로 춤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춤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 견디지를 못한다.
2) 교회는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심지어 마귀를 앞에 두고도 사랑스런 욥의 믿음을 자랑하였다. 부모는 자녀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성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자랑해야 한다.
사랑의 완전한 회복
I. 6:1-3 동산 안에 있는 사랑하는 자
1. (6:1) 아가서 6장은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를 도와 사랑하는 임을 함께 찾아 나서겠다는 다짐으로 시작된다. 술람미 여인의 자기 남편에 대한 예찬은 그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확신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확신 역시 불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앞부분에서 술람미가 고백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해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있는 상태이다. 감정의 골이 해소되었다하더라도 완전하게 치유될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2. (6:2-3) 솔로몬은 향기로운 꽃들이 자라고 있는 자기의 동산으로 내려가 양떼들을 먹이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임의 동산'은 다름 아닌 술람미 여인 자신이었다. 4:12-15과 5:1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임의 동산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미는 임이 이미 자신에게로 돌아왔음을 뜻한다. 이것은 그들의 헤어짐은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술람미 여인은 다시금 자신이 임과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랑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네게 속하였구나" 사랑 안에서 상호 소유의 고백은 이미 2:16에서 술람미 여인의 열정적인 사랑 고백 속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다. 앞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하였다'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로 되어있다. 이러한 순서적 차이는 감정의 괴리가 술람미 편에서 먼저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면서 또한 남자 쪽에서도 감정의 괴리가 극복되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II. 6:4-13. 솔로몬의 아내를 향한 칭찬: 화해의 표시
1. (6:4) 솔로몬은 다시 술람미를 극찬하는 말로 자신이 감정의 괴리가 해결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6:4에서 솔로몬은 자기의 아내를 디르사와 예루살렘, 그리고 기치를 높이 든 군대에 비유하고 있다. (1) 디르사는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위의 도시이다. 이곳에서는 요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파라강의 물 근원이 있으며, 주변 경관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오므리 왕이 사마리아 성을 새로 지울 때까지 이곳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2) 예루살렘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뛰어난 곳이었다. 이곳은 다윗 이후 통일 왕국의 수도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아름다움이 예루살렘처럼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3) 또한 솔로몬이 보기에 술람미는 기치를 높이 든 군대처럼 위엄이 있고, 또한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강한 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2. (6:5-9) 이 부분에서 솔로몬은 자기 아내의 아름다움을 4:1-3에서 불렀던 칭찬으로 반복하여 다시 묘사하고 있다. 그때의 노래는 결혼식이 있었던 날 솔로몬이 신부를 위하여 불렀던 사랑 노래이다. 4장에서는 신부의 일곱 부위에 대한 칭찬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네 부분 곧 눈과 머리털과 이와 빰에 대한 칭찬으로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때의 노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그 이후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자기 주변에 60명의 왕비와 80명의 비빈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있는 수없이 많은 시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람미 여인만이 그에게 유일한 여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술람미 여인은 어느 누구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오직 술람미 여인만이 그에게 유일무이한 임이었다. 6:9에서는 주변의 다른 여인들도 술람미의 이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녀가 복된 여자임을 칭찬하고 있다. 비록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지만, 그런 사랑을 주변의 누구도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빌어줄 만큼 순수하다는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은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사랑이다.
3. (6:10) 솔로몬의 술람미 칭찬에 맞추어 예루살렘 여인들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나선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네 가지 비유를 통하여 술람미의 청순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1) 아침빛 같이 뚜렷한 모습. 이것은 아침 여명이 밝아오는 동녘의 뚜렷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2) 달 같은 아름다움. 이것은 어두운 밤에 환하게 비취는 달빛을 연상시킨다. (3) 해같이 맑은 모습. 이것은 하루 중에 가장 밝은 정오의 태양빛을 연상시킨다. (4) 기를 높이 든 군대 같은 위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를 높이 든 군대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위엄 있는 모습이다.
III. 6:11-13. 술람미가 솔로몬을 처음 만났던 때의 회고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솔로몬의 아내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결혼 전에 그녀는 단지 시골처녀에 불과하였다. 그녀는 어느 날 호도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지를 보려고 골짜기 들판으로 내려갔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포도나무에 순이 돋았는지 석류나무에 꽃이 피었는지를 알아보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런데 그때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왕궁의 한 병거에 실려 왕궁의 왕비가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공로로 왕비가 된 것이 아니고 왕이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고백하며 밝히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은 본래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솔로몬 왕이 자기를 선택하여 준 결과라는 것이다.
6:13절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는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가까이 오라고 부르는 초청으로 끝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