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전적관(白馬高地戰蹟館)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길 72 [산명리 1822-3]
목차
정의
개설
건립 경위
변천
구성
현황
정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에 있는 백마고지전투의 전시관.
개설
백마고지전투는 6·25전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 북방에 있는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둘러싸고 한국군과 중공군이 치열하게 접전하였던 전투이다. 한국군 보병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우리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라 할 수 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백마고지 전투를 벌인 결과 아군과 적군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전투 과정에서 발사한 포탄만 적군 측 5만 5000발, 아군 측 22만 발이었다. 또한 아군과 적군이 12차례의 공방전을 벌이며 24회나 주인이 바뀌었다. 백마고지전투가 끝난 후 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군의 방수(防戍) 능력을 높이 평가받은 일전으로서 보(步), 전(戰), 포(砲), 공(空)의 협공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고지 공방의 범례가 되는 결전이기도 하였다. 백마고지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 백마고지전시관이 건축되어 6·25전쟁 당시 치열하였던 현장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이와 동시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건립 경위
백마고지전시관은 백마고지전투에서 희생된 한국군, 미군, 중공군 등 전사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변천
백마고지전시관은 1990년 5월 3일 건립되었다. 현재는 DMZ 안보투어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구성
백마고지전시관은 ‘기념의 장’, ‘회고의 장’,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격렬한 전투 현장을 재현하였으며, 높이 22.5m의 기념탑을 세웠다.
‘기념의 장’에는 통일에 대한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설치되어 있다. 특히 당시 백마부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백마고지 탈환의 모습이 담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국군이 적의 기관총으로 더 이상 전진을 할 수 없게 되자, 제 9사단 제 30연대 1중대 3소대장 강승우 소위가 오귀봉 하사, 안영권 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뽑아 들고 육탄 돌격을 감행하였다. 결국 기관총 진지를 폭파한 후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아군은 백마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탄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다.
‘회고의 장’에는 아군과 적군의 전사자를 추도하기 위한 위령비와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다짐의 장’에는 전망대, 자유의 종각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백마고지전시관은 현재 국군 희생자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망대와 함께 자유의 종각도 건립하여 추모의 공간이자 안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입장요금 : 무료(출입통제 없음)
백마고지 전투
날짜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장소 : 강원도 철원군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
결과 :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의 승리
지휘관
대한민국 김종오 제9사단장 소장
대한민국 임익순 제30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영선 제1대대장
대한민국 김봉철 제29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이대철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경진†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주일 제28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최창용 제3대대 중령
대한민국 전부일 제51보병연대장 대령
아군 병력
국군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 병력 2만 명
국군 제51, 52, 53 포병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3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중화인민지원군 병력
중화인민지원군 제38군단 6개 연대 지원부대병력
총병력 4만 4056명
각종포 55문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장융후이 대장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10일간 백마고지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 과정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이 395고지로 맹렬히 돌격했고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군대와 3차례나 전투를 치렀으나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고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395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국군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국군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도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1929년 1월~1952년 10월)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인물들도 전사하였다 .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제5공군은 745회 출격했다. 네이팜탄 358발을 포함해 폭탄 2700발을 백마고지에 투하했다.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을 잃게 되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잃은 군대가 정예병이라 차후 신병이 보충되더라도 숙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명칭 유래
백마고지는 원래 무명의 395고지였으며 현재의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확정된 유래는 없지만 두가지 유력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한 엄청난 포격으로 인해 나무가 모두 쓰러지고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여 백마고지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백마고지의 야간 전투시 백마고지를 뒤덮은 수많은 낙하산 조명탄들이 터져서 내려오는 하얀 섬광을 영국 외신기자가 영국 옥스퍼드셔주의 벅셔 다운즈에 있는 Whitehorse Hill과 모양이 비슷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용했고 AP통신사, INS통신사 등을 통해 'White Horse Hill'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사가 전세계로 타전되었다. 그리하여 'Los Angeles Times', 'Monroe Morning World' 등 미국 신문사들이 10월 7일자 기사부터 'White Horse Hill'라는 명칭이 들어간 기사들을 재배포하면서 공식적인 명칭에 이르렀다.
한편 국내언론에서는 1952년 10월 8일 이전에는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395고지 수색전', '395고지 전초전' 등으로 표기되었고 10월 8일부터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 기사 역시도 AP통신사발 기사이다.
[백마고지 전적비&노동당사&도피안사] 위치도